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에도 택시기사는 민감한 얘기를 거침없이 내뱉었다. 기자도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신뢰를 잃었다는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신구범(愼久範)씨 얘기지요. 저번 제주도지사 선거 때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탈락하면 승복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했어요. 그런데 경선에 패한 뒤 약속을 뒤집고 무소속으로 출마했습니다. 형편없이 표를 못받았지요.”
약간 김이 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이렇게 에돌려 표현하는 택시기사의 화술에서 제주도 사람의 정서를 엿볼 수 있었다.
신구범 전지사는 1995년 6월27일 광역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11만1205표를 얻어 당시 민자당 우근민(禹瑾敏), 민주당 강보성(姜普性) 후보 등 정당공천을 받은 경쟁자들을 누르고 민선 제주도지사에 당선됐다.
그 뒤 신 전지사는 민주당의 전신인 국민회의에 입당했고 199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도지사 후보 당내 경선에 출마했다. 당시 당내 경쟁자는 우근민씨였는데 경선 결과에 승복하겠다는 서약을 한 뒤 치러진 경선에서 신 전지사는 패했다.
그러나 서약과 달리 신 전지사는 무소속으로 본선에 출마했다. 결과는 낙선. 당선자인 우근민 후보가 13만9695표를 얻은 반면 신 전지사는 8만1491표에 그쳤다. 1995년 첫 지방선거에서 신씨가 얻은 11만여 표에도 못미치는 결과였다.
“민주당 대선후보인 이인제씨도 신 전지사와 비슷한 경우 아닙니까?”
“손님은 이인제씨 지지하시나 보죠?”
“저는 기자입니다. 대선 관련, 현지 민심을 취재하려고 왔습니다.”
“그러십니까?”
잠시 뜸을 들이던 기사는 대뜸 “정치불신이 심각하다”고 말했다.
“육지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여기서는 큰 인기를 끄는 정치인이 없습니다. 이인제씨도 이회창(李會昌)씨도 여기서는 인기가 별로입니다.”
그런 얘기가 오가는 사이 택시는 목적지인 제주시 이도2동 민주당 제주도지부에 도착했다.
택시기사의 마지막 말처럼 제주도 사람들은 과거 정당 소속 정치인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제주도민들의 정치적 성향은 전통적으로 ‘무소속’이다. 왜 그런지에 대해 사람마다 해석이 엇갈리지만 군사독재 시절에도 제주도민들은 무소속 의원에게 표를 던졌다. 14대 총선에서는 당선자 3명이 모두 무소속이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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