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호

“학벌타파는 선택 아닌 생존의 문제”

한완상 전교육부총리의 소신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입력2004-11-08 15: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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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출 발언이 아니라 30년간 지켜온 소신이다” 한완상 전교육부 장관은 ‘학벌타파’에 대한 분명한 원칙을 밝혔다. 아울러 그는 ‘똑똑한 1등보다 인간적인 꼴찌가 소중하다’는 교육관과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실패한 원인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또 업무보고를 준비해야 됩니까?”

    1월29일 개각이 단행된 직후 교육인적자원부 공무원들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지 4년을 채우기도 전에 일곱번째 장관을 맞았기 때문이다. 두 팔을 걷어붙이고 교육현장을 뛰어다녀도 부족한 시기에 해묵은 서류를 뒤적여야 할 신임 장관도 피곤한 노릇이지만, 장관이 바뀔 때마다 ‘제자리걸음’식의 업무보고를 해야 하는 일선공무원들이나 혹시라도 입시정책이 바뀔까 노심초사하는 학부모들의 마음도 편치는 않다.

    한완상(66) 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1년간 재임했지만 김대중 정부 교육장관의 평균 재임기간은 8개월이다. 역대 문교·교육 장관들의 평균 재임기간이 1년3개월인데 비하면 짧은 셈이다. 이것은 가뜩이나 일관성이 없었던 한국 교육정책의 문제점이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더욱 심화됐음을 알게 하는 실례일 것이다. ‘교육이 백년대계’라는 말은 고사하고, ‘1년 농사계획’에도 못 미친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던 셈이다.

    2001년 1월 김대중 정부의 여섯번째 교육수장으로 기용된 한완상 장관은 ‘학벌주의 타파’라는 소신을 펼치려 했지만, 역부족을 실감해야 했다. 국무회의에서 학력란 폐지 방안을 보고했다가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것이다. 언론에서는 ‘불명예 퇴진’이라는 꼬리표를 달았지만, 2월8일 오후 한 전장관이 머물고 있는 경기도 일산의 오피스텔을 찾았을 때 어두운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다.

    서울대 교수 자리에서 해직되는 불행을 감내하면서도 역사의 고비마다 소신발언을 아끼지 않았던 현실참여파. 거기에 한국 사회학계에 민중(民衆) 개념을 본격적으로 제시했던 진보적 지식인이며 민주화 이후 두 번에 걸쳐 부총리를 지낸 관료…. 한 전장관을 소개할 때는 대개 이런 말들이 따라붙는다. 그래서 책장마다 사회과학 서적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을 것으로 상상했는데, 오피스텔은 사방이 텅 비어 있었다.



    “40여년 간 모아온 책을 두 번에 걸쳐 성균관대학교에 기증했습니다. 제가 비록 서울대학을 나왔지만, 아무런 인연이 없는 성균관대에 주기로 했어요. 학벌을 타파하는 데 일조할 수 있는 대학에 조금이라도 더 지원한다는 마음이죠. 최근 몇 년 사이 성균관대 의대는 서울대나 연세대와 경쟁할 만큼 성장했어요. 이런 대학이 많이 나와야 학벌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작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일반적으로 지식인이 책을 기증할 때는 학연이나 사적인 관계를 고려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신문지상에는 모교나 시골학교에 장서를 헌납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주 실린다. 그런데 한 전장관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방송통신대와 상지대 총장을 지냈으면서도, 성균관대를 선택한 것이다. 내친 김에 언제부터 학벌문제를 고민했느냐고 물으니, 뜻밖에도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때라면 한전장관이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하다가 서울대 교수로 부임한 직후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둘째딸이 밤 12시가 되도록 잠을 안 자고 끙끙거리는 겁니다. ‘선생님이 5쪽부터 10쪽까지 20번 똑바로 쓰라’는 숙제를 내주었는데, 이 녀석이 똑바로 쓰기 위해서 쓴 것을 지우고 또 쓰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노트를 찢어버리고 ‘선생님이 야단치거든, 서울대 교수인 아빠가 찢었다고 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나요. 그때 저는 글씨를 똑바로 쓰는 건 딸아이에게 교육이 아니라 고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반에서 1등 해야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게 어떻게 교육입니까?”

    대단한 아버지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라면 누구나 학교에서 내준 숙제에 한두 번쯤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모가 공책을 찢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것도 교단의 권위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던 1970년대 초에.

    한 전장관의 자녀들은 그후 어떻게 됐을까. 한 전장관에게는 딸만 셋이 있는데, 모두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첫째와 셋째는 아버지가 박사학위를 받았던 에모리대를, 둘째는 브린모대를 나왔다. 한 전장관은 망명시절을 떠올리며 “내가 한국에 계속 머물렀다면, 아이들이 명문대에 가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남을 짓밟는 1등이 되느니, 어려운 사람을 돕는 꼴찌가 되라’고 가르쳤다”고 말했다.

    한 전장관은 사회학자다. 그는 교육부총리가 되기 전부터 다양한 시각에서 학벌문제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사회가 조만간 철저한 신분사회로 진입할 것’이라는 연세대 사회학과 송복 교수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학벌=출세’의 카테고리를 깨야만 한국사회가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6·25 직후만 해도 가난하지만 똑똑한 학생들이 일류대학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한국사회의 계층이 열려 있었다는 뜻이죠. 하지만 요즘 일류대에 들어간 학생들의 부모들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한쪽으로 쏠려 있습니다. 교육과 신분이 밀접한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는 얘기죠.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외국에서는 일류대에 입학해도 졸업하기 위해 하루에 6∼7시간씩 공부하는데, 한국은 1∼2시간밖에 안해요. 외국 학생들은 졸업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하는 일도 있지만, 우리는 입학하면 졸업이 자동으로 보장됩니다. 그렇게 공부한 학생들이 세계적으로 일류가 될 수 있느냐 이겁니다. 한국의 일류대학에서는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에요. 그저 출세해서 남을 부려먹고, 암기해서 고시에 붙겠다는 학생들뿐이잖아요. 이걸 고치지 않으면 한국 교육은 달라질 수가 없는 겁니다.”

    한 전장관은 취임 직후부터 학벌문화 타파를 추진했다고 한다. 일부 언론은 그의 학벌타파 주장이 즉흥적이었다고 평가했지만, 한 전장관은 완강하게 부인했다. 실제로 2001년 4월 중순 한장관이 교육부 간부들에게 ‘학벌타파 방안연구’ 지침을 하달하자 교육부 학교정책기획팀에 전담반이 꾸려졌다. 또한 5월18일 당정회의에서 이 문제를 공론화했으며, 8월과 10월엔 재계 교육계 인사들과 공동연구를 벌인 뒤 공개세미나를 열었다. 이 무렵 교육부는 학벌타파 표어공모전을 열기도 했는데, 당선작 세 편의 문구가 흥미롭다.

    ‘학벌만능 병든사회 능력우대 건강사회’ ‘학벌없는 열린세상 바로서는 미래교육’ ‘학벌문화 헌옷벗고 능력사회 새옷입자’

    “학벌타파는 대통령께 보고하고 거기에 대해 의문을 표한 장관들에게도 자세히 설명한 사안입니다. 심지어 전경련 김각중 회장과도 논의했어요. 그런데 내 얘기를 직접 들었던 장관이 국무회의에서 1년 전과 똑같은 질문을 해서 의아했습니다. 일부 신문은 ‘깜짝쇼를 했다’는 식으로 기사를 썼는데, 그건 과장된 겁니다. 국정홍보처장이 사견을 곁들여서 얘기하니까 기자들이 감을 못 잡은 것 같아요.”

    ―언론 보도에 불만이 크신 것 같습니다.

    “교육부는 시끄럽게 떠들지 않았을 뿐이지 학벌타파 문제를 꾸준히 검토하고 역점사업으로 추진해왔습니다. 제가 학벌 얘기를 ‘불쑥 했다’는 건 사실과 다른데도, 언론은 그렇게 몰아갔어요. 한국 언론에도 ‘그레샴의 법칙(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경제이론)’이 적용되는 모양입니다.”

    ―학벌타파를 이슈화해야겠다고 결심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대중 정부의 국무위원을 출신 학교별로 따져보니까 서울대가 45%였습니다. 김영삼 정부 때는 68%나 됐고요. 세계 어느 나라도 한 대학 출신이 국무위원의 50%를 차지하는 경우는 없어요. 미국도 중앙정부의 과장급 이상 공직자를 보면 아이비리그 출신이 평균 3%를 넘지 않거든요. 사정이 이런데도 한 대학은 요직을 독점하고, 199개 대학이 박탈감을 느끼는 구조가 과연 정상이냐? 이런 학벌주의를 그대로 둘 것이냐? 저는 안된다고 본 겁니다.”

    한 전장관은 로버트 J. 새뮤얼슨이 쓴 ‘아이비리그의 가치’라는 연구를 길게 인용했다. 새뮤얼슨은 아이비리그 출신들의 성공요인을 분석했는데, 그 결과 학교 졸업장보다는 학생들의 자질이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한 예로 SAT 점수가 100점 정도일 때 졸업 후 소득의 차이는 3∼7% 수준이었으며, 명문대와 비명문대 졸업자 사이에 존재하는 약간의 월급 차이도 학교보다는 개인의 능력 때문인 것으로 조사됐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는 대학 졸업장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한 전장관의 주장이다.

    “2001년에 상장된 684개사의 등기임원 5177명 중 46.8%가 서울대 등 명문대 출신입니다. 이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겁니다. 이렇게 좋은 자리를 명문대학이 다 차지하니까 학부모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것이 사교육을 과열시키고 족집게 선생까지 만들어내는 원인으로 작용하고요.”

    ―문제는 방법론이 아닐까 합니다. 학벌의 부정적 영향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정부와 기업, 학부모와 NGO, 언론과 지식인들이 힘을 합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뛰어넘어 범국민 차원의 운동을 일으켜야만 학부모와 학교 학생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벌문화를 타파하는 방안의 하나로 입사지원서에 학력란을 기재하지 말자고 주장하셨는데, 기업들은 학력도 중요한 정보인 만큼 포기할 수 없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내 얘기는 ‘무조건 없애자’는 게 아니라 요건을 ‘고졸 이상자’ 정도로 바꾸자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대졸도 불이익을 받지 않고 실력 있는 고졸에게도 길이 열리잖아요. 그러고나서 좀더 과감하게 가려면 학력란을 아예 없애고 그 회사가 원하는 사람을 자율적으로 뽑자는 거죠. 벤처기업은 성실성과 전문성을 보고, 조선업종은 공대출신을 우대하고….”

    ―전문성을 매개로 기업과 학교를 연결하자는 말씀이네요.

    “그렇죠. 대학의 특성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학벌주의에는 반대하지만 ‘credentialism(특성 편중주의)’는 필요하다고 보는 겁니다. 그게 기업이 사는 길입니다. 신문기자도 외국처럼 분야별로 잘하는 사람을 채용하고, 디자인업체는 디자인을 잘 가르치는 대학에 직접 인재를 요청하는 겁니다.

    한 전장관의 학벌타파 발언이 관심을 끄는 이유 중에는 그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점도 적지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비서울대 출신이 학벌 문제를 거론할 경우 흔히 ‘콤플렉스’로 오해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반면 서울대 출신이 ‘학벌타파’를 주장하면, 기득권을 포기하는 용기있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서울대의 개혁을 외치는 서울대인에게도 고민은 있다. 바로 내부의 곱지 않은 시선이다. “10년 동안 신입생을 뽑지 말자”는 주장으로 파문을 일으켰던 서울대 물리학과 장회익 교수도 그런 고충을 털어놓은 일이 있다.

    ―서울대 출신의 상당수는 학벌문제에 의식적으로 침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서울대를 나온 사람 중 지식인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학벌주의를 타파하자는 데 찬성할 겁니다. 제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내 말이 옳다고 하던데요.”

    한 전장관은 조심스럽게 서울대 교육의 문제점으로 화제를 바꾸었다. 서울대 교수를 지낸 사람이 ‘서울대가 인재를 망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떤 학생이 17개 과목을 모두 잘한다는 건 스스로 천재의 기질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미국처럼 창의력을 중시하는 나라도 대학 스스로 ‘천재를 키우지 못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빌 게이츠 같은 사람도 하버드를 다니다가 떠났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제가 서울대를 폄훼하는 건 아니지만, 천재를 키우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죽이고 있지 않습니까. 제 모교가 세계적인 대학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에 서울대가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서울대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제가 아는 수학과 교수가 있어요. 그분이 서울대에서 수재 소리를 듣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첫 시험을 보고 유학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었답니다. ‘0의 중요성과 의미를 논하라’는 문제가 나왔는데, 손도 못 대고 백지를 냈다는 거예요. 그때까지 서울대에서 방정식만 열심히 풀었지, 0에 관한 고민을 아예 해보지 못한 거죠. 미국에서는 보고서를 내더라도 남의 생각을 옮기거나 짜깁기를 하면 절대 학점을 주지 않아요. 부족해도 좋으니까 자기 생각을 쓰라는 거죠. 지금 서울대 학생들은 남의 것을 외우는 데는 세계 최고지만, 자기 것을 만드는 수준에서는 낙제점입니다.”

    한 전장관의 서울대 비판은 계속됐다. 이번엔 서울대의 문화적 빈곤으로 이어졌다. 분야는 바뀌었지만, 그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핵심 코드는 여전히 ‘창의력 부족’ 문제였다.

    “제가 소설가 황석영씨에게 ‘당신이 서울대 국문과를 나왔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하고 물어본 일이 있어요. 황선생 대답이 ‘그랬으면 끼가 다 빠졌을 겁니다’라는 거예요. 서울대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하고 싶은 소설에 열심히 매달릴 수 있었다는 거죠. 서울대 출신 중에 김승옥 이후엔 좋은 작가가 안 나오잖아요. 이문열씨도 사범대학 2학년 다니다 그만두었어요. 암기력을 중시할 경우 창의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건 서울대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교육계 전반의 부실함과 관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도 있죠. 저는 다만 학부모들이 그렇게 보내고 싶어하는 서울대가 교육수준에서 엄청나게 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겁니다. 새로운 이론은 비정상적 대안을 찾는 데서 나오는 건데 지금 서울대는 그런 발상 자체를 못하고 있어요. 암기로 고시에 붙어서 법조인이 된 사람이 법치를 제대로 알겠습니까? 히틀러 밑에서 일한 지식인들을 우리가 진정한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까? 그들은 ‘지식기사’일 뿐이지, 지식인은 아닙니다. 지금의 서울대는 ‘지식기사’를 열심히 만들어내는 공장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아무튼 고시제도는 바꿔야 한다고 보시는 거죠.

    “당연히 그런 방향으로 가야죠. 법조문 몇 개 더 아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1등을 계속하면서 남을 젖혀놓는 데 익숙해진 사람은 인간성에서 뒤질 수밖에 없어요. 그런 사람들이 톱 엘리트가 됐을 때 소외된 사람들의 아픔을 들어줄 수 있겠어요? 그건 어려운 겁니다. 그러니까 국가공무원도 암기 위주가 아니라 검증된 경험과 능력을 중심으로 선발해야 한다 이 말입니다.”

    해마다 수능시험이 끝나면 언론사와 입시전문기관은 이른바 ‘배치표’를 만든다. 점수 순으로 대학을 나열하고 학생들에게 합격가능 대학과 점수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에는 배치표가 무용지물이었다. 교육부가 학생들의 총점을 공개하지 않아 누적석차를 매길 수 없었던 것. 이 때문에 입시철 단골뉴스였던 수능 최고득점자의 인터뷰도 나오지 않았다. 교육부가 입시혼란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도 총점과 석차를 비공개에 부쳤던 이유는 대학별로 줄세우는 관행을 뿌리뽑겠다는 강력한 의지 때문이었다.

    ―대학서열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인위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72만명이 한 줄로 서는 것은 곤란하죠. 또 지금 학부모들이 매긴 서열이 실제 서열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대학교수들의 수준은 전국적으로 많이 비슷해졌어요. 그런데도 학벌주의 때문에 특정 대학들이 지나치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젠 학생들이 대학별로 여러 줄로 서고, 그 속에서 대학의 특성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봐요. 이렇게 해서 서울대를 능가하는 대학들이 많이 나와야죠. 포항공대나 과학기술대는 벌써 서울대를 앞섰잖아요.”

    ―선진국에도 대학서열은 존재하는데, 왜 그것을 억지로 없애려 하느냐는 비판도 있습니다.

    “미국은 좋은 학교가 20개쯤 되니까 특정 대학의 독점을 걱정할 필요가 없죠. 학생들은 20줄로 서면 되는 거고요. 하지만 우리는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줄로 서니까 미국과 다른 겁니다. 엄밀하게 보면 연세대 고려대는 학벌 축에 들어가지도 못해요. 그래서 저는 연세대나 고려대 관계자들에게 ‘빨리 서울대를 따라잡으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일본도 교토대 와세다대 게이오대가 도쿄대를 자극하면서 실력이 서로 올라갔잖아요.”

    이 대목에서도 방법론이 문제가 된다. 한 전장관은 특성화와 차별화를 통해 많은 대학들이 서울대를 따라잡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많은 대학관계자들은 파격적인 대책 없이 서울대 추월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 연세대는 대규모 재원마련을 위한 기부금입학제의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한 전장관은 기부금입학제에 비판적인 견해를 밝혔다.

    “카네기가 1889년에 3500만달러를 기부하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죽을 때 부자로 죽으면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럽게 죽는 것이다’ 평생 악착같이 돈을 번 사람도 그런 말을 하는 게 바로 미국 자본주의의 힘입니다. 카네기가 무슨 대가를 바라고 기부금을 낸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도 미국처럼 성공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대학에 기부금을 내야 한다고 봐요.

    자기 자녀를 입학시키는 수단으로 돈을 바치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상술입니다. 헌법에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데, 그때의 국민은 개인이지, 부모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기부금입학제는 헌법소원을 내면 꼼짝없이 걸리게 돼 있어요. 또 기부금입학제를 도입한다고 할 때 사립대학의 편차는 어떻게 해결할 겁니까? 특정 사립대학만 기부금을 독식하고 나머지 사립대학을 소외시키는 제도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국민정서도 아직까지는 반대쪽이 우세하다고 봅니다.”

    한국교육은 대학을 중심으로 돈다. 그래서 대학입시가 중요한 것이다. 한 전장관은 수능시험에 대한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수능이 너무 쉽게 출제돼 사회적 논란을 빚은 직후 교육부 수장이 되었으며, 수능이 지나치게 어려웠다는 비판을 받고 물러났다. 쉬워도 욕을 먹고, 어려워도 욕을 먹는 수능시험에 대한 한 전장관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1월14일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에서는 ‘수능시험 본래의 취지에 맞지 않게 출제된’이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문제가 어렵다는 점을 사전에 몰랐다는 말씀인지요.

    “그건 아직도 미스터리입니다. 제가 평균 77점이 나오도록 출제하라고 지시했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어요. 그런데 결과는 67점으로 나왔잖아요. 나중에 출제위원들이 내 방에 왔길래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니까 자기들도 그렇게 될 줄 몰랐다는 겁니다. 사고력 테스트를 위해 좋은 문제를 많이 냈다는데…. 하도 답답해서 내가 직접 1교시 시험문제를 풀어보기까지 했는데, 창의력이나 사고력과는 무관한 문제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출제위원도 몰랐다는데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서 국회에 가서도 ‘벼락맞은 기분’이라고 말했던 거죠.”

    ―수능시험은 쉬워야 한다고 보시는 거죠.

    “수능이 어려우면 사교육비가 올라갈 수밖에 없어요. 수능시험은 변별력을 갖춰야 한다는 전제에서 고등학교 교과서를 열심히 공부하면 누구나 풀 수 있는 수준이 적당하다고 봅니다.”

    고교평준화 문제는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사안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평준화가 학생들의 실력을 하향평준화하고 있다고 비판하는가 하면, 평준화를 풀면 공교육 정상화는 요원해진다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가운데 ‘평준화를 푸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요지의 KDI(한국개발원) 연구자료가 공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고교평준화 제도를 어떻게 보세요.

    “우리나라 보통교육은 평준화 위에서 기본 공통과정을 통해 인간적 자질, 기본소양, 민주적 시민의식 등에 치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는 대학체제로 바꿔서 과목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만든 다음, 대학에서는 전적으로 수월성과 능력 중심으로 가야 합니다.”

    ―평준화의 역기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도가 학생의 자유로운 경쟁과 능력향상을 막는다는 주장인데.

    “우선 사람이 되고 나서 능력을 담아야죠. 사람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능력을 키우면 무서워질 수 있습니다. 가정과 학교에서 남을 배려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야만 지식을 올바로 쓸 수 있는 겁니다.”

    결과론이지만, 한 전장관의 교육개혁 실험은 꽃을 피우지 못했다. 후임자인 이상주 교육부총리가 “학벌문화 타파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말했지만, 거센 저항에 부딪혀 한 발 물러선 흐름을 되돌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한 전장관이 당초 ‘우군’으로 설정했던 언론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학부모와 지식인의 동참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학벌타파 운동이 활로를 찾기 위해서는 더욱 더 세련된 프로그램이 필요한 셈이다.

    ―김대중 정부의 후반기 내각에 참여하셨는데, 직접 들어가서 일해보니까 개혁이 왜 실패한 것 같습니까.

    “얼마전 ‘다시 한국 지식인에게’ 라는 글에서도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 썼습니다. 개혁이 성공하려면 개혁을 추진하는 중심세력의 시스템화가 반드시 필요한데, 김대중 정부는 그게 부족했다고 봅니다. 개혁 프로그램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상황실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저마다 각 부처에서 열심히 뛰었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 소득이 별로 없는 거죠. 대통령의 확고한 개혁의지에 비해 개혁 시스템은 너무나 빈약했다고 생각합니다.”

    ―청와대 주변과 언론에서는 어려운 수능시험과 그로 인한 강남지역의 사교육 과열, 그리고 학력란 폐지 발언 등으로 물의를 빚었기 때문에 경질됐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한데,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요. 마음 속으로는 어떤 사람을 어느 자리에 놓고, 또 어떤 사람을 유임시키려다 보니 내가 물러나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수능시험은 나에게 큰 책임이 있지만, 출제자도 그렇게 될지 몰랐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학벌타파는 대통령의 소신이니까 물의를 빚었다고 볼 사안이 아니죠. 일부 언론에서는 수능이 어려워지니까 강남지역의 아파트 값이 올라간다고 보도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떳다방이 퍼뜨린 소문에 불과해요. 제가 데이터를 뽑아보니까 그 무렵 강남으로 전학간 학생은 40∼50명뿐이었어요. 그래서 그러한 문제들이 직접적인 경질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한 전장관은 물러난 뒤 모처럼 휴식을 취하면서 재임시절의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최근 그가 읽은 책을 보면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지고 싶어하는 마음을 살짝 엿볼 수 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의 ‘금강경’, 스퐁 성공회 감독의 ‘왜 기독교가 변하지 않으면 죽는가’, 현각 스님의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한 전장관은 지금 새로운 길을 떠나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학벌타파는 일생 일대의 소임’이라는 다짐처럼 그는 머지않아 교육운동의 일선에 복귀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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