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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전농림장관의 ‘관료들과의 전쟁’ 29개월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김성훈 전농림장관의 ‘관료들과의 전쟁’ 29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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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전장관은 취임 직후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두 가지 원칙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첫째, 재임중 농림부와 산하기관 직원은 절대로 장관의 집에 찾아올 수 없다. 볼 일이 있는 사람은 사무실에서 절차에 따라 만나야 한다. 둘째, 기업가와 만날 수는 있다. 하지만 장관실에서 해당 국장의 입회하에 기록하면서 만난다. 이것은 비리사건의 상당수가 사적인 만남에서 비롯된다는 점에 착안한 아이디어였다.

며칠 뒤 첫째 원칙을 어긴 사람이 나타났다. 역대 호남출신 장관의 심부름을 도맡았다는 농림부 과장급 직원 Y씨가 두 차례에 걸쳐 김전장관의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는 “그동안 여러 장관을 모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를 활용해주십시오. 제 고향은 전라도 ○○이고, 장관님을 예전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바로 다음날 김전장관은 간부회의에서 이 사실을 공표하고 Y씨를 한직으로 전보 발령했다. 그리고 얼마 뒤 구조조정 과정에서 Y씨를 명퇴시켰다. 김전장관은 “지금 생각하면 아주 미안한 일이지만,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회고했다.

김전장관의 가족 중에서도 원칙을 위반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칠순을 넘긴 큰누나다. 큰누나는 김전장관을 어릴 때부터 뒷바라지해준 어머니 같은 존재다. 하지만 큰누나가 “내 초등학교 동창의 아들이 농림부 산하기관에 근무하는데 본부로 승진시켜달라”고 부탁하면서 이력서를 건네자, 김장관은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누님이 나를 장관시켰소? 나는 이렇게 부탁하는 놈을 벌줘야겠습니다. 누님은 내가 장관 그만둘 때까지 우리 집 출입금지요. 대신 철마다 인사는 하겠습니다.” 그러자 큰누나는 통사정을 하면서 “처벌만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는 것이다. 김전장관은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서 “나도 참 못된 사람”이라고 말했다.





관료는 집단으로 행동한다


김전장관은 자택을 공개하지 않은 탓에 ‘봉변’도 겪었다. 취임 직후 터진 김강용 절도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김강용의 변호사는 “삼성동 현대빌라 김성훈 장관의 집에서 운보 그림 300호 등을 훔쳤다”고 말했다. 김전장관의 집은 큰 그림을 걸어놓을 만큼 넓지 않았음에도, 농림부 직원 가운데 장관의 집에 가본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보니 아무도 대꾸할 수 없었던 것이다. 뒤늦게 김강용이 현장검증에서 또 다른 ‘현대빌라’를 지목하면서 오해가 풀렸는데, 김전장관은 그때서야 직원들을 초청해 저녁을 대접했다.

기업가와는 반드시 기록하면서 만나겠다는 원칙은 김포매립지 사건이 터졌을 때 위력을 발휘했다.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은 김포매립지의 용도를 바꾸기 위해 다양한 루트로 로비활동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김장관은 “김대중 정부의 도덕성이 걸린 문제다. 김포매립지를 풀어줄 경우 수서비리 이상의 게이트가 터질 수 있다”며 완강히 반대했던 것이다.

이 무렵 김장관은 최회장과 장관실에서 만난 일이 있다. 물론 농림부 간부 두 사람이 대화를 기록했다. 이날 최회장은 김장관의 ‘국가기강론’에 설복당해 마침내 “그렇다면 그냥 농사를 짓죠”라며 물러섰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뒤 최회장은 용도변경을 추진한다며 일본 용역회사와 계약까지 맺었다. 그러자 일부 신문에서는 김장관의 뇌물 수수의혹을 흘리기도 했다. 이때 김장관은 ‘비장의 무기’인 회의록을 전격적으로 공개했고, 김포매립지를 둘러싼 용도변경 논쟁은 막을 내렸다.

김포매립지를 둘러싼 농림부와 동아건설의 힘겨루기가 벌어지는 과정에 김장관은 수많은 압력을 받았다. 그는 퇴임 직후 당시의 고충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일이 있다.

“대한민국의 한다 하는 정치인은 거의 다 나한테 전화를 걸어서 ‘김포매립지를 풀어주라’고 했습니다. 관계부처 장관회의에서도 농림부장관 빼고는 전부 풀어주자고 했어요.(중략) 워낙 압력이 세게 들어와서 김종필 총리에게 보고했습니다. 대부분의 언론과 정치권이 다 허용해주라고 했지만, 김총리는 내 얘기를 듣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래도 동아그룹이 포기하지 않아 대통령께 말씀드렸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아무리 기업이 어려워도 부정한 방법으로 도울 수는 없다’며 농림부에 힘을 실어주셨습니다.”

김전장관은 김포매립지 사건을 통해 관료는 위험이 따르는 사안이 발생할 경우 집단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한다. 농림부에 대한 로비가 관계부서 관료들을 통해 아주 치밀하게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 학연과 지연이 개입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결국 코너에 몰린 김장관은 마지막 카드를 뽑았다. ‘책임지기 싫어하는’ 관료의 아킬레스건을 공격한 것이다.

“여러분들이 정말 특정기업에 특혜를 줘야 한다고 생각하면, 당신들 이름으로 결의하라. 농림부장관은 용도변경에 반대했는데, 누구 누구가 찬성해서 용도변경을 할 수밖에 없다고 써라. 그러니까 아무도 더 얘기를 못하더라고.”

김전장관은 이 과정에 대통령과 교감이 있었다고 한다. 그 내용을 들어보면 대통령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여러 명의 장관과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이 움직인 흔적이 보인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끝까지 김장관에게 힘을 실어줬다는 것이다. 김전장관의 말을 더 들어보자.

“나는 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이심전심으로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걸 아무한테도 공개하지 않고 묵묵히 버텼던 거죠. 그런데 얼마 후 어떤 장관이 나한테 대통령이 해주랬다고 말하는 겁니다. 대통령이 하지도 않은 말을 전하면서 나를 협박한 거예요. 나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대통령 얘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어요. 계속해서 압력을 넣길래 내가 그 분에게 ‘대통령께 물어보겠다’고 하니까 금세 얼굴이 빨개지면서 ‘해주라는 게 아니라 협의하라는 얘기’라며 꼬리를 내리더라고요. 그 사람과 동아그룹 고위관계자가 모대학 동문이거든요. 그러니까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까지 속이려고 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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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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