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업무보고를 준비해야 됩니까?”
1월29일 개각이 단행된 직후 교육인적자원부 공무원들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지 4년을 채우기도 전에 일곱번째 장관을 맞았기 때문이다. 두 팔을 걷어붙이고 교육현장을 뛰어다녀도 부족한 시기에 해묵은 서류를 뒤적여야 할 신임 장관도 피곤한 노릇이지만, 장관이 바뀔 때마다 ‘제자리걸음’식의 업무보고를 해야 하는 일선공무원들이나 혹시라도 입시정책이 바뀔까 노심초사하는 학부모들의 마음도 편치는 않다.
한완상(66) 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1년간 재임했지만 김대중 정부 교육장관의 평균 재임기간은 8개월이다. 역대 문교·교육 장관들의 평균 재임기간이 1년3개월인데 비하면 짧은 셈이다. 이것은 가뜩이나 일관성이 없었던 한국 교육정책의 문제점이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더욱 심화됐음을 알게 하는 실례일 것이다. ‘교육이 백년대계’라는 말은 고사하고, ‘1년 농사계획’에도 못 미친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던 셈이다.
2001년 1월 김대중 정부의 여섯번째 교육수장으로 기용된 한완상 장관은 ‘학벌주의 타파’라는 소신을 펼치려 했지만, 역부족을 실감해야 했다. 국무회의에서 학력란 폐지 방안을 보고했다가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것이다. 언론에서는 ‘불명예 퇴진’이라는 꼬리표를 달았지만, 2월8일 오후 한 전장관이 머물고 있는 경기도 일산의 오피스텔을 찾았을 때 어두운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다.
서울대 교수 자리에서 해직되는 불행을 감내하면서도 역사의 고비마다 소신발언을 아끼지 않았던 현실참여파. 거기에 한국 사회학계에 민중(民衆) 개념을 본격적으로 제시했던 진보적 지식인이며 민주화 이후 두 번에 걸쳐 부총리를 지낸 관료…. 한 전장관을 소개할 때는 대개 이런 말들이 따라붙는다. 그래서 책장마다 사회과학 서적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을 것으로 상상했는데, 오피스텔은 사방이 텅 비어 있었다.
“40여년 간 모아온 책을 두 번에 걸쳐 성균관대학교에 기증했습니다. 제가 비록 서울대학을 나왔지만, 아무런 인연이 없는 성균관대에 주기로 했어요. 학벌을 타파하는 데 일조할 수 있는 대학에 조금이라도 더 지원한다는 마음이죠. 최근 몇 년 사이 성균관대 의대는 서울대나 연세대와 경쟁할 만큼 성장했어요. 이런 대학이 많이 나와야 학벌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작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일반적으로 지식인이 책을 기증할 때는 학연이나 사적인 관계를 고려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신문지상에는 모교나 시골학교에 장서를 헌납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주 실린다. 그런데 한 전장관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방송통신대와 상지대 총장을 지냈으면서도, 성균관대를 선택한 것이다. 내친 김에 언제부터 학벌문제를 고민했느냐고 물으니, 뜻밖에도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때라면 한전장관이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하다가 서울대 교수로 부임한 직후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둘째딸이 밤 12시가 되도록 잠을 안 자고 끙끙거리는 겁니다. ‘선생님이 5쪽부터 10쪽까지 20번 똑바로 쓰라’는 숙제를 내주었는데, 이 녀석이 똑바로 쓰기 위해서 쓴 것을 지우고 또 쓰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노트를 찢어버리고 ‘선생님이 야단치거든, 서울대 교수인 아빠가 찢었다고 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나요. 그때 저는 글씨를 똑바로 쓰는 건 딸아이에게 교육이 아니라 고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반에서 1등 해야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게 어떻게 교육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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