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호

한국의 난형난제 列傳

  • 이형삼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ns@donga.com

    입력2004-11-08 16: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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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신승남 전 검찰총장의 후임에 이명재(李明載·59) 전 서울고검장이 임명되자 신임 이총장의 형제들이 또 한번 화제에 올랐다. 이총장을 비롯해 형 이경재(李景載·63) 전 중소기업은행장, 이정재(李晶載·56) 전 재경부 차관 등 3형제는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후 지난해 초 서로 약속이나 한 듯 후진을 위해 자리에서 물러나는 미덕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남동생의 비리로 재임 8개월만에 불명예 퇴진한 데 이어 여동생까지 구속되면서 곤욕을 치른 신 전총장 형제와 극적인 대조가 됐다.

    이총장 3형제는 ‘대구 3재(才)’로 불린 수재들이었다. 경북 영주가 고향으로 대구에서 명문 경북고를 나와 서울대에 진학한 뒤 행정고시(경재·정재)와 사법고시(명재)에 잇달아 합격했다. 1990년대 초 이총장이 대형 경제범죄를 주로 다루는 서울지검 특수1부장으로 있을 때 이 전행장은 한국은행 자금부장과 은행감독원 부원장보를, 이 전차관은 재무부 이재국장을 지내 ‘3재(載)가 한국경제를 끌고간다’는 말을 낳았다.

    ‘3才 3載’

    이경재 전행장은 서울대 경제학과 4학년 때인 1960년 고등고시 행정과(12회)와 한국은행 입행시험에 동시 합격했다. 강경식·이규성 전 재경부 장관, 전철환 한국은행장 등이 고시 동기. 이 전행장은 고심 끝에 한국은행으로 진로를 정했다. “공무원을 하려면 집에 먹을 게 좀 있어야 할텐데, 우리집 형편은 그렇지가 못해 ‘안정된 월급장이’를 택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은행에서 뉴욕사무소장·자금부장·이사·감사를 역임했으며, 은행감독원 부원장보, 금융결제원장을 거쳐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5월 중소기업은행장에 취임했다.

    이 전행장은 1997년 1조3500억원의 사상 최대 적자를 낸 기업은행을 취임 후 2년 연속 흑자로 돌려세웠다. 2000년에는 4000억원이 넘는 순이익을 기록해 웬만한 우량 시중은행을 앞섰다. 자회사 정리 등 일관된 구조조정과 대기업 여신 축소, 적극적인 수신 유치에 힘입은 결과였다. 구조조정 과정에서는 막판까지 당사자들의 의견을 하나하나 확인해 공감을 얻어냈다.



    지난해 5월 거듭된 3년 임기가 만료되자 행원들의 연임 요구에도 불구, 행장에서 물러났다. 현재는 금융연구원 초빙연구원으로 연구활동에 매진하면서 매주 하루씩 고향 영주의 동양대학에 내려가 ‘금융기관 경영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이 전행장의 누이동생인 춘재(春載·61)씨는 가톨릭대 심리학과 교수. 이 대학 사회과학대학장을 거쳐 현재 심리상담대학원장을 맡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한번도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을 만큼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경북여고를 나와 서울대에 진학, 당시로선 신학문 축에 든 발달심리학을 전공했다. 이교수의 부군은 국민은행 상무를 지낸 서상록(徐相祿·62) 인천전문대학장.

    이교수보다 두 살 아래인 이명재 검찰총장은 경북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때까지 사법고시에 합격하지 못하자 당시 ‘시험 봐서 들어갈 수 있는 최고 직장’이던 한국은행에 시험을 치러 합격했는데, 그해 외환은행이 설립되자 외환은행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후 대학 졸업 5년만인 1970년 사법시험(11회)에 합격, 군 법무관을 거쳐 1975년 서울지검 영등포지청 검사로 출발했다.

    이총장은 뒤늦게 검사가 됐지만, 은행에 근무한 경험을 살려 대검 중앙수사부와 서울지검 특별수사부에서 장영자·이철희 어음사기사건, 명성그룹 사건, 영동개발사건, PCS-종금사 비리사건, 세풍(稅風)사건 등 굵직굵직한 경제사건을 매끄럽게 처리해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당대 최고의 검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장영자·이철희 어음사기 사건 때는 이례적으로 검찰총장이 검사들을 대동하고 TV 카메라 앞에 나와 회견을 가졌는데, 당시 중수부 검사로 이 사건 수사를 주도하던 이총장이 사건개요와 수사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스타검사’로 떠올랐다.

    그가 복잡한 경제사건을 수사할 때는 경제통인 형과 동생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을 법도 한데, 실제로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 전행장에 따르면 “경제의 큰 흐름이나 메커니즘에 대해 더러 조언한 적은 있지만, 명재도 워낙 경제사건을 많이 조사해봐서 어느새 ‘도사’가 다 돼 있더라”는 것.

    이총장은 서울고검장으로 있던 지난해 5월, 신승남 당시 대검 차장이 검찰총장에 내정되자 검찰을 떠났다. 신승남 전총장은 이총장의 서울대 법대 1년 후배지만, 사법시험 9회 출신으로 이총장보다 두 기수가 앞서 이총장이 굳이 물러나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이총장은 사시 합격이 늦은 자신이 검찰에 남아 있으면 후배들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판단, “선배님이 검찰조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며 만류하는 후배 검사들을 뿌리치고 미련없이 물러났다가 7개월만에 검찰총장으로 금의환향했다.

    이정재 전 재경부 차관은 이경재 전행장의 고교(경북고), 대학(서울대 경제학과), 직장(한국은행) 후배다. 이 전차관은 1969년 한국은행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행정고시(8회)에 합격, 재무부 이재과장, 이재국장, 재무정책국장 등을 역임하며 20년간 금융정책을 다뤄온 정통 재무관료. 예금보험제도 도입과 예금보험공사 설립작업을 주도했다.

    김영삼 정부 때 공정거래위 상임위원, 예금보험공사 전무 등으로 외곽을 떠돌다 김대중 정부 출범 1년 만인 1999년 1월, 그의 능력을 아낀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의 끈질긴 설득으로 금감원 부원장을 맡았다. 이후 금감위 부위원장(차관급)을 거쳐 2000년 8월 재경부 차관에 올랐으나, 지난해 3월 개각을 앞두고 “후배들의 앞길을 막고 싶지 않다”며 물러났다. 지금은 법무법인 율촌 고문으로 위촉돼 경제분야 소송과 관련한 자문에 응하고 있다.

    이 전차관 아래로는 두 동생 병재(昞載·53)씨와 상재(載·50)씨가 있다. 병재씨는 경북고,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와 한빛은행 검사실장으로 재직중이다. 경북고 재학시절에는 야구선수로 활동하며 전국대회 우승을 휩쓸었다. 야구선수로는 드물게 특기생이 아닌 정식 입학시험을 치러 고려대에 진학했다.

    상재씨는 고교 입시에 실패하자 검정고시를 치러 고교 졸업자격을 얻었고, 대학 진학도 포기했다가 방송통신대에서 공부했다. 현재 모니터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을 경영하고 있다. 다섯 형제 중 머리는 가장 비상했지만 학교 운이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전행장 형제의 부친은 도쿄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이런저런 사업을 하다 실패해 가정형편은 그리 여유롭지 못했다. 부친은 자식들에게 ‘공부하라’고 강요한 적은 없지만 교육열은 남달랐다고 한다. 집이 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자주 드나들며 교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고, 늘 자식들을 먼 발치에서 관찰하면서 교사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었던 조부는 평생 술 한잔을 입에 대지 않은 꼬장꼬장한 선비였는데, 부친도 비슷한 성향이었다. 그런 조부와 부친의 영향으로 이 전행장 형제들도 양보와 절제의 유교적 미덕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듯하다는 게 주변의 시각이다.

    이 전행장과 이총장, 이 전차관은 지난해 초 두 달 간격으로 나란히 현직에서 물러났지만, 3형제가 사퇴를 앞두고 아무런 협의나 상의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 사람 다 신문을 보고 형제들이 물러나는 것을 알았을 정도라는 것. 이 전행장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어릴 때도 스스로 알아서들 공부했고, 사회에 나와서도 형이랍시고 동생에게 간섭하는 일이 없었다. 나는 죽어가던 은행을 살려놨고 임기도 다 됐으니 물러났고, 명재와 정재도 올라갈 만큼 올랐으니 그만둔 것이다. 남들이 잘한다고 박수쳐줄 때 ‘다음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나가는 게 가장 보기 좋다.”

    김성호 청장 후임으로 서울지방국세청장에 임명된 지 13개월 만인 지난해 9월 안정남씨의 뒤를 이어 국세청장에 오른 손영래(孫永來·56)씨는 손학래(孫鶴來·60) 철도청장과 형제간이다.

    전남 보성 출신인 두 사람은 광주고 4년 선·후배. 같은 고향, 같은 고교 출신의 친형제가 차관급인 청장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으나, 15명이 교체된 2월4일의 차관급 인사에서 나란히 유임됐다.

    조선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손학래 청장은 건설부 기술직 7급 공채로 출발해 기술정책과장, 고속철도기획단장 등을 거쳐 비(非)고시 출신으로는 드물게 차관급에 올랐다.

    손영래 청장은 연세대 행정학과와 행정고시 12회 출신. 여수세무서 과장을 시작으로 서울 관악·남대문세무서장, 조사국장 등을 맡았다. 행정학과를 나와 사무관 시절 기업 회계장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자 독학으로 공부해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따낸 노력파로 유명하다. 조사국장으로 있을 때 안정남 당시 청장을 보좌해 한진그룹, 보광그룹 탈세사건을 파헤쳤으며, 지난해 언론사 세무조사 때도 안 전청장의 오른팔로 조사를 총지휘했다.

    특허청장으로 있다 2월4일 차관급 인사에서 산업자원부 차관에 임명된 임내규(林來圭·57)씨의 동생은 임내현(林來玄·50) 전주지검 검사장. 임 검사장도 2월5일 대검 공판송무부장에서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은 광주 출신이지만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녔다. 임차관은 서울고, 서울대 사회학과를 나와 1972년 행정고시(12회)에 합격했으며, 임 검사장은 경기고,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1976년 사법시험(16회)에 합격했다.

    법조계의 형제로는 송진훈(宋鎭勳·61) 대법관과 송진현(宋鎭賢·50)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들 수 있다. 두 사람은 대구 출신으로 경북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63년 고시 사법과 16회 출신인 송대법관은 초임 시절 4년간 광주, 목포 등지에서 근무한 것 외에는 30년 법관생활의 대부분을 대구에서 보낸 ‘향판(鄕判)’. 1997년 대법원 민사3부 대법관에 임명됐다. 공직자 재산공개 때 전재산이 3억7000여만원인 것으로 밝혀져 청렴성을 인정받았다.

    송부장판사는 1976년 사법시험 18회 출신으로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지법 서부지원 부장판사, 대전고법 부장판사 등을 역임했다. ‘중앙일보’ 논설고문인 송진혁(宋鎭赫·60) 상무와 한국방송개발원 송진영(53) 방송인력개발실장도 이들과 형제다. 송상무는 경북고,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국방부 장관을 지낸 이상훈(李相薰·69) 재향군인회장도 명문가의 일원이다. 이회장은 교육자 이창우(李昶雨·1908∼2001)씨의 6남1녀 중 차남. 이들 6남1녀 중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이회장을 빼고는 모두 서울대를 나왔다.

    장남 상혁(相赫·70)씨는 경복고,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동양시멘트 전무, 한화그룹 골든벨상사 사장, 삼희통운 사장 등을 지냈다. 현재는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경기고, 육사 11기 출신인 차남 상훈씨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합참본부장,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거쳐 대장으로 예편한 뒤 노태우 대통령 시절인 1988년 국방부 장관에 올랐다. 동아건설 상무를 지낸 3남 상진(相辰)씨는 타계했다.

    4남 상문(相文·63)씨는 경기고, 서울대 상대를 거쳐 미국 마이애미대에서 경영학석사를, 조지아대에서 경영학박사를 받았다. 1968년부터 버지니아대 경영학과에서 가르치다 1976년 네브래스카대로 옮겼다. 미국 경영학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현재는 네브래스카대 경영학과 석좌교수. 5남 상륭(相隆·61)씨는 서울대 성악과를 나와 대우건설에서 오래 근무했다. (주)대우 건설부문 이사를 거쳐 지금은 용산역개발주식회사 부사장을 맡고 있다. 외동딸 순자(純子·57)씨는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의 대학에서 강사를 지냈다.

    상철(相哲·54)씨는 KT(‘한국통신’에서 사명이 바뀜) 사장. 이상철 사장은 경기고,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도미, 버지니아 폴리테크닉주립대에서 석사, 듀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통신위성 설계를 담당했고, 국방성에서 지휘통신자동화시스템을 설계했다.

    1982년 귀국해 국방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일했으며, 1991년 한국통신으로 옮겨 통신망연구소장, 사업개발단장, 무선사업본부장, 한통프리텔 사장 등을 역임했다. 2000년 2월 16대 총선에 민주당 지역구(경기 성남분당을) 공천을 받아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그해 12월 한국통신 사장에 취임했다.

    이들의 부친인 이창우씨는 충북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 교단에 선 이래 서울사대부속초등학교, 청주중, 서울 경서중, 원주고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김종량 한양대 총장, 조정원 경희대 총장,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정대철 민주당 상임고문, 김명자 환경부 장관 등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아흔을 넘긴 나이에 인터넷을 배워 제자들에게 e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타계하기 한 해 전인 2000년 스승의 날 옛 제자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92세의 노은사는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공감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당신들같은 제자는 꼭 ‘소유’하고 싶다”며 각별한 제자 사랑을 드러냈다.

    이 전행장 3형제가 영주 출신의 ‘대구 3才’라면 정해창(丁海昌·65) 전 법무부 장관, 정해왕(丁海旺·55) 금융연구원장, 정해방(丁海昉·52) 기획예산처 사회예산심의관(이사관) 3형제는 김천 출신의 ‘대구 3才’라고 할 수 있다. 이들 3형제도 경북고와 서울대 동문이며, 정 전장관의 바로 아래 동생인 해명(海明·61)씨도 경북고를 졸업했다.

    5남2녀 중 장남인 정 전장관 위로는 누나 해순(海順·67)씨가 있다. 해순씨는 김천여고를 졸업한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한국은행 입행시험을 치러 취직했다. 평범한 가정에서 여자가 대학 가는 게 드문 시절이기도 했거니와 여섯이나 되는 동생들을 뒷바라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 월반해서 중학교에 입학했을 만큼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해순씨의 부군은 부산대 총장을 지낸 헌법학자 서주실(徐柱實·70) 박사다.

    정 전장관은 서울대 법학과를 수석으로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대학 2학년 때인 1958년 고등고시(10회) 행정과와 사법과에 동시 합격한 수재. 1981년에 발간된 경북고 동문회지 ‘경맥(慶脈) 65년’에는 그에 대한 인물평이 이렇게 실려 있다.

    “丁동문은 발군의 강기력(强記力)과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정평있다. 모교 졸업 때 동점 2위였으나 서울대 법대 수석 입학에 수석 졸업의 기록을 세웠으며, 재학시에는 ‘스트레이트 올A’ 학점을 획득, 전 고려대 총장 유진오 박사가 경성제대 시절 수립했던 천재적 기록을 깨뜨렸다는 일화의 주인공으로 당시 ‘대학신문’에 대서특필된 바 있는 귀재(鬼才). 특히 법무부 검찰과장 재임 3년간 이봉성 황산덕 김준 등 장·차관의 인정을 받아 대(對)국회 답변안까지 작성했을 만큼 법리면에서도 탁견(卓見)이 돋보인다는 게 중평들이다….”

    정 전장관은 1982년 법무부 차관을 거쳐 1987년 법무무 장관에 올랐으며, 1990년부터 2년여 동안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현재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정 전장관은 이경재 전 중소기업은행장의 경북고 1년 선배이며, 부인은 이명재 검찰총장의 누나인 이춘재 교수와 경북여고 동기생이다.

    해명씨는 경북대 의대를 나와 외과 개업의로 일하고 있다. 경북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형인 정 전장관이 서울에서 공부할 때 대학에 진학하게 되자 가정형편을 고려해 서울대 입시를 포기하고 경북대를 지원했다고 한다.

    해명씨의 누이동생 봉자(鳳子·58)씨는 대구 제일여중에 수석 입학한 뒤 경북여고를 거쳐 이화여대 약학과를 졸업했다. 부군 이성규(李聖揆·63)씨는 에스아이에스기술·에스피테크 회장.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나와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했으며 삼미특수강 사장 등을 지냈다.

    정해왕 금융연구원장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외환은행에 들어갔다가 1981년 도미, 뉴욕주립대에서 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6년부터 켄터키주립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1989년 대신경제연구소 상무로 영입됐다. 이후 대신경제연구소 사장, 금융연구원 부원장을 거쳐 1998년 금융연구원장에 선임됐고, 지난해 연임됐다.

    그가 귀국한 직후 정 전장관이 대통령 비서실장이 됐지만, 이 때문에 동생들이 덕을 보기는커녕 오히려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고 한다. 형이 경상도 출신 대통령을 보좌하는 경상도 출신 비서실장인데도 동생인 그가 호남 기업(대신증권)이 운영하는 연구소에 머물러 있자 주변에선 “정해창이 동생 하나 안 챙긴다”며 빈정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정원장은 “형님이 비서실장 초기에는 경제분야에 대해 더러 문의하곤 했으나, 석 달쯤 지나니 더는 물어오는 게 없더라”고 했다. 경제연구소보다 청와대로 더 많이 쏟아져 들어오는 경제관련 정보를 형이 꼼꼼하게 소화했기 때문이다.

    정해명 사회예산심의관은 예산에 관한 한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으로 불린다. 서울대 법학과를 나와 행정고시(18회)에 합격, 1976년 교통부 사무관으로 공직에 들어선 뒤 10개월 만에 경제기획원으로 옮겨 경제조사국, 경제기획국, 정책조정국을 거쳤다. 그후 예산실에서 법사행정·통상과학·건설교통 예산담당관, 재경원 예산정책과장, 기획예산처 예산총괄과장 등을 지냈다. 사회예산심의관은 예산실 국장 3인 중 한 사람으로, 정부 비경제부처의 예산 편성업무를 총괄한다.

    정 심의관은 역대 예산실장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예결위 국회의원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정해방이 없으면 대한민국 예산을 못짠다”고 할 만큼 독보적인 예산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두뇌가 비상해 학창시절에는 수학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고, 바둑실력도 ‘귀신’ 소리를 듣는 수준(아마 5단)이다.

    정 심의관의 동생인 막내 해원(海原)씨는 서울 경복고와 연세대 교육학과를 나와 대우, 강원산업 등에서 근무하다 현재는 자형 이성규 회장의 회사에서 중역을 맡고 있다.

    정 전장관 형제의 부친 정윤진(丁允鎭)씨는 대구사범학교 1회 졸업생으로 포항, 고령, 김천 등지에서 국어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고정적으로 월급이 나왔기 때문에 농사만 짓는 집보단 사정이 나았지만 일곱 남매를 가르치기엔 버거운 형편이었다. 특히 정 전장관이 경북고에 진학하던 해 부친도 경북중으로 전근하면서 온 가족이 김천에서 대구로 이주한 후로는 더 빠듯해졌다.

    부친은 집안 돌아가는 사정에 다소 무심했던 반면 생활력이 강한 모친이 억척스레 살림을 꾸렸다고 한다. 정 전장관은 “잠을 자다 새벽녘에 무슨 소리가 들려 눈을 뜨면 모친이 낡은 ‘싱거’ 재봉틀을 삐걱거리며 삯바느질을 하고 계셨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경북중 교원주택에 살 때는 모친이 하숙을 쳤는데, 정 전장관 형제들이 하나같이 수재로 소문나 학생들이 서로 하숙생으로 들어오려고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형은 죽이고, 동생은 살리고”


    이규성(李揆成·63) 전 재경부 장관과 이규홍(李揆弘·58) 대법관 형제는 김대중 정부 초기, 외환위기 충격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한국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목적은 같지만 방법은 상반된 임무를 떠맡았다.

    이 전장관이 초대 재경부 장관으로 임명돼 부실 대기업 퇴출 등 국가 차원의 구조조정 작업을 진두지휘한 데 비해, 이 대법관은 당시 서울지법 법정관리 전담재판부인 민사합의50부 부장판사로 법정관리나 화의를 신청한 부실기업의 회생업무를 책임졌던 것이다. 그래서 “형은 죽이고, 동생은 살린다” “형은 ‘부실국가’, 동생은 ‘부실기업’ 관리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충남 논산 출신인 이 전장관은 서울대 경제학과 3학년 재학중이던 1960년 고등고시 행정과(12회)에 합격해 1963년부터 재무부에서 근무했다. 외환자금과장, 국제금융국장, 제1차관보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으나, 1982년 경제기획원 출신들이 재무부를 장악하면서 1차관보에서 전매청장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이것이 그에겐 새옹지마가 됐다. 그 이듬해 발생한 아웅산 폭발사건으로 대통령을 수행한 핵심 경제관료들이 유명을 달리했던 것. 그후 관계 진출 25년 만인 1988년 재무부 장관에 올랐다. 그는 1990년 장관에서 물러난 지 8년 만에 다시 경제팀 수장인 재경부 장관으로 돌아왔다.

    그는 옛 재무부 관료들이 전임 장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기투표에서 1위에 올랐을 만큼 역량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장관퇴임 후 수지킴 살해범 윤태식씨가 운영하던 패스21 회장으로 영입된 전력 때문에 한동안 구설에 올랐다.

    이 대법관은 이 전장관의 대전고, 서울대 후배.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던 해인 1967년에 사법시험(8회)에 합격했다. 서울민사지법 부장판사,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을 지내며 기아, 한보사건 등 수백 건의 회사정리·화의·파산사건을 다루면서 화의제도와 파산제도를 정착시켰다. ‘회사정리와 화의절차 처리상의 문제점’ 등의 논문을 냈을 정도로 민사법과 도산 관련법에 정통하다. 회사정리 사건에서 채권자 등 많은 이해당사자들을 차분하게 설득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이 대법관의 형 규승(揆丞·60)씨는 충남대 축산학과를 나와 모교 동물자원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며, 동생 규방(揆邦·52)씨는 국토연구원 민간투자지원센터 소장이다.

    이 전장관과 마찬가지로 대전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이규방 소장은 한국은행에서 근무하다 미국으로 유학, 오하이오주립대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대 전반에 대통령비서실에서 국토개발담당 경제비서관과 사회간접자본투자기획단 부단장으로 일했으며, 1999년부터 국토연구원(국토개발연구원에서 명칭 변경) 민간투자지원센터(PICKO) 소장을 맡고 있다. PICKO는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민간투자를 행정적·기술적으로 지원하는 곳. 이소장의 책임 아래 교통·금융·법률분야의 전문가들과 건설교통부 등 5개 정부 부처에서 파견된 공무원들로 구성돼 있다.

    막내동생인 규왕(揆旺·43)씨는 연세대 화학과를 나와 미국 노스다코타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명지대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장영식(張榮植·70) 전 한국전력 사장과 최근까지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장재식(張在植·67) 민주당 의원 형제도 소문난 명문가 출신이다. 장의원의 조부인 장진섭(張鎭燮)씨는 전남 무안군(현재는 신안군) 장산도 출신으로, 부근에서 손꼽히는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장남 병준(炳俊)씨를 일본대 법과, 차남 병상(炳祥)씨를 일본 메이지대 법과, 4남 홍염(洪琰)씨를 중국 베이징국민대 등에 유학보냈다.

    병준씨 형제들은 대지주의 아들이면서도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했는데, 특히 셋째인 홍재(洪載)씨는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했다가 일경에 고문당한 후유증에 신병이 겹쳐 청년기에 세상을 떴다.

    장영식·재식 형제는 병상씨 슬하의 4형제 중 3남과 4남이다. 병상씨의 장남인 정식(正植·사망)씨는 전남대 의대를 나와 모교 안과 교수를 지냈는데, 아들 하종씨도 조선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일하고 있다.

    2남인 충식(忠植·73)씨는 광주제일고와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했다. 정치에 뜻을 품고 광주시의원, 전남도의원을 거쳐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하다 5·16이 터지면서 수감됐다. 당시 함께 수감됐던 정치인들은 ‘반성문’을 쓰고 풀려났는데, 그는 끝까지 쓰지 않고 버티는 바람에 정치활동 규제자로 묶였다. 결국 정치를 포기하고 한국은행에 들어가 검사역 등을 지냈다. 한은 퇴임 후에는 기업인으로 변신, 한국후지필름 사장, 한국닉스 회장을 역임했다.

    충식씨는 ‘수재’ 소리를 들으며 자란 4형제 중에서도 가장 머리가 좋아 학창시절 별명이 ‘노트나시(noteなし, ‘노트가 없다’는 뜻)’였다고 한다. 노트에 필기 한 자 하지 않고도 수업 내용을 훤하게 꿰뚫고 있어 붙여진 별명이다.

    대학 재학중 6·25가 발발하자 형 정식씨는 군의관으로 참전했고 충식씨는 두 동생과 함께 학도병으로 지원, 미 2사단을 따라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이 쏜 기관총탄에 맞아 사경을 헤맸다. 휴전 후 국가유공자로 지정됐다. 부인 고 민란식(閔蘭埴)씨도 4·19 당시 경찰에 구타당해 심한 부상을 입은 국가유공자로, 수년 전 별세한 뒤 4·19묘지에 안장됐다.

    충식씨의 자녀들 중에는 학자가 많다. 장녀 하진(夏眞·51)씨는 충남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지난해 여성개발원장에 취임했으며, 장남 하성(夏成·49)씨는 소액주주운동으로 잘 알려진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 3녀 하경(夏慶·45)씨는 광주대 가정관리학과 교수, 영국 옥스퍼드대 경제학박사 출신의 차남 하원(夏元·43)씨는 KDI 연구위원이다.

    여기에다 장하진 원장의 부군이 김홍명(金弘明·57) 조선대 정외과 교수, 장하성 교수의 부인이 김훈순(金勛順·47)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장하경 교수의 부군이 김대원(金大原·53) 조선대 미술대학장이라 한 집안에 박사가 7명이나 된다.

    장영식 전사장은 광주서중,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한 후 1969년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계량경제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는 계량경제학의 발아기라 미국에도 계량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가 10명 남짓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30년간 계량경제학을 하면서 에너지 분야를 부전공으로 연구해 이 분야에서도 전문가가 됐다.

    장 전사장이 미국 유학을 가게 된 것은 장면 전총리와의 인연 때문.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씨와 이기붕이 부통령 자리를 놓고 맞붙었을 때 장 전사장의 부친 병상씨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막기 위해 투표함을 지키다 이기붕이 동원한 반공청년단에게 테러를 당해 숨졌다. 함께 있던 형 충식씨도 부상을 당했다.

    부통령에 당선된 장면씨는 선거 후 장 전사장 4형제를 불러놓고 눈물을 흘리면서 “앞으로는 나를 너희들의 아버지로 여겨라”며 격려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부탁할 것이 없느냐고 묻자 장 전사장이 유학을 보내달라고 청했고, 가톨릭신자인 장면씨는 가톨릭재단에 다리를 놓아 장 전사장이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갈 수 있도록 주선했다.

    장면씨는 4·19 직후 국무총리에 오르자 유학중이던 장 전사장을 불러들여 총리실의 유일한 경제비서관에 임명했다. 지금의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던 셈. 장 전사장은 비서관으로 있을 때도 다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선 장총리를 ‘총리님’ 대신 ‘아버지’라고 불렀을 만큼 총애를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당시 집권 민주당의 대변인이던 김대중 대통령과 교분을 가졌고, 그 인연으로 훗날 DJ의 경제 브레인으로 다시 만난다.

    장 전사장은 KDI 연구위원으로 있던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자 형 충식씨와 DJ의 동교동 자택을 찾아 인사하고 경제정책 등에 관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DJ와 나눈 대화가 신군부 세력에게 도청되는 바람에 신군부가 집권한 후 그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도피하는 신세가 된다.

    뿐만 아니라 당시 주택은행장이던 동생 장재식 의원에게도 불똥이 튀어 취임 1년 만에 행장에서 물러났다. 그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년 한국전력의 첫 공채 사장에 선임된 데도 그런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다.

    장 전사장은 11개월간 한전 사장으로 일하면서 1조원 가량의 현금 수입을 올렸고, 불요불급한 공사를 축소하고 불리한 내용의 각종 계약 조건을 손질해 약 1조원을 절약함으로써 전체적으로 2조원이 넘는 수익을 기록했다. 사장에서 물러난 후에는 20년간 몸담아온 뉴욕주립대 경제학과 교수로 복귀했다. 그는 미국 경제 전반에 정통해 ‘만능박사’로 통한다.

    장재식 의원은 “나도 경제공부깨나 했다고 자부하는 사람인데, 장박사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의정활동을 할 때 뭐든 궁금한 게 있으면 그 양반한테 전화를 해서 물어보는데,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정책동향에서부터 크라이슬러사 파산과정에 이르기까지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막힘없이 명쾌하게 설명해준다”며 혀를 내둘렀다. 전공인 에너지 분야는 말할 것도 없어서 가령 북한의 구체적인 전력사정이나 퀘벡 저수지의 저수용량을 한자리수까지 외고 있다는 것.

    장 전사장의 아들 하상(夏相)씨는 코넬대를 나와 보잉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역시 코넬대 출신인 딸 진애(眞愛)씨도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장재식 의원은 초등학교에서 1년, 고등학교에서 1년을 월반해 17세 때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장의원의 이력서 학력란에는 출신고교가 광주고, 조선대부고 두 곳으로 돼 있다. 그는 광주고 2학년 때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조대부고 3학년에 편입, 석 달 동안 조대부고를 다니다 졸업하고 서울대에 들어갔다. 당시 광주고엔 월반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의원은 조대부고 출신은 ‘동창’, 광주고 출신은 ‘준(準)동창’으로 친다.

    장의원은 서울대를 졸업하던 1956년 고등고시 행정과(7회)에 합격했다. 최각규 전 경제부총리, 김용환 한나라당 의원 등이 고시 동기. 그러나 동기들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장의원은 보직을 받지 못해 4년2개월 동안 수습행정관 신세로 책상만 지켰다. 엘리트 코스인 내무부에 들어가려고 고시에서 행정1부를 지원해 수석을 차지했지만, 내무부는 그를 수습으로도 받아주지 않아 2지망인 재무부로 출근해 하루 종일 책만 읽다 나왔다. 당시 온 집안이 골수 야당원이 돼 자유당 독재정권과 척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장의원은 대학 3학년 때인 1954년 자유당이 사사오입 개헌을 시도하자 형 영식씨 및 친구들과 함께 광주시내로 뛰쳐나가 시위를 벌이다 광주교도소에 20일간 수감된 전력까지 있었다.

    그는 4·19 후에야 비로소 족쇄에서 풀려났다. 그해 1급지인 서울 서대문세무서장(서기관급)에 사상 최연소(25세)로 발령을 받았고, 이후 광화문, 남대문서장, 재무부 세제과장 등을 거쳤다. 1966년 국세청이 발족한 뒤에는 국세청으로 자리를 옮겨 징세·직세·간세국장을 역임했다. 국세청 발족 이래 1979년까지 국세청 국장급 이상 간부 20여명 중 호남 출신은 장의원이 유일했다. 그런 형편이라 장의원에 대한 국세청 안팎의 견제도 심했다.

    지역감정이 본격적으로 발호한 1970년 장의원이 서울지방국세청장에 임명되자 기관에서는 그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됐다. 서울청장은 조사국장, 부산청장과 함께 국세청의 3대 요직 중 하나였다. 손톱만한 흠이라도 나오면 목이 달아날 판이라 장의원은 1979년 주택은행장으로 갈 때까지 차관으로 지은 20평짜리 서민주택에서 장롱도 의자도 없이 살았다고 한다.

    조사를 해도 이렇다할 만한 게 나오지 않자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장의원에 대해 “김대중과 가깝다는 설이 있고, 전라도 인맥을 끌어모아 파벌을 조성한다고 함”이라는 애매한 결론의 보고서를 올렸다. 보고서를 읽어본 박정희 대통령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남덕우 재무부 장관에게 “참고나 하라”며 던져줬다. 그러나 지레 겁을 먹은 남장관은 장의원을 간세국장으로 내려앉혔다.

    그때껏 장의원은 김대중 대통령과 한번도 개인적으로 대면한 적이 없다고 한다. 재무부 세제과장이던 1965∼66년에 DJ가 국회 재경위원장이었기에 국회에서 마주치면 인사나 나눴을 뿐이라는 것. 공무원이 야당 인사를 개인적으로 만났다간 당장 사진이 찍혀 보고되던 시절이었다. 또한 당시 국세청에는 국장급은 물론 과장급에도 호남 출신이 드물었기 때문에 ‘전라도 인맥을 끌어모아 파벌을 조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1973년 고재욱 신임 국세청장이 ‘조세행정의 1인자’라 칭송하며 38세의 장의원을 일약 국세청 차장에 발탁하자 국세청은 또한번 술렁거렸다. 영남 출신의 몇몇 국장들이 “당신을 죽이라는 지시를 받았으니 각별히 조심하라”며 분위기를 귀띔해줄 정도였다. 기관원들이 전기계량기 검침원으로 가장, 집으로 들어와 사진을 찍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꼬투리를 잡힌 것은 없었다. 당시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장재식이 애향심이 강한 것은 사실이나 파벌을 만든 적은 없다”는 요지의 보고서를 올려 이전의 보고서 내용을 뒤집었다. 장의원의 집 사진을 본 박대통령도 “국세청 차장이 아직도 이런 집에 사느냐”면서 혀를 찼다고 한다.

    장의원은 그후 6년간 국세청 차장에 재임했다. 그 시절 장의원은 박대통령의 청렴성을 눈으로 확인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으면 그 내역을 꼼꼼히 기록해 국세청으로 보내왔다. 한푼도 자기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는 얘기다. 국세청은 그 명세서를 보고 기업들이 낸 정치자금 액수만큼을 영수증 처리해 비용으로 인정해줬다고 한다.

    장의원은 1980년 주택은행장에서 물러난 후 서울대 고려대 사법연수원 등에서 조세법, 재정학 등을 가르치다 1987년 DJ캠프에 합류,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당 전국구로 정계에 입문했고, 15·16대 총선 때는 지역구(서울 서대문을)에서 연거푸 당선됐다. 지난해 자민련의 국회교섭단체 구성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민련으로 당적을 바꿔 DJP 공조 복원에 기여하는 등 DJ의 직할부대 노릇을 해왔다.

    장의원의 장남 하준(夏準·39)씨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27세 때 이 대학 경제학부 교수로 취임했다. 차남 하석(夏碩·35)씨는 미국 스탠퍼드대를 나와 영국 런던대 과학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딸 연희(連希·37)씨의 부군은 임수빈(任秀彬·39) 서울지검 남부지청 부부장검사.

    김성훈(金成勳·63) 전 농림부 장관과 김성호(金成豪·56) 조달청장 형제는 우애가 남다르기로 소문나 있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콩 한 알도 똑같이 나눠먹으며 자랐기에 서로를 챙기는 정이 애틋했다.

    김 전장관 형제(4남3녀)의 고향은 전남 목포 인근의 무안군 산정리. 김 전장관의 조부는 1000석 가까이 수확하던 지주로, 그의 땅을 밟지 않으면 산정리를 지날 수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집도 20칸이나 됐다.

    김 전장관의 부친은 목포상고에 합격했지만 조부가 “학교 가면 일본놈 앞잡이 된다”며 뜯어말리는 바람에 진학을 포기했다. 이후 부친은 지주의 아들이면서도 소작인의 독립 갱생을 주창하며 협동조합운동에 투신했다.

    일제 때는 협동조합운동가가 사회주의자로 몰렸기 때문에 부친은 몇 차례나 감옥을 드나들었고, 4H운동 등 돈 한푼 안 생기는 농촌운동에 매달려 재산을 축냈다. 6·25 직전의 농지개혁 때는 법으로 정한 3정보 외의 농지를 모두 소작인들에게 나눠줬는데, 그 대가로 받은 유가증권은 전쟁 후 휴지조각으로 변했다.

    더구나 부친은 광산김씨 종손이라 한 달에 한두 번꼴로 제사를 모셨는데, 그때마다 200명 가까운 혈족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기둥뿌리가 뽑혀나갈 지경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 전장관의 숙부가 일찍 타계하면서 부친은 슬하의 7남매 외에 계수와 조카 4남매까지 집으로 들여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부친은 말년에 시의원이 됐지만 의회에 입고 나갈 양복 한 벌이 없었다.

    1958년 김 전장관이 목포고를 졸업하고 산정리에서 최초로 서울대(농업경제학과)에 진학했을 때 부친은 남은 전답을 모두 처분하고 빚까지 얻어 마련한 돈을 쥐어주며 “1년 학비다. 그 다음은 네가 알아서 해라”고 했다. 김 전장관은 서울대에 3등으로 합격했지만, 당시는 어수선한 전후 복구기라 수석합격자 외에는 장학금 혜택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김 전장관의 학비와 하숙비를 대느라 그해 목포여고에 합격한 동생 성자(成子·59)씨와 목포중에 3등으로 합격한 김성호 청장은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이것이 김 전장관에겐 평생 벗지 못할 부채로 남게 된다.

    그때 김 전장관의 형인 장남 성용(成鎔·68)씨는 전남대부속병원에서 임시직 전기기사로 일하며 조선대 공대에 다니고 있었는데, 집에서 2년 가까이 놀고 있던 김청장을 보다 못해 이듬해 조선대부속중학 야간부에 등록시키고 낮에는 전남대병원에서 사환으로 일하게 했다. 김청장은 새벽에 병원으로 출근해 병실을 청소하고 직원들의 심부름을 하면서 야간중학을 다녔다.

    그후 고교 장학생 선발시험에서 1등을 해 조대부고 주간부에 학비를 면제받고 입학하게 된다. 김 전장관보다 두 살 아래인 동생 성주(成洲·61)씨는 고교 졸업 후 대학에 갈 형편이 못되자 해군 장기하사관을 지원해 군 복무중 마산에서 야간대학을 마쳤다.

    대학에 진학한 김 전장관은 아르바이트와 장학금으로 학비를 조달했고, 전남대에서 석사를 마친 후 500대 1의 경쟁을 뚫고 미국 유학생 선발시험에 합격, 하와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6년부터 중앙대에서 교편을 잡은 뒤 부친의 뒤를 이어 농민운동에 헌신했다. 1993년 영국에서 돌아온 김대중 대통령이 이듬해 아태재단을 세운 후 DJ에게 중국 및 북한경제 문제를 조언하면서 맺은 인연으로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초대 농림부 장관에 올라 2년5개월이라는 최장수 재임 기록을 세웠다(이 기록은 최근 김명자 환경부 장관에 의해 깨졌다). 김 전장관은 재임중 농지개량조합· 농지개량조합연합회·농어촌진흥공사 등 3대 기관을 축소통합한 농업기반공사를 출범시켜 80여년 만에 농민들의 수세를 폐지한 것과 농협·축협·인삼협중앙회를 축소통합한 이른바 ‘2대 개혁’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긴다.

    김청장은 조대부고 졸업생으로는 최초로 서울대(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서울에서 공부하며 스스로 숙식을 해결하려면 좋은 조건의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야 했고, 그러려면 커트라인이 가장 높은 인기학과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무조건 상대 경영학과를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1971년 행정고시(10회)에 합격, 국세청 사무관으로 출발해 기획관리관, 재산세국장, 징세심사국장, 경인지방국세청장, 서울지방국세청장을 거쳐 2000년 8월 조달청장에 올랐다. 그가 청장으로 부임한 후 조달청은 ‘민원행정서비스 최우수기관’ ‘공공부문혁신 최우수기관’ ‘정보화수준 최우수기관’으로 잇달아 선정됐다.

    장남 성용씨는 부친이 타계한 후 전기공사를 대행하는 작은 사업을 꾸려가며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형제들을 돌봤다. 벌이가 빠듯해 성용씨의 부인은 그날 그날 수입으로 하루 먹을 봉지쌀과 연탄 10장씩을 사들여 생계를 이어갔다.

    성용씨는 특히 공부를 잘했으면서도 형편이 어려워 제때 학교를 못간 막내 김청장을 “내 아들보다 아낀다”며 살뜰하게 보살폈다. 중학부터 대학까지 뒷바라지한 것은 물론, 김청장이 공직에 진출한 후에도 보직이 바뀌거나 승진할 때마다 “남의 신세 지지 마라” “월급 아닌 돈은 받지 마라”고 신신당부하며 경제적으로 도움을 줬다. 호남 출신이 드물고 유혹이 많은 국세청에서 김청장이 깨끗한 처신으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성용씨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게 주변의 얘기다.

    성용씨는 김성훈 전장관이 교수가 된 뒤에도 “한눈팔지 말고 연구에 진력하라”며 5년에 한 번꼴로 승용차를 바꿔줬다. 사업이 크게 번창했던 것도 아니다. 성용씨는 1961년 단칸방에서 사업을 시작한 지 40년 만인 지난해 봄에야 어렵사리 3층짜리 사옥을 마련했다.

    성용씨가 사옥에 입주하던 날, 김 전장관과 김청장은 “청빈(淸貧)의 표상인 이 3층 건물이 저희에겐 30층, 300층보다 더 높이 우러러 보입니다”는 글이 담긴 액자를 만들어 사무실에 걸었다.

    성용씨는 동생들에게 그저 베풀고 관대하기만 한 맏형이었지만, 김 전장관이 동생들을 사랑하는 방식은 전혀 딴판이었다. 엄격한 “훈육주임”을 자임했던 것. 특히 자신 때문에 진학이 늦었던 김청장에겐 미안한 마음에 더 혹독하게 대했다.

    김 전장관이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농촌경제연구소에 근무할 때 서울 역촌동의 방 두 개짜리 전셋집에서 풋내기 사무관인 김청장을 데리고 살았다.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와서 다시 2km를 걸어 들어가야 하는 미나리밭 동네였다. 그때 김청장은 워낙 박봉이라 생활비를 내놓기는커녕 가끔 형수에게 용돈까지 타 썼다고 한다. 김 전장관은 그런 생활자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던 어느날 김청장이 택시를 타고 귀가하는 것을 본 김 전장관은 동생에게 “내일 당장 내 집에서 나가라”고 통고했다.

    “너는 지금껏 큰형의 도움을 받고 살았는데, 사무관이 된 지금도 혼자 힘으로 살 생각은 않고 나한테 기대 살겠다는 거냐? 공무원 봉급으로 못 살겠으면 왜 공무원을 하겠다는 거냐. 계속 공무원을 하겠다면 공무원 연습부터 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는 평생 국가와 국민에게 짐만 될 거다.”

    이튿날 동생을 내보낸 김 전장관은 부인에게 “성호가 한 달 동안 먹고 쓰는 돈이 얼마나 되냐”고 물어보고는 매달 그 액수만큼 김청장 명의로 만든 통장에 돈을 넣었다. 그 통장은 김청장이 결혼할 때 쥐어줬다.

    김 전장관은 농림부 장관에 취임한 지 두 달 후에 차남의 혼사를 치렀는데, 친구는 물론 친인척에도 알리지 않았다. 결혼식 이틀 전에 직계 형제들에게만 알리며 “비밀을 지키라”고 당부했다. 결혼식장도 처음엔 시내로 잡았으나, 남의 눈에 띌 것 같아 구로동의 변두리 예식장으로 옮겼다.

    결혼식은 토요일 오후였는데, 김 전장관은 수행비서에게 “구로동에서 먼 조카의 결혼식이 있는데, 차로 가면 막힐 테니 지하철을 타고 가겠다”며 전철역까지만 태워달라고 한 뒤 승용차를 돌려보냈다. 식장에서도 혼주 자리에 앉아 있으면 누군가 알아볼 것 같아서 밖에서 담배를 피우다 신랑이 입장할 때 슬쩍 들어가 사진 한 장만 찍고 빠져나왔다. 완벽한 ‘007 결혼식’이었다. 물론 축의금도 받지 않았다.

    얼마 후 경인지방국세청장으로 있던 김청장도 장녀를 결혼시켰는데, 그토록 보안유지를 당부했건만 결혼식 며칠 전 김 전장관의 비서과장이 “동생분이 개혼(開婚)하신다면서요?” 하며 물어왔다. 김 전장관의 비밀 결혼식으로 물을 먹은 비서과장이 한껏 안테나를 세워놓고 있다가 ‘한 건’을 잡은 것이다. 그날 김 전장관은 퇴근하자마자 김청장을 불러다 다그쳤다. 동생이 “가까운 친구들에게만 알렸다”고 ‘실토’하자 김 전장관은 노발대발했다.

    “네가 뭔데 자식 혼사를 소문내고 난리냐. 경인국세청 관내 기업이 1만2000개인데, 그 중에 10%만 눈도장을 찍으러 봉투를 들고 와도 그게 얼마겠냐. 당장 청첩장 인쇄 중단하고 예식장도 변두리로 옮겨라. 친구들에겐 결혼날짜가 바뀌었다고 해라.”

    날짜가 너무 임박해 식장은 옮기지 못했지만 김청장은 연막을 피우느라 진땀을 흘렸다. 식장에선 수부(受付)를 없애고 축의금을 받지 않았다.

    2000년 7월1일 농협·축협·인삼협중앙회의 통합을 완료하면서 2대 개혁을 마무리한 김 전장관은 “내가 할 일은 다했으니 제발 나 좀 물러나게 해달라”며 요로에 호소하고 다녔다. 행시 10회인 김청장이 차관급에 오를 연배인데, 같은 고향 출신의 형제가 정무직인 장·차관에 앉아 ‘호남 대통령’에게 부담을 줄 수는 없으니 자신을 그만두게 해달라는 하소연이었다.

    더구나 당시 김청장은 서울지방국세청장이었는데, 고시 동기인 안정남 국세청장이 광주고 후배인 손영래 조사국장을 서울청장에 앉히려고 김청장을 옷벗기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결과는 ‘해피엔딩’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동안 김 전장관의 사퇴의사를 물리쳤으나, 그해 8월에 민주당과 자민련이 다시 손잡으면서 자민련 몫인 농림부 장관 자리는 한갑수씨에게 돌아갔다. 김청장은 차관급인 조달청장으로 영전되면서 언론사 세무조사에서 손에 피를 묻히는 화를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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