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호

“DJ는 사람을 곁에 두지 못하고, YS는 욕심이 너무 많고, JP는 머리 좋지만 결정적 순간에 용기가 없어”

‘마지막 재야’ 예춘호씨가 회고하는 ‘나와 3金’

  • 이계홍 < 작가·용인대 겸임교수 >

    입력2004-11-05 14:1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예춘호씨는 행운유수(行雲流水)를 좌우명으로 평화스럽고 담담하게 노후를 보내고 있다. 격변기마다 한국 정치사의 한복판에 있던 그가 이젠 야인으로 돌아가 낚시와 서예로 소일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재야’로 통하는 예춘호(芮春浩·76)씨의 노후는 따스한 겸손, 표나지 않는 의리, 내연하는 지조, 느긋한 여유를 즐기는 삶이었다. 집권당 사무총장, 3선 개헌 반대투쟁의 선봉, 반독재 투쟁의 중심, 그리고 3김(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모두와 가까이 지낸 정치 역정 등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지만 이제는 조용하게 주변을 살펴가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격변기 때마다 우리 정치의 복판에 있었던 그가 역할과 임무가 끝났다고 자임하고 미련없이 야인으로 돌아가 담담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결 인상적인 삶으로 비쳐진다. 예씨가 쓴 낚시기행집 ‘바람을 잡고 고기를 낚고’에 이런 그의 삶의 모습을 담고있는 내용이 있다.

    “조어도(釣魚道)라는 말이 있다. 오랜 세월 낚시를 해서 낚시라는 행위가 조과(釣果)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 낚지 못해도 낚시는 완성된다는 것을 간신히 알게 되었다. 조과가 없어도 실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또 미끼를 보고도 머뭇거리며 달려들지 않는 고기를 꼭 낚아야 한다는 것은 미련한 일이다. 고기도 미끼를 먹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땐 느긋하게 자연을 낚는다.”

    예춘호씨를 만나기 위해 몇 차례 전화를 했을 때 무뚝뚝한 목소리의 남자가 잠시 기다려달라며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연결해주었다. 전화를 넘겨받은 남자의 목소리도 무뚝뚝하기는 마찬가지. 그에게 “예선생과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몇날 몇시에 올거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언제 가면 만나뵐 수 있냐고 묻자 필자에게 약속시간을 말해달라고 했다. 곧바로 연결해주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며칠 후 약속시간에 맞춰 약속장소로 가는데 장소를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휴대전화로 알려준 대로 골목을 돌아가면 엉뚱한 곳이 나오고, 다시 찾으면 전혀 다른 길이 나왔다. 그래서 또다시 전화를 걸어 장소를 확인하는 일이 거듭되었다.

    “그러니까 아래쪽으로 가서 다시 위쪽으로 가면 왼편에 길이 나오고, 그러면 새마을주차장이 보이고 바로 프라임빌딩이 나올 겁니다.”



    “이곳 지리에 밝지 못한데 아래쪽이 어디고 위쪽이 어디란 말입니까. 큰 건물을 말씀해보세요.”

    40분 가까이 헤매다보니 슬며시 부아가 치미는데다 안내하는 사람이 도무지 서툴러보여 전화에 대고 짜증을 냈다.

    어렵사리 찾은 새마을주차장도 말만 주차장이지 간판도 무엇도 없었고, 찾은 뒤 보니 프라임빌딩도 건물입구 벽에 붙은 조그만 동판에 새겨져 있었다. ‘동판보다 수백 배는 더 큰 상점이름을 대주었더라면 찾기가 훨씬 수월했을 텐데 참 답답하군’ 하고 사무실로 올라갔더니 지금까지 전화 안내를 해준 사람이 바로 예춘호씨가 아닌가.

    시간과 장소를 약속한 사람도 본인이었다. 여태 비서쯤이 안내를 해주었겠거니 여기고 전화로 짜증 섞어 분풀이를 했는데, 정작 본인이 약속시간이며, 길 안내까지 직접 맡아 해주며 필자의 짜증을 고스란히 받아준 것이다. ‘미리 “내가 예춘호요” 했다면 이쪽도 겸손의 예를 갖췄을 텐데’ 하는 마음으로 조금전의 불손을 얼버무렸다. 예씨는 그런 일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못하는) 모습으로 소파에 앉기를 권했다. 그에 앞서 전화를 연결해준 사람은 옆에 사무실을 둔 중년남자였는데, 아마도 전화를 같이 쓰는 것으로 보였다. 후에 알았지만 그는 예씨의 낚시동지였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 69-9번지 프라임빌딩 601호. 벽면에 ‘재단법인 영도육영회’란 간판이 붙어 있다. 예춘호씨의 개인 사무실이다. 찾기도 힘든 골목 깊숙한 이곳에 굳이 사무실을 낼 이유가 있나 싶어 “예선생님의 건물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곁에 있던 중년인사를 보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인터뷰가 끝나고 밖으로 나올 때 그 문제가 여전히 궁금해 사무실 옆방에 있던 중년남자에게 물었다.

    “하필이면 왜 이곳에 사무실을 두셨습니까?”

    “예선생님과 낚시를 많이 다녔지요. 사무실이 없으시기에 내가 그냥 쓰시라고 드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개인사무실은 낚시를 통해 친교를 맺은 건물주가 제공한 것이라는 얘기다.

    예춘호씨는 윤곽이 뚜렷한 미남형이다. 콧날이 산처럼 우뚝하고 콧잔등에 거무튀튀한 흉터가 남아 있다. 얼핏 보면 젊은 시절 한가락 하던 때 패거리들과 한판 벌이면서 생긴 ‘야성의 훈장’ 쯤으로 보였다.

    “콧잔등의 흉터는 어떻게 해서 생겼나요.”

    “아, 이거 말이오.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지방 교도소로 이감 도중 동상에 걸린 것이오.”

    그리고는 더 이상 말이 없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1980년 5월17일 밤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주모자라 하여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요원들에 의해 불법 연행되어 가혹한 고문과 조사 끝에 1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그해 겨울 원주 교도소로 이감되던 중 동상에 걸린 것이다.

    30평 남짓한 사무실. 책꽂이에는 책이 빼곡히 꽂혀 있다. 주로 일본 서적과 사회과학 서적들이다. 사무실 모서리에는 도배할 때 벽지에 풀을 먹이기 좋게 하기 위해 인부들이 만들어놓은 것 같은 허리 높이 정도의 기다란 송판 탁자가 놓여있다. 벽에 수십 개의 붓이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붓글씨를 쓰기 위해 마련한 탁자로 보였다.

    예씨는 6시간 가까이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몸가짐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70대 후반의 연령임에도 불구하고 별로 편해보이지 않은 의자에 꼿꼿이 앉은 채 인터뷰에 응했다. 그만큼 건강에는 자신이 있어 보였다.

    -사무실을 서재로 꾸미셨군요. 책이 많은데 요즘 어떤 책을 읽으시나요.

    “일본의 시사잡지를 주로 읽습니다. ‘중앙공론’ ‘문예춘추’ ‘세계’ 등이죠. 그런데 이들 시사지들이 세계를 보는 관점이 우리와 퍽 달라요. 깊이가 있다고 할까, 시각이 넓다 할까. 그래서 일본 잡지를 보고 있어요. 아프간 사태 기사를 예로 들면 시각도 우리와는 다르고 기사도 훨씬 좋아요. 종족 분포를 도표로 만들어놓는가 하면 문명사적 측면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문이나 잡지와는 많이 비교됩니다. 우리 신문의 논조는 대개 미국적 관점이나 시각으로 접근해요. 그리고 단편적이고. 우리 신문 잡지를 보고는 아프간 사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계 그리고 미국 주도로 펼쳐지고 있는 세계 경제,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어요. 일본잡지에는 무엇보다 독특한 시각의 기사가 많아서 여러가지 참고가 되고 지식도 얻습니다.”

    -전에 기자촌 쪽에 사셨는데 언제 이쪽으로 이사 오셨나요.

    “진관외동에서 20년 살았지요. 1988년에 그 집을 팔고 분당으로 이사했어요. 그리고 최근에 분당 옆 동아 솔레시티로 이사 가서 살고 있지요.”

    방이동 사무실은 1주일에 4,5차례 출근하며 책도 읽고 서예도 하고, 옛 동지들을 만나는 장소로 활용한다.

    -요즘 정치를 보면 짜증 나시지요.

    “나는 요즘 정치에 관한 한 함구해왔어요. 분별 없이 끼어들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일정 시기 정치를 했다면 자기 스스로 반성하면서 정리해야지 끼어드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다고 본 것이지요.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이 인편으로 식사하자는 연락을 해왔을 때도 거절했어요.”

    -옛 민주화 동지로서 만나서 좋은 말씀을 드리는 것도 방법 아니었나요.

    “그것이 어려워요. 독대라면 모르지만 여럿 중에 한 사람이 되어서 밥 한끼 먹고 오면 들러리만 선 것 같아서 뒷맛이 개운치 않아요. 전에 몇 차례 초대를 받아 갔는데 대개가 그런 경우였어요. 그래서 초대를 사양한 거지요.”

    -그렇다면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을 이 자리에서 해보시죠.

    “개혁을 진실하게 해야지요. 개혁에 대한 정체성이 불분명한 인사를 데려와 개혁정권이라고 주장해선 누구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원칙이 제대로 선다면 전라도 사람을 데려다가 쓴 들 어떻습니까. 전라도 사람이라도 나쁜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는 것이 문제지요. 좋은 시절에 설치는 자들일수록 언어의 수사법이 현란한 법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박아무개 같은 자들이지요. 내용이야 어떻든 국민이 싫어하는 사람을 다시 옆에 끼고 있으니 그 자체로서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그가 어떻게 민주화를 얘기하고, 그동안 고생한 민주인사들을 만나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삶의 과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설사 유능한 두뇌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수긍하지 않을 거예요.”

    인터뷰의 목적을 벗어난 것 같아 말머리를 돌렸다.

    -이 자리는 선생님의 삶의 역정을 돌아보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독자에게 알리기 위해서 마련된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가장 절실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조금전 정치에 관해서는 함구해왔다고 했는데, 지면도 넉넉하니 모처럼 아무런 제약 없이 말씀해보시지요.

    “요즘 정치불신이 많아요. 정치는 나쁘다고 하지요. 그러나 그 책임이 정치인에게만 있습니까? 국민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봐요. 국민이 나쁜 정치인을 만들어요. 경험상 정치인이 정치를 그만둘 때는 낙선했을 때일 겁니다. 이런 때 행정부에 있었거나 (재산축적을 한 경우를 말한 듯하다) 조상의 유산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패가망신하는 거예요. 사돈의 팔촌 돈까지 끌어다 선거운동을 했는데 망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이런 정치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국민 아닙니까. 그런데도 정치인을 비난할 자격이 있습니까. 이렇게 돈 많이 쓴 사람이 이기는 선거 풍토에서 쓴 돈을 회수하려는 것이 사람의 욕심 아닙니까. 국민이 깨어 있지 않고는 아무리 좋은 정치제도가 나와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예씨는 이런 말도 했다.

    “국회의원 출신 모임인 헌정회에 나가서 소일하는 전직 의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점심 한끼 때우기 위해 갑니까. 한마디로 대접받기 위해 가는 거예요. 후배 의원들이 대접하고 무슨 단체, 무슨 기관에서 마련하는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거지요. 그런 돈이 다 어디서 나옵니까. 나는 여당의 주요 직책을 맡아보았습니다. 기업은 가만히 앉아 있을 때 (돈을) 주지 않아요. 결탁과 부정을 눈감아주는 조건에서 반대급부가 나오는 겁니다. 그것이 모두 부패의 고리가 되지요. 지금은 경제 단위가 달라지고 수법도 지능적이 되어서 부정의 방법이나 액수도 옛날과 엄청나게 다를 것입니다.

    6대(1963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던 때의 일입니다만, 출마자들에게 당에서 150만원의 선거지원금이 나왔어요. 당시 20만원 정도면 서울에 한옥 전세를 얻을 돈이었으니까 적은 액수는 아니지요. 10대(1978년) 때 무소속으로 출마했는데 탄압 때문에 선거운동을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1억원이 들더군요. 돈이 없으면 움직이는 사람이 없어요. 돈 전달이 안되면 모든 조직이 스톱이에요. 지금은 20억~30억원도 많은 돈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돈이 누구에게 돌아갑니까. 사람을 보고 찍는 것이 아니고 돈을 보고 찍는 국민에게 갑니다.

    정치란 무엇입니까. 자기 할 일을 다한 사람들이 욕심 없이 마지막으로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자리 아닙니까. 그동안 여러가지 인생살이를 거친 경륜을 통해 이견과 반대와 대립항을 조정해서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책을 강구해 삶의 내용을 좀더 풍성하게 제공하는 자리죠. 그것을 철학적으로 정리해 우리가 실현해보자는 것이 정치인의 할 일일 것입니다. 준비된 대통령도 그런 뜻일 겁니다. 정치철학이 바탕이 되어서 이를 구현해 나가는 것.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탐욕의 정치가 만연해 있어요. 본말이 전도된 거지요.”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 정치는 경륜 있는 장로가 해야 한다는 뜻으로 비쳐지는데요. 지금 30년 동안 3김 정치에 식상한 사람들은 세대교체란 화두에 상당한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영국의 토니 블레어나 퇴임한 클린턴, 러시아의 푸틴과 같은 젊고 활력 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은데요.

    “3김에 대한 반사적 반응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만, 원칙은 그렇지 않아요. 단순히 생물학적 연령으로 구분할 계제는 아니라고 봐요. 우리의 정치사에선 역정이 훌륭한 정치인을 만나지 못해 나이 많은 사람이 욕을 먹고 있는데, 그것이 대통령 경선에서 떨어지니까 탈당을 하고 새로 당을 만들고, 국민을 속이는 언어를 만들고…. 이런 것들이 존경받는 장로를 만들지 못한 원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신념에 따라 정치철학을 내세워서 이를 실현시키다가 국민에게 채택이 안되면 정권을 내주고, 그래서 야당이 집권여당이 되고, 이래야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선거가 임박해서 정치구조를 바꾼다는 등 복잡하게 술수를 부려요. 이것은 온당치 못하지요. 임기 5년 동안 잘했으면 재집권하는 거고, 못했으면 야당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순리죠. 잔재주를 부리면 또 정치가 왜곡되고 굴절되어서 혼란이 가중됩니다.”

    -예선생께선 사람의 분열, 당의 분열을 여러 번 목격했지요.

    “그렇습니다. 1987년 대선후보 단일화운동 시절이 생생하군요. 당시 김대중 김영삼 양김 단일화 논의가 있었습니다만, 재야에선 김대중씨를 지지했어요. 학생 기독교 문인 등 민주화세력 중 핵심은 65~75학번의 학생들이었는데 이들은 DJ로 결론을 내렸지요. 재야는 윤보선 전대통령 자택에서 논의를 했는데 DJ지지를 결의했습니다. 그런데 윤보선 전대통령은 YS를 지지해요. DJ로 결론이 났는데 그분이 뒤에 가서 별도로 놀아요. 나는 부산 출신이지만 재야회의에서 결론이 났기 때문에 그것을 따랐는데 윤 전대통령은 그게 아니에요. 옛 민주당 구파 인연 때문인 것 같기는 하지만 지금도 그분의 정치 행로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씨는 당시 DJ편이라고 해서 고향 부산에서는 발을 붙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그는 국회의원 낙선을 거듭한다. 3선개헌 반대에 이어 두번째 ‘정치적 실패’를 맛본 것이다. 물론 이를 실패라고 정의하는 게 올바른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정치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국회의원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정치생명이 다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는 부산 영도가 아니라 서울에서 출마했으면 압도적인 표로 당선되었을 것이라고 지난 세월을 회상한다.

    “사실 나는 단일화 문제에 대해 두 사람 중 하나로 단일화하자는 것이었지 꼭 특정인이 돼야 한다는 단일화는 아니었어요. 그리고 재야가 결정을 한 것이기 때문에 재야에 소속한 사람으로서 그것을 따랐을 뿐이고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때 단일화 실패가 우리 역사에 엄청난 손실을 갖고 왔습니다. 지역감정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었는데 결국 굳어버렸고요. 이런 점을 걱정한 나는 어쨌든 누가 되든 단일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고향에선 나를 김대중이 앞잡이 노릇을 하고, 고향의 정신을 배반했다고 삿대질을 한 것입니다. 그래도 내 결정을 역사가 보상해줄 거라고 믿었는데…. 글쎄요.”

    -그 무렵 예선생은 김대중씨의 비서실장 아니었습니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서울의 봄 때인 1980년 4월 김대중씨가 비서실장을 맡아달라고 한 것은 사실입니다. 1980년 3월16일 윤보선 전대통령 집에서 국민연합을 재편성하기 위한 회의를 마치고 나올 때 DJ가 비서실장을 맡아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무엇이든 당신을 도울 수는 있지만 비서실장은 맡지 않겠다고 했지요. 나는 성격도 비서실장 역을 못할 뿐만 아니라 비서실장으로는 격이 맞지 않지요. 그래도 그는 우리집까지 찾아와서 비서실장을 맡아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맡아달라 아니다’를 거듭하다 그해 5월17일 정보부원에게 끌려간 거지요. 정보부 요원들이 55일간 온갖 고문을 다 했어요. 그들이 나를 김대중 비서실장이라고 씁디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조작하면서 비서실장이란 직책이 필요했나 봅니다. 그러나 나는 단 하루도 김대중씨 비서실장으로 일해본 적이 없어요.”

    예춘호씨는 3김과 모두 가깝다. 단순한 수사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정치 운명을 같이해온 동지로서 그렇다. 한 살 위인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는 정치 입문을 함께 한 동지고, 어떻게 보면 그를 위해 3선개헌 반대투쟁을 하다 쓴맛을 보고 정치 행로를 달리하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동갑(1927년생)인 김영삼 전대통령과는 고향이 같다. 정치 입문 초기 당은 달랐지만 나라의 변화를 추동하는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면에서 입장이 같았고,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시절, 동지로서 함께 활약했다. 두 살 위인 김대중 대통령과는 재야 시절 이념적 동질성을 공유하며 함께 옥고를 치른 유대감이 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질문을 하고 넘어가는 게 순서일 것 같아 질문을 던졌다.

    -김대중 대통령이나 김영삼 전대통령이 단합을 했더라면 나라의 민주화나 지역문제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얘기들이 많은데요. 두 분에 대해 지근거리에서 보신 인상은 어떻습니까.

    “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것 없이 욕심이 많죠.”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1985년 민추협이 민주화 추진의 본산이 됐습니다. 나는 함석헌 문익환씨와 함께 재야대표로서 민추협 구성에 깊숙이 관여했어요. 사실 그때 정치는 없고 재야만 있던 때 아닙니까. 민추협은 철저하게 합의제였어요. 그런데 잘 뒤집어져요. 단일화 작업 때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나는 두 사람 다 민주투쟁의 상징이 돼 있으니 양보하는 사람이 승자라고 했지만 둘은 갈라서고 만 것입니다.”

    -그럼 누구의 잘못이 큽니까.

    그러자 즉답 대신 이런 얘기를 했다.

    “1977년 말 야당 총재 선거가 있었습니다. YS와 이철승씨가 대결했는데 이때 연금중이던 DJ가 몰래 나와, 아서원에서 YS를 도우라는 연설을 했습니다. 그것이 기폭제가 돼서 다음날 YS가 총재가 됐고, ‘YH 사건’이 나면서 YS가 총재직을 박탈당했습니다. 이어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했습니다. 그 뒤 YS가 총재직에 복귀했는데 이때 DJ와 어떤 묵계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하루는 DJ가 YS를 만나 합의를 보았다며 정무위원 5명, 상임위원 100명을 받아줄 것이라는 거예요. YS에게 가보니 언제 그런 말 했냐는 식입디다. 상임위원 100명이라면 총재 경선 대의원 800명 중 8분의 1에 지나지 않는데 이것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숫자도 미미한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별의 명분이 돼버린 거예요. DJ의 아서원 연설이 아니었으면 당선되지 못했을 텐데, YS는 그런 것도 들어주지 않은 겁니다. 그걸 받아주면 다른 명분을 찾지 않는 이상 결별할 이유가 없었는데도 말이오.”

    DJ에 관해서는 이런 말을 했다.

    “민추협 때의 일입니다. 민추협 집행부 구성에 관해서 DJ 아들인 홍일씨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러자 홍일씨가 ‘아버지는 미국에서 돌아온 지가 얼마 안돼서 국내 사정을 잘 모릅니다’ 하면서 1주일만 시간을 달라는 거예요. 그 무렵 재야에서도 DJ 지지에 대한 의견이 갈라진 상태였어요. 한완상 문동환씨도 등을 돌리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들을 설득해 DJ연금 해제 때 함께 회동하자고 했지요. 그리고 동교동에 찾아갔는데 마침 DJ는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수안보에 가는 중이었어요. 한완상씨나 문동환씨를 잃으면 큰 손실이고, 국내에선 기독교를 대표하는 사람들인데 무시할 수가 없어서 내가 DJ를 설득해 돌아오게 한 겁니다.

    며칠 후 DJ의 귀국환영회를 진관외동 우리집에서 했는데 그날 낮 방송에 민추협 부의장에 김상현씨를 선정했다는 보도가 나와요. 의장이 둘인데 부의장이 한 사람이란 말이지요. 의장 밑에 부의장은 다섯 명도 둘 수 있고, 열 사람도 둘 수가 있는데 김상현씨 하나로 발표를 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귀국환영회를 하면서 이 점을 지적하고 화를 냈지요.

    재야 핵심들을 민추협으로 견인해내는 데 내가 일정 부분 큰 몫을 했고, 또 DJ를 밀자고 약속을 받아낸 것도 나인데 정작 그 핵심은 빠지고 김상현씨로 결정을 해버린 것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지연으로 봐서나 우정으로 봐도 나는 YS를 밀어야 하는데 재야의 약속과 내 개인적 소신으로 DJ를 밀었는데…. 나를 DJ측 밀사, 또는 조정자로 내세워놓고 이런 망신을 시키는구나 해서 대단히 화가 나서 욕을 퍼부은 적이 있습니다. 결국 한 달도 못 가서 김상현씨도 부의장직에서 쫓겨나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당시 김상현씨가 민추협 공동의장 대행을 하면서 기부받은 정치자금을 자파 세력 확장하는 데만 썼다고 해서 동교동측으로부터 비난받지 않았습니까.

    “덤비는 기질 때문에 손해를 많이 본 사람입니다만, 근본적으로 좋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DJ 주변에 붙어 있지를 못해요. 이들이 모두 정치적 자원이 되는데 곁에 두지를 못합니다. 민추협 구성 때의 일입니다만, 김상현씨의 역할이 컸지요. 재야나 동교동 쪽은 2·12 총선을 보이콧하자는 등 소극적으로 나왔어요. 그러나 김상현씨는 맨주먹으로라도 모처럼 생긴 정치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어요. 결과적으로 그의 주장이 맞았습니다. 이때 재야 운동권 출신들을 대거 영입해 여소야대라는 큰 정치혁명을 이룬 것입니다.

    한때 김상현씨를 오해한 적도 있는데, 그가 누구와도 친하게 지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정보부 사람과도 가까이 지냈습니다. 정치 해금도 당연히 1순위로 될 거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해금이 됐는데 그 사람만 해금이 되지 않아 총선에 출마도 못했어요. 그런 점을 보면 김상현씨가 꼭 정보부 사람과 친한 것은 아니었다는 판단이 섭니다. 출마를 못하면 정치생명이 끝나는데 그만 제외됐어요. 그때 나는 김상현이 절대로 오해 살 만한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어요. 정치자금 문제도 마찬가지로 그를 오해해선 안된다고 봐요. 그는 투명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어디다 무엇을 감춰놓는다든지 하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과욕이랄까, 설치는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인데 좋은 정치감각과 에너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죠. 그런데 DJ쪽에서 그런 사람을 가까이 두지 않아요.”

    이중재씨 얘기도 했다.

    “이중재씨도 좋은 사람입니다. 머리도 있고, 명분 없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1987년 대선이 참담한 결과로 끝난 뒤 양순직 이중재씨가 중심이 되서 야권이 통합해 총선을 치르자고 제안했어요. YS의 통일민주당, DJ의 평화민주당이 통합해 집권당에 맞서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했다고 이중재씨가 평민당 회의석상에서 맞기까지 하는 망신을 당하고 쫓겨났어요.

    명분 있는 통합이란 언제 어느 때 들어도 좋은 것 아닙니까. 그것을 못한단 말이에요. 그리고 주변에 두어야 할 사람들을 자꾸만 털어내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보십시오. 재목들을 다 걷어내 버려서 저 모양이죠. 당이나 청와대 사람들을 보세요. 난쟁이들만 모여있잖아요. 이러니 국정이 제대로 굴러가겠습니까. 집권당이 되면 인재 풀을 작동해 좋은 사람들, 어제의 동지들을 규합해서 나라를 위해 봉사하게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옹졸한 사람들, 때 묻은 사람들이 모여서 마치 ‘협량 경연대회’를 하는 것 같으니….”

    그는 거듭 YS와 DJ 두 사람이 민추협 정신으로 단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는 국민을 위해서나 지역과 민족을 위해서, 그리고 두 사람이 역사적으로도 크게 사는 길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YS와 DJ에 관해서는 말씀을 하셨는데 JP는 어떻습니까.

    “‘머리’는 단연 JP지요. 흔히 DJ가 머리가 좋다고 하지만 JP 머리를 따를 수 없어요. 젊었을 때 그는 비전이 있었어요.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정리된 철학과 의욕이 있었지요. 최근 1964년 한일회담에 관한 에피소드가 쓰여진 일본 월간지를 읽은 적이 있는데 고작 38세의 김종필씨가 일본 정치의 대가 오히라 외상(후에 수상)을 만난 구절이 나와요. 오히라도 젊은 사람의 탁견에 놀랐다는 것입니다. 재기발랄하고 예술적 심미안도 갖추고 있는 뛰어난 사람이에요. 그런데 재주 있는 사람이 변화를 많이 가져오잖아요. 결정적일 때 용기가 없어요.”

    JP가 분명 3선개헌을 막자고 지시해놓고는 결국 개헌 지지로 돌아섰던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과 인척 관계(처 삼촌)다보니 박대통령의 명을 끝내 거역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런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그의 고뇌를 이해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 관계와 공적인 관계는 구분해야지요. 우리는 기껏 그를 위해 개헌반대 운동을 했는데 도중에 돌아서서는 우리를 개헌 지지로 유도하는 거예요. 3선개헌 지지를 유도하기 위해 몇날 며칠 우리를 불러내 함께 술을 마셨어요. 그때 내가 그에게 ‘정 그렇다면 우리(예춘호 정태성 박종태 김달수 양순직 등)가 개헌을 지지하겠다. 대신 JP 혼자서만 반대하라’고 제안했어요. 그렇게 된다면 그는 미래의 지도자로 우뚝 설 명분이 생기는 것이었죠.”

    또 이런 일화도 소개했다.

    “신민주공화당(자민련 전신)을 창당할 때의 일입니다. JP가 인편을 통해 복당을 권유해왔어요. 양순직과 함께 복당해서 당을 도와달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내가 제안을 했지요. 전두환 정권에 대해 비판을 해달라. 신군부에 엎드리지 말고 당당하게 투쟁의 깃발을 올려달라고 요구한 거지요. 그래야 우리가 신민주공화당에 합류할 명분이 주어진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신군부에 의해 12년형을 선고받고 2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으므로 YS나 DJ당도 아닌 JP당에 들어가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 명분이 신군부에 대한 입장 정리였습니다. 그런데 JP는 그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JP의 이름이 너무 많이 거론되는 것도 내켜하지 않는다. 지금은 내각제를 고리로 캐스팅 보트를 쥘 계산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모양이 좋아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몇 년 전 JP로부터 식사 초대를 받았어요. 그 자리에서 우스개로 정치에서 손을 떼고 나와 낚시나 다니는 것이 어떠냐고 떠보았지요.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2인자를 노릇을 했으면 됐지 YS, DJ 밑에서 또 2인자로 있는 게 민망해 보였습니다. 그는 태연하게 묵살하더군요. 나는 복당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복당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사에서 보듯 병신되기 십상이죠. 데려다놓고 정치적으로 활용해먹고는 비참하게 다시 폐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JP도 YS, DJ 양쪽을 다 가보았지만 상처밖에 남은 게 없지 않습니까.”

    그는 정치 노선상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JP의 능력과 겸양은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주문을 잊지 않는다. 인간적으로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3선개헌에 반대할 때 JP는 야당 당수보다도 더 많은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의 집으로 전화를 하면 명색이 2인자 집인데도 언제나 전화선에서 지글지글 끓는 소리가 났다는 것이다.

    “JP에게는 DJ나 YS가 갖고 있지 못한 인간적 표정이 있습니다. 머리가 좋다 보니 문학소년 같기도 하고, 센티멘털한 멋쟁이죠. 그러나 정치는 냉혹해야 합니다. 몸을 빼야 할 때가 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무슨 일이건 말과 행동을 할 때는 적기가 있는 법인데 그런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고 아쉽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요.”

    -3김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했는데 더 보태실 말씀은 없습니까.

    “JP도 학생시절에는 상당히 진보적이었어요. 학창시절 좌익운동을 했다는 문건이 미국을 통해서 나온 적이 있어요. 하긴 사상이 무제한적으로 유입되고 좌익사상에 물들지 않으면 지식인 반열에 오르지 못하는 시절이었으니 냉전적 시각이나 사고로 전단할 수는 없지요. 그런데 요즘 그의 대북 관련 발언을 보면 좀 걱정스럽습니다. 젊은날의 JP의 생각과도 크게 거리가 있는 것 같고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우선적인 인간의 도리, 덕목 아닙니까. 어려운 북한을 돕는 것이 여유 있는 남한의 입장에서는 당연하지요. 융통성 있게 진행해야 합니다. 북한이나 미국에 대해 폭 넓게 해석하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3선개헌 반대 때의 일화가 있다면 소개해주실 수 있습니까.

    “정보부와 청와대가 감시를 심하게 했지만 몹쓸 짓은 안했어요. 신군부보다는 훨씬 신사적이었다고 할까요. 박대통령은 젊은 정치인의 얘기는 경청했어요. 한번은 이후락 비서실장이 ‘장난’이 심하고 말썽이 많은 것을 보고 이후락씨가 곁에 있는 자리에서 직접 대통령께 건의했지요. ‘각하 주위에 있는 나쁜 놈은 다 물리쳐야 합니다’라고 말씀 드린 것이지요. 박대통령은 ‘알고 있어’라고 짧게 대답했던 것 같습니다. 민주화됐다고 하는 요즘도 당사자가 있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지는 못할 거예요. 그런데 박대통령은 이 건의를 받아주었어요.”

    -3선개헌을 반대하던 분의 건의를 박대통령이 받아들였습니까.

    “박대통령은 3선개헌 전만 해도 국가관이 뚜렷했어요. 내가 공화당 사무총장으로 있던 36~37세 때, 그러니까 박대통령은 46~47세 때가 되는군요. 지역구 난민촌에 불이 났는데 피해가 심했어요. 박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청와대로 들어오라고 하더니 지역구에 내려가라며 헬리콥터를 내주고 여비도 줍디다. 캄캄한 밤중에도 지방에 비피해가 나면 곧바로 내무장관 농림장관을 불러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모색케 했습니다. 나는 그런 방법이 꼭 옳다고는 보지 않지만, 박대통령의 열정은 사줄만 하다고 생각해요.

    이승만 대통령 시절의 비서진은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지만 박대통령은 비서진을 대폭 보강해 핵심 브레인으로 활용했지요. 이런 것들은 모두 군대에서 나온 겁니다. 미국의 제도를 그대로 옮겨온 것인데 브리핑 메모 회의 이런 것들이 같은 맥락이죠. 그래서 측면에서 국가의 틀이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박대통령이 3선개헌과 유신을 거치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부인 육영수 여사를 잃은 것이 결정적으로 그를 타락시켰다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3선개헌과 유신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인격적으로도 파탄이 왔습니다. 특히 육체가 말이 아니었어요. 군대시절부터 많이 마신 술 탓에 수전증이 있었는데, 그 무렵에는 손을 더 떨었어요. 게다가 주변에서 젊은 여자를 붙여주니 방탕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지요.”

    -정치 입문은 박대통령을 통해서 한 것입니까.

    “지역의 젊은 지도자 발탁 케이스로 봐야지요. 5·16 혁명이 나던 해 중앙정보부에서 당을 만들었습니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중심이 되어서 창당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이때 나는 부산에서 유솜(USOM) 원조로 주택을 짓고 있었어요. 고향 어르신이 부산시장으로 있었는데 그가 600채의 난민주택을 짓는데 도우라고 해서 참여했습니다. 헌신적으로 그 일을 하면서 지역개발위원회를 만들어 청년운동을 시작했어요. 그 무렵에 유진오씨가 본부장으로 있는 국민재건운동본부가 발족됐고 자연스럽게 그 일원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공화당에 참여하는 게 어떠냐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정보기관에서 제가 하는 일을 눈여겨봤다가 보고했던 모양입니다.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참신한 당을 만든다고 해서 응했습니다.”

    -일생을 통해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어떤 것입니까.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흔히 정치적 소신을 굽히지 않고 3선개헌 반대투쟁에 앞장선 점과 신군부 시절 민주화의 중심에 서있었다는 것을 내세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젊은 시절 난민촌을 건설한 것을 들었다.

    “그때는 정말 신명나게 일했습니다. 벽돌 한 장 시멘트 포대 하나가 아쉬울 때였는데 도둑도 많이 맞았어요. 도둑을 막으려고 난민촌에 천막을 쳐놓고 24시간 현장에서 살았습니다. 국가 경제단위로 보아 당시 가옥 600채를 짓는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런 일을 했다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괴로운 일은 어느 때였습니까.

    “3선개헌 반대투쟁 때였지요. 누구보다 나를 믿고 아끼던 박대통령을 반대하면서 심적으로는 고통스러웠습니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찬성했겠지요. 결국 반당분자로 몰려 당에서 쫓겨났습니다. 해당 행위자라는 명목이었죠. 제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때의 심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특별한 인생관이 있으면 말씀해주시지요.

    “때가 아닐 때는 자연을 벗삼아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자가 입신을 위해 각지를 돌아다닐 때 은둔한 노자 계열의 사람들이 ‘공자 너도 집에 돌아가 농사를 짓는 것이 어떠냐’고 비아냥거립니다. 정치를 하건 사업을 하건 적기에 담담하게 물러나는 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집권당 사무총장 할 때 아침마다 출근하다시피 우리집으로 뻔질나게 오던 사람이 사무총장에서 물러나니까 코빼기도 비치지 않아요. 권력의 속성이란 그런 것입니다. 아름다운 정치풍토가 되지 못해서 자꾸 이용하려는 정략만 나온 결과지요.”

    예춘호씨는 골프예찬론자다. 돈 가진 사람들의 운동만은 아니라고 본다. 지금은 골프 대신 낚시를 하고 있지만 퍼블릭코스를 더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골프를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낚시는 보기 싫은 사람을 보지 않아서 좋지요. 낚시터에 사람이 많이 있으면 다른 쪽으로 자리를 옮기지요.”

    요즘 그는 행운유수(行雲流水)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그런 정신으로 서예를 줄곧 해왔다. 먹을 40분 정도 갈아 글씨를 두 시간 정도 쓴다. 그리고 붓 씻기를 30분, 벼루 닦기를 30분 동안 한다. 글을 쓰고 붓을 닦다보면 딴생각이 날 틈이 없다. 남의 욕을 할 시간도 없어진다. 욕심이 없어지니 굴욕적으로 남에게 매달릴 이유도 없다.

    -하루 일과를 어떻게 보내십니까.

    “새벽 3~4시에 기상합니다. 일어나서는 일본의 시사지 ‘중앙공론’ ‘문예춘추’ ‘세계’ ‘현대’ 등을 목차를 훑으면서 호기심이 가는 것부터 읽습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시론들이 좋아요. 우리가 얻지 못하는 중요한 정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는 먹을 갈기 시작합니다. 보통 먹물을 두 숟가락 정도 만들어놓습니다. 그리고 10장 정도의 글씨를 씁니다. 오전 7시경 아침식사를 하는데 대개 죽을 먹습니다. 누룽지나 빵으로 대신하는 경우도 있고요. 1980년대 징역을 갔다 온 뒤 식생활이 바뀌었어요.”

    퇴근시간은 따로 없지만 보통 오후 4시경이면 집으로 돌아간다. 그가 운영하는 영도육영회는 자신이 부산에 세운 도서관을 처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도서관 사업은 정부가 해야 한다고 보고 이를 처분해 20억원을 마련해 육영사업을 시작했다. 13년 전부터 매년 중고교생과 대학생 각각 70명을 선발해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가족으로는 부인 황치애씨(70) 사이에 종석(50·한양대 경영학과 교수) 종홍(44·국민대 경제학과 교수) 종영(41·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연구교수) 3남과 출가한 종옥(47) 지숙(39) 2녀가 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