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호

주도권 행사 부시, 평화연출 김정일, 체면유지 김대중

2002년 남·북·미 3각 게임

  • 정낙근 < 국제전략정보연구소 통일전략실장 >

    입력2004-11-04 11: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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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중 대통령은 2차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금강산사업을 제외한 다른 ‘어젠더’는 다음 정권과의 협상카드로 남겨놓을 가능성이 크다. 남북관계는 상반기까지는 평화분위기가 고조되고, 대선이 가까워 오면서 북미의 이해관계에 따라 경색국면이 될 가능성이 크다.
    9 ·11테러 이후 5개월이 지난 지금, 한반도를 중심으로 남·북·미 관계는 어떻게 전개돼 왔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유화와 강경 국면이 반복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한반도 정세가 대화 국면으로 들어섰다고 본다.

    반테러전쟁이라는 예기치 못한 악재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잠시 대결국면이 조성됐지만, 일단 미국을 비롯한 반테러 동맹이 아프간전쟁을 어느 정도 성공리에 마무리지음으로써 그간 유보됐던 한반도 대화와 협상의 시나리오가 다시 가동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될 것이다.

    물론 아프간전쟁이 지속되었더라도 미국으로서는 대(對)한반도 정책 재검토와 결정을 무한정 연기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반테러전쟁과 별개로 금년 봄쯤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정책을 확정하게 될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다만 반테러전쟁 이전과 달리 구체적 협상 아이템의 실효성과 협상주체들의 명분에 따른 역학관계 등에서 나타날 변화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월29일 부시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발표한 ‘악의 축’ 발언은, 미국이 그동안의 테러전쟁 성과를 정리하고 국익을 위한 미래의 세계전략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사용한 중요한 레토릭(수사)이라 할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과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했고 전세계가 이를 둘러싸고 논란에 휩싸였다.



    특히 북한이 악의 범주에 들어갔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의 대북 햇볕정책의 성과와 전도를 둘러싸고 우리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이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이 발언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는 반미-친미, 반DJ-친DJ, 여-야, 보수-진보 등의 중첩된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났다. 정작 직접 당사자인 미국과 북한은 우리의 ‘냄비체질적’ 갈등상을 그들의 국익과 관련지어 주의깊게 저울질하고 있는 것 같다.



    ‘한반도 게임’의 기본 전제


    9·11테러사태는 모든 면에서 많은 변화를 초래했다. ‘만약 9·11테러가 없었다면’이란 가정은 우리를 참으로 안타깝게 하는 대목이다. 물론 문명세계에서 자행된 야만적 행위를 응징하는 것이 절박한 과업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한반도 정세와 관련지어 볼 때, 9·11이 없었더라면 작년 10월16~18일의 제4차 이산가족 상봉과 10월18일 부시 대통령의 방한이 예정대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특히 부시 대통령의 방한은 한반도가 대화를 통해 평화의 큰 흐름을 타는 데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은 금년 12월 대통령 선거라는 중요한 정치일정이 놓여 있다. 때문에 자칫 한반도 관련 ‘외교게임’에 대단히 취약해질 소지가 있다. 따라서 2002년 한반도를 둘러싸고 북한과 미국 사이에 치열하게 전개될 외교전의 의미를 제대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한국은 국가적 차원의 대응책보다는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본의 아니게 북·미 게임의 대상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비록 상식 수준이긴 하지만 2002년 남·북·미 사이의 한반도 게임을 읽을 때 우리가 망각하기 쉬운 몇 가지 전제들을 우선 상기시켜 보자.

    첫째, 9·11테러가 미국의 세계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꿔놓는 계기가 됐음을 인정해야 한다. 9·11테러는 그 잔혹성과 과감성 면에서 지금까지 상상속에서나 존재했던 테러방법을 머리 밖으로 끌어냄으로써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악의 한계’를 무한대로 확장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는 상식과 합리성에 바탕을 둔 판단들이 틀릴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는 의미와도 통한다.

    둘째, 2002년 북·미의 대 한반도정책 목표는 2003년으로 예정된 핵과 미사일 협상에서 자국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있다. 김정일은 지난해 5월 스웨덴 페르손 총리와의 회담을 통해 미사일 발사를 2003년까지 잠정 유예하기로 한 바 있다. 또 1994년의 제네바합의도 일단 2003년이면 1차 시한이 마무리된다. 경수로 건설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아 2008년경에나 완공될 수 있을 것이란 보도도 있지만, 어쨌든 경수로 건설 지연에 따른 보상 문제와 경수로의 핵심부품 인도 이전에 특별 핵사찰 수용 여부 등을 중심으로 새로운 협상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이 문제는 북한을 설득할 수 있는 ‘펀드’가 어느 수준에서 합의되고, 또 어떻게 그 펀드를 만들어내느냐가 기본 관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은 미국의 비용 제공 규모를 대폭 줄이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돈으로 ‘악’과 협상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고, 또 북한도 벼랑끝 전술로만 대처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미국과 북한 등 외세가 한국의 대선을 ‘숨죽여’ 지켜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는 그 승패가 각국의 대미정책 수립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각국은 1년여에 걸쳐 미국에 ‘액션’을 거의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대선을 주변 국가들이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것이라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대한반도 정책의 실행을 유보할 나라는 없다.

    특히 김정일은 남한 대선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2002년 한 해를 마냥 손놓고 있을 수는 없다. 내년에 필요한 것을 금년 중 남한으로부터 미리 확보하려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남한의 대선 게임을 적극 활용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한국과 이해관계가 있는 나라들은 대선 결과에 개의치 않고 한국의 대선을 자국의 국익 확보를 위한 절호의 기회로 활용할 거란 얘기다. 각국이 특정 후보에게 베팅을 하지는 않겠지만, 설사 후보 선택에 차질이 생겼다 하더라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 충분히 만회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다.

    넷째, 김대중 대통령이 이미 레임덕에 빠져 있기 때문에 국내정치의 변화에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김대통령이 집권당 총재직을 버리고 국내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중요한 점은 여전히 그는 현직 대통령이면서 단임제 대통령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편으론 김대통령의 정책 결정력을 약화시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김대통령이 국내 정치권과 여론으로부터 심지어 미국으로부터도 구속받지 않고 정책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역대 대통령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김대중 대통령도 퇴임 이후의 안전에 관심이 많다. 김대통령은 퇴임후의 안전을 위해서 국내정치보다는 한국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라는 이미지를 고양하는 행보를 택할 것으로 보인다. 재임중 발생한 문제가 퇴임후에 불거지더라도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욕보여서는 안된다는 국내·외 여론에 기대어 자신의 안전을 모색할 것이다.

    때문에 김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의 권한을 충분히 활용해 그간 못다 이룬 한반도 평화 창출을 위해 더욱 적극적인 행보를 취할 것으로 생각된다. 국내 정치권과 시민사회에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긴 하겠지만, 미국이나 북한은 그의 행보에 적당하게 조응함으로써 반대급부를 얻으려 할 것이다. 대선 후보는 ‘어음’밖에 끊어줄 수 없지만 현직 대통령은 ‘현찰’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갈등은 대화를 예비한다. 갈등이 깊어질수록 중재자가 필요하다. 최근의 북·미 갈등 상황은 대화의 중재자를 필요로 하는 형국으로 볼 수 있다. ‘악의 축’ 발언으로 미국이 대북 강경으로 치닫고는 있지만, 이면에는 협상을 위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어떤 사안이든 근본적인 해결책에 당장 도달할 수 없다면 주어진 상황에서 실리를 확보하는 게 협상의 기본이다. 또 비용은 적게 지불하면서 효과를 크게 ‘체감’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갈등의 강도를 높이는 것이 유리할 수 있다.

    여섯째, 남북한과 미국 어느 나라든 2002년 상반기에는 한반도 정세가 경색되는 것보다는 평화 분위기가 되는 게 각자의 이익 확보에 유리하다. 그러나 선거가 다가오는 하반기로 갈수록 경색 분위기가 2003년의 협상에 더 유리할 것이다. 남북관계의 경색이 2003년 북·미 협상에서 양측의 협상 주도력을 높여주는 동시에 한국에 비용 부담도 적극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의 대선 정국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여기서 북·미가 한국 ‘대선 프로그램’을 가동시킬 여지가 생긴다. 한·미 정상회담 이후 미국의 대선 프로그램이 본격 가동되지 않을까 주목된다.

    전세계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의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이로부터 향후 남·북·미 사이에 전개될 수 있는 게임을 예상해보자. 먼저 부시 대통령의 연두교서에 나타난 ‘악의 축’ 발언과 관련된 주요 부분을 발췌한다.

    “미국은 두 가지 큰 목표를 지속적으로 추구할 것이다. 첫째는 테러기지의 소탕과 테러계획의 분쇄, 그리고 테러분자들에게 정의를 보여줄 것이다. 둘째는 화생방 무기를 소유하려는 테러조직과 체제들이 미국과 세계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9·11 이후 테러지원국가들은 숨을 죽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진정한 본질을 안다.

    북한은 주민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미사일과 대량살상무기(WMD)로 무장된 체제이다. 이러한 국가들(북한, 이란, 이라크)과 이들의 테러동맹들이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면서 악의 축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미국과 우리 동맹국들을 기습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효과적인 미사일 방어체제를 개발 배치해야 한다. 시간은 우리편이 아니다. 미국은 세상에서 가장 파괴적인 무기를 가지고 우리를 위협하는 세계의 가장 위험한 체제들을 용납해서는 안될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단지 시작일 뿐이다.”

    미 정부는 연두교서 발표와 함께 의회에 내년도 예산안을 제출한다. 각 부서의 장관들은 예산 편성의 합리성을 설명하기 위해 의회에 출석하여 보고를 한다. 재미있는 점은 ‘악의 축’이 적절치 못한 레토릭임을 미국과 전세계의 언론이나 전문가들 그리고 부시행정부를 제외한 대다수 국가가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무부, 국방부, CIA 책임자와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 각 부서의 중간 책임자 중 어느 누구도 진의가 잘못 전달되었다는 식의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과 이란을 이라크와 함께 다룬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에도 미행정부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부시행정부는 내년 국방예산으로 올 회계연도보다 480억달러 증액(14.5%)된 3790억달러를 제출해 놓고 있다. 이는 1980년대 초 레이건행정부 이후 최대 규모의 증가폭을 기록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의회에 보낸 메시지에서 “새 예산안은 단순한 수치의 나열이 아니라, 바라지는 않았지만 이겨야 하는 전쟁수행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새 예산안은 ‘전시 예산’으로 불린다. 결국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 발언을 한 첫번째 이유는 아무래도 미사일 방어체제 구축을 포함한 국방예산 확보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북한은 왜 ‘악의 축’에 포함되었을까. 이란과 이라크만 지목할 경우 자칫 이슬람권과의 문명충돌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기 때문에 북한을 끼워넣은 점도 있는 것 같다.

    비록 발언은 세련되지 못했지만 북한의 본질에 대해서는 명확히 규정했다.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 발언을 한 후 미행정부 고위관리들의 대북 관련 발언을 보면 “북한은 세계 제일의 미사일 장사꾼”(라이스 백악관 보좌관) “햇볕정책에도 북한은 변하지 않았다”(파월 국무장관) “평양 당국이 한반도를 북한의 통제하에 영구히 통일하겠다는 목표를 포기했다는 증거를 아직까지 찾아볼 수 없다”(테닛 CIA 국장) 등등 하나같이 강경 일변도다.

    ‘미국방보고서’에서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근거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북한은 중동·동남아에 미사일을 수출하는 국가로서, 대량살상무기 확산의 진원지라는 것이다. 이는 미국 지도부가 최근 잇따라 북한의 미사일 수출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뿐만 아니라 북한에 의한 화생방무기 기술의 확산도 우려하고 있다. 9·11테러를 겪은 미국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가 테러집단이나 개인에게 유출되는 것을 심각한 위험요소로 판단하고 있다.

    미국방보고서는 또 북한의 재래식무기 전방 배치와 핵과 생화학무기 그리고 미사일 개발 계획이 동북아와 한반도에 심각한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가까운 장래에 국지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큰 지역으로 한반도를 평가한 것이다. 동시에 북한을 본질에 있어 ‘악’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도덕적 결함도 지적하고 있다. 민생을 희생하면서 대량살상무기 개발 계획에 자금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부시행정부의 이러한 대북 인식은 남북정상회담 이후 입이 닳도록 북한이 변했다고 주장한 대북 온건파들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음을 보인 것이다. 다시 말해 북한이 보여준 그동안의 변화는 현상의 변화일 뿐, 본질에 있어 변화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한편 부시의 발언은 한국에 대한 압박용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김대중 정부 4년 동안 햇볕정책으로 소위 남북당사자원칙이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을 얻었고, 그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과 영향력이 줄어든 면이 있었다. 이에 따라 부시행정부는 남북 공조 분위기를 반전시켜 다시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2월 하순의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햇볕정책에 발목잡힌 김대통령을 압박함으로써 한국이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의도도 있을 것이다. 아울러 몇 차례에 걸쳐 결정이 연기된 FX(차세대 주력전투기)사업의 미국행 결정에 대한 압력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부시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으로 만들어진 한반도 화해 분위기를 깨뜨리기를 원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미국이 한반도 긴장완화 과정에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특히 미국의 대중국 전략을 방해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미국의 세계전략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고 카스피해의 에너지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미군의 중앙아시아 주둔이 필요하다.

    중앙아시아는 미국의 21세기 세계전략 요충지다. 북쪽으로는 러시아가, 동쪽으로는 중국이, 서쪽으로는 카스피해가, 동남쪽으로는 인도가 자리잡고 있다. 또 유라시아대륙을 관통하는 물류이동의 중심축으로 부상하게 될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지나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는 21세기 세계 석유산업을 움직일 엄청난 양의 카스피해 유전지대가 있다.

    따라서 미국의 전략목표는 바로 3대 강국의 세력권이 맞서 있는 전략요충지에 미군을 주둔시키는 한편 카스피해 유전지대를 장악하기 위한 군사적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주한미군의 감축과 재배치는 부시행정부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시행정부는 북한을 겉으로는 압박하면서도 끊임없이 북·미 대화의 문을 열어놓고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9·11테러가 터졌다. 부시행정부의 모든 전략목표가 반테러전쟁에 집중됐다. 중동과 한반도에서의 ‘동시 전쟁, 동시 승리’라는 ‘윈-윈(Win-Win)’ 전략을 부시행정부는 내부적으로 이미 폐기했다. 때문에 부시행정부는 반테러전쟁을 위해 대북정책의 결정과 실행을 일단 유보시켰다. 9·11테러사태로 인해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을 빼낼 명분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북한 역시 테러지원국인 동시에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수출하는 ‘깡패국가’로 여전히 낙인찍혀 있기 때문이다.

    반면 북한도 한반도 평화 연출이라는 큰 틀 속에서 기획했던 이산가족 상봉을 반테러전쟁 중에 진행할 이유가 없어졌다. 이산가족 상봉 카드는 앞으로도 북한에게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는 동시에, 더 중요하게는 평화 분위기 연출을 위한 좋은 재료이기 때문이다.

    그후로도 미국은 북한을 계속 압박한다. 작년 11월말 일본 경시청은 조총련계 금융기관인 ‘조긴도쿄(朝銀東京) 신용조합’과 조총련 본부에 대해 전례없이 강력한 압수 수색을 실시했다. 12월 말에는 동중국해상에서 일본 해상보안청 함정이 북한공작선으로 추정되는 괴선박을 격침시킨 사건도 발생했다. 두 사건 모두 미국의 정보 제공과 지원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 미국은 왜 그랬을까?

    한마디로 북한으로 흘러들어가는 자금줄을 차단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정권 유지를 위한 김정일의 주요 자금원은 조총련계 자금과 미사일 등 무기 수출대금 그리고 금강산관광 대가금이다. 이 중 미사일 수출은 미국이 계속 감시하고 있고, 금강산 관광대금 송금도 지지부진하다. 나머지 하나가 조총련계 자금인데 미국이 이를 차단함으로써 북한에게 약 6억달러 상당의 재정적 압박이 가해진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부시의 ‘악의 축’ 발언 이후 미국은 민간부문이 중심이 되어 북한의 이라크와의 차별성을 적극 옹호하고 있다. 북한과의 대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방북이 무산되긴 했지만, 4인의 전직 주한 미대사와 스칼라피노 교수의 방북이 기획되기도 했다. 2월12일에는 파월 국무장관이 북한과 전쟁할 의사가 없으며, 아무 조건없이 어느 곳에서든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떤 행보를 취해왔을까? 9·11 이전부터 김정일은 이미 북한식 개방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 증거가 2000년 이후 두차례에 걸친 중국 방문에서 김정일이 보인 언행, 작년 7월말부터 1개월간의 러시아 방문, 그리고 9월 장쩌민 주석과의 평양정상회담 등이다. 김정일은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우호선린관계를 회복하면서 정권 안정을 약속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북·중·러 북방 삼각동맹의 복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여세를 몰아 김정일은 고이즈미 일본총리와의 회담과 제2차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북·미 정상회담을 대미(大尾)로 삼아 4강 정상외교를 마무리해 정권과 체제의 안정을 보장받으려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9·11테러사태가 발생하자 이러한 계획이 틀어져버렸다. 대신에 북한은 재빨리 테러행위를 비난함으로써 미국의 입장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였다. 테러 응징이 전쟁으로 발전하고 미국의 일방주의적 태도가 노골화되자, 북한은 중·러와 공동보조를 취하면서 미국의 확전에 반대했다.

    북한은 그 나름으로 지난해 12월 ‘테러자금 조달 억제에 관한 국제협약’과 ‘인질 억류방지에 관한 국제협약’에 서명함으로써 반테러 국제협약 12개 가운데 7개의 협약에 서명하는 등 성의를 보였다. 또 백남순 외상은 지난해 12월초 북한을 방문한 스웨덴 특별사절단에게 북한은 테러지원 국가가 아니므로 나머지 5개 반테러 국제협약에 서명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9·11테러사태의 불똥이 북한으로 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또 미국과 일본의 대북 강경태도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국장급인 이형철 후임으로 차관급인 박길연을 유엔대표부 대사로 복귀시켰다. 박대사는 미 공화당 행정부에 폭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고 돌파력도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박길연을 유엔대사로 임명한 것은 북·미 대화를 이끌어낼 적임자로 판단했기 때문인 것 같다.

    아울러 북한의 관영매체들도 ‘악의 축’ 발언이 나오기 전까지 미국에 대한 비난을 중단했다. 이에 화답하듯 미국은 겉으로는 대북 강경자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으면서도 금년 1월 초 제임스 켈리 동아태담당 차관보와 허바드 주한미대사를 통해 북·미 대화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이어 박대사와 잭 프리처드 한반도 평화회담 특사가 처음으로 상견례하는 자리를 갖기도 했다.

    ‘악의 축’ 발언이 나오자 북한은 미국이 선전포고를 한 것이라며 미국을 비난했지만, 북한의 대미 비난 강도와 횟수도 과거에 비해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2월8일 박길연 북한대사는 언제든 북·미 대화에 나설 용의가 있음을 강조했다. 크게 보면 북한은 부시행정부 출범 초기에는 미국의 태도를 숨죽여 지켜보다가 지난해 5월부터 대미 대화 입장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오고 있는 셈이다. 반면 남북 대화에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주목되는 아리랑축전


    북한의 금년도 동향과 관련하여 눈여겨볼 것이 있다. 금년은 사회주의국가들이 중시하는 ‘꺾어지는 해’다. 북한에는 3개가 겹쳐 있다. 김일성 90회 생일(4월15일), 김정일 회갑(2월16일), 조선인민군 창설 70주년(4월25일) 등. 또 4월29일부터 2개월간 평양 아리랑축전이 준비되고 있다.

    주목할 점은 북한이 아리랑축전을 주 상품으로 해 관광지와 연계한 패키지 관광상품을 개발해 일본과 중국 등 세계 각국에 홍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국가관광총국의 일어판 안내문을 보면, 공연 입장료를 4단계로 차등화하고 있고 2박3일·3박4일·4박5일 및 그 이상의 일정 등으로 구분하면서 평양시내, 묘향산, 남포, 장수산, 구월산, 개성 등과 연계한 관광상품을 소개하고 있다. 관광총국은 현지 비자 발급 및 외국 항공사의 전세기 이용도 가능하다고 선전한다. 조선족 동포들의 경우 북한내 친척방문 편의도 제공한다며 조선족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특히 북한 당국이 직접 남한 주민을 대상으로 한 집단관광을 모집한 점도 주목된다. 현대아산을 통해 금강산 관광과 연계한 아리랑 루트(금강산-원산-평양)를 제안한 것이다.

    도대체 김정일은 무슨 생각으로 아리랑축전 동안 이렇게 과감하게 문을 열어놓으려는 것일까? 아리랑축전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분석해볼 때, 단순히 체제선전과 월드컵에 맞불을 놓기 위한 것으로 보기에는 과거와는 다른 점이 있다.

    본래 실무진이 보고한 명칭은 김일성 주석을 상징한 ‘첫 태양의 노래’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정일이 ‘아리랑’으로 바꿀 것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정치색을 배제하고 민족적인 공연이 되도록 하려는 의지에 따른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러한 김정일의 행보를 종합해볼 때 북한은 굳이 남북대화에 매달릴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 같다. 김대통령의 레임덕을 목도하고 금강산 관광대금의 송금마저 여의치 않자,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느니보다 차라리 기존의 금강산 관광사업은 명맥만 유지하고 서쪽의 경의선 철도 연결과 개성공단 등의 협력사업은 다음 정권으로 넘기려는 심산인 것 같다. 미국도 민족공조라는 명분으로 남·북이 ‘자주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김정일은 남북한간 기존 사업의 마무리는 용인하나, 새로운 사업의 시작은 용인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일 것이다.

    다만 그 사이 남한으로부터 단기적인 실리를 얻기 위해 남북관계를 경색보다는 대화 정국으로 풀어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마지막까지 햇볕정책을 유지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줄 때 김대통령이 대북 지원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에서 남북정상회담 가능성도 계속 흘릴 것이다.

    한편 김정일은 이미 중국, 러시아와의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체제의 안정성과 체제 유지를 위한 지원을 약속받은 것 같다. 조총련에 의한 북한 송금자금이 그 어느 때보다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아리랑축전을 차질없이, 그것도 규모를 늘려 치르겠다는 것은 축전을 치를 자금을 확보했다는 방증이 아닐까 여겨진다.

    최근 김정일의 행보도 과거에 비해 미국에 매달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강경책이 지속되면 북한이 격렬하게 반발할 법도 한데, 오히려 눈에 띄지 않게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을 하면서, 때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미국과 북한이 남한의 정국을 관망하면서 대남 카드를 활용할 최적의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아프간전쟁이 종결됨으로써 남·북·미가 한반도 정책을 조율하고 확정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특히 부시대통령의 방한은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 방향을 가늠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될 전망이다. 양 정상은 원론적 수준에서 합의점을 도출할 것이다. 한·미 동맹관계의 확고한 유지와 한국의 대북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 그리고 남·북 대화의 재개를 희망한다는 정도의 입장이 표명될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한·미간 입장을 조율하고, 북한이 이 문제에 전향적인 입장을 취하도록 촉구할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일단 대화 정국으로 돌입은 할 것이다. 미국도 북한도 남한도 모두 대화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미국과 북한 사이에는 2003년 핵과 미사일 협상이라는 진검 승부가 예정되어 있다. 어떻게 하면 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까 하는 점이 양측의 주된 관심사다. 그러면서 챙길 수 있는 실리는 확보하려 할 것이다. 그 실리는 바로 대선정국인 남한에서 구해진다. 남한의 각 후보진영은 남북관계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입장 표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선 승리를 위해 가능하다면 남북관계가 후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기를 바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미국과 북한이 대선 정국에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또 부시의 방한 이후 남북한에는 중요한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다. 남한에는 월드컵과 동아시안게임, 북한에는 3차례의 꺾어지는 해 행사와 아리랑축전이 예정돼 있다. 이 모든 행사가 세계의 이목을 끄는 가운데 평화를 연출하고 과시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김정일은 이 행사들을 적극 활용하여 평화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세계에 과시하려 할 것이다.

    김정일은 금년을 북한식 ‘국제화’의 원년으로 삼아 평화 분위기 연출에 들어갔다. 북한은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아리랑축전을 정치색을 배제한 민족적인 제전으로 그리고 평화의 축전으로 준비하면서 “오고 싶어하는 사람은 전부 받아들인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북한의 의도대로 아리랑축전과 월드컵을 연계시킬 수만 있다면, 북한은 관광 수입은 물론이고 개방의 길에 들어설 수도 있다. 그간의 ‘음침한’ 이미지를 바꿀 절호의 기회가 된다.

    한편 김대통령은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성사를 크게 기대하진 않겠지만,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도 못할 것이다. 김대통령은 국내 정치권의 거센 반발이 예상되는 가운데에도 자신의 의사에 따라 한반도 평화 분위기 연출에 적극 힘을 쏟을 것이다. 바로 자신의 퇴임후 안전과 역사적 평가가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김정일의 화답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때문에 김대통령은 김정일에게 대화의 메시지를 계속 보내면서 메신저를 보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정치권의 반발을 고려해 이 임무를 자연스럽게 수행할 수 있는 인물과 기회를 물색할 것이다. 이 점에서 월드컵이라는 평화 이벤트와 관련된 움직임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평화 이미지’에 맞는 대선주자는?


    평화 분위기가 고양됨으로써 김대통령은 약화된 정치력을 상당 부분 회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활용하여 정권 재창출에 나설 경우 김대통령의 미래는 어려워질 것이다.

    한편 한반도 전체가 평화 분위기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평화 이미지에 적합한 인물이 대선가도에서 자연스럽게 부상할 수 있다. 현재 여야에서 거명되는 후보 중 과연 평화 이미지에 적합한 인물이 누구인지 따져보는 것도 흥미있는 대목이다. 거명되는 대선주자 중에 없다면 다른 곳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 상황이 인물을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할 것이냐는 별개 문제다. 오히려 대선 정국을 혼전으로 몰아갈 수 있고 그럴 경우 미국과 북한이 대선 게임에 개입할 여지도 넓어진다.

    결국 미국과 북한이 원하는, 자립력이 높지 않은 약체 후보의 당선 가능성도 엿보이고 이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절대 강자가 존재하지 않는 대선 정국이 만들어질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상반기에 한반도에 연출된 평화국면은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경색국면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높다.

    부시행정부는 김대통령처럼 독자적으로 남북관계의 물꼬를 열어가는 인물을 선호하지 않는다. 한반도를 미국의 영향력 아래 두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친미 성향의 보수적 색깔을 가진 인물을 선호할 것이다.

    또 평화 분위기가 뜨겁게 달궈져 있을수록 조그마한 공작으로도 쉽게 경색 국면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북한이 이 역할에 적격이다. 하반기에 가면 북한도 더 이상 김대통령에게 기댈 것이 없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2003년이 가까워올수록 게임의 주체는 북·미가 되고, 초점도 핵과 미사일 문제로 넘어갈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북한과 미국은 자기들이 한반도를 경색시켰다는 비난을 뒤집어쓰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대신 남한의 대선정국에서 유력한 후보에게 뒤집어씌우려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반도 경색의 책임은 피하면서 1994년처럼 남한을 배제한 채 북·미가 주도권을 쥐고 핵과 미사일 협상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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