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븐 할둔에 따르면 문명은 그 구성원들을 하나의 목표 아래 결속시킬 수 있는 집단의식을 통해 발전한다. 그리고 그 집단의식이 붕괴될 때 문명은 쇠퇴한다. 이븐 할둔의 통찰은 어디까지나 아랍 문명권의 역사에 대한 관찰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광대한 유라시아대륙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의 역사에서도 어느 정도 유효하다.
‘바람에 새겨진 역사’를 부제목으로 하는 ‘유목민 이야기’(김종래 지음, 자우출판)는 몽골제국을 중심으로 유목민들의 역사와 문화를 서술한 책이다. “길게는 40년 짧게는 3년”에 걸쳐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는 저자의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수록한 사진 자료도 훌륭하고, 부록의 유목제국사 연표는 활용도가 높으며, 속도감 있는 필치도 특기할 만하다. 여러모로 훌륭한 인문·역사 교양서다.
그런데 저자는 “유목민의 역사를 단지 소개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것들에서 드러나는, 그리고 미래의 인류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하나의 관점, 즉 유목이동문명적 관점을 제시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한다.
저자는 몽골의 칭기즈칸이 시행한 파발마 역참제도를, 인터넷과 더불어 인류 역사상 단 두 번에 걸쳐 나타난 반(反)중앙집중적 정보 전달체제로 평가한다. 또한 칭기즈칸이 자기 체제로 들어온 사람이라면 종교나 인종을 불문하고 차별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타자와 공존할 줄 아는 인간’이 유목적 인간관계의 미덕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현재 우리는 오랜 정착문명 시대에서 벗어나 매우 낯설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 상품과 지식과 정보가 ‘생각의 속도’로 이동하는 시대가 그것. 저자는 시대의 이런저런 징후들을 정주에서 유목으로의 변화로 총괄하여 읽어낸다.
이 책에 시비를 걸면 이렇다. 칭기즈칸의 파발마 역참제도는 그 의도에서 볼 때, 드넓은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지극히 중앙집중 지향적인 정보 전달체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무력으로 정복한 타자를 억압하여 그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시도를, 타자와 공존할 줄 아는 인간이라는 미명으로 일컬을 수 있을까? 몽골인, 색목인, 한인, 남인, 이렇게 사실상의 차별제도를 유지했던 몽골제국이 아니던가?
우리 시대의 여러 새로운 징후들을 ‘유목’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파악하려는 시도는 무척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아날로그적 유목’과 비트의 파도를 타고 네트워크를 주유하는 ‘디지털적 유목’을 유비하려는 시도는, 자칫하면 역사적 상대성을 무시하고 범주 착오나 시대 착오에 빠지기 쉽다.
이제 다른 책으로 넘어가기 위한 연결 고리를 이 책에서 찾아본다.
“달의 높이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단 하나의 축조물만 보인다고 한다, 중국의 만리장성이다. 사실 여부를 백퍼센트 단언할 수는 없지만…(후략).”
저자가 ‘백퍼센트 단언할 수는 없다’고 말한 것이 정말 다행이다. ‘정재승의 과학콘서트’(동아시아)에 따르면, 달에 훨씬 못 미치는 거리에서도 지구상의 인공건축물들은 우주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달에서 만리장성이 보인다는 최초 발언자 미상의 근거 없는 이야기는, 미국의 인기 퀴즈쇼 ‘제퍼디’에 인용되면서 사람들에게 널리 퍼졌다.
‘정재승의 과학콘서트’는 2002년 2월 현재 주요 서점의 과학 교양서 분야 베스트셀러 최상위권에 올라 있다. 경기과학고를 거쳐 한국과학기술원 박사, 예일대에서 응용물리학 및 신경정신과 박사후 연구원, 현재 고려대 물리학과 연구 교수. 1972년생인 저자의 이런 이력이 젊은 세대에게나 부모들에게나 긍정적인 역할 모델로 어필할 수 있다는 점도 책에 대한 도서시장의 반응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이 지니는 가장 중요한 의의는, 과학자와 글쓰기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는 데에 있다.
정재승의 자기 소개에 따르면 경기과학고 시절 영화·음악·문학·철학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이방인’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 시절 자신의 우상은 카뮈와 사르트르였다. 한국과학기술원에서도 영화 동아리, 음악 감상부, 철학 동아리 활동에 열심이었다. 과학 분야의 학문적 성취와 인문, 예술에 걸친 폭넓은 교양 함양에 두루 성공한 드문 경우라 하겠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갈릴레이, 뉴턴, 다윈, 슈뢰딩거, 제임스 슨, 스티븐 호킹, 이들의 공통점은? 물론 모두 유명한 과학자들이다. 그밖에도 이들은 모두 베스트셀러 작가다. 이는 성공적인 과학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능력 가운데 하나가 글쓰기임을 보여준다.
사회생물학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은 교수가 된 다음에도 개인 교사로부터 글쓰기 훈련을 받았다.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가능한 한 많은 한 사람들에게 알리고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그런 훈련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 훈련의 성과일까? 윌슨은 저술가로서도 큰 성공을 거두어 왔다. 그런 윌슨의 하버드대학 제자인 최재천 교수(서울대 생명과학부)의 과학 저술가로서의 성공도 결코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영미권에서는 과학 저술(Science writing)과 과학 작가(Science writer)가 전문화되어 있다. 대부분 실제의 과학 연구 경험을 지니고 있으며, 일반 독자들에게 (최신) 과학 내용을 풀어서 전달하는 솜씨, 그러니까 글솜씨와 이야기 구성력이 뛰어나다.
이들은 프리랜서 전업 작가로서는 물론 신문 잡지 방송 등 매체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출판 편집 분야에서도 전문성을 발휘한다. 미국 영국 캐나다 등에는 전국적인 과학 저술가 단체가 결성되어 있으며, 특히 미국에는 비영리 단체인 과학저술진흥회(Council for the Advan cement of Science Writing)도 구성되어 있다.
최근 대학가에서 이공계 지원자가 급격히 줄어드는 추세를 단지 대입제도 차원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은 단견이다. 물론 기초과학 육성 정책이나 과학기술자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과 처우 등 정책적,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젊은 세대가 과학을 어렵고 힘들기만 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 중요한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 읽을 만한(readable) 글을 쓸 줄 모르는 과학자, 한 시대의 사회·문화와 호흡을 함께 할 줄 모르는 과학자, 이런 과학자들만을 양산해온 지금까지의 우리 교육이 아닐까 한다.
이런 측면에서 1996년 골수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칼 세이건, 그리고 그의 에세이를 모은 유고작(Billions and Billions)을 번역한 ‘에필로그’(김한영 옮김, 사이언스북스)가 각별하게 다가온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인 에필로그에서 칼 세이건은 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무려 여섯 차례나 죽음과 대면해야 했던 2년에 걸친 투병 생활을 차분하게 회고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칼 세이건은 천체물리학자로서 미 항공우주국(NASA)의 여러 우주 탐사 계획에 참여했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더욱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저서 ‘코스모스’는 영어로 출판된 과학도서 중 가장 많이 판매되었다. 1997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큰 화제를 모은 그의 SF작품 ‘콘텍트’는 천문학·물리학 등의 과학 지식과 문학적 상상력, 이야기 구성력 등을 성공적으로 융화시킨 사례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칼 세이건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 인문학 전공자들과 자연과학 전공자들은 좀처럼 서로를 알려고 하지 않으며, 설혹 알려고 한다 해도 알 수 있는 길을 찾기가 힘들다. 그런 길이 없으니 깊어지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오해다.
군사학교를 거쳐 공대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한 뒤 다시 철학·심리학·수학 등을 공부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든 경력의 작가가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로베르트 무질(1880∼1942)이다. 국내에는 그의 책이 단 두 권만 나와 있다.
작년 가을 소개된 무질의 처녀작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박종대 옮김, 울력)이 독일어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독일의 저명한 비평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Marcel Recih-Ranick)는 2001년 6월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독일 문학작품 가운데 청소년들에게 반드시 추천할 만한 것들을 거론하며 이렇게 말했다.
“무질의 경우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과 단편 ‘통카’는 들어가야겠죠. 한때 그렇게 인기 있었던 헤세는 ‘수레바퀴 밑에서’로 만족해야겠고.”
너무도 많이 알려져 있는 헤세에 비하면, 이미 1949년에 ‘런던타임스’가 ‘20세기 전반기 최대의 독일어 작가’로 평가한 바 있는 무질은 우리에게 너무나 낯설다.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은, 1966년 ‘양철북’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폴커 슐렌도르프에 의해 ‘젊은 퇴를레스’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바 있다.
무질의 대표작이자 미완성의 대작 ‘특성 없는 인간’은 현재 모 문화재단이 번역 지원사업의 대상으로 선정해 번역 중에 있다고 한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협주 혹은 넘나들기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사실 인문학에서도 기초학이라 할 수 있는 고전학만큼 우리나라에서 홀대받는 분야도 드물다. 기초 인문학에 바탕을 둔 일종의 응용 도서로 ‘이것이 서양 문명이다’(이희재 옮김, 황금가지)가 있다.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에서 ‘영문학과 서양문명’을 강의하는 이 책의 저자 마이클 매크론의 홈페이지를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1994년부터 웹 개발자로 일하면서 웹 개발 관련 워크숍과 강좌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한편으로 셰익스피어, 신화학, 성서학, 고전학, 시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인문 교양서를 집필했다. 다음은 그의 한 마디.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죽은 언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말로 씌어진 사상과 표현은 지금도 면면히 살아 있다. 그런 말을 박사논문이나 고등학교 교훈이나 법률 문서에나 남아 있는 낡은 찌꺼기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이 책은 고대 희랍어 및 라틴어 고전에서 비롯된 표현과 개념들의 유래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예컨대 ‘내일이면 늦으리’라는 표현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가 ‘송가’에서 사용한 표현이다.
“그대가 현명하다면 포도주는 오늘 체로 걸러라. 짧기만 한 이 인생에서 먼 희망은 접어야 한다. 우리가 말을 하는 동안에도 시간을 시샘하며 멀리 달아나니, 내일이면 늦으리니 오늘을 붙잡도록.”
여기서 호라티우스는 밖으로 달려나가 세상을 정복할 생각일랑 버리고 하던 일이나 제대로 끝맺으라고 충고한다. 야심을 버리고 지금의 일에 충실하라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미루지 말고 빨리빨리 일을 처리하라는 뜻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독서인의 입장에서 이렇게 바꾸고 싶다. “그대가 현명하다면 서가의 책은 오늘 읽어라. 내일이면 늦으리니 오늘 책을 읽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