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호

삭막한 대한민국에 르네상스는 없다

  • 입력2004-11-08 17: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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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천재들도 지금 한국에 태어났다면 별 볼일 없었으리라. 자유도, 자치도 제한된, 그래서 다양성도, 보편성도 꽃필 수 없는 이 사막보다 더 삭막한 나라. 암기 천재는 더 이상 우리 시대의 주인공일 수 없다. 그들이 주인공인 한 우리에게 르네상스는 없다. 아니 문화란, 시민이란, 미래란 없다.
    르네상스란 단어는 다방이나 음악감상실, 심지어 고급 술집 이름으로도 곧잘 사용된다. 그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말이다. 조금은 ‘고상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장사가 ‘부흥’하라고 붙인 것일까. 여하튼 나는 그 어느 곳의 고객도 아니다. ‘부흥’이란 의미로는 더욱 자주 사용된다. 예컨대 ‘한국 마라톤의 르네상스를 이룩했다’는 식이다. 물론 나는 어떤 분야에서도 그런 르네상스를 이룩한 적이 없다.

    르네상스는 흔히 우리말로 ‘문예부흥’이라 번역된다. ‘문예’란 문학과 예술을 뜻하는 듯한데, 르네상스 시기에는 학문까지 포함하는 광범한 문화 부흥이 이루어졌고,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따라서 문예란 말은 적절치 않다. 또 지금은 그 단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일제 이후 각 학교에 문예반이라는 것이 있었으나 요사이는 그것도 없다. 나는 어떤 학교의 문예반 출신 문예청년도 아니었다.



    나는 ‘르네상스적 인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동아’ 2000년 1월호는 필자를 인터뷰하며 ‘르네상스적 인간’이라는 표현을 썼다. 관심 분야가 다양한 탓이라고 하나 나 정도의 관심영역을 가진 사람들은 주위에 너무나 많다. 역사에서 르네상스적 인간이란 예술과 학문은 물론 정치나 사회생활 전반에서 만능의 창조적 인간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2년 전에도 부끄럽기 짝이 없었으나, 그 뒤 그런 식의 이야기가 다른 곳에서도 몇 번이나 되풀이되자 더욱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연재도 그 인터뷰를 계기로 시작되는 것인지 모르기에 필자는 르네상스적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르네상스적 인간은 말 그대로 르네상스 시대를 산 인간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부르는 견해는 없다. 그 시대 인간은 대부분 무지한 농민으로서 문화와 관련이 없었으며, 그 중 몇 사람만이 창조적 업적을 남겼다. 그런 소수의 창조적 인간을 르네상스적 인간이라 부를 수도 있겠으나, 역사에서는 그 중에서도 지극히 예외적인 몇 사람의 전인(全人)을 진정한 르네상스적 인간이라 칭한다. 예컨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1404~72)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이다.

    레오나르도야 누구나 알지만 그보다 더욱 전인적인 인물이었던 알베르티는 우리에게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법률가로 출발하여 건축가, 화가, 조각가, 작가, 시인, 철학자, 문학자, 음악가, 자연과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유토피아 이론가 그리고 만능의 스포츠인으로 살았다. 그는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생활의 이상을 체득하고 표현한 전형적 휴머니스트였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서가 아닌 즐거움을 위한 연구와 창조에 몰두한 점에서 다른 르네상스 사람들과 달랐다. 그야말로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무엇이나 할 수 있었고 또 하고자 했던 무엇에도 거침없는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르네상스는 흔히 수많은 ‘천재’ 예술가들의 작품들로 장식된다. 물론 나는 그런 작품을 만든 적도 없다. 우리는 흔히 그 작품들이 천재적 예술가의 창조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엄청난 권력과 자본이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부자들이 돈으로 흥청댄, 조금은 고상한 한때의 잔치에 불과했다고도 볼 수 있다. 보들레르가 ‘예술은 매춘이다’라고 외친 것처럼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대부분 정권이나 부자를 위해 예술로 봉사했다. 따라서 그 ‘천재’의 ‘창조’라고 하는 점에도 문제가 많다. 여하튼 나와는 무관한 얘기다.

    흔히 르네상스의 정신을 휴머니즘, 르네상스 인간을 휴머니스트라고도 한다. 휴머니즘을 인문주의, 휴머니스트를 인문주의자라고도 하고, 이는 특히 최근 인문학 ‘위기’ 문제와도 관련돼 논의되기도 한다. 철학 문학 사학 등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학문을 인문학이라고 하고, 그것을 학문의 중심으로 보면서 그 위기를 강조하는 견해다. 르네상스처럼 위대한 문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절대로 필요한데 우리는 그것을 소홀히 하여 망조가 들었다는 식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에서 휴머니즘, 휴머니스트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말이나 글을 권력이나 부자에게 팔아먹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었다. 사실 우리가 휴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이 르네상스 당시에 매우 반동적인 현상이었고 반종교개혁의 불가결한 전제였다고 하는 점은 이미 그람시가 1930년대에 지적했다. 그렇게 보면 학문도 ‘매춘’이 된다. 심지어 휴머니스트란 말은 더욱 속된 의미에서 예컨대 매춘까지도 즐기는 ‘인간적’ ‘세속적’ 또는 ‘쾌락적’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적어도 르네상스에서 휴머니즘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으로 역사와 문헌을 철저히 존중하는 과학적이고 실용적이며 비판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르네상스 시대 휴머니스트는 정치적 연설이나 법정 변호 또는 편지 쓰기를 전문으로 하는 직업적 웅변가나 저술가들로서 중세의 학문에 대한 공격도 자신들의 직업 선전을 목적으로 한 활동에 불과했다. 그런 의미에서 르네상스 시대 정치가나 법률가는 사실 전형적인 휴머니스트였다. 예컨대 알베르티나 마키아벨리가 그랬다. 그러나 ‘신동아’ 기자가 법률가란 이유로 나를 르네상스적 인간이라 부른 것은 물론 아니었으며, 나도 그런 부름은 사양하겠다. 그러나 법률가는 물론 그 어떤 직업인도 르네상스적 인간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래야 우리의 정치나 법률이 조금씩 나아질 것이 아닌가.

    내가 이해하는 르네상스적 인간이란 단순히 만능의 재주를 지닌 인간이 아니다. 그런 인간이라면 우리가 새삼 살펴볼 필요도 없다. 사실 만능인이란 말보다 보편인이라는 말이 더욱 적합한 번역이다. 보통인, 일반인이라고 해도 무방하나 어감이 좀 다르다. 여하튼 그것은 보편성을 중심에 두고 끊임없이 다양성을 추구하는 인간을 말한다. 그 다양성이란 단순히 잡다한 흥미나 관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지배하는 부조리하고 추악한 현실에 끝없이 저항하면서 언제나 보편성을 추구하고 마지막으로는 유토피아를 그리는 것이다.

    여하튼 나는 어떤 이유에서든 르네상스적 인간이 아니나, 그러한 보편인의 즐거운 삶을 지향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이 연재는 알베르티나 레오나르도 같은 보편인의 이야기로 이어질 것이다. 그 전에 먼저 서론 격으로 르네상스에 대해 몇 가지 살펴보자.

    최근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 1818~97)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가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1860년에 나온 책이니 한글판 출간은 약 140년이 늦은 셈이다. 그 책은 르네상스에 대한 고전적 연구임에 틀림없으며 번역할 가치 또한 충분하나, 저술 당시는커녕 140년이나 뒤처져 나오게 된 것은 여러가지로 문제가 많다. 그런데 번역서에는 그런 문제점을 전혀 지적하지 않으니 여기서 그 몇 가지를 검토하려 한다.

    부르크하르트는 스승인 랑케를 비롯 당대 독일 사학자들이 정치사에 기운 것에 반해, 예술을 중시하는 새로운 역사학을 탐구했다. 심지어 정치, 국가, 전쟁이라는 현상마저도 예술적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기묘’한 학자였다. 6개 부로 구성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제1부 ‘예술작품으로서의 국가’에서는 13~16세기 이탈리아 역사를 군주정과 공화정의 관점에서, 특히 전자에 중점을 두고 고찰하면서, 국가나 전쟁도 인간의 개성적 의식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설명한다. 제4부 ‘세계와 인간의 발견’에서는 자연과학과 자연미 등을 설명하며, 당시 지식인의 시야가 급격히 넓어진 까닭에 아메리카의 ‘발견’이나 단테와 같은 새로운 문학의 창조가 가능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제5부 ‘사회의 축제’에서는 사회적 조직, 제6부 ‘도덕과 종교’에선 미신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기독교 도덕이 발전했다고 주장하며 종교도 문화의 일부로 본다.

    그는 르네상스를 해명하는 열쇠로 제2부 ‘개인의 발전’에서 중세의 익명성에 대해 르네상스의 ‘전인’과 명성의 이념을 대비시키고, 이어 제3부 ‘고대의 부흥’에서 휴머니스트에 대해 설명하며, 르네상스의 새로움을 개인주의에서 구하고 이를 고대 부흥과 연결시킨다. 그리고 책 전체를 통해 그는 르네상스의 천재들을 유럽 근대 최초의 지도자로 찬양하면서, 르네상스는 서양의 정신적 물질적 혁명의 결정적 시기로서 중세에 대립했으며, 근대를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역사서라기보다 문학서라는 느낌을 받기 쉽다. 예컨대 왜 중세가 없어지고 르네상스가 돌연히 나타났는가에 대한 설명도 없이 그냥 그렇게 주장한다. 게다가 아메리카 ‘침략’을 지식인 문제로 다루거나 전쟁을 개성의 충돌로 보는 등,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을 갖고 있다. 부르크하르트 자신도 이 책을 에세이라 불렀다. 그러나 아무리 제멋대로 썼다 해도 기묘하다. 그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문제점만 검토해보자.

    첫째, 르네상스를 근대사회가 낳은 근대문화의 효시로 본 점이다. 그 책을 쓴 1860년은 근대 자본주의 문화가 절정을 이룬 시기였다. 그러나 바로 1860년 이후 그때까지의 전통과 단절된 새로운 현대 도시 공업사회 - 그것을 산업자본주의, 독점자본주의, 제국주의 그 무엇으로 부르든 - 가 출현했다. 말하자면 그는 마지막 근대인으로서 르네상스를 자신이 속한 시대문화의 표상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1860년 이후 사람들에게 르네상스는 당연히 훨씬 중세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이후 르네상스를 중세와 연관짓는 연구가 활발하게 나타났다. 부르크하르트가 중세를 암흑의 시대로 본 점에 대해 반발한 중세사가들은 르네상스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이 이미 중세에 그 뿌리를 내린 것이라 주장했고, 그 결과 ‘12세기 르네상스’ 등의 책이 쏟아졌다. 그렇게 시작된 논쟁은 100년 이상 계속되고 있으나 아직 마땅한 결론은 나지 않고 있다.

    여하튼 부르크하르트 같은 근대중심주의자는 21세기를 사는 지금의 우리에게는 더욱 고리타분하게 보인다. 물론 아직도 그런 고리타분한 근대서양중심주의 또는 근대서양화주의가 우리의 척박한 정신풍토이니(특히 각종 학교의 교과서에는 아직도 그렇게 쓰여 있다) 오히려 부르크하르트 책이 딱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렇게 어려운 책이 베스트셀러까지 된 것일까. 형편없이 몰상식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 천박한 독서풍토에서는 그나마 축하할 일이라고 해야 할까.

    둘째,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를 14~16세기 이탈리아의 피렌체라는 도시에서 태어나 살았던 몇몇 전제군주와 천재의 문화적 산물로 다루고 있다. 즉 그는 르네상스 당시 이탈리아 인구의 극소수인 상류계급만을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1000만 명의 이탈리아인 대부분은 농민으로 무식하고 가난했으며 엄청난 권력의 질곡에서 비참하게 살았다. 따라서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르네상스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그야말로 소수의 예술가와 저술가들, 그리고 그들이 봉사한 권력과 부자들의 사치스런 여가 짓거리에 불과했다. 부르크하르트는 그런 여가 짓거리를 대단한 문화라고 생각하고 그 책을 쓴 것이다. 그것은 아직도 황제와 귀족 그리고 부자가 설치던 1860년대 독일인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이었다. 물론 그때도 마르크스(1818~83) 같은 사람이 있었으나, 당시의 그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존재였다.

    지금 우리에게 부르크하르트 같은 태도로 문화나 예술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상하다. 왜냐 하면 우리는 황제나 귀족은 물론 그 어떤 헛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민주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시민이라면 도리어 르네상스 당시의 이탈리아 민중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고 행했는지를 묻고, 그들의 문화를 탐구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그런 탐구까지는 하지 않는다 해도 부르크하르트의 주장은 ‘전제주의는 개인을 압살한다’는 역사의 경험과 어긋남을, 특히 우리의 현대사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셋째, 부르크하르트가 소위 정신사관, 즉 일상생활보다 관념에서 출발해 대립적인 것을 무시하고 시대의 문화적 일체성 내지 정체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며, 상이한 활동 사이에 막연한 관련성을 상정해 역사를 보았다는 문제다. 이는 앞에서 본 ‘전제군주와 천재들에 의한 르네상스’ 설명과 같은 맥락이다. 1860년은 그러한 정신사관, 관념사관이 절정을 이룬 시기이였지만, 동시에 그것이 정신사와 대립적인 경제사회사로부터 중대한 도전을 받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경제사회사관은 일상생활에서 출발해 공통의 경향을 무시하고 대립을 강조하여, 문화를 경제사회적 토대에 의해 결정되는 이데올로기로 보았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부르크하르트는 그야말로 ‘보수 반동’의 표본이다. 이처럼 부르크하르트는 적어도 민주주의나 경제사회사관의 입장에서 보면 문제가 많다. 우리가 경제사회사관에 반대한다 해도 부르크하르트의 견해는 저 고리타분한 왕조사나 천재사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다.

    부르크하르트의 시각은 우리의 초·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의 세계사 교과서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고 우리의 상식이 되었다는 점이 더 큰 문제다. 르네상스란 ‘고대 그리스 로마 예술을 부활시켜, 찬란한 예술을 꽃피우고, 그 사실주의·세속주의·개인주의로 중세의 막을 내리고 근대의 막을 올린 것’이라 정의하며 몇몇 천재들의 작품을 들먹인다. 르네상스와 중세·근대의 관련에 대한 논쟁이 있음은 앞에서도 설명했으니 나머지 문제를 세 가지만 더 살펴보자.

    첫째, 르네상스가 고대 예술의 부활인가 하는 점이다.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흔히 제시되는 라파엘의 ‘아테네 학당’의 중심은 하늘을 가리키는 플라톤과 땅을 가리키는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등 그리스 철학자들이다. 그러나 이 그림이 그려진 바티칸의 라파엘 방에는 그것과 마주보는 ‘성체의 논의’라는 그림이 있다. 이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신의 나라를 그린 것으로 르네상스가 기독교를 배경으로 생겨난 것임을 웅변한다.

    ‘아테네 학당’에서 플라톤은 레오나르도, 헤라클레이토스는 미켈란젤로, 유크리트는 브라만테의 얼굴로 그려져 있다. 플라톤을 레오나르도의 얼굴로 그린 것은 레오나르도 예술이 플라톤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철학자를 대신한 새로운 시대 상황을 보여준다. 그리스에서 중시된 철학자가 르네상스에서는 예술가로 바뀌었다. 게다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는 전혀 우수에 젖은 인간이 아니었으나, 르네상스의 미켈란젤로는 그런 인물의 전형으로 그려져 있다. 그야말로 새로운 인간상의 표현이다.

    또한 그 배경인 아치형 건축은 그리스에 존재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 신전은 직선형이다. 물론 아치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건물 일부에서 사용됐을 뿐 전체 구조로 사용된 적은 없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 그림에 나타나는 원근법이 그리스는 물론 로마 시대에도 없었던 것으로 그야말로 르네상스의 창조라는 점이다. 중심점을 향해 집중하는 이 구도는 우수에 찬 인간 표현과 같이 르네상스의 독자적 소산이다.

    르네상스 말기의 화가이자 역사가 조르지오 바자리(1511~74)는 스스로 ‘그리스 양식’이라 부른 비잔틴미술이나, ‘독일 양식’이라 부른 고딕 미술을 경멸하고 르네상스 미술을 가장 진보된 ‘현대 양식’으로 찬양했다. 사실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독일, 프랑스, 영국 예술가들과 달리 고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혁신을 할 수 있었다. 이는 뒤에 독일이 계몽주의의 영향이 약했기에 낭만주의로 쉽게 옮겨갈 수 있었던 것과 같다. 르네상스 사람들은 바로 ‘앞’ 시대의 고딕을 부정하기 위해 ‘먼’ 전통인 그리스를 긍정했다. 그러나 중세를 완전히 부정하고 고대를 완전히 재현한 것은 아니었으며, 사실 중세와 고대는 르네상스에 공존했고 혼화됐다. 그래서 보티첼리의 성모상은 비너스와 함께 그려졌고, 미켈란젤로의 예수는 아폴로상에 따라 형상화되었다.

    르네상스의 아버지 격인 지오토의 공간구성이나 인간상은 그리스의 그것과는 다르며, 도리어 몽골제국의 확장으로 서양에 알려진 중국 회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르네상스에서 발명된 원근법은 그리스에는 없었고 비너스라는 주제도 그리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조형성을 갖는다. 특히 성모상이나 십자가상처럼 르네상스 이후 가장 많이 그려진 주제는 그리스에 아예 없었다.

    둘째, 르네상스가 어느 정도로 ‘찬란한 예술의 번영’을 초래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그 상징으로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 등 르네상스 3천재를 비롯해 그들의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천지창조’ ‘성모상’ 등의 작품을 든다. 그러나 그 예술이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것보다 우수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르네상스 당시에 많은 예술가가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질적인 우수가 아니라 양적인 우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의미의 예술의 양적 번영도 영역에 따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유화·목판화·동판화·인쇄본은 모두 독일이나 네덜란드에서 비롯됐고, 문학은 14세기 전반 단테와 페트라르카 이후 ‘시 없는 세기’(1375~1475)를 맞이했다. 또한 당시의 음악은 전적으로 네덜란드인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예술 전반의 ‘찬란한 번영’이라는 말에는 문제가 있다.

    물론 원근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사실처럼 예술 분야의 기술적 혁신이 있었고 장르상의 혁신도 있었으며 각종 이론도 확립됐다. 미술이론, 문학이론, 음악이론은 물론이요 마키아벨리를 중심으로 한 정치이론까지 등장했다. 교육에서는 휴머니즘이라고 하는 5개학과, 즉 문법·수사학·시학·역사학·윤리학을 중시한 영역이 등장했다. 그러나 그 또한 결코 르네상스 예술이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예술보다 우수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셋째, 르네상스 예술의 본질을 ‘사실주의·세속주의·개인주의’라고 보는 것이다. 사실주의란 보통 미술사에서 19세기 쿠르베 이후의 반(反)체제적 미술사조를 말하므로 친(親)체제적인 르네상스를 그렇게 부르는 것에는 문제가 많다. 이는 우리 미술사에서 정선이나 김홍도의 그림을 그렇게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대착오적인 논의가 될 수 있다. 차라리 당시의 일상을 묘사한 풍속화적 요소가 도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또한 르네상스 예술이 중세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속적인 것이기는 했으나, 이 점도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르네상스 예술 작품도 압도적으로 중세의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정선이나 김홍도의 시대에 그들이 예외적이었고 도리어 그들을 포함해 압도적 다수는 중국식 산수화를 그렸다는 것과 같다. 마치 지금도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화가의 대부분이 참으로 ‘전근대적’인 풍경화나 인물화를 그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르네상스의 ‘개인주의’라는 것이다. 바로 부르크하르트가 주장한 것인데, 이 말 역시 여러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나는 르네상스의 그것을 ‘개성주의’ 정도로 이해한다. 즉 르네상스 미술은 획일적인 중세 미술과 달리 개성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인이 동양인을 보고 다 똑같다고 느끼나 동양인에게는 그렇지 않듯, 중세 작품을 두고 무조건 획일적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중세인의 눈으로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르크하르트 보다 300년도 더 전, 바로 르네상스 시대인 1550년에 르네상스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있었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바자리다. 그의 ‘르네상스 화가 열전(원제 ‘가장 뛰어난 이탈리아의 건축가·화가·조각가들의 생애: 치마부에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은 르네상스에 대한 기본 문헌이다. 400년도 더 지나서 우리말로도 번역됐다. 그러나 이 책은 역사학·미학·이탈리아어·문학 등을 전공한 교수도 아니고 언론인·소설가나 화가도 아닌 의사(르네상스를 참으로 사랑하는)에 의해 번역된 탓인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바자리는 천재란 혼자가 아닌 다수로 나타나 경쟁하는 것이 자연법칙이며 르네상스에 많은 천재가 나타났다고 했는데, 이 말에는 여러 문제가 있으니 일단 무시하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하필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발생한 이유로 그는 다음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떠들썩한 비판이 습관화됨으로 인한 철저함. 둘째, 어려운 자연환경에서 오는 근면성과 기민함 및 판단력. 셋째, 영광과 명예에 대한 격렬한 욕구. 그러나 피렌체 사람만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누구나 시끄럽고 한국 사람도 대단히 시끄러운 편이다. 자연환경이 어렵기는 한반도도 이탈리아 못지않고, 근면성이나 출세 욕구 또한 그 못지않다. 그밖의 다른 나라 사람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마찬가지일 것이다.

    16세기의 바자리와 달리 볼테르를 비롯한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자유와 경제’를 르네상스 성립의 이유로 들었다. 즉 자유도시국가 형성으로 인해 상업이 촉진되고 그것이 다시 문화를 촉진시켰다는 설명이다. 이는 이탈리아 자유도시 뿐 아니라 자유를 추구한 한자동맹도시나 네덜란드에서도 유사한 발전 형태를 발견할 수 있음으로써 증명된다. 이러한 설명의 전통은 19세기 부르크하르트까지 이어졌으나, 그는 예술 자체를 더욱 중시한 점에서 낭만주의적이었고 설명 방식은 앞에서 보았듯 전제주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19세기 독일의 부르크하르트보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설명이 우리에게 더욱 호소력이 있으나, 부르크하르트가 그랬듯 계몽주의자들도 자기 ‘안경’으로 보았다는 혐의를 벗기 힘들다. 과연 당시의 정치가 자유로웠는지, 또는 경제가 번영했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여하튼 바자리로부터 부르크하르트까지 르네상스는 단순한 고대의 부활이 아니라 고대문화를 능가한 것, 그리고 세계의 어떤 문화보다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근대서양문명에 대한 절대적 찬양을 목표로 한 것으로, 그 역사의 근거를 고대문명에서 찾음으로써 다른 문화는 무시되었음을 말한다. 마치 19세기 다윈의 진화론이나 스펜서의 사회진화론 등이 19세기 서양문화의 절대성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것으로부터 서양 중심의 세계 역사와 지리가 조작되어 서양의 세계침략을 뒷받침한 것처럼. 19세기 영국의 페이트가 쓴 ‘르네상스’도 지성과 상상력에 대한 사랑과 자유로운 미적 인생관에 대한 열망으로 르네상스를 극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르네상스 연구사 전체를 살펴 볼 필요는 없다. 그 복잡한 역사는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여기서는 20세기의 주목할 만한 경향 두 가지만 더 설명하자. 위에서 본 전통적인 르네상스관을 고수하면서 도상학으로 그 주장을 강화하려는 미술사가들의 주류적 입장은 꽤 소개되었으니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첫째, 마르크스주의자인 프레데릭 안탈(1887~1954)의 견해다. 그의 저서 ‘피렌체 회화와 그 사회적 배경’(1947년)을 보자. 그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함께 걸려 있는 두 점의 르네상스 시대 성모자(聖母子)화 중 하나는 즉물적이고 소박하며 명쾌하나 다른 하나는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성화(聖畵)풍이라며, 이런 차이가 생긴 이유로 전자는 소박하고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중류계급, 후자는 보수적이고 봉건적인 귀족계급을 위해 그려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문제가 많다. 예컨대 당시 사람들을 진보적 중류계급이라는 식의 20세기적 용어로 구분할 수 있는가, 과연 그런 계급이 존재했는가, 도리어 당시 그림을 주문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한통속이 아니었던가 하는 점 등이다. 설령 그런 구분이 엄밀하게는 가능하다 할지라도 거기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둘째, 계몽주의 이래 전통적으로 ‘자유와 경제’라는 측면에서 르네상스를 설명해 온 것에 수정을 가하게 만든, 20세기의 대표적인 두 가지 경제사회사적 연구업적이 있다. 먼저 로페스(1910~)는 14~15세기에 이탈리아의 경제가 발전한 것이 아니라 퇴보했다는 점을 밝혀냈다. 중세 이탈리아는 호황이었으나 교회는 작았고, 중세 프랑스의 경우 불황이었으나 교회는 거대했다는 점, 르네상스도 경제적 발전 탓이 아니라 도리어 경제적 퇴보로 인해 상인들이 문화활동에 투자할 여유가 생겨 문화가 번성했다는 설명이다. 우리나라도 최근 토지나 주식 가치가 떨어지자 부자들이 문화에 투자하는 양상이 나타난 것과 같은 현상인지 모르나, 그런 투자조차 일정한 경제적 번영을 전제로 하는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다음, 정치적 자유와 관련해 바론(1900~)은 1400년경 밀라노가 피렌체를 침략하자 피렌체에 집단적 동질성에 대한 강조 현상이 나타나 자국을 아테네·로마와 동일시하게 됐고, 그 결과 문화에도 큰 변화가 생겨 르네상스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즉 국가 위기가 문화 번성을 가져왔다는 설명이다. 어쨌거나 위기 극복의 계기가 ‘자유’도시국가로서의 정치적·정신적 자유에 있음은 인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완전한 전제국가에서는 위기를 문화로 극복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살펴보자. 사실 검토할 가치도 없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그의 저작들에서 르네상스시대에 ‘보고 싶고, 알고 싶어하는’ 인간이 폭발적으로 배출돼 예술과 학문의 걸작이 탄생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대단한 호기심의 인간들이 출현할 만한 토양이 13세기 성 프란체스코와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마련됐다고 설명한다. 마치 그것이 자기만의 독창적인 시각인 것처럼 책의 5분의 1을 할애해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전혀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성자나 황제에 의해 인간의 호기심이 별안간 발현했다는 주장에는 도저히 찬성할 수 없다.

    이어 나나미는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이유로 교황청과 시민공동체의 존재를 들고, 도시국가가 학문에 투자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피렌체에서 시작된 이유로는 피렌체인의 비판정신과 경제적 번영을 들면서 후자를 주도한 메디치가에 대해 설명한다. 책의 3분의 1에 이르는 이 설명 또한 지도자 중시의 견해다.

    나나미는 르네상스의 유산으로 엄청난 예술품, 정신의 독립에 대한 강렬한 집착, 일원론적 사고방식을 들었다. 그리고 르네상스는 종교개혁과 달리 비기독교세계와도 관련 있다고 하면서 그 근거로 ‘심안(心眼)’과 ‘극기(克己)’라는 일본어를 들었다. 그 두 단어가 르네상스에서 온 것은 아니지만 말의 의미는 르네상스와 통하므로 그런 말이 있는 일본에서도 르네상스가 가능하다는 것인 듯 하다. 즉 극기란 정신의 독립, 심안은 일원론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이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어느 사회의 어떤 언어에나 그러한 말들은 존재한다. 중세에도 그런 말이 없었을 리 없다.

    시오노 나나미의 르네상스 저작집 7권은 위의 내용을 담은 제1권 ‘르네상스는 무엇이었던가’로 시작해, 제2권 ‘르네상스의 여인들’, 제3권 ‘체자레 보르지아 또는 우아한 냉혹’, 제4·5권 ‘바다 도시 이야기’, 제6권 ‘바다의 대리인’, 제7권 ‘내 친구 마키아벨리’로 구성된다. 제2권 이하는 과거에 쓰여진 것이므로 새로 쓴 것은 제1권뿐이다. 제2권 이하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번역돼 나와 베스트셀러가 됐다. 제1권도 최근 번역돼 매우 잘 팔리고 있다. 나나미의 저작은 그가 쓴 ‘로마인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인물사, 그것도 예술가들의 이야기라기보다 정치인 중심의 왕조비화사 같은 것이다. 그것이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며, 일본에서조차 학계로부터 철저히 무시되고 있음을 볼 때 우리가 학문적인 검토까지 할 필요는 없다. 불행히도 한국에서는 역사학자들이 그 책들에 대한 친절한 논평까지 곁들이고 있지만 말이다.

    나는 그 책들이 대중물로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일본식의 야사물일 뿐 아니라 그 기본입장이 인물지배사에 못 박혀 있음이다. 일본 야사물의 대종은 천황이나 사무라이들을 영웅으로 다루는 것인데, 천황제가 확립된 메이지시대에 ‘플루타르크 영웅전’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 같은 것들이 영웅전과 함께 유행하면서 일본 국수주의의 한 뿌리가 되었다. 최근 우리 사회에 그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음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위에서 짚어본 몇 가지 견해와 달리 필자는, 문화가 경제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정하는 대신 문화(학문·문학·미술·건축·음악·연극·무용·영화 등에 나타난 태도나 가치관)와 사회(정치·경제·사회의 총칭)의 상호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는 문화가 문화인의 자각적인 의도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문화인은 사회적 존재로서 문화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자만을 강조하는 정신사관이나 후자만을 강조하는 물질사관은 둘 다 일면적이다.

    또한 몇몇 천재의 뛰어난 능력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14~16세기 이탈리아 사람들의 삶 속에서 르네상스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예술가들의 작품이 갖는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만이 절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는 위에서 근대주의자 부르크하르트를 비판했듯 ‘근대’나 ‘진보’란 말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태도다. 즉 르네상스가 최고의 진보라서 서양의 다른 시대나, 동양처럼 서양과 다른 사회의 예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식의 이야기는 금물이다. 르네상스 또한 다른 문화와 공존하며 상호 교류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른 모든 문화가 그러하듯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예컨대 한국문화는 독자적인 무엇이 아니다. 단군이니 무속이니 뭐니 하며 한국문화의 원형이니 순수니 하는 것에 집착하는 소위 민족주의자(더욱 정확하게는 국가주의자)들을 보면 과연 저들이 문화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문화란 기본적으로 잡스러운 것으로 ‘잡종’임을 그 타고난 운명으로 한다. 잡종이라고 해서 문화의 권위나 순수를 해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 문화가 단군 이래 우리끼리 만든 순종이 아니라 1세기 전에는 중국에서 왔고, 1세기 후에는 일본이나 서양에서 왔다 해도 그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것에 대한 물신화인 것이다.

    르네상스 당시 이탈리아 대학에서는 먼저 교양과목으로 학예(Arts), 즉 자유 7과목 - 기초 3과(문법·논리·수사)와 응용 4과(산술·기하·음악·천문) - 을 공통으로 배우고, 이어 신학·법학·의학 중의 하나를 전공으로 택하게 했다. 말하자면 오늘 우리 대학에 존재하는 인문학과 같은 것은 없었고, 교양으로 모든 학생이 인문학을 공통으로 배운 뒤 종교인·의사·법률가 중 하나를 택해 직업 교육 받은 것이다. 이것이 대학의 원형이라면 대학은 본질적으로 직업교육을 시키는 곳이고, 인문학은 그 직업인의 교양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문학은 무엇보다도 교육과 도덕적 완성을 목표로 삼았다. 그 핵심은 생활과 지혜의 결합, 지적 활동과 실천능력의 조화였다. 이는 철학적이라기보다 구체적 문제에 대한 토론을 중시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보기가 정략론을 수립한 마키아벨리다.

    한편 우리의 대학은 출발부터 왜곡돼, 인문학과가 대학의 중심인 양 과장되고 직업과 무관하게 철학이니 문학 또는 예술에 탐닉하는 것이 교양인 양 선전되는 낭만 과잉의 비현실적 분위기가, 참혹한 현실의 식민지시대로부터 청년들을 도피시키는 기능을 했다. 그 토대가 사회현실과 유리된 문예반 식의 인식이다.

    그러나 학자라는 직업인의 배출은 어느 사회에서나 지극히 제한적이다. 따라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대학 졸업 후 대부분 전공과 무관한 분야에서 직업을 얻거나 실업 상태에 놓였다. 이러한 왜곡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게 되면서 인문학과 학생 정원을 줄이고 학생들이 자유롭게 학과를 선택할 수 있는 제도가 채택된 것이다.

    여기서 인문학 위기론이 대두되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알베르티와 같이 르네상스 휴머니스트가 보여주는 보편성과 다양성에 입각한 전인적 지식의 추구야말로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우리 문화 전반이 그렇지만 서양문화의 모방과 암기로 점철된 문화식민지적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철저히 폐쇄적인 학문의 분화를 파괴하고 서양문화에 대한 과도한 물신주의를 벗어나야 하며 자기가 사는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긴장 속에 그 현실을 비판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나는 우리의 르네상스를 위한 구상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사람, 인재의 개념은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암기력이 아닌 보편적이고 다양한 교양에 바탕한 창조력이 인재의 기준이 되어야 하며, 또 그런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 그러자면 지금 우리의 교육 및 사회제도는 철저히 바뀌어야 한다. 아니 정치도, 경제도 바꾸어야 한다. 작고 자유로운 도시, 활기찬 자치의 도시, 저마다 개성을 갖는 다양한 시민들이 보편성을 추구하는 도시가 정치·경제·사회의 중심이 돼야 문화가 꽃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천재들이 지금 한국에 태어났다면 우리와 진배없었으리라. 지금 우리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기에 르네상스가 불가능하다. 자유도, 자치도 제한된, 그래서 다양성도 보편성도 꽃필 수 없는 사막보다 더 삭막한 나라. 오직 국가권력과 재벌기업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관리하는 식민지시대 또는 군사독재시대에나 환영받을 만한 암기 천재들은 더 이상 우리 시대의 주인공일 수 없다. 그들이 주인공인 한 우리에게 르네상스란 없다. 아니 문화가 없다. 아니 시민이 없다. 아니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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