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인의 허위진술이 수사에 혼선을 드리게 됐음을 가슴 깊이 반성하고 본인의 과오에 대해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8월19일 새벽 국중호와 대질시 ‘내 눈을 똑똑히 보고 이야기하라’는 피맺힌 절규를 모른 체한 인간쓰레기가 다름아닌 본인이었습니다.”
대통령의 탄식
그가 구속된 직후 신광옥 당시 민정수석비서관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이 사건의 경위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국중호 행정관은 구속당할 만한 위법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인천지검의 무리한 구속영장 청구로 인해 국중호가 억울하게 당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김대통령은 “왜 인천지검에만 가면 그런 일이 생기나. 임창열 경기지사도 인천지검에서 구속됐으나 얼마 전 무죄판결을 받지 않았느냐”며 탄식했다.
인천공항사건은 현재 1심이 진행중이다. 발생한 지 반년이 지난 이 사건이 새삼 관심을 끄는 것은 검찰이 당시 여론무마용으로, 또는 말못할 사정에 의해 국중호씨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재판과정에서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의문은 특히 국씨의 인천공항사건 개입혐의를 굳히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던 뇌물수수혐의가 법정에서 흔들린 데서 비롯됐다. 국씨의 뇌물수수혐의에 관련된 증인은 모두 3명. 그 중 한 명이 법정에서 이를 부인했고, 나머지 증인들도 곧 법정에 나와 검찰 수사내용을 부인할 것으로 알려져 적어도 이 부분에 관한 한 국씨는 무죄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이 이미 검찰수사 단계에서 같은 내용의 진술을 했음에도 검찰이 국씨에게 뇌물수수혐의를 적용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이 발생한 것은 언론사 세무조사로 정부와 주요 언론사들이 날카롭게 맞서던 지난해 8월초였다. 구속 당시 국씨의 혐의는 업무방해, 직무상비밀누설 두 가지였으나 그 달 말 기소될 때는 뇌물수수혐의가 덧붙여졌다. 인천공항 유휴지개발사업에 뛰어든 (주)에어포트72 컨소시엄의 참여업체인 (주)에이스회원권거래소 측으로부터 해외여행경비로 2000달러를 받은 혐의였다.
사건의 발단은 당시 인천공항 개발사업단장이던 이상호씨의 한겨레신문 단독인터뷰 및 기자회견이었다. 이씨는 이를 통해 유휴지개발 사업체 선정과정에 외압이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언론은 국씨가 구속될 때까지 약 일주일간 이 사건을 쉬지 않고 다루었다. 이씨 주장의 핵심은 후보사업체 중 하나였던 (주)에어포트72에 대한 권력층의 특혜지원 의혹이었다.
그 한 달쯤 전인 7월10일 이씨가 주도한 평가단은 인천공항 유휴지개발 우선협상대상 사업체로 (주)원익 컨소시엄을 선정했다. 그런데 이씨에 따르면 사업자 선정이 끝난 후 인천공항 강동석 사장이 우선협상대상업체를 (주)에어포트72 컨소시엄으로 바꾸기 위해 재심사를 요구하는 등 부당한 지시를 내렸으며, 청와대 국중호 행정관도 전화를 걸어와 (주)에어포트72를 잘 봐달라고 청탁했다는 것이다. 이씨의 ‘폭로’가 특히 주목을 끈 것은 (주)에어포트72 컨소시엄에 김홍일 의원의 처남 윤흥렬씨가 대표이사인 (주)스포츠서울21이 상당한 지분을 갖고 참여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씨의 기자회견은 언론보도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중앙일보를 제외한 모든 언론은 오히려 (주)원익 컨소시엄에 대한 특혜의혹을 제기하고 있었다. 주된 이유는 (주)원익이 (주)에어포트72보다 훨씬 낮은 토지사용료를 제시하고도 우선협상대상업체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은 (주)원익 컨소시엄에 삼성물산이 포함된 점을 예사롭지 않게 보고 삼성의 로비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국씨는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이 사건을 권력형비리사건으로 규정한 언론은 그의 항변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청와대는 언론에 이 사건이 불거진 후 자체조사결과 국씨에게 특별한 문제점이 없는 것으로 결론짓고 대변인을 통해 이를 공식 발표했다.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8월9일 국중호씨가 사직서를 낸 후 당시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은 김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고 한다.
“국중호 행정관은 참 억울하게도 자진해 사표를 냈습니다. 언론사 사주들의 검찰 출두를 앞두고 무차별적인 언론보도가 문제였습니다. 그런 전화(이상호씨에게 한 전화)는 민정업무 차원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김대통령은 매우 안타까워하며 선처를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인천지검이 국씨를 구속함으로써 청와대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됐다.
국씨는 과연 억울하게 구속된 것일까. 또는 ‘몸통’을 대신한 희생양일까. 국씨 구속의 타당성을 따지는 것은 이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것과 관련이 깊다. 검찰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가 구속됨으로써 외압의혹의 불씨가 사그라졌기 때문이다. 검찰은 (주)에어포트72 측에 대한 권력층의 지원의혹은 물론 (주)원익 측의 로비의혹도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이 사건에 대한 1심 재판은 지금까지 모두 6차례 열렸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열리고 있는데, 핵심증인인 강동석 인천공항 사장의 불출석으로 여러 차례 공전됐다. 게다가 최근 법관 인사이동에 따라 재판부가 바뀌어 공판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국중호씨는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구속됐던 이상호씨와 더불어 지난해 9월29일 금보석(1000만원)으로 석방됐다. 검찰 수사내용은 첫 재판부터 흔들렸다. 검찰을 당혹스럽게 만든 장본인은 (주)에어포트72 컨소시엄의 일원인 (주)에이스회원권거래소 고문 양아무개씨. 양씨는 국씨에게 뇌물(2000달러)을 준 혐의로 불구속기소됐다. 그는 법정에서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국중호씨의 대학 동창이자 현직 공무원인 한OO씨를 보호하기 위해 검찰 조사과정에 국씨에게 2000달러를 준 것처럼 거짓진술을 했다”고 주장했다.
뇌물사건이 법정에서 종종 논란이 되는 것은 뇌물을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의 진술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경우 검찰은 대개 뇌물을 준 사람의 진술에 의존해 기소한다. 특히 계좌나 수표추적이 무의미한 현금수수의 경우 뇌물공여자의 진술은 공소유지에 절대적인 비중을 갖는다. 따라서 공여자의 진술이 바뀌면 검찰의 논리는 힘을 잃게 마련이다.
이처럼 검찰수사의 근본이 흔들릴 수도 있는 법정진술이 나왔는데도 대다수 언론은 이를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연일 외압의혹을 제기하며 국씨의 혐의를 집중조명할 때의 열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일까.
물론 뇌물을 준 혐의를 받고 있는 양씨가 법정에서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렇지만 그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양씨의 진술 말고도 국씨가 뇌물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정황증거가 하나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 정황증거들의 그림자는 이미 검찰 수사단계에서 어른거렸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검찰은 이를 간과하거나 무시했다.
검찰 수사의 편의성에 비하면 양씨의 진술번복은 그다지 놀랄 만한 것이 못 된다. 인천공항사건 관련 검찰 수사기록을 훑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깜짝 놀랄 것이다. 양씨를 비롯해 뇌물수수혐의에 관련된 3명 모두 국씨에게 뇌물을 준 혐의를 여러 차례에 걸쳐 부인했고 조서에도 그렇게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양씨의 법정진술은 ‘번복’이 아니라 오히려 ‘일관된 주장’인 셈이다.
검찰은 왜 국씨에게 기어코 뇌물수수혐의를 적용했는가. 이제 그 미스터리의 숲으로 들어가보자. 첫째 관문은 돈이 누구를 통해 누구에게 건네졌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관련자 3인의 진술은 초기엔 뒤죽박죽이다가 나중엔 어느 정도 일관성을 갖춘다.
국씨가 인천공항사건의 늪에 빠진 것은 관세청 서기관인 대학동창 한씨를 통해 (주)에이스회원권거래소의 실소유주이자 고문인 양씨와 사장인 김아무개씨를 소개받으면서다.
양씨와 김씨는 한씨의 주선으로 지난해 5월18일 국씨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인천공항 유휴지개발사업과 관련해 “사업자 선정과정에 의혹이 많으니 공정한 심사가 이뤄지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국씨는 6월 및 7월에 각각 한 차례씩 강동석 인천공항 사장과 이상호 당시 개발사업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항간의 소문을 전하며 ‘공정 심사’를 언급한다. 국씨에게 적용된 직무상비밀누설 및 업무방해혐의는 바로 이 전화통화와 관련된 것이다(이 혐의의 타당성에 대해선 뒤에 따로 살펴본다).
그후 네 사람은 역시 한씨의 주선으로 한 차례 더 만난다. 국씨는 6월20일 오후 1시10분께 “점심이나 같이 하자”는 한씨의 연락을 받고 서울 한남동에 있는 (주)에이스회원권거래소 사무실에 들렀다. 사무실에서 10여 분 얘기한 후 ‘풀향기’라는 인근 식당으로 옮겨가 점심을 먹고 2시20분께 헤어졌는데 이 만남이 뇌물수수혐의의 배경이 됐다.
뇌물수수혐의가 불거진 것은 국씨가 구속된 지 4일이 지난 지난해 8월17일. 이날 새벽 검찰에 불려간 양씨는 8월19일 새벽까지 만 48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다. 처음엔 검사의 끈질긴 추궁에도 돈 준 사실을 완강히 부인한다. 그러다 ‘갑자기’ 국씨에게 해외여행 경비로 2000달러를 줬다고 진술한다.
‘갑자기’라는 표현을 쓴 것은, 양씨의 답변이 어느 순간 돌변하기 때문이다. 1차 진술조서를 보면 양씨는 “국중호에게 금품을 준 적 없냐” “여행 경비 정도는 주었지 않냐”는 검사의 질문에 “절대 없다”고 답변한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진 문답이 괴이하기 짝이 없다. “이상의 진술은 사실인가” 하고 묻자 “대부분 사실대로 진술했으나 국중호에게 돈 주지 않았다고 진술한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고 답변을 180도 바꾸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 해답은 8월19일 새벽, 그때까지 따로 조사를 받고 있던 관련자 3인, 곧 양씨와 김씨, 한씨가 한 조사실에서 만난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만남 직후 양씨는 태도를 바꿔 국씨에게 돈을 줬다고 진술한다.
그런데 조서엔 신문 도중에 있었던 3인 회동사실이 기록돼 있지 않다. 아무런 부연설명 없이 완전히 상반된 진술이 곧바로 이어진 데는 그런 사정이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양씨는 1차 재판에서 “수사검사가 3인을 입회인 없이 조사실에 몰아넣고 알아서 맞추라고 했고 그 자리에서 공무원 신분인 한OO씨가 울면서 호소하는 바람에 허위진술하게 됐다”고 증언한 바 있다.
수사기록에 나타난 3인의 공통된 진술에 따르면 돈을 받은 사람은 국씨가 아니라 한씨다. 세 사람은 조사실에서 만난 직후 ‘일시적으로’ 양씨가 국씨에게 돈을 건넸다고 진술했으나 이후 신문과정에서는 일관되게 국씨의 무고함을 주장한다. 요지는 원래 외국출장을 떠나는 국씨에게 여행비조로 주려고 했는데 국씨가 일찍 자리를 뜨는 바람에 대신 한씨에게 줬다는 것이다. 한씨는 그 돈을 자신이 썼다고 주장했다.
세 사람의 진술은 처음부터 허점 투성이였다. 단적인 예가 2000달러의 용도. 애초 검사가 이들에게 “국중호에게 여행경비를 주지 않았냐”고 물은 것은 국씨의 여름휴가(국씨는 지난해 8월초 입대를 앞둔 아들과 함께 캐나다 여행을 했다)와 관련된 것이었다. 세 사람도 처음엔 이를 의식해 2000달러의 용도를 ‘여행경비’ 또는 ‘휴가비’로 설명했다. 하지만 뒤에 2000달러의 용도는 국씨의 유럽출장(6월23일∼7월5일)과 관련된 것으로 슬그머니 바뀐다.
2회 진술(8월24일)부터 ‘진실’을 말하기 시작한 양씨는 마지막 4회 진술(8월28일)에서 1차 진술시 자신이 국씨에게 돈을 줬다고 ‘거짓진술’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김OO와 한OO, 나 세 사람이 조사실에서 입회인 없이 만났을 때 한OO이 ‘돈은 내가 받았다’고 말했고 김OO는 자신이 달러를 마련해 한OO에게 줬다고 얘기했다. 공무원 신분인 한OO을 보호해줘야겠다는 생각에 내가 (국중호에게) 준 것으로 거짓진술을 했다.”
양씨는 법정에서 검사가 “같은 공무원인데 왜 한OO만 보호하려고 했나” 하고 추궁하자 “국중호는 이미 사표를 내고 구속됐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1차 진술에서 “인천공항 유휴지개발사업자 선정과 관련해 공정한 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2000달러를 여행경비로 줬다”고 말한 (주)에이스회원권거래소 사장 김씨도 곧 진술을 뒤집었다. 국씨에게 돈을 주기 위해 환전한 것은 맞지만 국씨가 먼저 사무실에서 나갔기 때문에 대신 한씨에게 중국여행 경비로 줬다는 주장이었다(한씨는 지난해 7월14∼17일 중국에 갔다 왔다).
이에 검사가 “국중호에게 전달해달라는 취지였냐”고 묻자 김씨는 “아니다. 국중호와는 상관없다. 한OO이 중국에 간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답변했다. 앞선 조사에서 거짓진술한 이유에 대해선 “평소 존경하는 한OO 서기관을 살리고 싶어서였다”고 말했다.
한편 한씨는 8월22일 3회 진술에서 “앞선 조사에서 거짓진술했다. 사실은 내가 그때 김OO로부터 2000달러를 받았다”며 이렇게 ‘털어놓았다’.
“김OO가 ‘국중호 해외출장경비로 준비한 돈’이라고 하기에 ‘전해주려면 직접 전해주라’고 했다. 그러자 김OO가 ‘그런 것이 아니고 한장군(한씨의 별명) 중국 갈 때 애 학비로 보태 쓰라’고 했다. 나 때문에 국중호가 구속됐고 돈까지 받았다고 누명을 쓰게 돼 미안하다.”
또 2000달러의 용처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아내가 집에서 처남댁에게 줬다. 처남이 중국에서 내 애를 돌보고 있기 때문이다. 처남 가족들이 마침 여름방학을 맞이해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한씨는 8월28일 최종 6회 진술에서 “김OO가 양OO 책상 위에 놓아둔 돈봉투를 집어 나한테 주기에 양복 상의 안주머니에 넣었다”며 돈 받을 당시의 정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한씨의 아내 박아무개씨도 조사를 받았다. 박씨는 “6월말쯤 남편한테 달러 봉투를 받았다. 이틀 동안 식탁에 올려놓았다가 올케(강아무개씨)가 지수(강씨의 딸)를 데리고 와 하룻밤 잔 다음날 점심때 올케에게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검사가 “남편 부탁으로, 돈봉투를 받지 않았는데도 받았다고 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자 이렇게 말했다.
“열한 살짜리 조카 앞에서 줬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냐. 관세청 공무원인 남편이 돈 받으면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알고 있는데, 25년 공직생활을 마감할 남편이 돈을 받았다고 말하는 내 심정이 오죽하겠냐. 내 진술은 사실 그대로다.”
양씨, 김씨, 한씨 이 ‘3인방’의 진술 중 특히 인상적인 것은 불이익을 무릅쓰고 자신이 돈을 받았다고 시인한 한씨의 진술이다. 지난해 8월20일 작성된 한씨의 자필진술서에는 회한의 감정이 절절히 드러나 있다.
“…먼저 본인의 허위진술이 수사에 혼선을 드리게 됐음을 가슴 깊이 반성하고 본인의 과오에 대해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습니다.…저는 김OO가 저를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진술한 것으로 알고 경황중에 인간으로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엄청난 죄를 저질렀습니다. 8월19일 새벽 국중호와 대질시 ‘내 눈을 똑똑히 보고 이야기하라’는 피맺힌 절규를 모른 체한 인간 쓰레기가 다름아닌 본인이었습니다. 저로 인해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를 도와주기는커녕 제 죄를 뒤집어씌우려한 파렴치한이었습니다.…제가 25년 동안 몸담았던 직장을 떠나 속죄하면서 새롭게 출발해…”
한씨는 실제로 사건 직후 관세청에 사표를 냈다. 사표가 반려돼 최근까지 계속 다니다 얼마 전 다시 사표를 냈다. 곧 법정에 증인으로 나설 예정이다. 그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모든 건 법정에서 밝히겠다”며 말을 삼갔다.
-검찰에서 진술을 번복한 이유가 뭔가.
“초기엔 허위진술했으나 나중엔 제대로 말했다.”
-최종진술이 진실에 가깝다는 말인가.
“그렇다.”
뇌물수수사건에서 돈을 줬다는 사람이 혐의를 부인하면 공소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당시 수사를 지휘했던 윤아무개 인천지검 특수부장에게 몇 가지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 윤부장은 “재판이 진행되고 있어 말하기 곤란하다”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다” “법정에서 공방이 벌어지고 있으니 판사가 판단할 것이다” 등의 얘기로 답변을 대신했다. 다만 ‘3인방’의 진술번복과 관련해선 “진술이야 바뀔 수도 있다”며 “맨 처음 진술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국씨의 혐의 중 뇌물수수 부분을 조사했던 고아무개 검사는 “뭐라 말할 수 없다”며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수수께끼를 푸는 중요한 단서는 돈이 건네졌다는 일시다. 공소장에는 국중호씨가 지난해 6월22일 오후 3∼5시 사이에 (주)에이스회원권거래소 사무실에서 양씨로부터 2000달러를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수사기록을 보면 일시를 둘러싼 ‘3인방’의 혼동과 착각, 의도적 부인은 조사과정 내내 계속된다. 국씨는 자신의 수첩기록을 바탕으로 6월20일 오후 1시10분께 (주)에이스회원권거래소 사무실에 들렀다고 주장했다. ‘3인방’의 기억도 처음엔 국씨와 비슷했다. 하지만 검찰 조사실에 셋이 모여 얘기를 나눈 이후엔 국씨와 만난 일시를 6월22일 오후 1시∼1시30분으로 정정한다.
그런데 일시에 관한 이들의 진술은 몇 가지 이유로 다시 바뀐다. 첫째 이유는 국씨의 수첩 메모. 거기엔 6월20일 오후 1시에 한씨와 만나기로 약속한 기록이 있다. 둘째 이유는 환전표. 환전표에 따르면 2000달러 환전일시는 6월22일 오후 2시58분이다. ‘3인방’의 공통된 진술에 따르면 국씨가 그날 (주)에이스회원권거래소에 머문 시간은 길어야 40분이다. 환전표와 3인방의 진술을 조합하면 국씨가 자리를 뜬 다음 국씨에게 주기 위해 2000달러를 환전해 한씨에게 줬다는, 얼토당토 않은 결론이 나온다.
셋째 이유는 한씨의 휴대폰 통화기록이다. 조회결과에 따르면 당일 한씨는 낮 12시27분 대전에서 휴대폰을 사용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대전에 머물렀다는 얘기다(한씨는 대전 관세청에 근무하고 있었다). 따라서 낮 12시30분쯤 대전에서 출발했다 쳐도 축지법을 쓰지 않는 이상 도저히 1시까지는 (주)에이스회원권거래소 사무실이 있는 서울 한남동에 닿을 수가 없다. 이런 모순에 직면한 ‘3인방’은 국씨가 6월22일 오후 2시 이후에 사무실에 들렀으며 한씨에게 돈이 건네진 시각은 오후 3∼4시라고 고쳐 주장한다.
일시에 관한 혼란스러운 진술과는 대조적으로 ‘3인방’이 일관되게 진술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국씨가 (주)에이스회원권거래소 사무실에 들른 것은 6월20일이든 6월22일이든 딱 한 번뿐이라는 사실. 둘째, 돈은 국씨가 아니라 한씨가 받았다는 사실이다. 다만 한씨는 마지막 진술에서 “국씨를 6월20일, 6월22일 두 차례 만난 것이 아니냐”는 검사의 질문에 “그렇다”고 끝까지 갈팡질팡했다. 기자가 전화통화에서 이 부분을 지적하자 한씨는 “기억의 한계로 혼선이 생겼다”며 “내가 두 차례 들른 일과 국씨가 한 차례 들른 일을 혼동했다”고 검찰에서의 진술이 잘못됐음을 시인했다.
왜 ‘3인방’은 끝까지 6월22일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했을까. 이는 국씨의 유럽출장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국씨는 6월23일 출국했다. 2000달러를 환전한 날은 6월22일이다. 이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것은 양씨의 3회 진술이다. 양씨는 “국중호 행정관을 만난 일시를 6월22일로 기억하는 이유가 뭐냐”는 검사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환전일시를 확인해보니 6월22일 오후 2시58분이라고 해 국씨를 만난 날짜를 6월22일로 정정하는 것이다.”
국씨의 변호인측은 “국씨에게 여행경비를 주려했다는 진술을 합리화하고 6월22일 사무실에 따로 찾아와 돈을 받아간 한씨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국씨의 방문일을 해외출장 하루 전인 6월22일에 맞추려 한 것 같다”고 분석한다.
당시 검찰은 국씨가 6월20일 오후 1시30분쯤 (주)에이스회원권거래소 사무실에 들러 ‘3인방’을 만났다는 사실을 몇 가지 증거에 의해 확인했다. 인근 식당인 ‘풀향기’에서 양씨 이름으로 점심식사를 예약한 기록도 확보했다. 당시 국씨의 운전사 노릇을 한 허아무개씨의 진술도 이를 뒷받침했다.
그런데도 검찰은 공소장에 국씨에게 돈이 건네진 일시를 6월22일 오후 3∼5시로 기록했다. 국씨의 주장은 배척한 채 ‘3인방’의 진술에서 일부는 취하고 일부는 바꾸는 방식으로 공소장을 작성한 셈이다. 하지만 국씨의 6월22일 행적을 제대로 조사했다면 그렇게 판단하는 것을 무척 망설였을 것이다.
국씨가 재판과정에서 밝힌 6월22일의 오후의 행적은 이렇다. 다음날 유럽 출장차 출국 예정이었던 국씨는 이날 그 준비로 바쁘게 움직였다. 신문로에서 김아무개씨와 점심식사를 한 후 청와대 사무실로 돌아갔다가 오후 2시20분 청와대를 출발, 2시50분쯤 등촌동에 있는 단골 안경점에 들러 전에 맡겨둔 안경을 찾는다. 3시30분, 안경점을 출발해 여의도 의원회관으로 갔다. 평소 잘 알고 지내는 K의원에게 출국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는데 K의원은 회의중이라 못 보고 보좌관, 비서관 등만 만난다. 오후 4시20분 청와대로 다시 들어가 책상을 정리한 후 5시10분 롯데백화점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아내와 만나 남방과 운동화를 구입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국씨가 6월22일 오후 3∼5시에 한남동에 있는 (주)에이스회원권거래소 사무실에 들러 2000달러를 받았다는 공소사실은 치명타를 입는다. 국씨의 알리바이를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는 그의 운전수 노릇을 했던 허아무개씨 및 국씨의 휴대폰 통화기록이다. 당시 허리가 많이 아팠던 국씨는 외부업무를 볼 때는 친구를 통해 소개받은 실직자 허씨에게 운전을 맡기곤 했다. 당일 허씨의 휴대폰 통화 발신지에는 화곡동·내발산동(안경점 부근), 여의도동(국회의사당), 을지로(롯데백화점) 등이 포함돼 있다. 국씨는 롯데백화점 물품구입과 관련된 신용카드 전표를 법정에 증거로 제출했다.
여기서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검찰이 허씨의 휴대폰 통화기록을 통해 국씨의 행적을 어느 정도 짐작했으리라는 점이다. 국씨에 따르면 담당검사는 조사과정에 국씨에게 통화내역기록은 보여주지 않은 채 “혹시 화곡동에 간 적 없냐”고 물었다. 그때까지 당일 행적을 기억하지 못했던 국씨는 ‘화곡동’이라는 말에 안경점이 생각났다. 이어 여의도 의원회관에 들렀던 일도 기억나 그대로 진술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검사와 국씨간에 오간 이 문답은 국씨의 신문조서에 기록돼 있지 않다.
2차 재판 때 이 문제로 검사와 국씨간에 설전이 벌어졌다. 검사는 “6월20일 한남동을 방문해 식사를 하고 돌아갔고, 6월22일 안경을 찾은 점은 인정한다”며 국씨의 주장을 일부 인정한 뒤 이렇게 추궁했다.
“그러나 왜 안경을 꼭 국중호씨가 직접 찾으러 가야만 했나. 안경은 국중호씨 운전사인 허OO씨를 시켜 찾아오도록 하고 그 시간(6월22일 오후 3∼5시)에 국중호씨는 돈을 받으러 한남동 (주)에이스회원권거래소 사무실에 혼자 갔다올 수 있지 않은가.”
이에 국씨는 “검사가 안경을 쓰지 않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안경이라는 것은 신체의 일부나 마찬가지여서 본인이 아니면 절대 못 찾는 것이다. 백화점 물건 배달하듯이 다른 사람 시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고 반격했다. 아울러 검찰이 허씨의 휴대폰 통화기록을 수사기록에 첨부하지 않은 점, 그와 관련된 질문을 하고도 조서에 기록하지 않은 점 등을 지적하며 “검찰 수사는 조작”이라고 주장했다.
화곡동·내발산동과 인접한 등촌동에서 N안경점을 경영하는 조아무개씨는 지난해 9월22일 인천지방법원에 사실확인서를 제출했다. 조씨의 진술에 따르면 국씨가 그의 안경점에 안경을 맡긴 것은 6월13일이고 찾아간 날은 6월22일이다. 조씨는 6월22일 오후 3시30분쯤 안경점에 찾아온 국씨를 만났다고 진술했다.
K의원 보좌관 김아무개씨의 사실확인서도 법원에 접수된 상태다. 김씨는 사실확인서를 통해 국씨가 6월22일 오후 4시께 K의원 사무실이 있는 의원회관 3XX호를 방문해 4시25분께까지 머물렀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당시 K의원 사무실에 근무하는 직원 3명도 국씨와 악수하고 인사했다고 한다. 김씨는 N안경점 주인 조씨와 더불어 법정에 증인으로 나설 예정이다.
이처럼 정황증거로 보면 국씨와 ‘3인방’이 만난 날짜는 6월20일이 분명하다. 그런데 국씨가 이날 2000달러를 받았다는 건 앞뒤가 안 맞는다. 환전일시가 6월22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6월22일은 어떤가. 이날 오후 국씨가 돈을 받았다는 공소사실은 국씨의 알리바이 앞에 무력하기 짝이 없다. 결국 6월20일, 6월22일 모두 국씨가 돈을 받기엔 ‘부적합한’ 날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편 국씨의 나머지 두 혐의인 공무상비밀누설 및 업무방해혐의는 국씨가 인천공항 강동석 사장 및 이상호 당시 개발사업단장에게 건 두 통의 전화와 관련된 것이다. 두 혐의는 이상호씨의 오락가락하는 진술과 ‘공무상비밀’에 대한 법리해석을 두고 구속 당시에도 논란이 됐었다.
강사장의 검찰 진술에 따르면 국씨의 전화행위에는 특별한 문제점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강사장은 국씨가 전화로 “공항 유휴지개발사업과 관련해 특정업체를 봐준다느니 어떤 업체는 들러리를 선다느니 하는 말들이 나돌고 있다”고 얘기한 데 대해 “민정수석실 행정관이 첩보를 알려주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답했다(2회 진술). 또 “당시 국중호씨가 자기 아는 업체를 잘 봐달라고 부탁했냐”는 검사의 질문에 “그런 부탁은 없었다”고 부인했다.
문제는 이상호씨의 진술이다. 이씨는 최초 조사에서 구속영장실질심사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 말을 바꿨다. 검찰 2회 진술 및 국씨와의 대질신문, 그리고 기자들 앞에서는 “국씨의 전화를 압력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장실질심사 및 검찰 6회 진술에서는 “압력으로 느꼈다”고 정반대로 대답했다.
통화내용에 대한 기억도 서로 다르다. 이씨는 국씨가 (주)에어포트72를 거명하며 “잘 봐달라”고 얘기한 것으로 기억한다. 국씨도 (주)에어포트72와 관련된 얘기를 꺼낸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잘 봐달라고 부탁한 것이 아니라, 심사과정에 대한 (주)에어포트72 측의 불만을 전해주며 공정한 심사를 권유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국씨의 변호인측은 평가단이 우선협상대상업체를 선정한 이후에 국씨가 이상호씨에게 전화를 건 점, 국씨의 전화가 업체선정과정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것이 강사장과 이상호씨의 진술에 의해 인정된 점 등을 들어 업무방해혐의는 난센스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국씨가 전화로 한 얘기는 직무수행과 관련된 비밀이 아니라 사적으로 취득한 풍문에 지나지 않으므로 공무상비밀과는 거리가 멀다는 논리를 편다. 비밀누설이란 그 비밀을 알지 못하는 제3자에게 알려주는 행위다. 그런데 국씨의 행위는 제3자가 아닌 풍문의 당사자에게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주의촉구’차원에서 알려준 것이므로 비밀누설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뇌물수수혐의는 직무상비밀누설 및 업무방해혐의와 별개인 것처럼 보이지만 검찰수사의 흐름을 분석해보면 그렇지 않다. 뇌물수수혐의야말로 국씨가 인천공항 유휴지개발 사업자선정과정에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를 가늠하는 척도이기 때문이다. 뇌물을 받고 개입한 것과, 받지 않고 개입한 것은 다르게 마련이다.
뇌물수수혐의가 인정되지 않으면 나머지 두 혐의도 흔들릴 개연성이 있다. 변호인 측이 무죄판결을 낙관하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세 가지 혐의 중 그나마 법리적으로 ‘확실한’ 뇌물수수혐의를 벗는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국씨에게 무죄가 선고된다면, 사업자 선정과정을 둘러싼 로비의혹과 외압의혹의 실체 못지 않게 검찰 수사의 배경에 대한 궁금증이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