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호

선발투수 강준만, 중간계투 한완상, 마무리는 시민운동

안티학벌을 외치는 사람들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입력2004-11-08 1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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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식 사회민주주의 정책이냐, 미국식 시장경제 모델이냐. 한완상 전부총리의 학력란 폐지 발언 이후, 학벌타파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교육관련 단체들은 학벌의 폐해에 공감하면서도, 구체적인 대안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이고 있다.
    조선 세종 때의 과학자 장영실이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낱 ‘우화’에 불과하지만, ‘실화’일 수도 있는 장영실의 부활을 추적해보자.

    ‘초등학교 때부터 각종 발명왕 대회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장영실은 과학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미역국을 먹었다. 과학은 잘했지만 영어와 수학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장영실은 지방대학을 졸업한 뒤 연구소에 지원했지만, 박사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연거푸 떨어졌다. 학벌이 나빠서 대기업에 취직할 수도 없었다. 이때 장영실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미국의 한 벤처기업이 아파트와 자동차까지 제공하며 그를 특별 채용했다. 그러자 장영실은 이에 보답하기 위해 연구에 몰두했고 마침내 ‘타임머신’과 ‘영구동력기’를 만들어냈다. 뒤늦게 한국정부가 SOS를 보냈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문학박사 이기문 선생이 감수한 ‘동아 새국어사전’에는 학벌(學閥)의 정의가 ‘①학력이나 출신 학교의 지체 ②같은 학교 출신자나 같은 학파의 학자로 이루어진 파벌’이라고 나와 있다. ①은 일정한 수준의 학교를 나왔다는 의미이고, ②는 학연 또는 학맥과 비슷한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학벌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벌(閥)의’ 의미를 확대 해석한다. 족벌·문벌·군벌·재벌 등에 쓰인 벌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권력을 상징하기 때문에, 학벌은 출신학교로 특권을 누리는 일체의 사회적 관계망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1월22일 한완상 교육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국무회의에서 학벌문화 타파를 공개적으로 거론한 직후 언론과 일부 정치인으로부터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대다수 언론은 원칙에 공감하면서도 현실성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으며,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은 “시장경제의 원리를 거스르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교육관련 시민사회단체들은 환영의 뜻을 밝히고 학벌타파 운동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한부총리는 ‘책임론’에 떠밀려 경질됐지만, 학벌논쟁은 이제부터가 시작인 셈이다.





    역사학자 이이화의 시련


    1월25일 오후 2시 서울 낙원동 문예아카데미 강의실에서는 ‘학벌 없는 사회를 위한 모임(이하 ‘학사모’·http://antihakbul.org)’ 월례토론회가 열렸다. 주제는 ‘우리 역사 속에서 본 학벌’, 초청강사는 이이화 역사문제연구소 고문이었다. 30여 명의 회원들이 모여들자 이고문은 강연을 시작했다.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얼굴만 비치고 졸업장을 받는 사람이 수두룩했습니다. 남들은 그 졸업장으로 출세했지만, 가난해서 등록금을 내지 못한 나는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연구비 신청도 못했어요.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열심히 논문을 발표해도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고 무시한 겁니다.”

    이고문은 광주고등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에서 수학했다. 하지만 그는 전공과 무관한 길을 걸었다. 그는 동아일보와 서울대 규장각에서 근무한 뒤 재야사학자로 활동했다. 어린 시절부터 한문을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그는 ‘인물한국사’와 ‘한국사 이야기’ 라는 역작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고문의 독보적인 실력은 교육부의 연구비 지급기준까지 바꿔놓았다. 이고문은 교육부 산하 학술진흥재단(이사장 박석무)에 연구비를 요청했다가 박사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일이 있었다. 이때 박이사장이 “이이화 같은 학자는 자격이 있는 거 아니냐?”고 항의하는 바람에 예외조항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고문은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더 이상 이 땅에서 학벌 때문에 차별받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인정받되 능력 없는 사람까지 보살펴 주는 세상이 와야 합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만 잘 살거나, 능력이 없으면서도 좋은 학교 나왔다고 출세하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고문은 한장관의 학벌란 폐지 주장에 대해서도 ‘용기있는 행동’이라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진보적 역사학자답게, 그는 적극적인 대응을 주문했다.

    “한완상 같은 사람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자꾸 나와야만 학벌이 깨질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학벌은 더욱 단단해지거든요. 12월 대통령 선거가 경기고와 경복고의 싸움이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학벌주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사람은 아마도 전북대 강준만 교수가 처음일 것이다. 강교수가 1996년 펴낸 ‘서울대의 나라’는 학벌이 한국사회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을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했다. 강교수는 이 책의 서문에서 학벌주의의 폐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학벌주의와 학연주의를 타파 내지 완화하지 않는다면 대학입시 전쟁은 영원히 지금처럼 살벌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우리 사회에 바람직한 의미의 경쟁이 뿌리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패자부활전이 없으니 승자나 패자 모두 열심히 노력해야 할 필요성이 그만큼 줄어들지 않겠느냐 이 말이다.’

    ‘서울대의 나라’는 ‘학사모’ 탄생에도 영향을 끼쳤다. 학사모 초대 대표를 맡았던 김상봉 문예아카데미 교장은 “강교수의 책을 보면서 자극을 받았다. 우리들의 아이들을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연세대 철학과 76학번인 김교장은 독일 유학을 다녀온 뒤 한국 교육의 모순점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김교장은 1999년부터 ‘함께 하는 시민행동’의 교육분과위원장을 맡아 ‘학벌 없는 사회를 위한 시민행동’을 출범시켰는데, 이것이 학사모의 모태가 되었다. 홍훈 연세대 교수, 김동훈 국민대 교수, 김경근 전북대 교수, 이철호 전교조 정책위원, 이병호 사당중 교사 등이 이때부터 멤버로 참여했다. 학사모는 서울 안국동에 사무실을 두고 있으며, 15명의 실무자와 500여 명의 후원회원이 활동중이다.

    학사모는 “학벌문화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획일화된 대학서열을 깨는 것이 필수조건”이라고 본다. 이를 위해 학사모가 제시한 방안은 세 가지다.

    첫째, 국립대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는 것이다. 국립대에 엄청난 예산을 배정하고 사립대를 외면하는 것은, ‘모든 납세자는 동등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국민평등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지방국립대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한다는 전제에서, 국립대도 사립대와 똑같은 조건에서 경쟁해야 한다고 말한다. 학사모는 서울대 물리학과 장회익 교수가 제안한 “10년 동안 서울대 신입생을 뽑지 말자”는 주장에도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둘째, 공직자 쿼터제의 도입이다. 학사모는 사법·행정·외무고시의 경우 단기적으로 10%, 장기적으로는 5% 이상 한 대학이 독점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개인의 직업선택 자유를 침해할 수 있으며, ‘역차별’ 논쟁까지 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다. 하지만 학사모 관계자는 “여성할당제를 실시한 이유는 여성을 채용하는 것이 차별하는 것보다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학벌문제도 그런 차원에서 검토하자는 얘기”라고 말했다.

    김상봉 교장은 “대학교수의 쿼터제를 시급히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 교수사회에는 진정한 경쟁이 없다. 일류대학 출신들은 문중화한 학벌을 이용해 독점권을 행사하며 인재들의 학계 진출을 봉쇄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대학 졸업자를 10% 이상 채용할 수 없게 만들면, 어쩔 수 없이 능력에 따라 교수를 선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곧 서울대 출신의 교수사회 진출을 제도적으로 제한하자는 얘기다. 실제로 대학교수 시장에서 10% 이상을 차지하는 학교는 서울대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학입시는 추첨으로 치르자


    셋째, 수능시험을 변별력이 없을 정도로 쉽게 출제하는 것이다. 김교장은 수능 만점자를 5만명 이상으로 늘리고 대학간 학점교환제를 도입하면, 대학의 문턱이 지금보다 훨씬 낮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김교장은 한발 더 나아가 “서열이 무의미해지면 독일처럼 모든 대학을 평준화해서 대학입시를 추첨으로 치를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하는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한 변수가 아니다”고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고등학교 수업이 어디 교육입니까? 좋은 대학에 많이 넣으려고 학생들을 기계식 교육의 희생양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실정이잖아요. 철학에 관심 있는 학생은 칸트를 읽고, 국어가 좋은 학생은 시와 소설을 열심히 읽어야 진짜 교육이잖아요. 학생들이 대학입시에 대한 부담을 떨쳐야만 그게 가능하단 말이에요.”

    김교장은 ‘학교공부 잘하는 아이가 능력있다’는 사회적 인식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공부 잘하는 사람이 사회현상을 잘 판단한다는 점에 공감하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의 입시공부는 그것과 무관하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요즘 학생들은 일제시대 때보다도 수준이 떨어진다”면서, 사색이나 창의력보다 입시경쟁 자체가 강조되는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문맹을 퇴치하던 시절에는 외우기 공부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고 봐요. 그러나 이제 그런 공부로는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지금 우리는 전국민이 대학입시에 뛰어들어서 열심히 ‘바보’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잠시만 방심해도 따라갈 수가 없으니 사색의 여유는 아예 꿈도 못꾸는 거죠. 아니, 4지선다형 문제를 잘 찍어서 그 아이의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차라리 그 시간에 집안일을 경험하고 돈을 벌어보는 게 낫지.”

    김교장은 한완상 전부총리의 ‘학력란’ 폐지 발언을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면접과정에서 대학이름을 쓰면 어쩔 수 없이 편견을 갖게 되고, 그것은 불공정한 심사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교장은 “학벌문제는 학력란을 안 쓰는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대학서열을 깰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교장은 처음 자신이 학사모를 만들던 3년 전과 비교해볼 때 국민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강준만 교수가 처음 책을 썼을 때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았지만, TV토론과 인터넷 홍보로 동조자들이 많아졌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김교장은 학벌타파 운동의 성공조건으로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진보적 관점에서 이론적 틀을 다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학벌문제를 과거 학생운동 수준으로 이슈화하는 것이다. 학사모는 이를 위해 조만간 다양한 시각에서 학벌문제를 분석한 책을 출간하는 한편,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사이버 모임’을 활성화할 예정이다.

    2월2일 오후 4시 서울 을지로 2가 ‘학벌 없는 사회만들기(‘학사만’·http://www.goodbyehakbul.org)’ 사무실에서는 ‘학벌타파 시민연대 준비모임(시민연대)’ 2차회의가 열렸다. 시민연대는 한 전부총리의 ‘학력란 폐지’ 발언 직후 ‘학사만’을 중심으로 전교조 참교육전국학부모회 서초강남교육시민모임 등이 참여해 만든 연대기구다.

    회의 주제는 2월20일쯤으로 예정된 공개토론회 준비였다. 발제자와 토론자를 잠정 결정한 뒤 참석자들은 학벌 문제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털어놓았다. 한 전부총리의 발언을 바라보는 각도는 조금씩 엇갈렸다. 정영섭(건국대 교수) 학사만 대표가 “한 전부총리는 학벌타파 운동의 원인제공자이며, ‘공직에서 물러나면 학벌타파 운동에 나서겠다’고 말했다”고 소개하자, 김동훈(국민대 교수) 학사만 사무처장은 “한 전부총리를 학벌타파 운동과 관련해서 만난 적이 있다. 내가 직접 접촉해서 고문으로 영입하는 문제 등을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만중 전교조 정책교섭국장은 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에 주목했다. 이것은 전교조가 학벌문제를 전교조의 정체성을 흔들 수도 있는 사안으로 보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학력란 폐지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공교육 정상화의 틀에서 학교 현장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지금 중·고등학교에서는 입시교육이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 학력고사 횟수가 늘어나고, 학력성취도 평가가 전국 단위로 확대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어요. 이렇게 학력을 중시하는 정책들이 양산되면 전교조가 표방해온 ‘입시지옥에서 아이들을 구하자’는 이념은 뿌리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토론은 저녁식사 자리에서도 계속됐다. 참석자들은 학벌타파 문제에 동의하면서도, 교육현안에 대한 시각에서는 큰 차이를 보였다. 먼저 평준화 문제를 놓고 정대표와 이공훈 운영위원(흥사단교육실천위원회 기획실장)이 논쟁을 벌였다.

    “원칙적으로 평준화에 반대합니다. 교육은 시장의 원리에 맡겨야지 국가가 간섭할 일이 아닙니다. 경쟁을 통해 대학서열이 정해져야 하듯이, 고등학교도 좋은 학교와 그렇지 않은 학교로 나누어지는 게 당연합니다.”(정영섭)

    “평준화는 현 시점에서 최선입니다. 저는 초·중·고 사립학교를 국가가 사들여서 모두 공립으로 만든 다음, 의무교육을 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고등학교를 지금의 초등학교 수준으로 평준화하자는 거죠.”(이공훈)

    교육계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한 교원성과급과 교수연봉제에 대해서도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시장이냐, 국가냐. 교육문제를 풀어갈 주체를 놓고 참석자들은 조금씩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교원성과급은 교육현장의 제약과 평가의 어려움 등을 감안할 때 시기상조라고 봅니다. 하지만 교수연봉제는 찬성합니다. 교수는 교육자라기보다 전문가이기 때문에 능력에 따라 시장에서 평가받는 게 당연해요. 제 주변을 봐도 무능한 교수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대학에 계속 머무는 한 대학의 경쟁력은 올라갈 수 없다고 봐요.”(김동훈)

    “시장의 기능은 지금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교육정책들이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잖아요. 그래서 학생들만 죽어나고…. 그 결과 우리 교육이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날이 갈수록 공교육은 황폐해지고 사교육은 팽창하고 있습니다. 현 단계에서 이러한 흐름을 바로잡을 수 있는 건 시장이 아니라 국가라고 봅니다.”(한만중)

    학사만은 학사모 사무처장으로 활동했던 김동훈 교수를 비롯해 정영섭 교수 이공훈 실장 등이 2001년 4월 독립해서 만든 조직이다. ‘학벌타파 운동을 벌이는 마당에 힘을 합치지는 못할망정 분리할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에 학사만 사람들은 “생각의 차이가 너무 컸다”고 말한다. 실제로 기자가 보기에도 학사모와 학사만의 교육관은 달랐다. 학사모가 국가의 적극적 개입과 교육의 공적기능 회복에 중점을 두는 반면, 학사만은 시장기능의 강화를 주장했다. 다소 거칠게 양쪽의 노선을 비교한다면 학사모가 독일식 사회민주주의적 모델에 가깝고, 학사만은 미국식 ‘시장경제’를 강조하는 셈이다.

    학사만이 주도하는 ‘시민연대’에 대해서도 학사모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학벌타파라는 대의명분에 찬성하기 때문에 참여하겠지만, 그 이전에 학벌문제를 바라보는 기본적 공감대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반면 학사만은 최소한의 원칙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여 국민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 시민연대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양측이 이처럼 신경전을 벌이는 데는 학사모와 학사만이 갈라지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동훈 학사만 사무처장의 이력은 특이하다. 경희대 법학과 재학중 외무고시에 최연소 합격해 외무부 공무원으로 근무한 뒤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독일 쾰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 지식계의 3대 부류로 볼 수 있는 서울대와 비서울대 그리고 외국유학을 두로 경험한 셈이다. 그는 1989년부터 국민대 법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비명문대 학생들의 좌절감을 뼈저리게 느껴왔으며, 1999년에는 ‘대학이 망해야 나라가 산다’라는 칼럼집을 냈다.

    김사무처장이 2001년 4월에 펴낸 ‘한국의 학벌, 또 하나의 카스트인가’ 라는 책은 한완상 전부총리가 학벌타파를 구상하는 데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한 전부총리는 이 책을 읽고 김사무처장을 직접 만났으며, 교육부 출입기자들에게 책을 나눠준 일도 있다. 또한 학사만은 지난해 교육부의 지원을 받아 ‘3회 연속 토론회’와 ‘지방 순회 토론회’를 열었다. 현재 학사만에서 활동하는 회원은 10여 명, 네티즌 회원은 200여 명에 이른다.

    학사만은 3단계의 변화를 통해 학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먼저 중고등학교가 변하고 그 다음에 대학이 변하고 마지막으로 사회가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게 사회의 변화인데, 이것을 위해서는 의식개혁이 선행돼야 한다고 본다. 김사무처장은 특히 동문회 문화가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얼마 전 대학동창회장 협의회 사람들이 국무총리를 만나서 ‘동문회보를 발송할 때 우편요금을 인하해달라’고 요구했대요. 이런 코미디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또 K대학은 동문 중에서 출세한 사람들의 명단과 그들이 낸 모금액을 적어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더라고요. 외국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김사무처장은 시험 위주의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는 “한국사람에게 시험은 하나의 종교에 가깝다”면서 “시험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쓰는 최후의 수단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 예로 김사무처장은 “대학입시를 필기시험 없이 내신성적만 갖고 치르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렇게 하면 학교와 교사의 권위를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수능시험이 학생들의 자질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신성적도 수능을 대체하기에는 문제점이 많다. 내신의 비중이 커지면 학생들은 내신점수를 올리기 위해 학원 과외수업에 매달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사무처장은 “학생들을 미국처럼 ‘밀실’에서 뽑자”고 말한다. 학교가 알아서 기준을 정하고 교육부는 감시만 하자는 얘기다.

    “물론 부정의 소지는 있습니다. 하지만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해결될 겁니다. 만일 어떤 명문대가 10명을 부정으로 뽑았다면, 그 대학은 시장에서 엄청난 부담을 안게 되는 겁니다. 대학에 전권을 주면 살기 위해서라도 공정하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김사무처장은 대학과 수험생의 자유로운 계약을 꿈꾸고 있었다. 바로 SAT 기준점수를 통과한 학생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지원서?자기소개서를 제출하고, 대학은 서류심사와 면접을 거쳐 합격자를 발표하는 미국식 모델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미국이 아니다. 해마다 면접시험 공정시비가 벌어지고, 대학입시 경쟁 또한 미국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국 대학의 도덕적 권위가 미국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김사무처장은 “일시적으로 문제가 있더라도 방향이 옳다면 그쪽으로 가야 한다. 힘들다고 주저하면 영원히 조선시대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미국도 SAT 점수만 갖고 줄을 세우면 편하게 뽑을 수 있다는 걸 잘 압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요. 수십명의 전문가들이 토론을 통해 학생을 선발하잖아요. 얼마전 동료교수의 자녀가 미국대학에 지원했는데, 면접시험을 위해 한국까지 찾아왔더라고요. 대학이 학생들에게 그런 정도의 성의를 보여야 하는 겁니다.”

    김사무처장은 2월말쯤 정부가 국립대학을 편파적으로 지원하는 문제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출할 예정이다. 국가가 대학을 만들어서 예산을 지원하고, 그렇게 해서 사립대학에 대한 우위를 지키는 것은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주장이다. 그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대학이 왜 권력기관으로 기능하면서 민간이 눈물을 흘리도록 만드느냐”며, “서울대는 이제라도 공익적 성격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미국 버클리주립대학은 합격자를 발표하면서 ‘입학자의 30%가 자기 집안에서 처음 대학에 들어온 학생입니다’ 라고 말했어요. 이건 소외된 사람들을 그만큼 배려했다는 단적인 증거잖아요. 서울대도 그런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서울대가 없으면 대학서열 문제가 해결될까?’ 하는 문제다. 일부에서는 서울대가 사라지면 연세대와 고려대가 그 역할을 대신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김사무처장은 “압도적 1등이 사라지면 서열은 급속하게 깨질 수밖에 없다. 사립대학은 현재 절대강자가 없기 때문에 저마다 특성을 살리면 여러 대학이 선두권을 형성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교사와 학생의 관계다. 하지만 교육의 질을 결정하는 데는 학부모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수험생보다도 더 열심히 뛴다. 고소득층 학부모가 일으킨 치맛바람이나 좋은 학군을 찾아 주민등록까지 옮기는 일은 외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예다. 최근 경기도 신도시지역의 고등학교 배정추첨에 오류가 생겨서 재추첨을 실시한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사람들도 해당지역 학부모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오랫동안 교육정책에서 소외돼왔다. 학부모가당당히 교육과정에 참여하는 외국과 달리, 형편에 따라 공교육 또는 사교육에 전적으로 맡겨왔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1990년대 중반 각급 학교에 도입된 ‘학교운영위원회’ 제도는 학부모를 교육의 주체로 끌어들인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때부터 학부모들은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 본격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다.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이하 ‘참교육’)’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학부모 단체다. ‘참교육’은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출범과 관련해 교사들이 대거 해직됐을 때 “학부모들도 교육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취지로 탄생했다. 그후 학교운영위원회 도입을 이슈화하고 육성회비 반환소송에서 승소하는 등 교육계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참교육은 현재 전국에 33개 지부를 두고 있으며, 회원은 5000여 명이다.

    참교육은 이미 2001년 1월 총회에서 학벌문제를 정식 안건으로 채택했다. 하지만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못한 채 2002년 주요사업으로 다시 상정했다. 참교육 박경양 부회장은 “학사모와 학사만이 학벌문제를 논리적으로 접근한다면, 우리는 국민운동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 학벌문제는 목청만 높인다고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참교육은 다가오는 교육위원 선거에서 적극적으로 후보를 내고 학력란 철폐를 공약으로 내걸 예정”이라고 밝혔다.

    박부회장은 학벌타파 운동에 학부모들이 나서야 하는 이유로 ‘피해자의 손으로 피해자를 구제하자’는 논리를 제시했다.

    “우리나라에서 학벌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2∼3%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학부모들은 신기루를 쫓고 있어요. 자기 자식을 3% 안에 넣으려고 모든 학생을 나락에 빠뜨리는 겁니다. 이제 학부모들이 나서서 그런 자해적인 경쟁을 끝내야 합니다.”

    참교육은 대학입시제도의 개선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현재의 수능시험으로는 학생들의 능력을 공정하게 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자질과 인성 그리고 잠재가능성까지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제도를 만들자고 주장한다. 박부회장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서울대에서 학교장 추천 케이스로 입학한 학생들과 강남에서 입시경쟁을 벌인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비교했어요. 그 결과 학교장 추천으로 들어간 학생들이 앞섰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수능시험 20∼30점 차이로는 학생들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뜻이잖아요.”

    박부회장은 한부총리의 학력란 폐지 발언과 관련 “정부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기업도 따라갈 것”이라며, 고시제도의 철폐를 요구했다. 공무원의 최우선적 조건은 사명감인데, 필기시험으로는 그것을 평가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머리가 조금 나쁘더라도 국가관이 철저하다면 부정부패가 훨씬 줄어들 겁니다. 법조문을 달달 외운 사람과 사회생활에서 검증된 사람 중에서 누가 더 사명감을 갖고 국가에 봉사하겠습니까? 지금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학벌의 수혜자이기 때문에 쉽지는 않겠지만, 정부가 의지를 보인다면 국민들도 동참할 것으로 봅니다.”



    고시제도 확 바꾸자


    박부회장은 검정고시 출신으로 감리교신학대를 졸업했다. 서울 오류동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교육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그는 2000년 상문고등학교 사태가 발생하자 시민대표로 추천돼 현재 이사장을 맡고 있다. 교육비리가 가장 심했던 현장에서 참교육의 꿈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가 최근 목격한 모 고등학교의 교원임용 과정을 들어보면, 학벌문제의 해결이 요원함을 느낄 수 있다.

    “5명의 교원을 뽑는 데 전국에서 600명의 원서가 들어왔대요. 그런데 지방대 서류는 뜯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처박고, 명문대 서류만 검토해서 합격자를 발표했다는 거예요. 이러니까 꼴찌를 하더라도 서울대에 들어가려고 발버둥치는 거죠.”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이하 ‘학부모연대’)’도 1989년 출범했다. 참교육이 전교조와 맥을 같이 한다면, ‘학부모연대’는 중산층과 전문가 집단의 이해를 대변해왔다. 참교육이 반대한 ‘자립형 사립고’에 대해 학부모연대가 찬성한 점이 대표적인 차이다.

    학부모연대 박유희 회장은 이화여대를 졸업한 뒤 ‘여성신문’ 출판국장을 지냈다. 그는 “학벌타파를 외치는 것보다 학벌에 초연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학벌이 갖고 있는 장점, 즉 학교의 전통과 특징은 살리되 학벌이 차별의 도구로 활용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전통을 모두 거부하는 건 어리석은 주장이에요. 하나의 대학이 고유한 학풍을 만들기 위해서는 100년 이상이 걸리는데, 그처럼 소중한 자산을 그냥 날려버릴 수는 없다고 봅니다.”

    박회장의 주장은 한마디로 좋은 대학을 많이 만들어서 특정 학교의 인재 독점을 막자는 것이다. 그는 “지방대학의 특성화를 통해 서울과 지방의 격차를 줄여나가는 한편, 도저히 경쟁이 안되는 대학과 학과는 문을 닫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회장은 “시대가 변하고 있다. 당장 서울대만 해도 올해 유능한 학생들을 다 끌어들이지는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학벌의 위력은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서초강남교육시민모임(이하 ‘서초강남’)’은 1998년 ‘공교육 정상화를 통해 건강한 교육을 이루자’는 취지로 만들어졌으며 회원은 200여 명이다. 이른바 8학군으로 알려진 서초·강남지역은 우리나라에서 사교육 열기가 가장 뜨거운 곳이다. 과외비로 한달에 수백만원을 쏟아붓고, 그것도 모자라 아이들을 유학보내는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하지만 ‘서초강남’ 김정명신 회장은 8학군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고 말한다.

    “아이러니컬하지만 8학군 학교의 시설이 서울에서 가장 낙후돼 있어요. 사교육 시장은 엄청나게 커졌지만, 공교육에 대한 투자가 소홀했던 거죠. 이건 교육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이들을 입시전쟁터로 내몰 수밖에 없는 게 8학군 학부모들의 고민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8학군 학부모들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셈이죠”

    김정회장은 “학벌타파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 먼저 포기해야만 가능합니다. 아직은 소수지만, 서초·강남 지역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봐요. 몇 사람만 잘 사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가치있는 공동체’가 소중한가. 우리는 이제 그런 본질적인 문제를 검토할 시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다.

    김정회장의 주장처럼 학벌타파 운동에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한완상 전부총리의 발언이 더욱 설득력을 갖는 이유도 그가 서울대 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학벌타파 논의가 힘을 받기 위해서는 서울대 출신, 고위 관료, 상류층 인사들의 동참이 절실한 상황이다. 그런 측면에서 2001년 4월 ‘서울대 개혁론’을 주창한 서울대 물리학과 장회익 교수의 용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교수는 “우리나라에서 교육문제는 정치쟁점화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세부적인 문제를 하나씩 고치는 방법으로는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국가가 큰 틀을 짜고 국민투표를 통해 단번에 합의를 이끌어내는 방식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의도적으로 대학서열을 파괴해야 한다. 우선 서울대는 10년간 신입생을 받지 말고 대신 지방 국립대생을 교육시키고, 사립대학은 학교별로 특성을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장교수는 학력란 폐지에 대해 “현실성이 없다”면서도 “사법시험 등에 공직자 쿼터제를 도입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즉, 능력을 우선하되 학벌이 과도하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장교수가 “대학교수를 뽑을 때는 학교별 인원수를 고려하면 안된다. 특정학교가 독점하더라도 철저하게 능력 중심으로 가야 한다”고 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장교수는 충북 청주공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수학과 과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토목기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장교수는 학생시절 읍내 다리를 지나면서 난간에 비친 햇빛의 농도 차이를 삼각함수를 이용해 계산해보고, 같은 방법으로 해가 지지 않았는데도 어두워지는 현상을 설명했다고 한다. 그는 청주공고 시절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선물받은 미적분 책으로 공부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요즘 학생들의 학습태도를 아쉬워했다.

    “30년 전 서울대에 들어온 학생들은 입시에 찌들지 않아서 깊이 있는 얘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고등학교 때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복잡한 생각을 못해요. 결과적으로 우리 교육이 서울대에 들어온 학생들까지 피해자로 만들고 있는 거죠.”



    지도층 인사의 각성이 필요


    한국교육개발원 최돈민 연구위원도 학벌타파에 적극적이다. 그는 한양대 교육학과를 졸업했으며, 지난해 9월 교육정책포럼에서 ‘학력주의의 실상과 대응방안’이라는 글을 발표해 관심을 모았다. 최연구위원은 이 글에서 학벌주의의 폐해를 자세히 지적했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소개받을 때 출신지는 어디고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를 가장 먼저 알고 싶어한다. 직접 당사자에게 묻는 경우는 드물고 그 사람과 가까운 사람에게 비밀스럽게 물어본다. 그리고 평소 가지고 있는 파일에 저장한다. 파일에 들어간 자료는 고정관념이라는 칡덩굴에 둘러쌓여 바깥으로 나올 수 없다. 어쩌다가 칡덩굴이 끊어지는 경우 ‘어 그 사람 그게 아니네. 좀 특이하네’ 라고 치부하며 덩굴을 더욱 단단히 감싼다.’

    최연구위원은 학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정치인과 경영인 언론인들이 각 대학의 특수대학원을 옮겨다니며 학연을 만드는 일이나 동문회 모임을 자랑스럽게 신문에 내는 행위, 유명인사의 이름만 걸어놓고 대학을 광고하는 객원교수 제도와 실험 한번 해보지 않고 의학박사 자격을 취득하는 관행 등이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최연구위원은 “학벌을 돈이나 혼인을 통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상류층의 의식도 문제”라고 꼬집었다.

    최연구위원은 또 사회진출 과정의 진입장벽을 없애기 위해 공인된 ‘취업능력시험’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취업박람회를 열어서 기업들이 ‘취업능력시험’ 점수만 갖고 채용하게 하자는 주장이다. 최연구위원은 삼성전자의 사례를 통해 ‘학벌과 업무능력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명문대와 비명문대로 그룹을 나누어서 1년동안 업무능력을 평가했는데 비명문대가 명문대를 앞서는 현상이 강하게 나타났어요. 그러니까 학벌을 갖고 신입사원을 뽑으면 결국 기업이 손해를 본다는 얘기죠.”

    학벌문제는 크게 세 곳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학벌에 진입하는 과정과 학벌을 갖고 사회에 진출하는 과정, 그리고 학벌이 구조적으로 권력화하는 과정이다. 이 가운데 최연구위원은 두 번째 과정에 주목했다. 즉 기업이 학벌에 연연하지 않고 공정하게 평가한다면 학벌의 폐해가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본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기업들은 눈에 띄게 능력 우선주의를 부르짖고 있다. 신입사원보다 경력사원을 선호하는 풍조와 학벌보다 기술을 강조하는 벤처기업의 등장, 삼성전자가 입사지원서에서 학력란을 삭제한 부분 등이 그런 흐름을 대변하고 있다.

    또한 부동의 선두였던 서울대가 올해 신입생 추가모집에서까지 미달 사태를 빚은 것도 엄청난 변화로 볼 수 있다. 여론조사에서도 이런 변화가 나타났다. 온라인 취업사이트 ‘잡링크’가 구인기업 담당자 1680명을 조사한 결과 10명 중 7명(72.1%)이 학력란 폐지에 찬성한 것이다.

    삼성전자 김형준 부장은 지난해 발표한 ‘21세기 디지털시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상’이라는 글에서 학벌주의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사람의 차이를 학벌이라는 잣대로 환원시켜 불평등한 서열 속에 몰아넣는 것은 획일화된 서열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논리는 인간의 다양성이 강조되는 미래사회에서 존중될 수 없다. 기업의 경쟁력은 학벌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시대가 찾아왔다.’

    지난해 말 개봉된 한국영화 ‘두사부일체’는 형식은 흔해빠진 조폭영화지만, 제법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능력’은 있지만 학벌이 없어서 ‘명동파’ 보스가 되지 못한 주인공 계두식이 늦은 나이에 단순히 졸업장을 따기 위해 고등학교에 들어간다. 계두식의 짝궁인 여고생 이윤주는 학비를 벌기 위해 술집에 나간다. 이윤주가 계두식에게 “대학에 가고 싶어. 나 돈 좀 꿔줄래” 라며 추파를 던지는 장면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의 학교교육이 끊임없이 제2의 계두식과 이윤주를 양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까지도 명문대학에 몇 명을 진학시켰느냐에 따라 고등학교의 서열을 매겼으며, 이 과정에서 적성과 무관하게 인생을 선택한 사람들이 많았다. 몇 점이면 어느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배치표가 사라진 것도 지난해부터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건 올해 대학입시에서 간판보다도 학과를 중시하는 소신지원이 눈에 띄게 많아진 점이다. 서울대가 미달되는 와중에 일부 지방대 인기학과가 고득점자로 넘쳐난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점은 있다. 유능한 인재들이 대학을 고르는 단계부터 직업의 안정성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건 분명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또 하나의 숙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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