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프랑스월드컵 경기장 귀빈석에 TV카메라는 출입금지였다. 할 수 없이 내가 직접 김종필 총리와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의 면담 장면을 카메라로 찍었다. 그날 나는 총리수행원·통역·사진사· 경호원 등 1인 4역을 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과 김종필 국무총리
프랑스는 1998년 월드컵 축구대회 개최국으로 지명되었다. 한국은 아시아지역 대표의 일원으로 참가하게 되었고 월드컵 본선 진출사상 최초의 1승만이라도 하기를 갈망했다. 한국은 프랑스월드컵 16강 진출을 최대의 목표로 정하고 정부와 국민이 온 정열을 쏟아 붓고 있었다. 바로 이때 나는 프랑스 주재 대사로 임명을 받았다.
1998년 5월 파리에 부임해서 보니 무엇보다 먼저 치러야 할 일이 98월드컵 축구대회였다. 다행히 대사관 내에 월드컵 담당직원이 있어서 경기와 관련된 각종 행정사항과 선수단 영접, 지원 및 응원 등 경기 관련사항을 월드컵조직위와 한국축구협회 사이에서 잘 조정해 나가고 있어서 별반 문제는 없었다.
국제적인 관광지 파리에서 월드컵 개회식과 결승전이 열리기 때문인지 수많은 사람들이 대사관을 찾아왔고, 이들을 접대하고 안내하는 일이 대사관의 큰 일거리가 되어버렸다. 서울에서 온 단체 응원단이나 인근지역 교민단체에서 파견된 응원단들은 각자 알아서 해결하였지만 국회의원, 고위공직자, 사회저명인사 등 소위 VIP들은 현지 사정은 아랑곳없이 무리한 협조를 강요하다시피 했다.
내가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프랑스를 방문하는 김종필 총리와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의 면담 주선 문제였다. 김종필씨는 김대중 대통령과 연합하여 대선에서 승리한 공로로 국민의 정부에서 초대 국무총리로 임명받았으며 오랜 세월 지속된 정치력과 경력 때문에 자타가 공인하는 실세 총리였다. 역대 총리들과는 위상이 다른 분이라 그의 방불(訪佛)에 외교부는 최대의 주의와 관심을 기울여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정부는 한국선수단의 월드컵 본선 진출에 맞추어 총리를 파견하여 차기 월드컵 개최국으로서 깊은 관심을 표시하려 했다. 또 이를 프랑스 고위층에게 보이기 위해 시라크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의 면담을 추진했다. 외무성을 통해 직접 면담요청을 하였지만 시간이 없어 대통령은 만날 수 없다고 공식으로 면담불가 회답이 왔다. 그러나 서울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거의 매일 면담을 성사시켜야 한다고 빗발치듯 지시가 쏟아졌다. 심지어 면담이 성사되지 않으면 방불 자체를 취소할 것이라는 협박성 전화가 외교부 고위층으로부터 걸려왔다.
나는 당시 부임 초였고 신임장도 제출하지 않은 상황이라 공식 활동을 할 수도 없었다. 또 해보았자 이미 불가 통보를 받은 이후라서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가닥 희망은 있었다. 나의 신임장 제정식 날짜가 김총리의 방불 이전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때를 빌려 시라크 대통령에게 직접 호소해 보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나만의 계획일 뿐 잘못될 경우를 생각해서라도 입밖에 내놓을 수는 없었다.
드디어 신임장 제정 날짜가 되었다. 신임장을 접수한 시라크 대통령은 접견실 한편의 응접실로 나를 초대하여 환담을 시작하였다. 시라크 대통령은 배석한 외교비서관이 건네준 메모지를 보며 세 가지 사항을 이야기했다. 먼저 한·불 우호 친선관계에 만족한다는 것과 외규장각 도서문제와 관련해서 한·불 양국이 전문가를 각각 한 명씩 선발하여 협상하자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종필 총리의 방불을 환영하는데 시간이 없어 못만나게 되어 섭섭하다는 것이었다.
시라크 대통령의 발언이 끝나기를 기다린 후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4월 런던 아셈 정상회의에서 각하께서 김대중 대통령을 월드컵대회에 초청한 바 있었는데(사실확인 없이 임기응변으로 말한 것임) 취임초기 산적한 국내업무로 인해서 해외 여행을 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대신 총리를 파견하는데 만날 수 없다면 유감입니다. 그러나 프랑스가 결승전에 올라있으니 만약 바쁘시다면 경기장에서라도 잠시 만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시라크 대통령은 즉석에서 좋다고 하면서 배석한 외교 비서관에게 면담준비를 지시하였다. 신임장을 받고 환담하면서 내가 프랑스어로 말하자 시라크 대통령은 한국대사가 프랑스말을 한다고 놀라면서 환한 얼굴로 반갑게 대해준 것이 퍽 인상적이었고, 그것이 그와의 대화를 부드럽게 이끌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총리의 시라크 대통령 면담 장면을 카메라로 잡아야 한다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것도 TV카메라로 찍어서 서울의 저녁 9시뉴스 시간에 방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알아본 결과 경기장 귀빈석에는 초청객 이외에는 들어갈 수 없고, 특히 TV카메라는 출입금지라는 것이다. 귀빈석에는 한국측에서 김총리와 대사인 나만 초청되었고, 제3자는 웃돈을 주고도 입장권을 살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내가 직접 사진을 찍기로 하고 결승전 때 지정된 장소로 김총리를 안내했다. 이렇게 김총리와 시라크 대통령의 면담이 이뤄졌다. 나는 미리 준비한 카메라로 면담장면을 몇 장 찍었으며 면담이 끝난 후 총리 공보비서관에게 카메라째 몽땅 인계하였다. 그 다음날 서울에서 온 팩스 사진을 보고 나는 놀랐다. 응원 머플러를 멋있게 목에 감은 시라크 대통령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김총리와 정답게 악수하는 장면이 마치 전문 카메라맨이 촬영한 사진 같았다. 그날 나는 총리수행원, 통역, 사진사, 경호원으로 1인 4역을 했다.
재외 공관장으로 있으면서 재임시 국가원수의 국빈방문을 맞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며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러한 행운을 두 번이나 가졌다. 첫번째는 김대중 대통령이 유럽 순방에서 프랑스를 방문한 것이다. 한국은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 첫해에 미국과 일본을 방문하고 그 이듬해에는 중국과 러시아를 방문하며 그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유럽 주요 국가를 순방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왔다. 하지만 다자관계를 떠나 양자차원에서 국빈방문은 흔치 않은 것이며 또 공관장의 해외 근무 기간이 3년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 국빈방문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행운을 두번이나 안게 된 것이다.
몇 차례에 걸친 연기 끝에 드디어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3월 프랑스를 국빈방문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 이전부터 유럽에 잘 알려진 인물이다.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한 그의 경력은 유럽 지성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아시아의 만델라로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프랑스정부는 그를 극진히 모시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역대 한국 대통령 중 최대의 환대를 했다고 본다. 의전 절차도 파격적이었다. 행정부만이 아니라 의회도 응분의 환대와 경의로 그를 맞이하였다.
국빈방문의 경우 프랑스정부는 정부 각료 중 한 명을 선발하여 방문하는 국가 원수를 공항에서 영접하고 환송하는데 김대통령의 경우 소테르 경제재무산업장관이 수행장관으로 지명됐다. 그는 이미 대통령 취임 직후 한국에 온 바 있었으므로 이 점을 고려하여 그가 수행장관이 된 것이다.
나는 김대통령 일행이 특별기 편으로 파리 오를리공항에 도착할 때 소테르 장관과 함께 공항에 나가 있었다. 이윽고 특별기가 착륙하여 김대통령 내외가 기체 밖으로 모습을 나타내고 서서히 계단을 내려왔다. 소테르 장관은 김대통령 앞으로 다가가서 손을 내밀며 환영인사를 하였다. “위대한 민주투사의 프랑스 방문을 환영합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을 환영한다는 말 대신 “위대한 민주투사”라는 표현을 쓴 것을 보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일생을 바친 그의 민주화 투쟁 역사를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의 두번째 행운은 시라크 대통령의 서울 답방이다. 마침 2000년 10월에 서울에서 제3회 아셈정상회의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시라크 대통령은 회의 직전 한국을 국빈방문하고 이어서 아셈정상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아셈정상회의는 대한민국 외교사상 최대의 행사였다. 건국 후 미국을 제외한 아시아 및 유럽 정상 25명이 일시에 한국에 모이기는 서울 아셈회의가 처음이었다. 따라서 정부는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벌였다. 서울 아셈정상회의를 홍보하여 외국여론을 불러일으키려고 본부는 물론 재외공관에서도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였다. 나도 주재국 언론매체를 활용할 계획으로 라디오 인터뷰와 신문 기고 등 할 수 있는 홍보 전략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에서는 정상외교가 일상화되어서 정상들의 국제모임에 대한 관심은 우리와 같지 않았다. 언론사들은 대사관의 요청에 못이겨 독자란에 조그맣게 대사의 기고문을 실어주는 정도였다. 이런 와중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발표되고 김대중 대통령이 그 영예를 안게 되면서 사태는 전혀 다르게 발전하였다.
파리 주요 일간지들은 김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나 악수하는 장면을 신문 전면에 실었고, 남북 정상회담을 위시하여 일련의 남북화해 협력 조치들을 상세히 보도했다. 라디오, TV 등 각 언론 매체들은 앞다투어 나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다. 도대체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누구며 어떻게 해서 노벨평화상을 받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노벨평화상 열기 속에 드디어 제3회 아셈정상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나는 회의 개최 하루 전에 서울을 국빈방문한 시라크 대통령을 영접하고 청와대에서 개최된 국빈 오찬에 초대되어 양국 대통령과 함께 귀빈석에 앉게 되었다. 내 옆에는 프랑스 의회를 대표해서 시라크 대통령을 수행한 불·한의원 친선협회장인 테라스 하원의원이 앉았는데 식사 도중 계속해서 김대통령을 쳐다보며 다음과 같이 나에게 이야기하였다.
“권대사님, 내가 노벨평화상 수상자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더없는 영광인데 이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갖고 싶지만 카메라를 가지고 오지 못한 것이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모르겠어요.”
일국의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노벨 평화상 수상자라는 데 더 큰 무게를 두고 말하였던 것이다. 당시 서울아셈회의에 참석한 정상들, 특히 유럽 정상들은 회의가 끝나면 즉시 귀국할 채비를 하였고 일부는 국내 사정을 핑계로 대리인을 보낼 계획도 한 바 있었지만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발표되면서 모두 김대통령을 한번 만나보자는 생각으로 일정을 바꾸고 청와대 예방을 신청했다.
노벨평화상의 위력은 대단하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축하해주고 한국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기 시작하였다. 한국은 이제 전쟁과 빈곤에서 벗어나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하였으며 올림픽을 개최하고 선진국 그룹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도 가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IMF의 위기도 슬기롭게 극복한 우등생으로 국제 사회에서 평가받게 된 것이다. 프랑스 주재 대사로서 이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이겠는가.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고 나 또한 어깨를 펴고 외교를 할 수 있었다. 콧대 높고 자존심 강한 프랑스인도 한국이 노벨상 수상국 명단에 오른 것을 치하하면서 예전과 같지 않게 존경심을 나타냈다.
그런데 지난해 귀국해서 본 한국의 국내 상황은 외국에서와 같지 않았다. 온 세계는 한민족을 높이 칭송하고 있는데 국내에서 보고 느끼는 정황은 그렇지 못해서 안타깝고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현재 한국과 프랑스 간 현안의 하나인 외규장각도서 반환 문제는 이 문제가 불거진 후 10여 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고 있다. 외규장각도서는 조선조의 왕실 의전 사항을 기록한 책자로서 강화도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공하여 약탈해 간 국보급 유물이다. 최근 전문가들이 프랑스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프랑스에 있는 총 269권의 의궤 중 30권은 한국에 없는 유일본이라고 한다.
그중 1권은 1993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방한 선물로 한국에 가져왔으며 나머지의 반환을 위해 현재 한·불 양국 정부는 각각 대표 1명을 선발해서 해결방안을 협의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지지부진한 원인은 프랑스 정부의 태도가 미온적인 데 있다. 프랑스에서 볼 때 취득 경위야 어쨌든 자기 손에 들어와 있는 물건이고 프랑스 문화재로 등재되어 프랑스 국내법으로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돌려주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세계적인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프랑스로서는 조선조 의궤 정도는 없어도 괜찮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반환의 선례가 되어 많은 국가들이 비슷한 요구를 할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특히 중국은 돈황 문서 반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한국과 프랑스의 외규장각도서 반환 협상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프랑스에 부임한 때는 한국이 IMF 위기를 맞이하고 있던 1998년 봄이다. 앞서 신임장 제정식 이야기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불 양국간 최대 현안인 외규장각도서 반환 문제에 대해 나는 나름대로 몇 가지 구상을 한 바 있다. 당시 한국정부는 IMF 위기를 맞이하여 여러가지 국책 사업을 재검토하고 있었다.
경부고속전철 건설 사업도 그중의 하나였다. 경부고속전철은 프랑스 TGV를 한국에 들여와 건설하는 것으로서 노태우대통령 때 계획을 세우고 김영삼 대통령 정부에서 이를 확정해서 프랑스와 계약을 맺었다.
고속전철사업은 엄청난 자본이 들어가는 사업이며 시간이 지나면서 건설비 내용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사업의 타당성, 경제성을 놓고 시시비비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IMF라는 경제위기를 맞이한 김대중 정부는 집권초에 경부고속전철사업의 지속 여부를 재검토하기로 했다. 재검토 결과 예정대로 사업을 진행하기로 확정하였다. 다만 공기를 당초 계획보다 3∼4년 늦추기로 하고 고속전철 구간도 2단계로 나누어 서울·대구 구간을 일차적으로 건설한 후 대구·부산 구간은 차후로 미루기로 했다.
나는 이러한 결정이 이루어진 이후 파리에 부임하였는데 개인적으로는 한·불 관계에서 최대 경협 사업인 고속전철사업을 이렇게 쉽게 결정한 데 불만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병든 노구를 이끌고 외규장각도서 1권을 서울로 가지고 온 것은 한국정부가 경부고속전철 열차로 자국의 TGV를 선정한 데 대한 감사였을 것이다. 프랑스는 독일과 일본을 따돌리고 한국의 경부고속전철사업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이후 IMF라는 국가 부도사태를 맞았다. 나는 이러한 비상시기를 이용해서 프랑스와 체결한 경부고속전철 사업계약을 파기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재계약 협상까지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평상시에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전세계가 인정하고 있는 경제위기를 구실로 천문학적 자금이 들어가는 고속전철사업 변경을 요구한다면 프랑스로서도 한국의 요구를 전혀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내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과거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원자력 발전의 다변화를 꾀하면서 프랑스로부터 원자력 발전소 2기를 도입하였다. 이 원자력 발전소 건설 사업은 한국이 프랑스와 체결한 최대의 경협 사업이었다. 1981년 프랑스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미테랑 대통령이 이끄는 사회당 정부가 집권했다. 미테랑은 사회당 당수로서 야당 시절 북한을 방문하여, 집권하면 북한을 승인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알려지던 터라 한국정부는 긴장하고 있었다.
당시만 하여도 동서냉전이 한창이고 남북한 간에 외교전이 치열하던 때라서 프랑스의 북한 승인은 한국정부에 엄청난 외교적 타격을 줄 것이 분명하였다. 서방 주요국가로서 프랑스의 북한 승인은 북한의 서방진출을 터주고 북한에 외교적인 고립을 벗어나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프랑스의 북한 승인을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저지해야 했다.
한국정부가 여기에서 생각해낸 것이 프랑스 후라마톰 회사가 제공한 원자력 발전소 2기 건설 사업을 외교적인 지렛대로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프랑스정부가 북한을 외교적으로 승인하면 당시 건설중이던 후라마톰사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중단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프랑스정부에 전달하였다. 프랑스정부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크게 반발하였지만 결국 북한 승인은 설로만 끝나고 실현되지 못했다.
금액상으로 볼 때 경부고속전철사업은 원자력 발전소와 견줄 수 없을 만큼 큰 규모다. 또한 프랑스정부는 경쟁자인 일본과 독일을 제치고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는 좋은 계기였기 때문에 미테랑 대통령이 직접 한국에 찾아와서 TGV 세일즈 외교를 벌였던 것이다. 고속전철사업은 아시아 진출의 교두보가 될 국책사업이었으므로 프랑스정부로서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성공시켜야만 했다. 한국 처지에서는 평상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국가간 계약 변경이지만 국가부도 사태라는 IMF 위기에서는 사정 변경 원칙이라는 국제법의 일반원칙을 적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는 파리에 부임하면서 고속전철 건설계약 재협상을 제의할 것을 생각하고 관련 기관에 은밀히 타진하였다. 구실은 한국이 경제 위기 때문에 계약 재협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재협상을 하더라도 한국이 손해볼 일은 전혀 없고, 잘하면 외규장각도서도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우선 일방적인 계약 변경은 위약이며 그럴 경우 막대한 위약금과 함께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한국 외교의 미숙함과, 강자 앞에 약한 사대외교의 비애를 몸소 느끼고 자탄과 자괴를 금치 못하였다. 나의 오랜 외교 경험을 통해 볼 때 IMF 위기를 활용한 고속전철사업과 외규장각도서 반환 연계는 가능한 일이었고 많은 국가들이 흔히 외교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나는 그때 더욱 집요하고 적극적으로 나의 의견을 정부요처에 전달하여 관철하지 못한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고 외규장각도서 반환 협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