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재야’로 통하는 예춘호(芮春浩·76)씨의 노후는 따스한 겸손, 표나지 않는 의리, 내연하는 지조, 느긋한 여유를 즐기는 삶이었다. 집권당 사무총장, 3선 개헌 반대투쟁의 선봉, 반독재 투쟁의 중심, 그리고 3김(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모두와 가까이 지낸 정치 역정 등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지만 이제는 조용하게 주변을 살펴가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격변기 때마다 우리 정치의 복판에 있었던 그가 역할과 임무가 끝났다고 자임하고 미련없이 야인으로 돌아가 담담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결 인상적인 삶으로 비쳐진다. 예씨가 쓴 낚시기행집 ‘바람을 잡고 고기를 낚고’에 이런 그의 삶의 모습을 담고있는 내용이 있다.
“조어도(釣魚道)라는 말이 있다. 오랜 세월 낚시를 해서 낚시라는 행위가 조과(釣果)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 낚지 못해도 낚시는 완성된다는 것을 간신히 알게 되었다. 조과가 없어도 실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또 미끼를 보고도 머뭇거리며 달려들지 않는 고기를 꼭 낚아야 한다는 것은 미련한 일이다. 고기도 미끼를 먹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땐 느긋하게 자연을 낚는다.”
예춘호씨를 만나기 위해 몇 차례 전화를 했을 때 무뚝뚝한 목소리의 남자가 잠시 기다려달라며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연결해주었다. 전화를 넘겨받은 남자의 목소리도 무뚝뚝하기는 마찬가지. 그에게 “예선생과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몇날 몇시에 올거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언제 가면 만나뵐 수 있냐고 묻자 필자에게 약속시간을 말해달라고 했다. 곧바로 연결해주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며칠 후 약속시간에 맞춰 약속장소로 가는데 장소를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휴대전화로 알려준 대로 골목을 돌아가면 엉뚱한 곳이 나오고, 다시 찾으면 전혀 다른 길이 나왔다. 그래서 또다시 전화를 걸어 장소를 확인하는 일이 거듭되었다.
“그러니까 아래쪽으로 가서 다시 위쪽으로 가면 왼편에 길이 나오고, 그러면 새마을주차장이 보이고 바로 프라임빌딩이 나올 겁니다.”
“이곳 지리에 밝지 못한데 아래쪽이 어디고 위쪽이 어디란 말입니까. 큰 건물을 말씀해보세요.”
40분 가까이 헤매다보니 슬며시 부아가 치미는데다 안내하는 사람이 도무지 서툴러보여 전화에 대고 짜증을 냈다.
어렵사리 찾은 새마을주차장도 말만 주차장이지 간판도 무엇도 없었고, 찾은 뒤 보니 프라임빌딩도 건물입구 벽에 붙은 조그만 동판에 새겨져 있었다. ‘동판보다 수백 배는 더 큰 상점이름을 대주었더라면 찾기가 훨씬 수월했을 텐데 참 답답하군’ 하고 사무실로 올라갔더니 지금까지 전화 안내를 해준 사람이 바로 예춘호씨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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