2001년 1월호

비결은 ‘가슴높이 교육’이었다

  • 황보태조

    입력2005-05-11 15: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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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다섯 남매를 두었다. 위로 딸 넷을 얻은 다음에 마지막으로 아들을 얻었다. 남 얘기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들 하나를 낳으려고 딸을 넷씩이나 낳았수?’하고 웃기도 하지만 결코 그런 마음에서 딸을 넷씩이나 낳은 것은 아니다.

    아내와 나는 아이가 생길 때마다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며 함께 기뻐했다. 그래서 아이가 생기는 대로 낳다보니 다섯 남매를 얻었을 뿐이다.

    나는 딸과 아들을 조금도 차별하지 않고 키웠다. 혹시 조금이라도 아들을 더 예뻐했다면 그것은 그 아이가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막내였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 다섯 남매 가운데 막내인 아들 율이 대학에 들어갔다. 막내가 서울대 의대에 특차로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한편으로 큰 짐을 던 듯 홀가분했고, 한편으로는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사실 막내의 대학입시가 나에게는 상당히 부담이었다. 딸 많은 집의 외아들이 잘 되는 일이 드물다는 속설도 있지 않은가.



    막내도 제 누나들 못지 않게 학교성적이 좋은 편이기는 했지만 대학입시라는 것이 아주 뛰어난 극소수의 학생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나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게다가 신문과 방송에 내가 독특한 교육방법으로 다섯 남매를 모두 수재로 키웠다는 이야기가 여러 차례 소개되었던 것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1946년 경상북도 포항시 구룡포읍에서 태어난 나는 이곳의 작은 산골마을에서 자랐다. 구룡포 초등학교를 나와 대구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나는 그후 몇년 동안 객지생활을 하다 나이 서른에 고향에 돌아와 25년째 줄곧 농사를 짓고 있다.

    고등학교 2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인 나는 결혼 후 아내와 어린 두 딸을 시골에 남겨두고 서울로 올라왔다. 관악산 서울대 신축공사장이 나의 일터였다. 이렇게 서울대와 첫 인연을 맺었던 나는 힘든 하루 일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자리에 누우면 아내와 아이들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아이들을 생각하다가 불현듯 ‘그래, 우리 아이들을 서울대에 보내야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큰애가 다섯 살, 둘째가 네살이었다.

    ‘내가 지금 짓는 이 건물이 인문대 사회관이라 했겠다? 우리 아이들을 법대에 보낼까? 외교학과는 어떨까? 무슨 과면 어때? 애들이 좋아하는 데로 보내면 되지.’

    이렇게 아이들이 서울대에 들어가는 것을 나는 공상 속에서 이미 ‘기정 사실’로 만들었다. 법과대학에 들어간 아이가 사법고시에 합격해 온 식구가 함께 기뻐하는 광경을 상상하기도 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밤이 점점 짧아지더니 공사 현장에 도착하는 아침 7시면 훤하게 밝았다. 몇 달 동안 일을 하다보니 일이 몸에 붙었는지 예전처럼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다. 자리가 조금씩 잡혀 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연락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두 딸과 함께 살게 되니 서울생활이 더 이상 삭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노동판의 퇴근은 저녁 7시였다. 집에 들어오면 아이들은 “아빠 왔다”고 소리치며 좋아했다. 몸이 고단하여 좀 쉬려고 해도 아이들은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둘이 번갈아 기어올라 아빠의 몸을 놀이터로 이용했다. 내 몸은 아이들의 튐뜰이요, 미끄럼틀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이들이 그렇게 기어오르고 매달리고 하는데도 별로 힘들거나 귀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기쁜 마음으로 아이들과 어울려 기분이 좋아져서 그런지 아니면 아이들이 내 몸을 놀이터 삼아 뛰고 구르고 하다보니 저절로 안마가 되어서 그런지, 오히려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얼마후 서울에 올라와 건축현장에서 번 돈에 어머니가 마련해주신 돈을 보태 봉천동 중턱에 조그만 구멍가게를 마련했다. 가게 겸 살림집인 셈이었다. 아내는 가게를 보고 나는 여전히 공사장에서 막일을 했다.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서인지 조금씩 매상이 늘어갔다. 철없는 아이들은 과자 가게를 한다고 좋아했다.

    아이들의 인형놀이

    우리 아이들은 여자아이라서 그런지 늘 인형놀이나 소꿉놀이를 하며 놀았다. 가끔 고무줄 놀이나 숨바꼭질도 했지만 동네가 워낙 비탈진 곳이라 그런 놀이를 할 만한 곳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일과는 먼저 종이 인형을 사 나르는 것이었다. 집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조그마한 문방구가 하나 있었는데 우리 아이들은 그 문방구 할아버지의 단골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아예 우리 아이들을 위해 종이 인형 다발을 준비해 두는 것 같았다. 대개 예쁜 공주와 왕자, 왕비와 임금 그리고 그들이 입을 옷. 사는 집, 먹을 음식과 과일, 갖가지 생활 도구도 그려져 있었다.

    아이들은 매일 이 그림 속에 있는 인형과 옷, 집과 가재도구들을 가위로 오려냈다. 그런 다음 인형들에게 옷을 입히면서 각자 역을 정해 온갖 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공주, 너는 하녀, 나는 임금, 너는 왕비, 하는 식으로.

    집과 가재도구까지 용도에 맞게 배치하면 방안에 하나의 ‘왕국’이 건설되는 셈이었다.

    그림 속의 인형과 옷을 가위로 오려내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아직 다섯 살, 네 살밖에 안 된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림들을 다 오리려면 1시간은 족히 걸리는 큰 일이었다.

    가게 일이 점점 바빠져서 나는 공사장 일을 그만두었다. 가게에서 팔 물건을 사기 위해 용산 도매시장에 가는 일 외에는 늘 집에서 아내를 도왔고 시간이 남으면 아이들과 같이 놀아주었다.

    나는 아이들이 노는 것을 언제나 가까이 지켜볼 수 있었다. 나는 그게 좋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 그때보다 더 행복한 시간은 없었던 것 같다.

    종이에 그려진 어린 공주의 손가락을 가위로 오리려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다. 그런데 얼마나 지났을까? 아내와 나는 아이들의 가위질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일 가위질을 하며 놀다보니 웬만한 어른들보다 훨씬 더 능숙하게 가위질을 하는 것이었다.

    문방구에서 산 종이인형이 아무리 많아도 아이들의 욕구를 다 채워주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아이들은 가게에서 나오는 과자 포장지 뒷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위질에서 그림 그리기로

    처음에는 그림을 보고 베끼더니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스스로 여러 가지 모양의 공주와 왕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음식이며 옷가지, 집 등 자기들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렸다.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자 나는 색연필, 색도화지, 크레용 등을 사다 주느라 바빴다.

    나는 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옆에서 보기만 했다. “그림은 이렇게 그리는 거야” 하면서 참견한 적은 한번도 없다. 아내와 나는 아이들 그림이 아무리 서툴러 보여도 “아이구, 잘도 그렸네. 우리 집 화가들 봐라”하면서 대견하게 여기고 칭찬했다. 이렇게 추켜주니 아이들은 더욱 신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은 나에게 자기들이 그린 그림에 이름을 붙여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약간 당황했다. 한두 개야 할 수 있겠지만 그 많은 공주들과 왕자들 그리고 시녀들의 이름을 내가 어떻게 다 짓는다는 말인가. 아이들이 차곡차곡 모아둔 인형 그림들은 수십개, 아니 수백개는 돼 보였다.

    “너희들이 지어봐. 너희들이 지으면 아빠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텐데?” 나는 꾀를 내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아는 공주 많지 않니? 네가 아는 공주 이름과 비슷하게 지어보면 되지 않겠니?”

    그때 우리 아이들은 아직 글자를 읽을 줄 몰랐다. 그 많은 공주와 왕자 이름은 글을 아는 동네 아이들과 놀면서 익힌 것이었다. “네가 아는 공주 이름과 비슷하게 지어보면 되지 않겠니?” 하는 내 말에 큰 아이는 대뜸 “라리 공주라고 하지 뭐”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다”고 맞장구 쳐주었다. 아이들은 이렇게 자기들이 인형 이름을 붙여놓고 기뻐했다.

    이제 아이들은 자기들이 그린 공주 밑에 ‘리라’공주 이름을 거꾸로 하여 ‘라리’ 공주라고 썼다. 처음에는 글자를 썼다기보다는 그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말하자면 자기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인형 이름에 있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발음해보고, 그렇게 알게 된 글자를 하나씩 베껴 쓰면서 새로 그린 그림인형의 이름을 짓게 된 것이다.

    과자상자로 글자 깨치기

    우리는 아이들이 이렇게 노는 광경을 보면서 ‘아하, 이렇게 하면 글자를 깨치게 되겠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때 우리 집에는 가구가 없었다. 이부자리를 방 한 켠에 가지런히 포개두었고 옷가지는 빈 라면 상자나 과자 상자에 넣어두고 살았다. 가게가 비좁아 과자 상자를 방안에 쌓아두기도 했다. 말하자면 방이 창고 겸 거실이었고, 침실 겸 아이들 놀이방이었다.

    나와 아내는 그 과자 상자로 ‘공부놀이’를 시작했다. 공부란 괴롭고 힘든 것이라는 내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공부가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공부’라고 하지 않고 늘 ‘공부놀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던 것이다. ‘공부놀이’ 이외에도 ‘학교놀이’ ‘글자놀이’ 등 아이들이 하는 일에는 무엇이나 ‘놀이’라는 말을 넣어 주었다.

    ‘라면땅’이라는 과자 상자가 누워 있는 우리 눈에 들어왔다.

    “얘들아, 저 상자를 좀 봐라. ‘라면땅’의 ‘라’자 하고 ‘라리공주’의 ‘라’자 하고 같지?”

    이렇게 설명하면 아이들은 그 글자에도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무척 재미있어 했다.

    가게에 있는 그 많은 과자들의 이름은 모두가 공주와 왕자의 이름에 활용되었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이미 이름을 알고 있는 과자 상자에 적힌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보면서 그 글자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 스스로 깨쳐갔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는 동네 간판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자기들이 아는 글자는 소리내 읽고, 모르는 글자는 묻곤 했다.

    나는 아이들이 글자 공부를 재미있는 ‘놀이’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랐을 뿐,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이란 참 놀라운 존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이런 놀이를 통하여 받침 없는 글자는 거의 다 읽어냈다. 그것이 정말 신기했다.

    그렇게 아이들과 더불어 하루하루를 평온하게 지내고 있는데 문제가 생겼다 신문에 우리가 살던 봉천동이 전부 철거된다는 기사가 났다. 살던 집은 무허가 건물이었는데, 세든 사람들은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우리는 그 말에 지레 겁을 먹고 잘 되던 가게를 정리했다.

    큰아이가 여섯 살, 작은아이가 다섯 살이던 1995년 추석 무렵, 우리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의 인형 놀이는 이곳에서도 계속되었다. 나는 서울에서 하던 것처럼 구룡포 읍내에 나가 종이 인형, 도화지, 색연필 등을 아이들에게 사다주었다.

    당시 시골에서는 종이 한장, 연필 한 자루에 벌벌 떨 정도로 물건을 아끼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우리 집에는 그런 것이 풍족했다. 남들보다 특별히 살림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종이 몇 장, 연필 몇 자루 정도는 아끼고 싶지 않았다. 아직 날짜가 지나지 않은 달력 뒷장에 그림을 그려도 아이들을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 그러니 아이들에겐 우리 집이 제일 좋을 수밖에.

    인형놀이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림에 도가 텄는지 아이들은 그림을 제법 잘 그렸다. 이 책 저 책을 보고 그리기를 좋아했는데 책과 아주 흡사하게 그렸다. 동네 아이들은 빙 둘러앉아 우리 아이들의 그림을 구경하면서 신기해하고 부러워했다.

    1976년 1월12일에 셋째가 태어났고, 이듬해 봄날 큰아이가 학교에 들어갔다. 큰아이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몸이 약한 편이었는데,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2km 이상 되었기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다.

    차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자전거를 사서 태워주기로 했다. 비포장 도로여서 노면이 울퉁불퉁한 곳을 지날 때는 자전거가 덜컹거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재미있어 했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좋지 않으면 하교 길도 자전거로 도와 주었다.

    논둑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어린 딸과 이야기하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우리 부녀는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는 아빠가 자전거로 자기를 학교에 데려다준다고 좋아했고, 아이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나의 기쁨을 더해주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예전의 나처럼 학교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학교에 가는 것을 즐겼다고 하는 편이 정확한 표현이리라.

    첫째는 학교에 가자마자 공부에 굉장한 흥미를 보였다. 몸은 마른 편이었지만 눈은 빛났고 학교 생활을 즐거워했다. 쪽지 시험을 볼 때마다 100점을 맞았다고 좋아했다.

    우리 아이는 그것이 ‘공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동네 언니들과 같이 하던 ‘학교 놀이’의 연장쯤으로 생각하고 즐기는 모양이었다.

    1년쯤 지나자 큰아이는 반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아이가 되었다. 그림 그리기에도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둘째가 학교에 들어가 나는 자전거의 뒷좌석을 조금 넓혀 두 아이의 등교를 도와 주었다.

    첫째와 둘째의 성격은 대조적이다. 첫째는 내성적인데 둘째는 외향적이다. 그런데 학교 생활은 너무나 닮았다. 무엇하나 열심히 하지 않은 게 없었다. 둘 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그 그림은 언제나 교실 뒤에 붙어 있었다. 국어 받아쓰기 하며 산수까지 모두 재미있어 했다.

    미술대회마다 두 아이가 상을 독차지하였다. 교내에서 매달 주는 학력상과 군 교육청에서 수여하는 상과 청년단체 주관 행사에서 주는 상을 놓치는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선생님과 학부형 치고 우리 아이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만나면 “그 집 아이들은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잘 하나?” “아빠가 매일 붙들고 공부를 시키는 모양이지?” 하고 묻곤 했다.

    셋째가 태어나고 두 해 후에 넷째가 태어났다. 딸 부자가 된 것이다. 할머니는 이제 우리 집 대가 끊기게 되었다며 노골적으로 손주며느리를 구박하시기 시작했다.

    이 셋째가 다섯살이 되었다.

    “이제 셋째도 얼마 안 있어 학교에 보내야 할 터인데 어쩌지?”

    나는 걱정이 되었다.

    “그렇지! 그렇게 해 봐야지!”

    나는 생각했다. 첫째와 둘째가 저렇게 공부를 잘 하는 것은 다 그 ‘인형 놀이’때문인지 모른다. 한번 그렇게 생각하니 점점 그 생각이 굳어졌다. 셋째는 오늘도 언니들과 ‘인형놀이’를 하고 놀았다. 주로 ‘인형놀이’의 공주 아기가 되는 입장이었지만 셋째 넷째 모두 재미있어 했다.

    나는 서울에서 하던 대로 셋째에게도 종이 인형을 사다 주었다. 그리고 도화지와 색연필 크레파스를 구해다 주었다. 이웃집의 지난 해 달력은 모두 아이들의 도화지로 사용되었다. 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셋째도 재미있어 하며 즐겁게 놀았다. 자연스럽게 언니들을 따라 ‘글자 놀이’를 하고 ‘1, 2, 3, 4 놀이’ ‘구구단 놀이’도 하였다.

    셋째 넷째도 학교에 갔다. 셋째가 조금 처지는 듯하더니 곧 따라붙였다. 나는 이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 공부였다”고.

    첫째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막내가 태어났다. 아들이었다. 위로 딸만 넷이었기 때문인지 모두 다 우리 집에 경사났다고 축하해 주었다.

    얼마 후 첫째와 둘째는 중학교에 들어갔고 셋째와 넷째도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썩 공부를 잘 하였다. 막내인 아들도 이제껏 누나들에게 해주던 방법대로 하면 틀림없이 공부를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셋째와 넷째에게 인형 놀이를 할 때 막내와 같이 놀아 주라고 일러 두었다.

    로봇에 푹 빠진 아들

    막내가 서너 살 때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누나들과 어울려 인형놀이도 소꿉장난도 했다. 그런데 다섯 살쯤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점점 누나들과 하는 인형놀이나 소꿉장난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대신 방안에서 놀려 하지 않고 자꾸 밖으로 나돌았다. 때로는 막대기를 집어들고 칼이라고 후려치며 야단을 피우기도 했다. 잠시도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있지를 못했다. 막내가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있을 때는 오로지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뿐이었다. 그것도 로봇이나 만화영화가 방영될 때에만.

    막대기를 휘두르는 데도 누나들이 관심을 주지 않자 이제는 “야! 야!” 하고 고함까지 지르면서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야단법석이었다. 누나와 집안에서 소꿉장난을 하기보다는 아빠와 밭에 가서 놀기를 더 좋아했다. 나는 걱정이 되었다.

    이제 올 것이 왔구나. ‘딸 자식 많은 집안에 하나 아들 버린다’는 옛 말이 꼭 맞구나.

    그런데 막내 율이는 누나들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누나들이 별로 재미있어 하지 않는 로봇 전쟁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연필로 자주 만화영화에 나오는 로봇을 혼자 그려보곤 하였다. “옳다. 이것으로 시도해 보리라”고 생각한 나는 읍내에 내려가서 서점이며 문방구에서 로봇만 잔뜩 나오는 그림책을 사다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림책을 보자 아이는 바로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틈틈이 많이 연습한 솜씨였다. 우리 식구는 모두 둘러 앉아 막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우리 식구의 즐거움이 또 하나 늘어났다. 막내가 그린 그림을 보는 재미였다. 누나들이 먼저 “아빠 율이 그림 봐라”하면서 좋아했고, 우리 부부 중 누구라도 먼저 보면 누나 넷은 물론이고 큰할머니(아이들 증조 할머니) 작은 할머니(아이들 할머니)까지 불러모아 그림을 보여주며 좋아했다.

    우리의 격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잘 된 그림은 따로 벽에 붙이기도 하고 코팅해서 책받침으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것은 아이에게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처음 그림을 코팅해 주었을 때 율이는 그림을 앞뒤로 살펴보면서 신기해했다. 누나들의 “코팅 해보자”는 제안은 율이를 한껏 고무시켰다.

    한번은 넷째가 학교에 가지고 간 책받침이 친구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넷째는 “내가 우리 반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더니 서로 달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뺏겼다”고 했다. 막내는 처음에는 좀 아쉬워했지만 별로 기분 나쁜 눈치는 아니었다. “또 그리면 되지 뭐”하면서 우쭐해했다. 한장 더 그려달라는 넷째의 제안이 떨어지기 무섭게 막내는 또 그리기 시작했다.

    로봇그림에 코팅해주며 격려

    그리고 또 그리고, 막내의 로봇 그림은 그야말로 일취월장 발전해 갔다. 처음엔 그림책을 보고 그리더니 이제는 볼 것도 없었다.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림책보다도 더 멋진 로봇을 그려냈다.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해 쯤으로 기억된다. 구룡포읍 청년 향우회에서 주최하는 어린이 그림 대회가 열렸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림 대회에 나갔다. 유치부도 있었는데 주제는 자유였다.

    막내는 로봇 그림을 그렸다. 다른 아이들도 처음에는 좋아하면서 그림을 그렸지만 곧 지루해졌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 본부석에 그림을 제출했다. 그런데 아직 그림을 다 그리지 못한 막내는 종료시간까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 꼬마의 손끝에서 어떻게 그렇게 온갖 모양의 로봇이 나오는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결과는 유치부 최우수상이었다. 유치원, 미술학원 한번 다니지 못한 산골마을 촌뜨기가 쟁쟁한 읍내 아이들을 물리치고 최우수상을 받다니! 막내는 신이 났다.

    이제 막내도 그림을 즐기게 되었으니 시작은 잘 되었다 싶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기가 그린 그림에 이름을 붙이는 놀이를 하면서 글자 공부도 저절로 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이리저리 로봇에 ‘이름짓기 놀이’를 유도해 보았지만 그때뿐이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제 로봇 그리기를 통해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앉아 한 곳에 정신을 집중하게 하는 데까지는 성공하였다. 블록 놀이도 좋아해서 한번 블록을 손에 잡았다 하면 몇 시간씩 가지고 놀았다. 그러나 이 놀이를 통하여 문자를 깨우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먼저 실패 원인을 분석해 보았다. 첫째, 위로 네 아이는 여자아이고 막내는 사내아이여서 사정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나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형 놀이를 로봇 놀이로 바꾸었고, 살림 놀이를 로봇 만들기와 블록 쌓기 놀이로 바꾸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글자 익히기까지는 이르지 못했는가.

    둘째, 환경이 달랐다. 우선 로봇은 종이 인형에 비해 가지 수가 얼마 되지 않아 그 이름이 다양하지 못했다. 우리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건담’ 시리즈 외에는 ‘아이자크’ ‘제타 플러스’ ‘윙윙’ ‘더블제트’ 정도였다. 그러니 로봇 이름을 활용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또 누나들과는 달리 로봇을 가지고 함께 놀아줄 친구가 없었다.

    율이가 글자를 쉽게 익히지 못한 것은 환경적 요인이 크리라는 결론은 이미 내린 바이나 큰 아이들과 다른 환경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곰곰 따져보니 그때는 과자가게를 하고 있었고 지금은 농사를 짓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이 엄청난 차이를 뒤늦게서야 생각해낸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막내아들의 공부를 위하여 다시 ‘과자집’을 차릴 수는 없었다. 결국 ‘꿩 대신 닭’이라고 아들이 좋아하는 과일이나 과자가 잔뜩 그려져 있는 그림책으로 ‘글자놀이’를 시작해보리라 마음먹었다.

    다시 학교 앞 문방구를 찾아갔다. 나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모양이었다. 그런 책이 있었다. 도화지보다 좀 두꺼운 종이에 온갖 과일이 그려져 있기에 이것이면 되겠구나 싶어 얼른 사왔다. 그러나 이것도 허사였다.

    “이것은 사과, 이거은 수박”하면서 글자를 깨우치려고 했지만 막내는 이내 시큰둥하였다. 얼마나 흘렀을까? 맛있는 것들이 잔뜩 그려진 그림책이 이 구석 저 구석으로 굴러 다니면서 모서리가 다 낡고 닳았을 무렵이다. 이것도 안 되니 직접 투자를 해보는 수밖에,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 둘은 실제로 과자를 보기도 하고 먹어 보기도 해서 관심이 생생한데, 그저 그림책만으로 막내에게 글자를 가르치려는 것은 욕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제 실제 먹을 것을 사다 주면서 바로 글자를 가르쳐보리라 생각했다.

    이것도 최대한 재미있게 해보리라. 궁리에 궁리를 했다. 아내와 의논한 끝에 엄마와 ‘편지 놀이’를 시켜보기로 했다. 그래서 어린 아들을 불러놓고 이제부터 엄마와 재미있는 ‘편지 놀이’를 해보자고 제안하였다. 막내는 좀 의아해 하면서도 관심을 보였다. 엄마와 하는 편지놀이는 재미있을 것 같았던 모양이다.

    그 때 아내는 일년 내내 집에서 가꾼 농산물들을 리어카에 싣고 읍내에 내다 파는 일을 주로 했다. 말하자면 나와 어머니, 할머니는 집에서 농사짓는 일을 전담하고 아내는 판매를 전담하는 방식으로 ‘분업화’했던 것이다. 아내는 매일 시장에 나가 집에서 가꾼 채소나 과일, 토마토, 수박 등을 팔아 가계를 꾸려 나갔다.

    ‘편지놀이’로 한글 익히기

    나는 막내에게 ‘편지 놀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편지 놀이는 이런 것이었다. 매일 엄마가 시장에 갈 때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에다 써서 엄마에게 주는 놀이었다.

    처음에 아들은 조금 걱정하는 눈치였다. 자기는 아직 글자를 모르기 때문에 ‘편지 놀이’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그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른 이렇게 말해 주었다.

    “어려울 것 하나 없다. 네가 가지고 있는 그림책 있지? 그것을 보고 네가 먹고 싶은 것을 쓰는 놀이란 말이다. 그래 너는 그림도 잘 그리는데 그까짓것 쉬운 글자를 못 쓸까봐? 오늘부터 당장 해보자”

    첫날 편지 놀이의 편지내용은 단 두 글자, ‘사과’였다. 그림책을 보고 사과 밑에 ‘사과’라고 씌어 있는 것을 다시 그린(?) 글씨였으리라. 아내는 막내가 접어준 대로 그 편지를 지갑에 곱게 넣고는 시장에 갔다. 그리고 가져간 물건을 다 팔고 집에 올 때 그 편지에 써있는 대로 사과를 사가지고 온 것이다.

    그런데 이건 웬 요술인가? 아이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 아닌가. 전에도 물론 사과를 사다 준 적이 있지만 이 사과는 아이에게는 ‘의미 있는’ 다른 사과였다. 막내는 누나들을 부르며 엄마가 사과를 사왔다고 고함을 쳤다. 누나들은 “이 아이가 사과 처음 봤나?” 하는 눈치였다. 아이는 “엄마가 내 편지 보고 사과 사 왔다”면서 무척이나 좋아했다.

    왜 그렇게 좋아했을까? 나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막내는 아마 자기가 글자라고 쓴 것이 맞게 씌어졌는지 엄마가 올 때까지 궁금했으리라. 또 자기가 쓴 암호 같은 이것이 제 구실을 다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런 의문이 일시에 다 풀렸던 것이다. 과연 글자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 날부터 아들과 엄마의 편지 놀이는 재미있게 계속되었다. 당시 우리 형편으로는 편지 놀이를 계속하는 것이 다소 무리였다. 그러나 아내와 나는 훗날 과외비를 대는 셈치고 매일 이 과일 저 과일을 사다 날랐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막내는 글자에 남다른 흥미를 보이며 글자 공부 놀이를 즐겼다. 조금 지나서 우리는 아주 재미있는 그림들이 있고 글자가 많지 않고 쉬운 동화책을 사다 읽어 주면서 아이의 흥미를 돋워주었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글자를 익힌 것은 그들이나 나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전부터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독서하는 습관만은 꼭 붙여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독서하는 습관이 붙지 않은 아이는 절대로 공부를 잘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취학 전 교육에 조금 자신을 얻은 후부터 나는 독서습관을 붙여주기 위한 계획을 하나 둘 진행하였다.

    이곳 구룡포읍에서 포항까지는 약 24km로 옛날부터 60리가 좀 넘는 거리라고 했다.

    나는 한 달에도 몇 번씩 포항 시내로 나갔다. 그 날은 내가 농사일을 하지 않고 종일 노는 날이다. 그러나 그냥 노는 게 아니라 이 책방 저 책방을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을 골라 주는 즐거움을 맛보는 날이었다. 처음엔 이 책방 저 책방을 많이도 다녔다. 그러다 단골 책방이 생겼다. 서점 주인을 잘 알게되자 우수고객이라며 10퍼센트 할인까지 해 주었다.

    당시 책값은 정가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할인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 후부터 나는 꼭 그 집에서 책을 샀다. 그러면 포항을 왕복하는 버스비가 나오고도 남았으니 차비가 별도로 더 들지 않는 셈이어서 좋았다.

    당시 주로 ‘견지사’라는 출판사에서 출간한 아동물을 사다주었는데 나중에는 ‘계림문고’와 다른 출판사에서 나오는 세계아동문학전집 가운데 읽을 만한 책을 낱권으로 골라 사다주었다. 전질을 사다주지 않은 이유는 돈도 돈이지만 과거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이 책의 부피에 질려 지레 겁을 먹고 읽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수십 권짜리 전질을 사주기보다 낱권으로 사다주는 것이 아이들이 부담없이 책에 재미를 붙이기가 수월하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텔레비전 어린이 연속극에 나오는 책이면 꼭 사다주었다. 이 방법은 아이들에게 독서 습관을 붙여주는데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예를 들면 ‘보물섬’이라는 어린이 만화 연속극이 나오면 재빨리 그 책을 사다 주는 것이다. 텔레비전 연속극은 꼭 재미있을 만하면 끝나고 다음 편을 기다리게 하였다. 아이들은 이 때문에 계속 그 프로그램을 보게 되는데 책을 사다 주면 그걸 안 보고는 못 배긴다. 그 다음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물론 텔레비전 연속극의 내용이 책과 똑같이 진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궁금증 때문에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책을 읽게 되었다.

    이렇게 하다보면 처음에는 책을 좋아하지 않던 아이도 책 한 권을 다 읽게 되고, 몇 번 그런 식으로 책을 읽다보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 책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홀렸다(?).

    우리 부부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릴 적 읽어둔 동화책이 아이들의 독서 습관을 길러 주는데 요긴하게 이용되었다.

    저녁에 아이들과 같이 지낼 때 우리는 어릴 적 읽은 책. 주로 명작동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읽은 지가 너무 오래 되어 줄거리를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이야기할 때도 있었다. ‘홈즈’ 이야기도 했고 ‘삼국지’ 이야기도 했다. ‘알프스 소녀’ ‘엄마 찾아 삼만리’ ‘집 없는 천사’ ‘철가면’ 등 우리가 다 아는 귀에 익은 세계명작들이지만 이 책 이야기는 아이들을 책으로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와 아내가 아이들에게 책 이야기를 해주면 얼마 안 가서 책장에 꽂혀 있던 낡은 책이 셋째 넷째 다섯째 아이의 손에 들려 있었다. 첫째 둘째를 키우면서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은 거의 다 사 두었기 때문에 우리 집 안방은 작은 도서관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다 합해봐야 이삼백권이나 될까? 이게 전부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내가 어렸을 때는 만화책 한 권도 책꽂이에 없었다.

    일부러 책을 방바닥에 늘어놓기

    좋은 습관은 평생을 가기 때문에 부모들은 어릴 때부터 깨끗이 청소하고 정돈하는 법을 강조한다. 그래서 장난감이나 책을 다 읽고 난 후 꼭 제자리에 놓아두라고 가르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에게 독서 습관을 길러주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나친 깔끔함도 때로는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준다고 한다. 그러니 집안을 약간 어지럽혀 놓는다고 벼락이 떨어져라 고함을 지르는 것은 엉뚱하게도 자녀의 독서 의욕까지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 집은 늘 다른 집보다 지저분했다.

    우리는 그때그때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을 방바닥에 깔아두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이들이 읽다가 그냥 방바닥에 둔 책을 치우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그러다보니 아이들의 버릇이 나빠져 온 방안에 책이 깔려 방에 발을 들여 놓으려면 이리저리 책을 밀치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게 좋았다. 아무래도 책이 가까이 있으면 한 페이지라도 더 읽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누구보다도 책을 가까이했다.

    막내 아이는 어릴 적부터 삼국지 이야기를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삼국지를 읽었다. 처음에는 한 권짜리 ‘소년소녀 삼국지’였다. 그런데 이 책을 한두 번 읽어보더니 오래 전부터 우리 집 책꽂이에 꽂혀 있던 6권짜리 ‘박종화 삼국지’를 읽어보겠다고 했다. 이 책은 분량이 많기도 하지만 성인이 읽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문체도 어렵고 요즈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지 않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읽기에는 어려운 책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제 스스로 꼭 읽겠다고 떼를 쓰니 그냥 읽어보라고 놔둘 수밖에.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너무 두꺼운 책이라 한 권도 읽지 못하고 곧 포기하리라 생각했다.

    초등학교 3학년짜리가 6권짜리 ‘박종화 삼국지’를 읽다니,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막내아이는 무엇에 홀린 듯 매일매일 삼국지를 읽어 나갔다. 1권, 2권, 3권, 4권, 5권, 기적 같은 일이었다.

    막내아이를 보면서 나는 아이들의 교육은 아이들의 지적 수준에 맞추기 보다 그 아이의 기호도에 맞추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그 약의 처방에 따라 약효는 사뭇 달라지는 법이다. 약이 정량보다 적으면 효과가 적거나 없고, 많으면 부작용 때문에 견디기 어렵다. 약을 주는 시간도 맞아야 한다.

    아이들의 공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교본이 좋아도 잘못 가르치면 저자의 의도와 어긋나게 역효과가 나는 수도 있다.

    내가 아이들에게 한자 공부를 시킬 때 왜 ‘어린이 한자’ 4권 가운데 3권부터 시작했는지 의아해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1권부터 차근차근 공부해 나가는 것이 맞을 터인데,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내 나름대로 오랫동안 고심 끝에 내린 처방이었다.

    여기 먼저 이솝에 관한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한다.

    ‘옛날 어떤 나라에 이솝이라는 노예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그의 주인이 다른 노예들과 이솝에게 먼길 갈 차비를 하라고 하였다. 노예들은 주인의 명에 따라 각자 지고 갈 짐을 챙겼다.

    그런데 이솝은 그 짐들 중 가장 크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길을 떠났다. 이를 본 주인은 이솝에게 가만히 물어 보았다. “너는 왜 다른 사람이 무겁다고 지고 가기 싫어하는 이 무거운 짐을 선택했나?” 이솝은 조용히 대답했다. “이 짐은 무거우나 모두 양식입니다. 우리 모두 먹어야 할 식량으로 며칠을 가다보면 점점 줄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내 짐은 점점 가벼워지지 않겠습니까?”

    이 대답을 들은 주인은 이솝을 지혜있는 사람으로 알고 더욱 그를 사랑하였다고 한다.

    나는 아이들 공부도 이 방법을 적용해 보리라 생각했다.

    이 ‘어린이 한자’ 책 내용을 살펴보면 첫 권은 100자로 되어 있는데 아주 쉬운 글자들이고, 둘째 권은 조금 어려운 글자로 200자, 다음은 더 어려운 글자 300자 그리고 마지막은 가장 어려운 글자 400자로 되어 있다.

    한자 1000자 정복과정

    그런데 사람은 이솝뿐 아니라 누구나 짐이 점점 가벼워지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누구나 처음 시작할 때는 대단한 각오로 시작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처음 의지가 점점 꺾여 흐지부지 되고 만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란 말도 생겼다.

    우리 아이들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래서 처음엔 좀 무거운(어려운) 300자 셋째 권부터 시작했다. 이 300자 교본을 하루 40자씩 익히면 일주일하고 반나절이면 된다. 아무리 의지가 약한 아이들이라도 방학 때 부모들이 조금만 신경 써주면 300자 3권을 일주일 남짓이면 뗄 수 있다.

    이 300자 고비만 넘기면 나머지는 쉽게 정복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우리는 이 300자 공부시킬 때만은 온 정성을 다 하였다. 산모가 첫 아이를 낳아 기르는 정성으로 혼신의 힘과 지혜를 다 짜냈다.

    매일 아이가 40자를 다하고 기지개를 펴고 나오면 우리는 “장하다, 장하다”를 연발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너무 그렇게 하면 아이는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그런다며 으시대기도 한다. 바로 그것이다. 으시댈 만큼 가볍게 생각하도록 격려를 하는 것이다.

    3권을 마친 다음에는 4권을 하는 것이 아니라 3권보다 쉬운 2권을 하게 하였다. 좀 더 가볍게 짐을 지게 하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2권은 그 획수가 3권에 있는 글자보다 적고 글자는 200자 밖에 되지 않아 심적 부담이 한결 가볍다. 하루에 40자씩 5일이면 200자를 끝낼 수 있는데 사실 상당 부분 3권에서 익힌 글자들이 많아 가볍게 끝낼 수 있었다. 다음은 더 쉬운 100자뿐인 1권이다. 이것은 3권과 2권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라 했다. 하루에 40자가 아니라 이틀 만에 다 끝냈다.

    이때쯤 해서 아이들이 가장 먹고 싶어하는 통닭으로 걸판지게(?) 잔치를 벌여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었다.

    “너는 한자 책 4권 중 이미 3권을 다 뗐다. 너는 대단한 놈(아들)이다. 너희 친구들 중 아무도 너처럼 한 아이는 없을 것이다. 이제 ‘겨우’ 한 권 남았다. 이 마지막 한권에는 이미 네가 공부한 책 속에서 익힌 글자들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에 쉽게 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로 용기를 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 어느 아이고 마지막 4권에 도전하게 되며 이로써 한자 1000자를 다 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1000자를 익힌 것은 농사일에 비유하자면 아시갈이를 한 셈이다.

    아시갈이는 애벌갈이로 논에 모를 심기 전 아주 이른 봄에 대강 논을 갈아 두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재벌갈이 때 땅이 물러져서 논이 쉽게 갈아지기 때문이다.

    이제 아시갈이를 하였으니 재벌갈이를 할 차례다. 물론 초벌갈이보다는 쉽다. 똑 같은 방법으로 셋째 권을 시키고 다시 2권, 1권. 이렇게 이솝의 짐처럼 가볍게 지다가 마지막 넷째 권을 야무지게 지고는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일이 다 끝나면 이제 써레질을 하고 번지질로 고르듯이 세 번째 공부를 또 시작한다. 첫 번째 아시갈이가 25일 걸렸지만 재벌갈이는 15일도 채 걸리지 않는다.

    이 둘을 다 합해 봐야 40일, 아직도 겨울 방학은 20일이 더 남았다. 3벌 갈이에 써레질 번지질을 다 해도 두 달 방학이 남는다.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하여 헤어졌다 만났다 친구를 사귀듯이 한자를 익히다 보면 그야말로 저절로 된다. 우리 아이 다섯이 다 되었는데 다른 집 아이라고 안 되란 법이 어디 있는가?

    그때 나의 조카도 방학 동안에 우리 집에서 한자 공부를 시켰는데 역시 넉넉하게 네 권을 소화할 수 있었다.

    아무리 여러 말로 아이들에게 설명을 하고 한자 공부를 시켜도 처음 아이들은 내가 하는 말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한 지 이틀이 못 가서 아이들은 자꾸 잊어버리는 데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래서 먼저 공부한 부분을 자꾸 들쳐보며 또 까먹었다고 걱정을 하였다.

    이렇게 하다간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전에 공부했던 것을 자꾸 다시 들춰보게 되니 진도가 나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풀에 지쳐서 아예 공부를 그만두게 된다. 여간 끈기 있는 아이가 아니면 여기쯤에서 포기하고 만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주 다른 발상을 해야 한다. 물론 사전에 공부는 친구 사귀듯 하는 것이라 하였으나 아이들은 그것과 공부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대도시에 처음 갔을 때 역에서 내려 이곳 저곳을 다녀보면서 천천히 그 도시의 윤곽을 익혀간다. 처음부터 역 주변의 모든 길을 샅샅이 알아 가면서 그 도시 전체를 알려고 하지는 않는다. 역 주변의 작은 골목이 어떻게 생겼건 상관 않고 대로를 따라 이리 저리 다니다 보면 중앙로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 중앙로를 따라 좀 더 작은 길을 알게 되고 또 이 작은 길을 따라 가다보면 샛길도 알아 나중엔 택시 기사가 되어도 좋을 만큼 길을 훤히 알게 되는 것이다.

    나는 공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완전히 익히면야 좋겠지만 그렇게 하려고 들면 누구나 제풀에 지치게 되고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 한 번쯤 해냈다 하더라도 다음부터는 그런 힘든 일은 기피하게 된다. 공부를 하루 이틀 하고 말 것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수십 년을 해야 할 것인데 어릴 때부터 지치게 할 수야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오늘은 익히고 내일은 반드시 잊어버려라”고 말했다.

    이것은 이제까지 아이들을 지도하는 많은 교육자들과는 다른 발상이지만 그 효과는 매우 컸다.

    나는 아이들 공부에 있어서도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려 애썼다. 그래서 각종 교외(校外) 경시대회를 이런 추억 만들기에 활용했다. 교외 경시대회에 아이들을 따라간 것은 물론 흔하디 흔한 어린이 그림대회에도 도시락을 싸들고 따라갔다. 읍내 어린이 그림대회는 물론 군(郡)대회, 시(市)대회, 그리고 포항 MBC가 주최하는 동해지구 어린이 그림대회에도 단골 손님이 되다시피 한 해도 빠지지 않았다.

    아이가 다섯이니 누가 가도 꼭 한 아이는 이런 대회에 나갔으니 남이 보기엔 무슨 대회 관계자 같았을 것이다. 그 날은 우리 식구가 모두 소풍가는 날처럼 이것저것 맛있는 것을 사가곤 하였다. 학교에 다니지 않던 동생들도 꼭 따라갔고 휴일이면 모두 가기를 즐겼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시를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시와 시조를 줄줄 외우고 다녔다. 그중에서도 이은상 선생님의 ‘가고파’란 시를 특히 좋아했다. 시조 몇 수도 멋있게(?) 외우고 다녔다. 그러나 그렇게 시를 좋아하면서도 한 수의 시도 제대로 지어보지는 못했다. 애는 많이 써 보았다. 그런데도 지어놓고 보면 ‘시’가 아니었다. 그래서 시인을 가장 존경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오래 전에 대교육자이자 아동문학가이신 이오덕 선생님이 쓰신 ‘일하는 아이들’이란 책을 친구로부터 선물 받아 읽어 보고는 시(詩)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로이 들었고 어쩌면 나도 시를 쓸 수 있으리란 생각을 했다.

    그래서 늦게 둔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시 몇 편을 같이 썼다. 여기 아들과 함께 쓴 시를 소개하고자 하는데 이것이 시인지 장난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시(?)를 지으면서 그럴 수 없이 행복했고 아들도 무척 좋아했다.

    아이들과 추억만들기

    어느 무더운 여름 날이었다. 아들은 어디를 다녀왔는지 집에 들어오자마자 하는 말이 “아빠 오늘 덥더라. 하늘엔 해 뿐이더라”고 말했다. 아들은 온몸에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날은 과연 더운 날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들의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더위 때문이 아니었다. 아들의 그 말 때문이었다. 덥다는 말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이 얼마나 재미있는 표현인가? 적어도 나는 아들의 이 말을 그렇게 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곧 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그래서 땀을 뻘뻘 흘리는 아들을 얼음 같은 지하수로 목욕시키고 시원한 방바닥에 누워서 아들과 시를 짓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여름 매미 소리가 온동네를 가득 메웠다. 제목은 ‘한여름’ 우리는 이렇게 시를 썼다.

    한여름

    해는 하늘을 다 차지하고

    우리 동네는

    매미 소리가 다 차지했다.

    이 석 줄이 우리가 지은 시의 전부다. 그러나 나는 10년이나 지난 지금도 이 시를 사랑하고 올해 대학(서울의대 예과 1년)에 들어간 아들도 아빠와 같이 쓴 이 시를 되뇌며 행복해 하고 있다.

    다음의 이 시도 어느 가을날 아들과 같이 쓴 시다.

    가을 마당 소야 니는 심심해서 우예 노노?

    우리는 심심하면 테레비 본다

    소야 니는 우리가 테레비가?

    그래 이 놈아

    소 텔레비전도 너거고

    할매 텔레비전도 너거다

    할머니 말씀

    이것이 시가 되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들과 함께 쓴 이 시들을 아직까지도 어떤 유명한 시인의 시보다 더 좋아한다.

    복습보다도 예습이 효과적

    공부도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려면 학교 수업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학교 수업만큼 중요한 일이 학생에게 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부모는 엉뚱하게 과외에만 매달리려고 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본다.

    그 원인을 나는 학생이 수업에 임하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무조건 여러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다고 해서 공부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마음의 준비를 할 것이며 준비가 되도록 할 것인가.

    나의 결론은 복습보다는 예습이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예습은 공부를 다 해 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다음날 수업 중에 내가 무엇을 공부하게 되는지를 살펴보고, 공부할 내용 가운데 선생님 설명을 듣고 깨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미리 체크(check)해 가는 것이라고 아이들에게 일러 주었다.

    이것은 모르는 것을 미리 공부해 가라는 ‘예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제안이다.

    우리가 경험했듯이 혼자 배운다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남의 말 몇 마디만 들으면 금방 알 것을 온종일 끙끙거리며 애쓸 필요가 어디 있는가? 사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매일 배울 것을 ‘미리’ 공부해 가라는 말 대신 내일 배울 부분 중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어디인지 체크(check)해 가라는 말로 바꾸었다. 적어도 “네가 성적을 올리려면 그렇게 하는 게 훨씬 수월하다”고 일러주었다.

    오늘 편안한 마음으로 내일 공부할 어려운 것들을 체크해 가는 것이 나중 시험 기간에 밤샘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낫다고 설파했다. 이것이 나의 비교우위론(?)이다.

    우리 아이들이 그래도 남들보다 성적이 좀 좋았던 것은 이 예습이 한몫을 하였으리라 생각한다.



    교육&학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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