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0년부터 44년간 이 땅의 여성·어린이·장애인을 위해 헌신한 로제타 셔우드 홀.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은 환자 치료중 34세의 나이로 순직했고, 아들 셔우드 홀은 한국 결핵환자의 대부가 됐다. 시련과 편견을 뚫고 조선 의료와 장애인 교육의 기틀을 다진 한 벽안 여성의 감동적인 삶.
이장식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그의 자서전 ‘닥터 홀의 조선 회상’을 접하게 됐다. 그의 부모 대로부터 시작되는 의료 선교사 4명의 봉사로 점철된 삶에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기독교에 대한 탄압, 남편과 딸을 연이어 여읜 인간적 고통 속에서도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낯선 땅의 불우한 이들을 위해 헌신한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 즉 셔우드 홀의 어머니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의사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한 채 43년간 이국 땅에서 온전한 봉사의 삶을 살다가 68세 노인이 되어서야 모국으로 돌아갔던 로제타 또한 가족과 함께 한강 기슭 야트막한 언덕 양화진에 묻혀 있다.
이곳에 묻혀 있는 홀 집안 사람들은 모두 5명에 이른다.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 중 최초로 순직한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Willam Jam es Hall), 그의 아내인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 아들인 닥터 셔우드 홀(Sher wood Hall)과 며느리 닥터 메리안 홀(Marian Hall), 마지막으로 셔우드 홀의 여동생인 에디스 마거리트 홀(Edith Margar et Hall) 등이다. 어린 시절 사망한 에디스를 뺀 나머지 4명이 이 땅에서 봉사한 기간을 합치면 무려 73년이 된다.
로제타는 영국·프랑스의 최고훈장은 물론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슈바이처 박사보다 22년 먼저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상가이자 신학자, 음악가였던 슈바이처 박사에 비해 의사의 길에만 전념했고, 게다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업적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특히 대한민국 정부로부터는 어떠한 공식적 인정을 받지 못했다. 1993년 교육부가 주관한 ‘한국특수교육 100주년기념사업’ 당시, 교육부와 해당 학회에서 조선 최초의 근대적 맹아교육을 실시하고 점자개발에 기여한 공로로 그녀에게 훈장을 추서하려 했으나 몇몇 인사들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된 일이 있다. 그녀가 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미수호 100주년 기념식’에서도 아들인 셔우드 홀 박사는 훈장을 받았으나 그녀에게는 어떤 경의도 표해지지 않았다.
1993년, 모 일간지에서 “로제타 홀의 업적을 우리가 너무 소홀히 하고 있다”는 내용의 칼럼을 읽게 되면서 그녀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다. 필자 역시 그녀의 사랑에 빚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뭔가 보답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전기 집필이었다.
그러나 필자의 무능과 자료수집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작업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다행히 2000년 10월, 고려대 의대 내 로제타 홀 클럽과 대한여자의사회 등의 초청으로 내한한 그녀의 손자 윌리엄 제임스 홀과 손녀 필리스 홀 킹 여사를 만나게 됨으로써 작업은 급진전을 보게 됐다.
“여성 의료는 여성의 힘으로!”
미국 개신교가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은 1885년이었다. 당시 개신교는 이미 조선을 제외한 동양 각국에서 오랜 선교 경험을 쌓고 있었다. 미국 젊은이들, 특히 의학도들 사이에서는 인도나 중국에 대한 선교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로 많은 신자가 목숨을 잃고 황사영이 로마교황청에 군대파견을 요청했다 순교하는 등 가톨릭 선교가 전략적 실패를 경험한 뒤, 서방에서는 조선 선교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1883년, 통상외교사절단으로 미국을 여행중이던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閔泳翊) 등이 목사 존 F. 가우처를 만나 조선의 변화에 대해 알린 것을 계기로 미국 선교기관들은 다시금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해외 선교에 적극적이던 감리교단은 조선에 아펜젤러, 언더우드, 스크랜턴 등을 파견했다. 교단은 조선의 관습, 종교 성향, 경계심과 박해 등을 감안해 교육·의료를 통한 선교를 초기 전략으로 채택했다. 특히 집밖에 나서기 쉽지 않은 여성들을 위한 여성의료선교사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됐다.
한편, 한미·한영 통상조약 등이 체결되면서 문호가 열리기 시작했지만 조선에서 종교의 자유는 여전히 유보적이었다. 1900년에는 조정이 지방관리들에게 선교사 처형을 지시하는 등 선교활동은 여전히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쇄국정책에 매진한 대원군의 부인 민씨(閔氏)가 ‘메리’라는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였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당시 이미 조선에는 4만여 명의 천주교 신자와 2만여 명의 개신교 신자가 있었고 그 수 또한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의 의료 복지 상황은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로제타는 44년간 여성전용병원 2개, 여자의학강습소 2개, 소아과병원 2개, 간호학교 2개, 결핵병원 1개(아들 셔우드와 함께)를 세우고, 맹아학교와 농아학교 각 1개, 고등학교 1개(남편 윌리엄과 함께), 초등학교 1개를 건립하는 등의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한글 점자 개발, 미국 유학 여의사 및 맹아 특수교사 배출, 맹인 영문과 졸업생 배출, 제1회 동양 맹학교 회의 개최 등도 그가 이룬 성과다.
로제타는 처음 조선에 올 때부터 “여성을 위한 의료사업을 여성의 힘으로!(Medical work for woman by wo man!)”라는 구호로 사업을 펼쳤다. 이러한 시각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로제타가 재정적 어려움과 일제의 감시와 견제에도 불구하고 여자의학강습소를 계속한 것은 그만큼 여성의 지위 향상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지막 숙원 사업 또한 조선 최초의 여자의과대학(고려대 의대의 전신)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사재를 털어가며 헌신했으나 대학 설립 직전인 1933년, 68세의 나이로 정년을 맞게 되자 같은 해 10월2일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갔다.
1927년 5월21일자 동아일보에는 강습회와 조선의학전문학교 기성회 조직 사업에 대한 장문의 기사가 실려 있다.
“장미는 어떠한 이름을 거기에 붙이더라도 그 향기는 언제든지 장미인 것과 마찬가지로 于先(우선) 講習(강습)이라는 이름으로라도 조선여자들에게 醫學上(의학상) 技術(기술)과 學術(학술)을 가르치겠다는 목적으로 그 같이 강습회를 개최하는 것이라는데… 근 70평생을 조선과 조선동포를 위하여 심혈을 다해서 犧牲的(희생적) 勞力(노력)을 아끼지 아니한 許乙(허을) 부인이 이번 사업에도 오로지 精誠(정성)을 다하고 있음으로 재단설립도 仝夫人(동부인)의 손에 이루어질 것은 의심 없는 일이더라.…”
로제타 홀은 영국계인 로즈벨트 렌슬러와 포에베 셔우드의 3자매 중 장녀로 뉴욕 리버티에서 태어났다. 로제타는 체스트넛 릿지 지역학교와 리버티 보통학교(Liverty Normal Institute)를 거쳐 1883년 오즈웨고(Oswego) 학교를 졸업했다. 그뒤 벧엘 근처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체스트넛 릿지 지역학교로 돌아와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1886년, 로제타는 인도 선교에 대한 한 외부 강사의 강연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아 필라델피아의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에 들어갔다.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의 간호병원과 소아과병원에서 6개월간 인턴과정을 거친 그녀에게 감리교 여전도 기관(Deaconess’s Home)은 맨해튼 빈민지역 진료소에서 일할 것을 권유했고, 로제타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로제타는 사실 병약한 소녀였다. 어린 시절 척추에 이상이 있어 몇 차례 수술을 받았고, 20대가 될 때까지도 완치되지 않은 상태였다. 의과대학에 다닐 때는 목에 결핵성 종양이 생겨 역시 수술을 해야 했다. 그래서 로제타는 자신이 의사로서의 자격이 없는 게 아닌가 고민에 빠지곤 했다.
그런 로제타가 어떻게 험난하기 이를 데 없는 의료선교사의 길을 선택하게 됐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소 길지만 1927년 11월 코리아미션필드지에 기고한 글 ‘현장에 대한 나의 소명’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내 가장 어렸을 때의 회상들 중 하나는 어머니가 내게 엘리자 에그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신 기억이다. 시적으로는 ‘천 명이나 되는 딸들의 어머니’라고 불렸는데, 그녀는 어느 외국 현장도 마다하지 않은 최초의 독신 여성 선교사였다. 그녀는 1839년 외국에 나가기 전 뉴욕주 리버티를 방문해 조부 길더스리브의 집에 손님으로 있으면서 당시 10세에 불과했던 내 어머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길만 열렸더라면 나는 어머니 스스로가 선교사가 되고 싶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머니가 해주신 이런 이야기들이야말로 나에게 선교사가 되고픈 충동을 일게 한 최초의 것이었다. 또한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나는 미국 인디언에 대한 책을 두어 권 읽었는데 그 책들은 인디언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언젠가 그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소원을 품게 했다.
나는 리버티 보통학교 및 오즈웨고 학교에서 교사로 훈련받았다. 어렸을 적 품었던 선교에 대한 비전은 시들기 시작했고 공립학교 교사라는 경력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던 때였다. 그 즈음 나는 어느 일요일 아침, 리버티에 있는 고향 교회에서 케너드 챈들스 부인이 인도 여행에 대해 연설하는 것을 들었다. 이 연설은 인도여성에게 복음 전도자와 의사가 매우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는 것이었고, 나의 가슴은 즉각 응답했다.
만일 챈들스 부인이 인도에서의 교육사업과 교사의 필요성에 대해 연설했었다면 나는 그렇게 봉사하겠다고 제안했을 것이며, 내가 조선에 갔던 것보다 몇 년 더 일찍 교사로 해외에 나갈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나는 챈들스 부인이 그때 일반 교육봉사(문맹퇴치) 쪽을 나에게 강조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의사가 되어 조선에서 봉사하도록 예정하신 하나님의 가호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복음 전도 사업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동인도 여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의사가 되어 그들을 돕는 것이라고 결정 내렸다.
나는 자연과학을 좋아했으며 또한 오스웨고의 자연과학 담당 교사인 여의사 매리 리 박사를 존경했다. 어머니는 나를 격려해주셨고 나는 우리 목사님인 J. W. A. 도지와 함께 라틴어를 공부하며 필라델피아에 있는 여성의과대학에 입학할 준비를 했다. 1889년 3월에 나는 마침내 그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나는 몇 가지 신체적 장애를 갖고 있으며, 그런 장애는 많은 사람들과 친구들을 낙담시킬 만한 것이었다. 목사님조차도 내가 외국 현장에 가는 것을 말렸다. …뉴욕시에서 몇 달 동안 의료 선교사업을 하는 동안 나는 의사로서 몇 가지 매력적인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그 무렵 나는, 여성들을 위해 마운트 홀요크(Mt. Holyoke) 신학교를 설립한 마리 라이온스(Mary Lyons)의 연설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만일 당신이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자 한다면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하는 곳에서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을 하십시오.”
이후 그 이야기는 좀더 쉽거나 좀더 돈이 되는 일에 대한 유혹이 생길 때마다 나를 확고하게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
당연히 나는 인도에 갈 것으로 기대하며 (의학공부를) 시작했으나 필라델피아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리고 이후 뉴욕시에 있는 동안 중국인들을 위한 일요 학교에서 가르치며 중국과 중국 여성의 무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여성해외선교회(WFMS)에 중국을 나의 희망지역으로 신청했으나 그들은 나중에 인도보다 더 절실한 도움이 필요한 조선의 북쪽 현장을 파견지로 결정하였다.”
로제타가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을 만난 것은 1889년 11월, 뉴욕시 가두진료소에서였다.
어느 날 간호원 젠켄스가 닥터 홀의 진찰실로 들어서면서 새 소식을 전했다.
“닥터 홀, 새 의사가 오셨어요. 닥터 로제타 셔우드라고, 선생님을 도울 분이에요.”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스테이트 선의 소아과병원에서 인턴과정을 마친 로제타는 윌리엄이 책임자로 있던 뉴욕시 메디슨가 선교진료소의 의무 복지사로 발령 받았다. 윌리엄은 로제타에게 한눈에 반했지만 내색을 않고 엄격한 선배로서 모든 서류를 차근히 읽은 뒤 위엄 있는 표정으로 인터뷰를 계속했다. 몇 해가 지난 후 그의 아내가 된 로제타에게 윌리엄은 “첫날 인터뷰 때 자기를 꽤 높여서 선전하느라 열심이었다”는 말을 하며 그녀를 놀리곤 하였다.
윌리엄 제임스 홀은 1860년 1월 캐나다 온타리오주 글렌 뷰엘의 농가에서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뒤를 이을 생각이 없던 그는 17세 때 공부를 중단하고 목공 견습생이 되었다. 그러나 2년이 채 안돼 폐가 나빠져, 고향으로 돌아와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건강은 기적적으로 회복되었고 이때 그는 “다시 주어진 인생을 값지게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죽을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목수로 일생을 마쳤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1883년 교사자격증을 취득한 윌리엄은 교사로 일하며 생명보험회사 세일즈맨까지 겸해 돈을 모았다. 그리고 2년 후, 온타리오주 킹스턴에 있는 퀸즈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해 대학의 YMCA 지부를 조직하고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재학중 국제 의료선교회 이사인 조지 도우넛 박사를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찾게 된다. 윌리엄은 그를 통해 뉴욕의 국제의료선교회에 의료선교사 양성을 위한 훈련제도가 있다는 정보를 얻는다. 윌리엄은 그 길로 뉴욕의 벨레뷰병원 의과대학으로 가서 3, 4학년을 마치고 1889년 졸업과 함께 의사 자격증을 받았다. 첫 직장이 바로 메디슨가 선교진료소였고, 그곳에서 로제타를 만난 것이다.
윌리엄은 사재를 털어가며 의료와 선교에 헌신하고 있었다. 10대 청소년 시절부터 해온 어린이 주일학교 일에도 열심이었다. 로제타는 닥터 홀을 깊이 존경하게 됐다. 선교사로서의 삶을 위해 결혼은 예정에 없는 계획이었지만 그해 크리스마스를 시작으로 계속된 홀의 청혼을 받아들여 1892년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
로제타와 만날 당시 윌리엄은 중국 파견을 앞둔 예비 선교사였다. 약혼 후 로제타는 예비 남편과 같은 임명을 받기 위해 뉴욕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협회에 등록을 했다. 이들은 감리교 선교 부의 방침에 따라 인도나 중국으로 나누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바라던 대로 1년이란 시간차를 두고 조선에서 극적인 해후를 하게 되었다.
먼저 파견된 이는 로제타였다. 1890년 10월14일 로제타는 조선에 파견된 최초의 여의사 메타 하워드(Meta How ard)의 후임으로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1개월 후 로제타는 감리교에서 운영하던 조선 최초의 여성병원 보구여관의 책임자로 임명됐다. 로제타는 1893년 8월23일 평양에 갈 때까지 그곳에 근무하며 병원을 크게 발전시켰다. 1897년에도 6개월간 병원을 맡아 운영했다. 후에 이곳은 동대문 부인병원으로 발전했고, 지금은 이화여대 부속병원이 되었다.
로제타는 선교사 생활 초기의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첫날 진료소에서 4명의 환자를 보았습니다. 다음날은 9명이었고, 이후 석 달 동안 통틀어 549명을 진료하였습니다. 진료 기록에 있는 진단 명을 보니 피부병, 안질, 귓병 등 50가지 이상의 다양한 질병이었습니다. 현재까지 입원환자는 9명입니다. 왕진은 21번을 했습니다(로제타는 그후 3년간 1만4천여 명의 환자를 치료하게 된다. 신혼 시절이었으나 남편 윌리엄이 감리교 감독 지시로 평양에 파견되는 바람에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외과 환자중 한 명은 수탉 한 마리와 암탉 3마리를 보내주었습니다! 16세인 그 젊은 여성환자는 수년전 화상으로 세 손가락이 붙어 손바닥 쪽으로 굽어 자라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를 병원에 입원시킨 뒤 마취를 하고 손가락을 분리해 각각 붕대로 감았습니다. 그리고 똑바로 펴서 부목을 대주었습니다.
나는 절개한 피부로 최대한 이식하려 노력했지만 아직 피부가 없는 부위가 남아 있었고 말이 잘 안 통했기 때문에 피부이식의 필요성을 환자에게 이해시킬 수 없었습니다. 나는 몇 조각의 피부 이식 편을 내 몸에서 떼어냈습니다. 다음으로는 환자로부터도 몇 조각을 떼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환부를 드레싱하면서 통역을 맡은 로드웨이터(Rothweiter) 양이 사태를 제대로 납득시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크리스마스날까지 상처는 거의 다 아물었고 다음날 나는 그녀를 집에 보냈습니다.
며칠 뒤에는 한 남자가 전날 내가 난산을 도와주었던 부인에게 줄 약을 타러 왔습니다. 나는 차라리 내가 가서 환자를 보는 것이 낫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비가 왔기 때문에 그 남자는 내가 비를 뚫고 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귀수’가 그에게, 내가 한국 여자에게 피부까지 떼어 주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병원에서 일하던 봉선 어머니도 나처럼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려면 성경을 좀더 읽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비록 내가 사람들에게 뭔가 보여주기 위해 그런 일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것이 그들에게 큰 인생의 교훈이 되었던 듯했습니다.
또 병원에 있던 한 조선인 보조원이 성공적인 백내장 수술 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의사가 맹인에게 눈 하나를 주었다. 그러고 보면 모든 직업 중에서 의사가 제일”이라고 하는 말도 들었습니다. 나는 이 한국 남자같이 비전문적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선교 현장에서 의사라는 것이 매우 큰 도움이 됨을 보았습니다. 영혼 깊숙한 곳으로부터 이런 식으로 이웃의 삶을 도울 수 있는 특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한편 로제타는 이화학당에서 심리학과 약학을 가르쳤고, 병원 조수들에게 인체의학을 가르치기 위해 사람의 골격을 교습자료로 쓸 구상도 했다. 무심결에 어린 조수들에게, 지난봄 남산 성 밖에서 주운 사람 해골을 가지고 가르치겠다고 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선교사들은 깜짝 놀라 주의를 주었다. 왜냐하면 사람들 사이에 외국인들이 조선 아이들을 잡아먹고 약으로 쓴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제타는 유골을 공공연히 교실로 가지고 가 사람들을 놀래키기보다는 학생들을 방으로 불러 개별적으로 보여주며 가르치는 길을 택했다. 1891년 10월 27일의 일이었다.
같은 해 12월15일, 존즈 목사가 전보를 갖고 병원으로 왔다.
“기뻐하십시오, 새 의사선생님이 오십니다. 닥터 윌리엄 제임스 홀이 부산에 도착했답니다.”
로제타로서는 너무도 고대하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게 된 감격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1892년 6월27일 두 사람의 결혼식이 거행됐다. 앞으로의 노고를 미리 보상이라도 하듯 조정에서는 군악대를 보내 축하해주었다. 또 신부는 미국 국적이고 신랑은 캐나다인이었기 때문에 미국공사관과 캐나다 공사관을 번갈아가며 두 번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 모두 장안의 화제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결혼 전후 윌리엄은 여러 차례 평양 등 북부지역 선교지 개척을 위한 여행에 나섰다. 자연히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적었다. 8월에는 신혼부부의 사정을 감안하지 않은 감리교 감독의 발령에 따라 남편 윌리엄이 평양선교기지 개척자로 임명돼 평양으로 떠났다.
2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1894년 5월4일에야 로제타도 평양으로 갈 수 있었다. 역시 감독의 명령에 따라서였다. 그녀의 품 안에는 태어난 지 6개월 된 아들, 셔우드 홀이 안겨 있었다. 로제타는 당시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가 가는 길을 인도하시는 주님, 주님의 일을 하는 것도, 인생 길도, 반드시 평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각오하게 해주시고, 기쁜 일에나 슬픈 일에나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게 해주시고, 오직 주께만 의지하고 주님만을 사랑하게 해주소서.”
이들은 평양에서 살 집을 구하기 위해 모금을 했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선교사 자녀들이었다. 닥터 홀이 어린이들에게 선교용 집이 필요하다는 설명을 하자 한 어린이가 나섰다.
“그런 일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 ‘집을 주세요’라고 기도하겠어요.”
윌리엄은 후에 그때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어린이들의 기도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직접 청원을 드렸다. 곧 응답이 왔다. 기도회가 끝나자 버티 올링거가 반짝이는 은화 1달러를 갖고 내 방에 왔다. “닥터 홀 여기 1달러를 평양 집 사는데 보태 주세요. 더 드리고 싶지만 제가 가진 돈은 이것뿐입니다.” 다음에는 그의 누이동생인 아홉 살 꼬마 소녀 윌라가 10센트를, 뒤이어 오거스터 스크랜턴이 50센트를 가지고 왔다. 이때 하나님의 자녀들인 이 꼬마들이 가져온 돈은 불과 1달러 60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빵 5개와 2마리 생선으로 5000명의 군중을 먹이신 하나님은 이 아이들의 선물을 8개월 후 1479달러 99센트로 불려주셨다.”
막상 닥터 홀 가족이 선교부에서 구입한 평양 집에 이사 오자, 평양의 관리들은 도시가 외국인들에게 넘어가기 시작했다며 몇몇 주민을 자극하였다. 결국 이들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조선인 기독교 일꾼들이 체포되고 로제타가 묵은 집에는 돌이 날아드는 일이 벌어졌다.
집을 판 사람과 닥터 홀을 도왔던 기독교인 김창식(뒤에 조선 감리교 초대목사가 됨) 형제 등이 관아에 잡혀갔으며, 이들이 심한 매를 맞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소식에 닥터 홀은 관가와 서울 감리교본부에 구조요청을 하기 위해 기진맥진할 정도로 뛰어다녔다. 당시는 외국인의 토지소유가 허용되지 않을 때였다.
한편, 로제타 모자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구경꾼들이 몰려왔다. 서양 여자와 그 아들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아이의 눈이 파란 것을 보고 “사람이 아니라 개”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여성들은 자기들끼리 10명씩 조를 짜 계속 들락거렸고 늦은 밤까지 문 창호지에 구멍을 내면서 들여다보았다.
“김창식이가 매를 덜 맞게 하고 싶지 않소? 김창식이가 맞을 매를 감해줄 테니 엽전 10만냥을 내놓으시오.”
이렇게 뒷돈을 요구하는 관리도 있었다.
5월11일, 평양감영에서 전보를 받았다는 전갈이 왔다. 그러나 그 내용은 오히려 홀 내외의 심경을 어둡게 했다.
“보시오, 서양 양반. 한성에서 기별만 오면 살 판이 열리는 줄 알았겠지만, 한성의 공관장들이 상감을 알현했어도 우리 상감마마께서는 평양은 예수를 전파할 곳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는 게요. 그리고 홀 의사는 나쁜 사람이니 그와 함께 모든 기독교 신자들을 오늘 다 참형에 처하라고 감사에게 어명을 내리셨소!”
이는 그들이 홀 부부를 위협하려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결국 홀박사 집에 물을 대주던 사람들마저 발길을 끊었다. 그럴 경우 태형에 처한다는 공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닥터 홀은 돈을 주고서라도 김창식을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김창식은 죽을망정 그런 돈을 낼 수는 없다고 윌리엄을 말렸다.
고문을 당하고 돌에 맞은 평양 기독교인들은 죽음 직전, 서울에 있는 영국공사(公使)가 평양감사에게 보낸 전보로 인해 겨우 풀려났다. 목숨을 걸고 도왔던 김창식에 대해 닥터 홀은 “그리스도를 위한 매우 큰 순교자인 그의 발 밑에 무릎 꿇고 싶다”는 말을 했다.
사태가 진정되면서 로제타는 하루 18~19명의 환자를 돌봤다. 또 환란중에서도 시각장애인에 대한 교육을 시작했다. 그러나 1894년 6월6일, 현지의 위험과 전쟁발생에 대한 우려로 로제타는 평양에 온 지 한 달여 만에 서울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8월 1일, 드디어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얼마 후 평양은 청·일 양군의 결전지가 되었다. 닥터 홀은 평양에 두고 온 신자들 걱정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10월1일, 선교사들은 평양을 향해 길을 떠났다. 닥터 홀과 장로교의 모페트 목사가 함께 갔다. 결전 후 3주가 지났지만 피난 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썩어 가는 시체들로 인해 공기는 몹시 더럽혀져 있었다.
신변 위험을 우려한 감리교 서울본부의 빗발치는 귀환 요청에도 불구하고 닥터 홀은 의사로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다며 평양에 계속 머물렀다. 부상자 치료에 혼신의 힘을 다하던 그는, 결국 격무와 발진티푸스 감염으로 운명하고 말았다. 1894년 11월24일, 결혼 2년5개월 만에 34세로 유명을 달리하고 만 것이다.
로제타는 당시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내게 말하려 한 것은, 그가 평양으로 간 것을 후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 일을 하였고 하나님이 나에게 갚으실 것’이라는 말도 했다. 나는 내 방으로 가 어린 셔우드를 품에 안고 아이와 나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간구했다.”
닥터 홀과 함께 부상병 치료현장에 있었던 모페트 목사는 또 이렇게 적고있다.
“부상자의 국적을 가리지 않고 어느 환자를 대하든지 그것이 첫 경험인 것처럼 겸손하고 조심스러웠으며 또 언제나 최후의 환자를 다루는 것처럼 정성을 다했다.”
윌리엄은 선교 여행을 할 때에도 자기 몸보다 작은 조랑말을 타는 것이 마음에 걸려 말과 함께 항상 걸어다녔다고 한다. 한번은 외도하는 남편을 ‘고쳐준다’는 외국인에게 거액을 뜯긴 여성이 찾아와 “당신도 외국인이니 대신 갚으라”는 억지를 쓴 적이 있었다. 같이 일하던 조선 신자들은 모두 말렸지만 닥터 홀은 “같은 외국인으로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며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그 여성에게 주었다고 한다.
남편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로제타는 1894년 12월 리버티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 로제타는 위험한 평양에서도 목숨을 걸고 자신을 도왔던 충실한 여조수 박에스더와 동행했다. 에스더가 그토록 소망하던 의학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박에스더의 남편 박유산도 함께 했다.
박에스더의 본명은 김점동이다. 14세 때부터 이화학당에 다녔고 영어를 잘해 로제타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통역사였다. 로제타는 박에스더 부부의 중매를 서는 등 신앙심 깊은 조선 처녀에게 큰 애정을 쏟아부었다.
박에스더는 조선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서양의학을 공부했다. 1900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 졸업 후 조선에 돌아와 광혜여원에서 로제타와 함께 한 달에 300여 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시각 장애아들에게 점자 악보를 익히게 하고 오르간을 가르치는 등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910년, 의사가 된 지 10년 만에 미국에서 자신을 뒷바라지하다 운명한 남편처럼 폐결핵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
로제타가 리버티에 도착한 지 얼마 안 있어 셔우드의 동생 에디스 마거리트가 태어났다. 홀 여사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귀여운 에디스가 자기 엄마가 태어난 집에서 처음으로 그녀의 파란 눈을 떴다. 에디스 마거리트 아빠가 가장 좋아하던 이사야 43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셔우드는 극동인 한국에서 태어난 반면 에디스는 15개월도 지나지 않아 1만 마일이나 떨어진 뉴욕 리버티에서 출생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로제타가 미국에 머무르던 1897년 2월1일, 평양에 홀 기념 병원이 개원했다. 이 건물은 선교회로부터의 어떠한 경제원조도 없이 그의 아내 로제타와 조선의 친한 친구들, 그리고 고국 친지들의 노력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그 사이 로제타는 미국에 머물며 남편 닥터 홀의 전기 ‘The Life of Rev. William James Hall. M. D.’를 완성했다. 아울러 조선 의료선교지원을 위한 모금강연에 나섰으며 평양맹아학교 점자교육을 더욱 본격화하기 위해 뉴욕포인트식 한글점자 개발에 나섰다. 1897년 11월10일, 로제타는 조선의료선교에 대한 소명의식과 계속 되는 조선의 부름으로 인해 두 아이를 데리고 다시 먼 여행길에 오른다. 비탄 속에서 조선을 떠난 지 3년 만이었다.
여성해외선교회는 그녀가 조선에 처음 부임하던 당시 일했던 보구여관에서 다시 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다음해인 1898년, 그녀는 평양으로 갔다. 로제타는 남편의 유언을 생각하며 홀 기념병원에서 열심히 일했다. 매일 환자수가 늘어나는 가운데 맹아들에게는 뉴욕에서 연구해온 점자를 가르쳤다. 로제타의 얼굴은 기쁨과 소망으로 빛났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까지 유쾌하게 만드는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898년 5월, 가족 모두 세균성 이질에 걸렸고 그로 인해 같은 달 23일, 세 살 난 딸 에디스가 사망하고 만 것이다. 로제타는 일기에 또 이렇게 쓰고 있다.
“또 하나의 큰 슬픔이 우리에게 왔다. 우리가 첫 번째 큰 슬픔을 당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셨던 귀중한 작은 위로자(에디스)가 우리가 미처 새 보금자리인 평양에 정착하기도 전에 우리의 사랑하는 품에서 사라졌다.”
에디스는 아버지인 윌리엄이 묻힌 양화진으로 운구됐다. 로제타는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없었다. 장례를 집전한 아펜젤러 목사는 홀 여사에게 편지를 써 위로했다.
“그녀는 지금 아빠의 품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 때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 가족의 절반은 이미 하늘나라에 가 있습니다.”
1898년 6월18일, 로제타는 슬픔 속에서도 평양 최초의 여성병원인 광혜여원을 개원했다. 병원이름은 남편이 살았을 때 자신들을 심하게 핍박했던 평양감사로부터 빌려온 것이었다. 감사의 아내를 치료해준 인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1920년, 홀 기념병원과 광혜여원은 평양연합기독병원으로 합쳐졌다. 같은 해 8월에는 에디스를 기념한 우리나라 최초의 소아과 병동을 지었다. 이 건물은 평양에 세워진 최초의 2층 건물이었으며 대동강물 대신 깨끗한 물을 공급하기 위한 커다란 물탱크가 설치되었다.
또 여기서 5년간 일하며 수련을 받은 조선 여의사 그레이스 리 부인이 일제로부터 개업의사 자격증을 얻는 일이 벌어졌다. 그녀는 조선 최초의 여성 개업의가 되었다.
로제타는 선교활동 내내 여성교육에 큰 관심을 보였다. 1914년 로제타가 감리교선교단에 보낸 보고서에는 5명의 여자의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구세군병원 의사들로 하여금 교육을 맡게 한 뒤 1년 과정이 끝나면 시험으로 마무리를 하는 것이었다. 또 총독부에서 세운 의학교를 여성에게도 개방토록 제안하고 직접 경비를 준비하기도 했다. 여자의학교육을 위한 대여장학제도도 마련했다.
병원의 약제사, 수간호사와 조산원, 조무사 등에게도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필요한 병원인력을 자체 양성한 것이다. 학년이나 직급에 따라 제복을 달리하는 등 학사관리도 엄격했다.
또한 시내에서 열리는 성경강습회에 의사나 교육 과정을 마친 간호사를 배치해 위생학 강의를 하도록 했다. 참석자들은 다시 이것을 자신들의 마을에 가서 가르쳤다. 여성들은 매우 열정적으로 듣고 빠르게 익혔으며 배운 것을 당장 실행에 옮겼다.
1900년 5월, 로제타는 에디스 사망 2주기를 맞아 셔우드와 함께 중국의 체후라는 곳으로 가 잠시 쉬면서 새로 시작할 농아교육자료를 준비했다. 어린 딸을 잃은 슬픔은 옅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참기 힘들어졌다. 일기에는 ‘만약 주님이 사랑하는 딸을 데려가시지 않았더라면 예수를 더 잘 의지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비밀스런 안타까움이 묻어 있다.
“이것은 선교사가 말하기에는 매우 어울리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가 두려워하는 평범한 현실이란다. 어쩐지 엄마는 이 상처를 의지력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단다. 신성모독 죄 같은 것! 불쌍하고 바보 같은 이 엄마! 주님은 엄마를 계속 가엾어하시는구나. 주님의 성령이 엄마를 깨우치시고 침체된 상태의 영혼에서 빠져 나오도록 도와주실 거야. 당신께서 나를 꾸짖으시고 내가 꾸짖음을 당하나이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황소처럼 주여, 나에게로 돌이키겠나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여기서 우리는 로제타의 인간적 고뇌의 절정을 보게 된다. 중국에서 돌아오자 더 많은 슬픔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떠나 있는 동안 그녀의 어머니가 미국의 고향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일기에 슬픔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어와 영어의 동음어(同音語)에 착안한 유머러스한 표현이 그것이다. 외국 선교사로서는 ‘생선’과 ‘선생’이 늘 혼동된다는 말도 하고 있다. 이런 구절도 나온다.
“왜 선교사는 일전짜리 동전 한 잎처럼 보잘것없는 존재일까(Why is a miss ionary like a penny)? 왜냐하면 선교사는 보내심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Becouse he is one sent(=cent).”
로제타가 여성교육 못지 않게 열정을 바친 것이 맹아와 농아에 대한 교육이었다. 로제타는 1909년 5월 코리아미션필드지에 기고한 글에서 농·맹아 교육을 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이곳 지상에 계셨을 때에 우리에게 아픈 이들뿐만 아니라 눈먼 이들과 말 못하는 이들을 동정하고 도우라고 가르쳐주셨음을 기억합시다. 그는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그는 귀먹은 자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자가 말하도록 하셨습니다. 불쌍한 자를 위하여 복음을 전도하라. 그리고 나를 거스르지 않는 모든 자에게 축복 있으라.”
로제타는 1894년 조선 최초의 시각장애아 학교인 평양여맹학교를 세웠다. 1897년에는 직접 고안한 뉴욕식 한글 점자를 가르쳤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맹인에게 행한 최초의 점자 교육이었다. 이는 1926년 기독교인 박두성이 훈맹정음 점자를 발명하는 데 큰 자극제가 되었다. 190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농아학교를 세웠다.
로제타는 오봉래라는 학생에게 처음 점자를 가르쳤다. 그녀는 후에 유능한 특수교육 교사가 되었다. 또 닥터 홀은 김성실이라는 학생을 아껴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게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맹인 영문과 졸업생이 된 그는 통역사로서 늘 홀 여사와 함께 했다. 1993년 문교부에서 발간한 특수교육백서에 따르면, 로제타는 여러 곳의 병원장이면서 1925년까지 무려 26년간이나 맹아학교와 농아학교의 교장직을 수행했다.
당시는 그나마 여유 있는 집안 출신 맹아만이 안마사나 무당 같은 직업을 가질 수 있었고, 대부분은 돼지 움막처럼 더러운 방에 갇혀 학대받다가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한 채 죽어가던 시대였다. 심지어 경기도의 한 할머니는 손녀에게 독약을 먹이려다가 선교사들의 경고로 눈물의 참회를 하기도 했다.
홀 여사는 이렇듯 불행한 사회환경을 장애자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점자로 성경을 가르치고 맹학교 조수, 점자제작, 사진관 보조 등의 일에 종사할 수 있게 했다. 또 인쇄술, 뜨개질, 재봉술, 수선법, 요리, 세탁, 편물, 다리미질, 바구니 제작, 돗자리와 짚신 삼기 등 다양한 기술을 가르치며 취업의 길을 열어 주었다. 평양맹학교는 계속 발전해 1915년경에는 학생 수가 55명이 되었고 총독부 장학금으로 동경 유학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재정적 어려움이 커 홀여사가 은퇴한 1935년부터 광복까지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로제타는 조선 맹아·농아 교육의 개척자일 뿐 아니라 지금부터 100여 년 전 이미 오늘날과 같은 장애인 교육 및 훈련에 나서고 취업제도 마련에 앞장선 개척자라 할 수 있다.
1914년 로제타는 평양에서 ‘동양 맹아·맹인학교 학술발표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조선과 중국, 일본 대표가 참석했다. 대회는 성황리에 끝나 시각 및 청각장애인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로제타의 외아들인 셔우드 홀은 커가면서 사업가의 꿈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10대이던 1907년 8월, 원산에서 열린 한 모임에서 1907년 기독교 대부흥기의 주역이던 하디 선교사의 설교에 감명받아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가 감명 받았던 하디의 설교 내용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다.
“아무리 높은 이상과 동기라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데 필요한 영적 힘이 없다면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기억하라, 그 힘은 항상 기도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 육체의 힘도 날마다 음식에 의해 유지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힘도 오로지 매일 매일의 기도를 통해서만 강해질 수 있다. …우리의 결심 역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영광이 되기를 바라는 데서부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닥터 셔우드 홀은 조선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인이며, 최초로 결핵 전문병원과 결핵요양소를 세운 인물이자,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한 사람이다. 결핵 퇴치 자금 마련을 위해 발행한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에는 조선의 상징인 남대문이 그려져 있다. 애초 셔우드는 거북선을 도안으로 삼으려 했으나 일제에 의해 불발됐다. 그럼에도 굽히지 않고 다시 남대문을 그려 넣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그의 자서전 ‘닥터 홀의 조선 회상(원제 ‘아시아:한국에서 청진기와 함께)’은 보배라는 이름의 가엾은 해주(海州) 소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시집갈 날을 받아놓은 보배는 결핵에 걸려 몸져눕고 만다. 당시 인구 4명 중 1명이 걸린 것으로 추정되는 결핵은 조선 사람들에게 천형(天刑)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느 화사한 봄날 보배는 곱게 차려입고 가족과 함께 황해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소풍을 갔다. 기침과 침의 고통에서 해방된 보배는 활짝 핀 진달래꽃 사이를 누볐다. 그러나 음식 준비를 끝낸 가족들이 그녀를 찾아냈을 때는 이미 꽃 한아름을 품에 안은 채 쓰러져 숨져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셔우드 홀은 바로 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보배가 쓰러진 진달래꽃무더기 자리에 조선 최초의 결핵병원을 세웠다.
이 회고록은 감동적인 ‘만세’ 장면으로 끝이 난다. 아내인 닥터 버텀리와 함께 15년간 이 땅의 결핵 퇴치를 위해 헌신한 셔우드 홀은, 그 공로로 조선 총독과 일본 천황으로부터 표창을 받은 경력이 있음에도, 결국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당하고 만다.
부산항을 떠나기 직전 셔우드 홀 가족은 눈물 속에 작은 의식을 치렀다. 셔우드는 가족들 앞에 수놓은 아름다운 태극기 한 장을 꺼냈다. 해주를 떠날 때 조선인 친구가 준 것이었다. 일가족 5명은 나뭇가지에 그 태극기를 걸어놓고 “조선의 진정한 국기를 향해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허킨스의 시 ‘연의 문(年의 門)’을 낭송했다.
“나는 年의 門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말했네 / 빛을 주시오 / 그래야 내가 미지의 세계로 안전히 걸어 들어갈 수 있소 / 그는 대답했네 / 어둠에 들어가시오. 그리고 하나님 손을 잡으시오 / 그리 하는 것이 빛보다 나으며 뜻 있을 것이오”
아래 글은 고려대 의대와 간호대의 로제타 홀 클럽이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 지 110주년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 손녀인 필리스 홀 킹 씨가 한 답사의 일부분이다.
“로제타 홀 선교사가 1928년 9월 4일 설립한 여자 강습소는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및 간호대학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도 천국에서 매우 자랑스러워 할 것입니다.
…제가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뵌 것은 우리 가족이 캐나다와 미국에서의 안식년을 마치고 인도의 선교지로 돌아가기 직전인 1948년 가을이었습니다. 저는 14세였고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뉴욕주의 애디론닥 산에 위치한 새라낙 호수까지 여행을 했습니다. 할머니는 거기서 휴가를 보내고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제가 너무도 좋아하는 시리얼 넣은 빵을 만들어주셨고 만드는 법도 가르쳐주셨습니다.
제 기억으로 할머니는 키가 매우 작으셨고,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척추 만곡증으로 인해 등이 굽어 있으셨습니다. 할머니는 저를 포함해 모든 여자가 의사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과학 과목은 제가 좋아하는 과목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록 저의 부모님과 저의 조부모님 모두 의사이셨지만 저는 의사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1951년 4월5일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히말라야 산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선교지였던 마다르(Madar) 결핵 요양소에서 사역중이셨습니다. 여태껏 제가 보낸 편지 중 가장 쓰기 힘들었던 것이, 바로 할머니를 너무도 사랑했던 아버지에게 보낸 위로의 편지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정말로 우리 할머니를 ‘만난’ 것은 1970년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아버지의 자서전인 ‘아시아 : 한국에서 청진기와 함께’의 원고를 타이핑하고 편집하는 일을 했습니다. 어느 여름날, 아버지는 수년치에 해당하는 할머니의 일기 몇 권과 기도 달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거기에는 한국에서 사역중인 모든 종파 선교사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달력에 그 이름이 적혀 있는 날에는 그들을 위해 특별 기도를 하셨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그 책들을 일기 겸 기도책으로 사용하셨습니다. 할머니가 일생 동안 충실히 써내려간 기록, 그렇게 다양한 흥미와 관심을 가졌던 한 여성의 인생 기록을 훑어보면서 우리는 참으로 귀중한 보물들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일기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 중 한 권에는 9세 무렵 로제타가 그녀의 고향사람들에게 한 짧은 설교의 매력적인 도입부도 적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에 읽었던 할머니의 매우 인상적인 업적들보다 더욱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또한 그것은 14세 소녀의 미숙한 감정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할머니가 이러한 기록을 통해 저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할머니 자신과 지나간 세대, 지나간 세월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로제타! 그 용감한 겉모습 밑에 감추어져 있었던 슬픔과 의로운 투쟁은 장애인 등 어려운 이웃의 삶을 개선하려는 사명감과 위로자 성령을 쉼없이 바라보는 가운데 사라져갔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외로웠으나 의로웠던 순례자, 로제타 셔우드 홀 의료선교사의 반세기를 조명해 보았다. 참으로 특별한 감동을 주는 인생의 파노라마가 아닐 수 없다. 홀 여사 부부와 아들 내외의 해외봉사기간을 합치면 무려 128년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위대한 의료봉사 가족공동체의 중심에는 늘 로제타 홀 여사가 있었다.
의사·기독교인의 귀감
로제타는 늘 “여성에 의한 여성의 치료”를 강조했으며, “여자가 어머니가 되는 것과 의사가 되는 것이 무엇이 다르냐”며 여성도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을 폈다. 그녀는 탁월한 여성운동가였으며 어린이와 장애인, 소외되고 학대받는 이들의 천사였다. 그녀의 특별한 업적은 신앙인으로서의 자세까지 위협할 정도로 극심한 인간적 고통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
우리 기독교인 의사들 중에도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릴 만한 훌륭한 이들이 여럿 있으나, 오늘날에는 대체로 보상적 의료체계 속에서만 환자를 치료한다. 따라서 자기피부를 도려내 환자에게 이식해주며 참사랑을 실천한 로제타 같은 적극적 의사윤리는 요구하기 힘든 일이다. 그렇더라도 이 글이 소극적 의사 윤리, 즉 불필요한 제왕절개 수술이나 불법 낙태수술, 의료계 일각의 의료비 허위·부당 청구 등을 줄이는 데 작은 자극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또 이제 우리 사회 지도종교로 대체된 기독교는 양적 성장을 극복하고 초기 선교사들이 가졌던 경건성과 봉사의 실천적 소명의식을 속히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100여 명(1997년 현재)의 우리나라 의료 선교사들이 세계 오지에서 헌신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이라도 로제타 셔우드 홀 여사의 공적에 대한 바른 평가와 함께 훈장이라도 추서할 수 있었으면 한다. 아울러 ‘잊혀진 무덤’이 되어가고 있는 양화진 언덕에 외국인 선교사 기념박물관을 세워 그들의 노고에 대한 자그마한 보은이라도 할 수 있게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