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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 홀의 조선사랑

의료선교사

  • 김홍권 < 한국종교사회윤리연구소 소장 >

로제타 홀의 조선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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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 홀은 영국계인 로즈벨트 렌슬러와 포에베 셔우드의 3자매 중 장녀로 뉴욕 리버티에서 태어났다. 로제타는 체스트넛 릿지 지역학교와 리버티 보통학교(Liverty Normal Institute)를 거쳐 1883년 오즈웨고(Oswego) 학교를 졸업했다. 그뒤 벧엘 근처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체스트넛 릿지 지역학교로 돌아와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1886년, 로제타는 인도 선교에 대한 한 외부 강사의 강연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아 필라델피아의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에 들어갔다.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의 간호병원과 소아과병원에서 6개월간 인턴과정을 거친 그녀에게 감리교 여전도 기관(Deaconess’s Home)은 맨해튼 빈민지역 진료소에서 일할 것을 권유했고, 로제타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로제타는 사실 병약한 소녀였다. 어린 시절 척추에 이상이 있어 몇 차례 수술을 받았고, 20대가 될 때까지도 완치되지 않은 상태였다. 의과대학에 다닐 때는 목에 결핵성 종양이 생겨 역시 수술을 해야 했다. 그래서 로제타는 자신이 의사로서의 자격이 없는 게 아닌가 고민에 빠지곤 했다.

그런 로제타가 어떻게 험난하기 이를 데 없는 의료선교사의 길을 선택하게 됐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소 길지만 1927년 11월 코리아미션필드지에 기고한 글 ‘현장에 대한 나의 소명’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내 가장 어렸을 때의 회상들 중 하나는 어머니가 내게 엘리자 에그뉴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신 기억이다. 시적으로는 ‘천 명이나 되는 딸들의 어머니’라고 불렸는데, 그녀는 어느 외국 현장도 마다하지 않은 최초의 독신 여성 선교사였다. 그녀는 1839년 외국에 나가기 전 뉴욕주 리버티를 방문해 조부 길더스리브의 집에 손님으로 있으면서 당시 10세에 불과했던 내 어머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길만 열렸더라면 나는 어머니 스스로가 선교사가 되고 싶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머니가 해주신 이런 이야기들이야말로 나에게 선교사가 되고픈 충동을 일게 한 최초의 것이었다. 또한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나는 미국 인디언에 대한 책을 두어 권 읽었는데 그 책들은 인디언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언젠가 그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소원을 품게 했다.

나는 리버티 보통학교 및 오즈웨고 학교에서 교사로 훈련받았다. 어렸을 적 품었던 선교에 대한 비전은 시들기 시작했고 공립학교 교사라는 경력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던 때였다. 그 즈음 나는 어느 일요일 아침, 리버티에 있는 고향 교회에서 케너드 챈들스 부인이 인도 여행에 대해 연설하는 것을 들었다. 이 연설은 인도여성에게 복음 전도자와 의사가 매우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는 것이었고, 나의 가슴은 즉각 응답했다.

만일 챈들스 부인이 인도에서의 교육사업과 교사의 필요성에 대해 연설했었다면 나는 그렇게 봉사하겠다고 제안했을 것이며, 내가 조선에 갔던 것보다 몇 년 더 일찍 교사로 해외에 나갈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나는 챈들스 부인이 그때 일반 교육봉사(문맹퇴치) 쪽을 나에게 강조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의사가 되어 조선에서 봉사하도록 예정하신 하나님의 가호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복음 전도 사업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동인도 여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의사가 되어 그들을 돕는 것이라고 결정 내렸다.

나는 자연과학을 좋아했으며 또한 오스웨고의 자연과학 담당 교사인 여의사 매리 리 박사를 존경했다. 어머니는 나를 격려해주셨고 나는 우리 목사님인 J. W. A. 도지와 함께 라틴어를 공부하며 필라델피아에 있는 여성의과대학에 입학할 준비를 했다. 1889년 3월에 나는 마침내 그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나는 몇 가지 신체적 장애를 갖고 있으며, 그런 장애는 많은 사람들과 친구들을 낙담시킬 만한 것이었다. 목사님조차도 내가 외국 현장에 가는 것을 말렸다. …뉴욕시에서 몇 달 동안 의료 선교사업을 하는 동안 나는 의사로서 몇 가지 매력적인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그 무렵 나는, 여성들을 위해 마운트 홀요크(Mt. Holyoke) 신학교를 설립한 마리 라이온스(Mary Lyons)의 연설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만일 당신이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자 한다면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하는 곳에서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을 하십시오.”

이후 그 이야기는 좀더 쉽거나 좀더 돈이 되는 일에 대한 유혹이 생길 때마다 나를 확고하게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

당연히 나는 인도에 갈 것으로 기대하며 (의학공부를) 시작했으나 필라델피아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리고 이후 뉴욕시에 있는 동안 중국인들을 위한 일요 학교에서 가르치며 중국과 중국 여성의 무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여성해외선교회(WFMS)에 중국을 나의 희망지역으로 신청했으나 그들은 나중에 인도보다 더 절실한 도움이 필요한 조선의 북쪽 현장을 파견지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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