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호

박정희 신화의 숨은 주역 경제참모들의 극비작전

경부고속도로 건설에서 8·3조치까지

  • 입력2004-11-08 14: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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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발경제시대부터 IMF 외환위기까지 한국경제 성장과 위기의 순간, 그 현장을 지켰던 김용환(金龍煥) 한나라당 부총재가 자신의 경험담을 책으로 펴냈다. 제목은 ‘임자, 자네가 사령관 아닌가’. 박정희 대통령의 독특한 화법으로 제목을 삼은 이 책에서 김부총재는 박대통령의 경제철학과 리더십을 생생한 사례를 통해 서술하고 있다. 또 1997∼98년 비상경제대책위원회의 일원으로 외채협상에 참여해 가까이에서 본 DJ와 그의 경제참모들과의 불편했던 기억들도 기록해놓았다.
    박 대통령이 재임중 이룩했던 많은 업적 중에서 경부고속도로는 시종일관 대통령이 직접 일궈낸 업적 중의 업적, 대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나는 이재국장으로서 재무부를 대표하여 건설비를 추정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1967년 12월 초, 서봉균(徐奉均) 장관으로부터 갑작스런 부름을 받고 장관실로 달려갔더니 부른 이유를 말하기도 전에 대뜸 “큰일났다”고 걱정만 했다. 대통령으로부터 경부고속도로의 건설비 소요액을 산출하여 보고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화


    지시가 떨어지고 나서 약 열흘간 당시 이재과의 홍인기(洪寅基) 사무관(후일 증권거래소 이사장 역임)을 지명하여 그와 함께 500㎞안(A)과 440㎞안(B) 두 경우를 상정하고 소요투자비를 추정하였다. A안의 경우 용지 매입비 17억5000만원, 공사비 347억5000만원 등 365억원으로 추정하였고, B안의 경우 용지매입비 15억4000만원, 공사비 305억8000만원 등 321억2000만원, 그러니까 1㎞당 7290만원의 공사비가 소용될 것으로 추정했다. B안은 후일 건설부가 확정한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사업비 소요액 330억원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건설 사업비를 추정하는 것도 중요하나, 재무부의 소임인 재원 조달 방안을 구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에 대한 장관의 지시는 없었다. 따라서 사업비 추정과 그 재원을 조달하는 방안 등 두 가지에 초점을 두면서 보고서를 작성해 나갔다.

    지금 생각해도 1967년 12월12일은 공직생활 동안 다시 한번 기억되는 날이다.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경부간선고속화계획 : 소요 공사비 추정과 재원조달방안’이라는 이름의 보고서를 박정희 대통령께 보고하는 날이었다. 이 날의 보고에는 대통령을 비롯, 재무부장관, 비서실장, 정소영(鄭韶永) 경제수석비서관, 그리고 홍인기 사무관 등이 참석했다. 통상적으로 청와대의 보고는 국장급 관료가 보고자가 되고, 간혹 주무과장이 배석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함께 애쓰며 자료를 챙기고 분석해 준 홍인기 사무관을 대동하는 것이 상급자로서의 도리라 생각하고 의전비서실에 특별히 부탁하여 그의 배석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박대통령 앞에서 A안과 B안의 공사비 추정액을 보고하고 그에 대한 재원의 조달방안을 보다 상세하게 브리핑하였다. 대통령은 재원조달에 관하여는 지시한 바가 없었기 때문에 의외의 보고를 받은 셈이다. 더욱이 경제기획원은 투자비 소요액 판단을 중도에 포기했고, 건설부 등 기타 기관도 재원조달 방안에 대한 보고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박대통령은 재무부의 보고에 매우 흡족해 했다. 그 덕분에 보고가 끝난 그 날 저녁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베풀어준 만찬에 참석하는 영예를 안을 수 있었다. 복요리를 곁들인 성찬이었다.

    나는 대통령으로부터 술잔을 받고 나서 입술만 축일 정도로 술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런데 홍인기 사무관은 대통령이 주시는 술잔을 거침없이 받아 마시는 것 아닌가. 대통령도 “젊은 사람이 술을 잘하는구먼, 나중에 출세하겠어”라는 농담을 하면서 즐거워했다.

    고리사채에 허덕이고 있는 기업을 구해 내고, 그 체질을 강화하고자 취해진 비상조치가 대통령 긴급명령 제15호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8·3 조치)’이다. 이때 나는 청와대 외자관리비서관 겸 비서실장 보좌관으로서 8·3 조치를 준비하라는 특명을 받고 전 과정을 주도하게 된다.

    1970년 전후에 나타난 세계경제의 침체는 전환기에 처한 우리 경제를 더욱 더 압박하고 있었다. 수출이 둔화되는 한편, 환율의 현실화에 따른 외화차입금의 원화상환 부담이 가중되면서 대부분의 기업이 재무구조가 부실화되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더구나 금리 현실화 조치에 따른 고금리정책에도 불구하고 지하경제의 규모가 커지면서 기업에는 금리부담의 압박이 가중되고, 은행들의 역할은 극도로 취약해져 금융시스템 전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때 탄생한 것이 이른바 대불(代拂)제도다. 기업이 외채를 상환하기 어려울 경우, 금융기관이 잠정적으로 대신 갚아주고, 사후에 해당기업으로부터 돌려받는 일종의 융자제도다. 그러나 금융기관의 대불 여력도 안정계획의 제약 속에서 충분치 못했다. 따라서 거의 모든 기업이 회생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최후의 자금 조달원으로서 사채시장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더 커져만 갔다. 당시 사채시장은 규모가 점점 커지고 번창하여 그나마 기업의 실질적인 자금줄 역할을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경제과학심의회의 천병규(千炳圭) 및 주원(朱源)씨는 사채를 제도금융권으로 유인하고 대환하되 기업의 위장사채를 없앨 것을 주장한 반면, 박희범(朴喜範)·송방용(宋邦鏞)·이기준(李基俊)씨는 사채를 아예 동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전자의 “대환을 하되, 위장사채는 출자 전환을 시키자”는 의견은 후일 8·3 조치에 적극 반영되었다.

    이와 같이 기업이 당면하고 있던 고리사채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남덕우·천병균·주원 씨 등의 대환파, 그리고 김영선·박희범·송방용·이기준 씨 등의 동결파로 양분되었다. 결과적이지만 8·3 조치는 동결파의 의견으로 귀결되었다.

    각계로부터 받은 보고서는 전부 나에게 보내졌다.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모든 보고서를 꼼꼼히 살펴보고 비교 검토하면서 나름대로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등 작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때 사채동결이라는 사안의 성격상 극비를 요할 뿐만 아니라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대통령긴급명령으로 처리하기로 결심하고, 한국은행으로부터 외자관리비서실에 파견되어 함께 일하고 있던 심형섭(沈亨燮) 비서관(후일 대한보증보험사장 역임)에게 “이 사항은 대통령과 비서실장, 그리고 나만 알고 있다. 여기에 당신을 합류시키는 것이니 비밀을 잘 지켜야 한다”면서 사채 규모의 파악을 비롯한 기초 자료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1971년 9월 심비서관과 산업은행에서 외자비서실에 파견되어 있던 타이피스트 이춘희(李春姬)양,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초기 실무준비팀을 구성했다. 회현동에 있는 뉴남산관광호텔(현, 호텔렉스 자리)이 첫번째 아지트였다. 혹시 의심을 받지 않을까 우려하여 사무실로 쓰고 있던 호텔 방에 ‘경주종합개발계획’이란 위장 차트를 내걸고 일을 시작했다. 첩보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어느 정도의 실무 준비와 긴급조치의 윤곽을 잡은 뒤, 11월10일 공식적으로 6인의 실무작업팀을 구성하여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실무작업팀은 초기 단계의 준비팀 3인 외에 상법(商法)의 대가였던 주택은행의 김종현(金宗炫, 후일 주택은행·외환은행 전무 역임) 부장과 재무부 이재2과의 정영의(鄭永儀, 후일 재무부장관 역임) 과장, 한국은행 조사부의 성준경(成俊慶, 후일 한미은행 전무 역임)씨 등 3인이 합류했다.

    나는 사채동결 조치의 성격상, 비밀 유지가 그 성패를 좌우할 것으로 생각해 작업팀에 참여하는 사람 모두로부터 서약서를 받기로 결심했다. 뿐만 아니라 서약서의 뒷면에는 날짜는 표시하지 않은 채, 사직원도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했다.

    1972년 6월경, D데이를 8월3일로 다시 잡고 마무리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최진배(崔震培) 재무부 직세과장이 8·3 조치안을 마무리짓는 작업반에 합류했다. 그밖에도 최각규, 이헌재(李憲宰, 후일 금융감독위원장·재경부장관 역임)씨 등 여러 사람이 이 작업에 관여하였으나, 이들의 역할은 작업팀이 구하고자 하는 자료나 각자의 임무와 관련된 부분에 대하여 의견을 제공하는 수준에 그쳤을 뿐, 사채의 동결과 관련된 핵심 부분에는 관여시키지 않았다. 물론 이들도 서약서 및 사직원을 제출했다.

    7월 말경, 준비된 안건을 어떻게 인쇄하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치자 나는 차라리 육필로 써서 복사하기로 결심했다. 비밀유지 때문이었다. 복사기의 작업용량(1분당 48면 예상)과 작업팀의 작업량을 역순으로 계산해 보니 7월27일부터는 복사를 시작해야 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래서 마지막 단계에 한국은행조사부 직원인 오창환(吳昌換)·이수길(李秀吉)씨가 준비된 안건을 육필로 정서하기 위해서 합류하게 되었다.

    마지막 단계의 작업은 우이동 그린파크 호텔에서 이루어졌다. 이 호텔은 당시 대표적인 러브호텔로 알려져 있던 터라 비밀유지에는 안성맞춤이라고 판단한 뒤 이 호텔의 한 층을 통째로 전세 내어 작업을 진행하였다. 여기에 신도리코의 복사기를 4대나 설치하였다. 비밀을 치밀하게 유지하기 위해 심형섭 비서관은 신도리코사에 가서 복사기를 분해·조립하는 방법까지 익히고 돌아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다. 오창환·이수길씨를 마지막 단계에서야 가담시킨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 정도로 비밀유지에 철저를 기했다.

    7월22일, 또 다른 두 사람이 합류하게 된다. 서울지방검찰청의 민석기(閔奭基) 검사와 법무부 법무실의 김기춘(金淇春, 현 한나라당 의원) 검사였다. 이들이 합류한 이유는 8·3 조치를 위반한 형사범과 일반 형사범에 대한 처벌형량의 형평성을 검증받기 위해서였다. 이들의 법률자문을 받은 후 오창환·이수길씨가 긴급명령의 최종안을 정서하여 엄청난 분량이었지만 시간 계획에 맞추어 차질없이 복사를 마쳤다.

    7월29일 갑자기 대통령께서 부르신다는 전갈을 받고 청와대에 들어갔다. 대통령께서 “8·3 조치를 단행하는 8월 3일 재무부차관으로 발령을 낼 테니 재무부에 가서 이 정책을 반드시 성공시키고 우리 경제를 건져내도록 하게”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한편 이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던 1972년 3월 나는 상공부차관으로 전보되었다. 상공부차관으로서의 책임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지만 경주나 제주도에 볼일이 있어서 간다고 출장 명령을 달아놓고 ‘경주종합개발계획’(?)을 위해서 호텔로 출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실제로 한번도 경주나 제주도에 간 적이 없어. 양심상 다소 가책을 받았으나 국가의 중대사안을 책임지고 있는 이상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박대통령께 중간보고차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당시 상공부장관이던 이낙선(李洛善)씨에게 “내가 김차관에게 특별한 임무를 부여했으니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오”라고 전화를 해주시는 것이 아닌가. 그 날 상공부로 돌아와 이낙선 장관에게 “아까 대통령께서 장관님께 전화를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면서, 사채동결 얘기는 않고 “산업합리화를 위한 특별대책에 관하여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라고 보고하려는 순간, 그는 내 입을 막으면서 “대통령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그 이상은 내가 알 필요가 없습니다. 자유롭게 행동하십시오”라고 하면서 나의 입장을 이해해 주었다.

    마지막 정책 결정 논의를 마친 후 대통령의 재가를 받기 전에 관계 각료들, 즉 이 문안의 공식 제출자인 김종필 국무총리, 태완선 부총리, 남덕우 장관, 이낙선 장관 등의 서명이 필요했다. 이 문안의 정식 명칭은 ‘종합경제조치를 위한 대통령긴급명령과 이의 관련 사항에 관한 보고’였다. 여기에 나는 당시의 직책인 상공부차관이 아닌 ‘보고관 김용환’으로 기재돼 있다.

    우리 직속 상관인 이낙선 상공부장관의 서명을 받기 위해 장관실에 들어갔더니, “난 내용은 보지 않겠어요” 하면서 서명을 했다. 그리고 남덕우 재무부장관의 서명을 받은 후, 태완선 부총리의 자택을 찾아가 간단하게 내용을 설명한 뒤 서명을 받았다. 그 다음 총리공관으로 찾아가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에게 “사채동결에 관한 대통령긴급명령안을 결재받고자 왔습니다” 하니까 내용은 일체 묻지 않고 “어, 그래, 그 날(국무회의에서 긴급명령을 의결하는 날을 뜻함) 내가 알아두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것만 말해 줘” 하면서 서명을 했다.

    김종필 총리뿐만 아니라 서명인 모두가 내용은 묻지 않고 서명만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도 그럴 것이 8·3 조치에는 우리나라의 기업에 대한 산업합리화정책 차원의 여러가지 지원시책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관계 국무위원들간에 사전 협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사채에 관한 특별조치에 관하여는 성격상 전모를 미리 알아서는 안된다는 각자의 양해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국무총리까지는 내가 직접 결재를 받았다. 그 다음 차례는 대통령의 재가가 남았다. 7월30일 당시, 박대통령은 진해의 해군기지에서 가까운 저도(猪島, 여름 별장)에서 하계휴가를 보내고 계셨기 때문에 김정렴 비서실장이 진해에까지 내려가서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그 다음날 서울로 올라왔다.

    1972년 8월2일 저녁은 비가 무척 많이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8월2일 밤 11시40분경, 대통령이 주재한 청와대 임시국무회의에서 8·3조치가 대통령긴급명령 제15호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의결·공포됐다. 그리고 8월3일 0시를 기해 시행되었다.

    1973년 10월16일 발발한 제1차 석유 파동은 우리 경제에 치명적 타격이었다. 1972년 말 배럴당 2.5달러이던 원유가가 1973년 말 5.3달러로, 1974년에는 11.25달러로 폭등했고, 이것이 1979년 7월 제2차 석유 파동을 전환점으로 배럴당 32달러까지 치솟았다.

    원유 가격이 폭등하자 우리나라 경제는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라 경제가 부도 상황으로 치닫자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기획원에 대책을 마련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 따라서 태완선(太完善) 부총리는 1973년 12월 중순 ‘74 경제기본시책(안)’이라는 제목으로 내각의 대응방안을 보고했는데, 그 자리에 나는 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배석하게 되었다.

    경제기획원의 구상은 국제 여건의 변동에 초점을 맞추어 작성되었으나 제시된 정책의 내용은 물론 그에 대한 실천 방안이 너무도 미흡하게 느껴졌다. 대통령은 보고를 다 받고 나서 “태부총리, 수고했습니다. 워낙 중요한 사안이니 청와대에서 다시 검토하여 결론을 내도록 합시다” 하면서 흔쾌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브리핑을 듣고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대통령으로부터 “임자, 올라오지”하는 호출을 받았다. 집무실에 올라갔더니, “경제기획원에 한 달 동안이나 시간을 줘서 대책을 마련하라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어. 그렇게 미지근하게 대응해 가지고는 이 난국을 극복하기 어려울 것 같아, 임자가 한번 다시 만들어봐”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 즉시 경제기획원의 보고 내용을 참고하면서 새로운 대책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12월 중순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1월10일 완성을 목표로 하였으니 1개월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성안된 것이 ‘국민생활의 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3호’, 이른바 1·14조치였다.

    석유 파동으로 야기된 악성 인플레이션을 완화하기 위해서 정부·기업·소비자의 공동노력을 조직화하고 저소득층의 부담 경감과 국민생활의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강력한 소비절약을 유도하여 석유 파동의 충격을 극복하려는 것이 1·14조치의 기본 목적이다.

    1·14 조치의 불가피성을 알리고 전 국민의 자발적 참여와 협조를 당부하는 내용을 담은 대통령담화문을 작성하였다. “새해에 들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심기일전(心氣一轉)하여 자신과 용기를 갖고 정부와 국민이 합심하여 당면 경제정책의 중점을 ①국민 생활, 특히 서민 대중의 생활안정 ②소비의 억제와 자원의 절약 ③국내 자원의 개발과 국제수지 애로의 타개 등에 두고자 합니다”라는 내용의 담화문이었다.

    이때 지금도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가 있었다. 인쇄 과정에서 긴급조치와 대통령담화문을 완벽하게 하고자 오자(誤字), 탈자(脫字)가 없도록 수없이 추고를 거듭했다. 그런데 국무회의에서 담화문을 낭독하고 통과시키려는 순간, 민관식(閔寬植) 문교부장관이 “각하, 틀린 글자가 하나 있습니다. ‘心氣一轉’이 아니라 ‘心機一轉’입니다”라고 지적하는 것이 아닌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완벽주의자로 알려진 내가 이처럼 중요한 문건에 오자를 그대로 남겨놓았다는 것을 알고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통령은 “통상 우리가 쓰는 한자는 ‘心機一轉’이 맞는데 氣(기)자로 쓴 ‘심기일전’도 좋지 않습니까. 마음과 기분을 한번 가다듬자는 의미인데 더 좋은 것 같습니다”라고 하면서 웃으시는 것이 아닌가. 다시 한번 내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국무회의에서는 분명히 대통령특별담화문의 원안을 그대로 통과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관료들을 휘어잡는 특유의 용인술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경제관료들의 노력을 인정하고 사기를 꺾지 않으면서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도록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그 후 대부분의 문건에는 심기일전(心機一轉)이라고 수정되어(?) 나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것들이다. 정부의 관보(官報)에도 기(機)자가 아니라 기(氣)자로 되어 있음을 다시 확인하였다.

    재무부장관 시절(1974~78)에는 인사관리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해 나름대로 원칙을 정해놓고 있었다. 재무부 본부의 승진 인사는 원칙적으로 국가시험 출신자들과 국가시험을 거치지 않은 내부 인사들의 비율을 5대5 정도로 하되, 때에 따라서는 국가시험 출신자들을 우대하여 6대4 비율의 범위 내에서 탄력성 있게 운영했다. 승진인사는 반드시 검증 과정을 거친 후 결정했다. 고위직일수록 이 원칙을 엄격히 적용하였다. 승진한 인사는 우선 재무부와 관련 있는 외청 내지 해외근무부서(예를 들면 해외재무관)에 배치하여 1∼2년간 훈련 과정을 거치도록 한 후, 본부의 핵심 국장으로 전보하여 중용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차관을 책임자로 한 1급 관료 4인으로 구성된 인사위원회에서 승진인사안을 작성하도록 하여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고자 노력했다. 후일 ‘김용환 사단’ ‘모피아(Ministry of Finance+Mafia = Mofia)’를 구축했다는 소리를 들은 일이 있다. 이 얘기는 오히려 4년3개월의 재임 기간중 원칙에 따라 유능한 엘리트 관료들을 선발하여 배치한 결과로 형성된 재무부의 관료진과 산하기관의 인사 구성을 오해(誤解)한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중용한 엘리트들 중에는 후일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인재가 많았다. 이 점에서도 사적 인맥을 구축했다는 얘기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1975년 당시 이상덕(李相德) 주택은행장과 박시헌(朴時憲) 전무간에 은행 경영을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지고 있었다. 이상덕 은행장은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이 한국은행 재임시 그를 상급자로 모셨던 사람이다. 반면 박시헌 전무는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이 든든한 후원자로 알려져 있었다. 이 두 사람이 각기 나름대로의 배경을 업고 갈등을 빚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은행 경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임기 도중이었지만 두 사람을 동시에 교체하는 처방을 선택하고 홍승환(洪承丸) 재무부 재정차관보를 은행장으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했다. 이것은 금융기관장의 불합리한 경영관행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고태진(高台鎭) 조흥은행장의 경우는 당시 오탁근(吳鐸根) 검찰총장과 사돈 관계였다. 또한 이후락 정보부장의 후원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금융계 인사를 순수 경영인으로 배치한다는 원칙으로 1976년의 주주총회에서 행장을 교체했다.

    전신용(全信鎔)씨는 상업·한일·신탁은행장을 역임하고 금융계를 떠나 당시는 야인으로 머물고 있었다. 그는 또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과 사돈 관계였는데 그 사람을 한국은행총재로 임명해 달라고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청탁을 한 모양이었다. 비서실장은 마지못해 나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끝까지 거부한 적이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재무부장관직을 사임하자마자 그가 금융통화위원회의 위원(1979∼81)에 선출되는 것을 보았다.

    또한 내가 재무부장관에 부임하자마자 김명수(金明洙) 조흥은행 감사가 대출심사 과정에서 감사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면직된 일이 있었다. 이 사람은 공교롭게도 내 장인의 친형제 못지않은 친구였다. 장인을 통해서 면직만은 피하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러나 인사 관행을 바로잡는다는 의지에서 그 부탁을 들어주기가 어려웠다. 그 연유로 장인과는 1년여 동안 불편한 관계를 겪기도 했다.

    옥포조선소의 건설은 원래 내가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장으로 재임하고 있을 무렵 시작된 계획 사업의 하나였다. 대한조선공사의 회장이던 남궁연(南宮鍊)씨가 결국 성사는 되지 않았지만 모건 개런티 투자은행에서 약 9000만달러의 차관을 얻어 거제도 옥포의 100만평 부지에 120만t 규모의 조선소를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추진위원회와 경제장관회의에서 수 차례 검토한 결과 차관계획의 성사 여부나 자금조달계획의 타당성에 다소의 의문이 없지 않았으나, 우리나라 해운과 조선분야의 선구자로서 그의 공로를 생각하여 일단 지원해 보자는 결론을 냈다. 이에 따라 1973년 5월 남궁연 회장의 대한조선공사를 사업 주체로 하는 옥포조선소 건설계획이 확정되었고, 1979년 완공을 목표로 10월에는 기공식을 하는 등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남궁회장이 장담하던 모건 개런티로부터의 차관이 무산되고, 더욱이 1973년 말 제1차 석유 파동이 발발하면서 소요자금이 당초의 1030억원에서 1500억원으로 증가되는 등 사업이 불확실해지고, 국내외로부터의 자금조달이 불투명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전체 공정 중 30% 정도가 진척된 채 1976년부터 건설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더욱이 남궁연 회장은 조선소의 사장직을 아들 남궁호(南宮浩)씨에게 맡겨놓고 본인은 해외 자금조달과 수주활동을 한다는 명목으로 1년에 100여일 동안 해외에 체류하면서 막대한 자금부담을 산업은행에 떠넘기는 것이었다. 그러니 건설단계의 대공사가 계획대로 진척될 리가 없었다.

    옥포조선소 건설의 정상화를 위한 논의가 거듭되다가 해가 바뀌어 1978년에 들어서 마침내 옥포조선소를 제대로 건설하기 위해서는 제3자에게 인수시킬 수밖에 없다는 결심을 했다. 이때부터 제3자를 물색하기 위한 의사 타진을 시작했다.

    내심 삼성이나 럭키 같은 튼튼한 기업에서 맡아주기를 바랐다. 후일 옥포조선소를 인수하게 된 대우그룹은 대상에서 제외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김우중(金宇中) 회장은 그동안 정부와 부실기업정리 과정에서 이미 한국기계, 신진자동차 등을 인수하여 정상화시켰고, 또 무엇보다 나와는 친교가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대우그룹이 불황 속에 허덕이는 조선공업, 그것도 부실해진 사업을 인수한다는 것은 아무리 그의 기업경영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삼성이나 럭키는 물론, 어느 기업에서도 이 사업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부실기업정리의 주무장관으로서 벽에 부딪쳤다. 그래서 김우중 회장을 만났다. 전후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김회장이 정부의 무거운 짐을 하나 덜어주어야겠소. 어렵지만 옥포조선소를 인수하여 조속히 완공을 해주시오”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한마디로 거부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벅찬데 그 큰짐을 제가 어떻게 짊어지라는 겁니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산업은행이 옥포조선소 때문에 망하게 됐소. 나라 경제가 잘못되면 기업인들이 잘되겠소? 기업과 정부는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것 아니오. 이번만큼은 김회장이 정부를 도와주어야겠소. 합리적이고 적법한 수준에서 지원을 해 드리겠소”라고 거듭 요청했다. 김우중 회장은 곤혹스러워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던지 자기한테 시간을 좀더 달라고 했다.

    그러던 7월10일경 김정렴 비서실장이 급히 보자고 하기에 즉시 실장실에 들어갔다. 김정렴 실장은 나를 보자마자 “이거 큰일났어요. 각하께서 김장관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계신데 야단났어요” 하는 것이 아닌가. 사연인즉 내가 산업은행에 압력을 넣어 옥포조선소를 의도적으로 부실화시키고 그것을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에게 넘겨주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궁연 회장이 그와 같은 내용의 호소문을 작성하여 비서실을 경유치 않은 사적 통로를 거쳐 박정희 대통령에게 드렸다는 것이다. 동시에 검찰, 정보부 등 사정기관에도 같은 내용의 문서를 작성하여 제출했다는 것이다. 대통령도 역시 인간이었다. “나는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어. 실장이 잘 조사해 보시오”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없지요. 책임을 지고 사임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김정렴 실장은 “내가 어떻게든지 대통령을 뵐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줄 테니 사임을 하더라도 대통령의 오해를 풀어드리고 물러나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그 날 저녁 아내에게 “이제 장관을 그만해야겠소. 다만 내 인격을 의심받아서는 안될 터인데…”라고 말을 흐렸던 기억이 난다. 아내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다그쳐 물어도 끝내 입을 다물었다.

    1978년 7월13일 대통령 집무실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뵈었다. 물론 사직서를 써 가지고 들어갔다. ‘조선공사(옥포) 문제의 경위’라는 제목의 13쪽짜리 해명서를 드리고 그 동안의 경위와 동 사업에 대한 남궁회장의 미온적 태도에 관하여 차분히 설명했다.

    대통령께서 다 듣고 나시더니 첫마디가 “임자, 내가 잠시 오해를 했구먼. 미안하네”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아니 이렇게 어렵게 된 문제를 자네 혼자서 처리하려고 몸부림치는가, 부총리는 뭐 하는 사람이야. 또 실장은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뒀어” 하면서 역정을 내셨다.

    당장 실장을 부르시더니 “김 재무는 이 문제에서 그만 손을 떼도록 하고 남 부총리가 주관하여 해결토록 하시오. 잘못하면 사람 하나 다칠 뻔했어” 하시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남덕우 부총리에게 직접 전화를 하시고 조속한 시일 내에 옥포조선소 문제를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대우 측과의 절충이 지지부진하던 8월 중순경 대통령으로부터 다시 부름을 받고 청와대에 들어갔다. 대통령께서 “김 재무, 옥포조선소 문제를 경제기획원에 맡긴 지가 한달 여가 됐는데 아직도 결론이 안 나는군. 산업은행은 점점 더 물려 들어가서 망하게 된다는 정보야. 이 문제를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으니 도리가 있나. 김 재무가 다시 맡아서 결론을 내주게” 하시는 게 아닌가.

    즉석에서 “알겠습니다. 1주일만 시간을 주십시오” 하면서 최대한 대우 이외의 실수요자를 설득해 보겠으나,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대우그룹을 실수요자로 정하겠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이런 일을 도와줄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군” 하시는 것이 아닌가.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즉시 몇몇 그룹 총수에게 최종 확인을 위한 전화를 했다. 예상한 대로 모두 거절하는 것이다.

    김우중 회장에게 만나자고 했다. 김 회장은 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또 무슨 오해를 받으시려고 이 일로 나를 부르시는 겁니까” 하면서 난처해했다. 미리 생각했던 인수조건을 제시하면서, “이 내용대로 받아주시오”라고 하면서 강요하다시피 부탁을 했다.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새로 제시한 조건은 경제기획원과의 협상에서 정부가 지원키로 한 예산을 통한 직접지원을 거부하는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부실기업의 정비 작업에 금융 수단이 아닌 재정부담을 직접적으로 연계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고수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김우중 회장은 매우 섭섭하게 생각하면서도 나의 성격을 잘 아는 까닭에 제시한 원칙을 수락해 주었다. 산업은행이 기존 대출금 중 124억5000만원을 출자전환하면서 잔여대출금의 상환기간을 연기하고 대우그룹은 그에 상응하는 공동출자를 하되, 그 금액은 그룹내의 기업 간 융자로 충당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원칙을 내용으로 하여 정부는 1978년 8월31일 경제장관회의에서 옥포조선소의 사업 주체를 대한조선공사에서 대우그룹으로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대우그룹은 조선소를 신조선, 수리조선, 플랜트 및 산업기계를 복합 생산하는 종합기계공업으로 육성하기로 하고, 1978년 10월 폐허 상태에 놓여 있었던 옥포조선소를 인수하게 된 것이다.

    혼란 속에서도 ‘부도난 정권’을 인수하기 위한 대통령 선거가 1997년 12월 18일 실시되었다. 국민들은 그 인수자로 DJ를 선택하였다. 나는 당시 자민련(自民聯)의 부총재로서 국민회의 측과 대통령 후보를 단일화하고, 대선 승리를 위해서 양당 연합전선의 전면에 나서 있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그 즉시 부도난 국가경제를 수습하는 데 전력을 쏟아야 하는 인연을 또 다시 맞게 된 것이다.

    1997년 12월22일 DJ는 카폰으로 “정권을 인수하고 보니까 나라가 빈껍데기 같습니다.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공동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는데, 김 부총재가 그 책임을 맡아줘야겠습니다”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DJP 공동정권의 탄생을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사람으로 이 정권이 경제난국을 극복하는 데 기여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 즉시 DJ의 제의를 수락하였다. 1997년12월 22일, DJ를 만나 우리측 위원 인선을 협의한 뒤, 정부측 위원을 포함하여 12인 비상경제대책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외채협상 대표단 시절 협상단 내부의 의견 불일치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우리 대표단은 뉴욕 외채협상에서 기본적으로 1998년 중 만기가 도래하는 금융기관의 외화채무(약 250억달러)를 정부의 지급 보증을 통하여 중장기채무로 만기를 연장시키려는 이른바 ‘상환기간의 연장계획’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협상에 들어가기 전날, 대표단 전략회의에서 유종근(柳鍾根, 현 전북도지사) 고문이 굿 아이디어가 있다고 하면서 다소 엉뚱한 얘기를 꺼내어 대표단 전체가 곤경에 빠진 적이 있었다.

    내용인즉, 한국은행이 20억달러 정도를 출자하여 장부상의 회사(페이퍼 컴퍼니) 하나를 설립하자는 것이었다. 이 회사가 80억달러 정도의 채권을 발행하여 국제금융시장에서 소화시키면 합계 100억달러의 회전기금을 만들 수 있고, 이 기금을 회전 사용함으로써 악성 단기외채를 단계적으로 인수·청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설명은 무려 1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어 그로서는 심각한 대안으로 고려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게 될 경우 결과적으로 우리나라가 채무지불정지, 즉 모라토리엄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또한 일부에서는 인도네시아나 과거 남미에서의 외채협상과 같이 채권단인 국제금융기관들도 도덕적 해이에 대한 책임이 있는 만큼 헤어 카트를 제안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나는 이러한 아이디어들이 전혀 현실성도 없고, 적절치도 않다고 설득해야 했다. 장부상의 회사가 발행하는 채권을 국제금융시장에서 소화시키는 것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헤어 카트는 논리도 빈약하고 채권단이 수용하기가 어려운 대안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YS정부나 당선자의 훈령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물론이고, 대표단이 뉴욕에까지 와서 국가 부도를 선언할 수는 없었다.

    정덕구 차관보는 현실성이 없다며 즉각 반대하고 나섰다. 나도 “우리 경제를 부도내서는 안된다. 협상 대표단이 정부의 훈령 범위를 일탈하는 협상 태도를 보여서는 안된다. 자칫하면 국제금융시장에서 혼란만 초래할 뿐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아이디어를 수용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결국 유종근 고문과 일부의 제안은 없던 일로 처리해 버렸다.

    그 와중에 임창열 부총리는 단기부채의 상환기한 연장보다도 골드만 삭스에 100억달러의 외평채 발행을 맡겨주겠다고 한 약속 때문에 외채협상과정 내내 의견 차이를 보였다. 그는 처음에는 일본으로부터 200억달러의 차관을 도입하여 외환 위기의 불을 끄려고 했으나, 이것이 여의치 않자 이번에는 외평채 100억달러 발행과 대만으로부터의 차관 100억달러 등 200억달러로 단기외채를 상환하여 외환 위기를 극복하려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골드만 삭스도 외평채 발행 업무를 수탁 받아 금리차, 수수료 등 한몫을 챙기려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의견차, 또는 불협화음 때문에 협상 대표단 단장인 나는 유종근 고문, 임창열 부총리 등과 다소 불편한 관계를 감내해야 했다.

    1998년 1월 초, 우리나라가 자칫하면 혼란에 빠질 수 있는 해프닝을 겪었다. 대만의 100억달러 차관 제공설이 바로 그것이다. 새해가 시작되었는데도 외환 위기는 더욱 악화될 뿐,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이 암울한 틈새를 노린 뜬구름 같은 루머가 감지된 것이다. 임창열 부총리와 국민회의의 일부 인사가 중심이 되어 정부가 대만 정부와 100억달러의 차관교섭을 추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임창열 부총리는 현직 부총리로서 국교 관계가 없는 대만에 직접 가지는 못하고 순회대사 자격으로 정인용 전 부총리를 보내기 위해서 여권을 이미 발급하는 등 YS정부의 외무부와 대만 정부의 외교부간에 교섭이 구체화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DJ측을 대표하여 김원길(金元吉) 국민회의 정책의장이 동행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1월 4일(일요일) 대만으로 가서 월요일 대만정부의 총통을 만나기로 일정이 잡혀 있다는 것이다. 1월2일, 정인용씨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는 “솔직히 그 제의가 믿기지 않습니다”, “정부의 심부름이니 가라면 가겠지만 대만의 국내 정치에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100억달러 차관은 정부 대 정부 관계가 아니라, 대만 정부가 ADB에 대만 지분으로 특별출연을 하고, 우리 정부는 ADB의 특별융자 형식으로 100억달러를 차입한다는 것이다. 대만의 100억달러 차관설은 루머가 아니라 실제 진행형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왜 대만 정부가 100억달러를 지원하는가, 중국과의 외교관계는 고려하였는지, 자칫하면 오히려 외환 위기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는 화약고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즉각 김원길 정책의장에게 연락을 취하고, “DJ도 알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당황해 하면서 “내일(출국 전날) 보고 드릴 예정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처럼 중대한 사안이 DJ에게는 보고되지 않은 채, 대만 정부와 원칙적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가, 매우 부적절한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즉시 DJ에게 연락을 취하여 “김원길 의장이 대만에 간다는데 보고를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DJ는 “무슨 일이 있습니까, 김의장이 대만에는 왜 갑니까” 하고 되묻는 것이 아닌가. 그간의 진행상황을 전화로나마 간략하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DJ는 “전혀 몰랐던 일인데 무슨 일을 그렇게 합니까”라면서 당황해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새 정부가 구성되면 외교정책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가 대(對)중국 외교의 강화가 될 터인데, 대만 정부로부터 100억달러를 빌리면 대중국 외교와 관련하여 어떠한 파장을 몰고 올지가 염려됩니다. 물론 100억달러를 빌리면 외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획기적 전기를 마련할 수는 있지만, 이번 사안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새 정부의 외교정책과 관련하여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라고 하면서 대만차관 속에 숨겨진 위험성을 지적했다.

    DJ는 이 판단을 즉각 수용하여 “YS정부가 독자적으로 판단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합시다. 김원길 정책의장은 가지 말고 정부측 대표만 가도록 하세요”라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그 100억달러 차관도입 구상 자체를 막지는 않았다.

    이 통화 내용을 즉시 김원길 정책의장에게 알리고 대만 출장을 중지하도록 요청했다. 잠시 후 임창열 부총리가 전화로 “대만 정부에서는 당선자 측에서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선자 측이 가지 않으면 일이 곤란해집니다”라면서 난감해 하는 것이었다. 나도 “우리측의 판단이 그러니까 김원길 정책의장은 보낼 수 없다. 현 정부의 책임 속에서 조치해주길 바란다”라고 당선자 측의 입장을 전했다.

    이렇게 대만 차관건을 조정하고 힐튼호텔에서 대학교수 한 분과 오찬을 하고 있는데 DJ로부터 “아까 그 건(件) 얘기인데, 100억달러 차관은 좋은 대안이지만 매우 중대한 사안인 만큼, 현 정부에서도 없었던 일로 처리하도록 하십시오”라는 전화가 왔다. 그 즉시 임창열 부총리에게 대만 차관건을 중단하도록 요청했다. 이때 임창열 부총리는 내가 모르고 있는 사이에 이러한 일이 진행되자 당선자에게 보고하여 훼방을 놓고 있지 않나 하고 오해를 하는 것 같아 무척 곤혹스러웠다.

    결국 대만의 100억달러 차관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지금 생각해도 나의 정확한 판단과 신속한 대응, 그리고 이 판단을 수용해 준 DJ의 결단은 매우 현명했었다고 믿는다. 100억달러 차관 교섭이 성사되지도 않았겠지만 설혹 성사되었더라도 이 때문에 새 정부는 대중국 외교에서 돌이킬 수 없는 혼란을 자초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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