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호

르네상스의 지적 기반을 만든 이슬람학문

  • 입력2004-11-08 17: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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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슬람 학문은 10세기를 전후한 이슬람 문명의 전성기에 그 문명을 주도하면서 학문 일반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향상시킴으로써 근대 학문의 밑거름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슬람 학문은 여러 분야에서 독창적인 업적을 쌓아올렸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고스란히 유럽에 넘겨줌으로써 르네상스의 지적 기반을 마련했다.
    르네상스의 지적 기반을 만든 이슬람학문
    이슬람이 인류문명의 보편적 가치에 대해 과연 어떤 기여를 했을까? 언필칭 ‘이슬람’이란 용어의 근저에는 ‘이슬람교’란 종교가 깔려 있고, 또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이슬람’이라고 하면 종교로서의 이슬람만을 연상하게 된다. 물론 1400여 년이란 길고도 긴 세월 동안 줄곧 세계 3대 종교의 하나로서 위상을 굳혀왔으니 그럴 법도 하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인류문명의 보편적 가치에 대해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라고 할 때, 어디까지나 한정된 사람들(신봉자-무슬림)의 가치관으로 그 ‘보편성’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것만으로 인류문명의 보편적 가치에 대해 이슬람이 기여했다고 말하기에는 미흡함 내지는 부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인류문명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기여도 면에서 따져보면, 종교로서의 이슬람보다 문화로서의 이슬람이 월등하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슬람문화야말로 중세 700~800년 동안 지구의 서반구에서 문명사의 주역을 담당했고, 서구의 르네상스 도래에 촉매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구인 모두가 크건 작건 간에 그 문화의 혜택과 결실을 모두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교합일이란 이슬람 고유의 특성으로 인해 이슬람에서 종교와 문화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는 하지만, 가치의 보편성에 대한 재량(裁量)에서는 결코 같을 수가 없다.

    비록 사막이란 문화의 불모지에서 출현했지만, 이슬람은 당초부터 문화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돌렸다. 경전 ‘꾸르안’을 보면 알라의 첫 계시절(96:1)이 바로 “읽으라, 창조주이신 그대의 이름으로”인데, 이것은 무지로부터의 탈피를 절체절명의 첫째 과제로 명한 절이라고 경전 주석가들은 해석한다.

    ‘꾸르안’은 바로 이 절에서의 명령형 동사 ‘읽으라’의 어근인 ‘읽기’ ‘읽음’이란 뜻이다. 교조 무함마드는 문도들에게 읽고 쓰기를 배우며 지식인을 존경하라고 거듭 강조하면서, 이슬람교의 전파를 위해 외국어까지 배우라고 권고했다. 만약 전쟁 포로가 10명의 무슬림 아동에게 읽고 쓰기를 깨우쳐주기만 하면 곧 석방했다고 하니, 배움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이슬람의 사원(마스지드)은 종교활동의 거점일 뿐만 아니라, 문화 전수와 교육의 장이다. 대체로 사원에는 도서관이나 학교(마드라사)가 부설되어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수시로 찾아가 책을 읽고 강의를 들을 수 있다. 메디나의 사파흐 사원은 ‘지식과 지혜’를 가르치는 최초의 학교였으며, 830년 압바스조 칼리파 마어문 치세시 바그다드에 설립된 ‘지혜의 집(바이툴 히크마)’은 첫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이 ‘집’은 이슬람문화의 전수와 연구에서 뿐만 아니라, 특히 그리스-로마나 페르시아 등 주변 선진 문명국에서 저술된 서적들을 대거 아랍어로 번역하여 이슬람문화의 형성과 발달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이어 859년 모로코 페스에 또 하나의 이슬람 교육 중심인 깔라윈 사원이 세워져 서방 이슬람 세계의 문화 창달에 일익을 담당했다.

    10세기 중엽에 설립된 안달루스(이슬람 스페인)의 코르도바대학은 유럽 학생들의 유학의 요람이어서 이슬람교와 이슬람문화의 서구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이슬람문화의 전파와 연구를 선도하는 학문의 최고전당으로 카이로의 아즈하르대학과 이라크의 니좌미야대학을 꼽는다.

    983년에 개교한 아즈하르대학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서 전통 이슬람문화의 계승과 향상에서 명실상부한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셀죽 왕조(1038~1194)의 칼리파 니좌 물크가 1065~67년 바그다드에 세운 니좌미야 대학은 이슬람의 정통파인 쑨니파 교리를 주로 전수하고 연구하는 전당으로서 이슬람문화를 전승하는 데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렇게 성장해온 이슬람 문화에서 학문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세 이슬람문화가 세계적 문화로 돋보이게 된 것은 바로 높은 학문수준 때문이었다. 이슬람은 지식과 학문의 탐구를 속세와 내세를 포함한 모든 곳에서의 인간생활과 활동의 필수로 의무화하고 있다.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에는 “그 누가 현세를 원한다면 지식을 얻어야 하고, 그 누가 내세를 원한다 해도 지식을 얻어야 하고, 또 그 누가 이 두 가지를 다 원한다 해도 역시 지식을 얻어야 한다”고 지식 습득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슬람의 학문을 이야기할 때면 으레 인구회자(人口膾炙) 되는 “학문은 멀리 중국에까지 가서라도 구할지어다”라는 말로 학문 탐구를 독려하기도 한다.

    이슬람의 학문은 이슬람교의 출현과 더불어 싹트기 시작하여 경전이 편찬되고 이슬람교가 확산되며 아랍어가 유일 공용어로 정착됨에 따라 신학과 문법학을 비롯한 이슬람 고유의 학문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9세기 전반에 이르러 ‘지혜의 집’이 세워져 본격적으로 외국 서적을 번역하여 새로운 학문을 수용하고 융화시킴으로써 이슬람의 학문체계가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대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카와리즘은 역저 ‘학문의 열쇠’(마파티홀 올룸, 10세기 후반)에서 당시까지 기본적으로 정립된 이슬람의 학문을 크게 아랍 고유학문과 외래학문으로 대별했다. 고유학문으로는 법학, 신학, 문법학, 서기학(書記學), 시학(詩學)과 음률학, 역사학이 있고, 외래학문에는 철학, 논리학, 지리학, 의학, 수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 기계학, 연금술이 있다.

    10세기 이슬람문화의 황금기에 이르러 고유학문이건 외래학문이건 간에 이슬람 문화란 하나의 용광로 속에 녹아서 이슬람 학문이란 하나의 덩어리로 응결됨으로써 이슬람 고유의 학문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물론 학문의 부단한 발전과 변모에 따라 학문영역이 확대되고 세분되었지만, 학문체계의 기본틀은 시종 유지되었다. 이슬람의 학문체계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몇 가지 학문분야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슬람 학문에서 전통이 가장 오래된 것은 단연 이슬람 신학(칼람)이다. 신학이란 종교신앙에 관한 일체 지식의 총칭으로서, 그 요체는 신앙과 이성(자유의지)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이다. 이슬람 신학은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킴으로써 신학의 근본문제인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있어서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 즉 이슬람 신학자들은 이성보다 신앙을 앞세워 유일신의 존재를 절대화하고, 그 전제에서 지적(이성적)인 노력으로 신앙을 심화시키는 방법에 의해 이 신학의 근본문제를 해명했다.

    그들은 11~12세기에 잊혀졌던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을 유럽에 전함으로써 중세 유럽의 스콜라 철학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무슬림들은 수학에서도 남다른 두뇌를 보였다. 수학 발전에서 그들이 두 가지 특출하게 기여했는데, 수학에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영(零, 0)의 발견과 대수학의 정립이다. 이슬람 초기 무슬림 학자들은 페르시아 지역의 준디 샤푸르 의학원을 통해 의학만이 아니라, 의학과 천문학의 기초학문인 수학도 전수받았다. 숫자를 비롯해 인도 수학을 많이 수용했다.

    그런데 인도 수학에서 숫자는 1부터 9까지만 있고 영은 없었다. 그래서 9세기 지리학자이자 대수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조로아스터교 신자 카와리즘을 비롯한 무슬림 수학자들은 인도의 숫자 서법을 아랍어 서법에 맞게 변형시켰을 뿐만 아니라, 영(점으로 표시)이란 전혀 새로운 숫자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수학에서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카와리즘의 ‘집합과 분할의 서’란 논문이 12세기 ‘인도 숫자에 대한 카와리즘의 서’란 제하에 라틴어로 번역됨으로써 유럽인들은 처음으로 영을 포함한 숫자를 알게 됐다. 숫자의 발달에 엉킨 사연에 무지한 유럽인들은 숫자를 아랍인들로부터 전수받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아라비아 숫자’라고 불렀다.

    16세기에 이르러 유럽에서 그대로 사용되던 로마 숫자는 아라비아 숫자로 대체되었다. 영어의 ‘cipher(영, 암호)’나 이탈리어의 ‘zero(영)’는 ‘공(空)’ ‘무(無)’ 혹은 ‘영’이란 아랍어 단어 ‘쉬프르(sifr)’에서 유래된 것이고, 영어의 ‘algorism(아라비아식 기산법, 아라비아 숫자)’은 수학자 카와리즘의 이름과 관계가 있다.

    피타고라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들은 수를 단순한 양의 개념으로 본 데 반해 카와리즘을 비롯한 무슬림 수학자들은 상호 관계적인 개념으로 인식함으로써 9세기 중엽에 대수학이라는 새 학문을 탄생시켰다. 카와리즘은 3차 방정식의 풀이법까지도 해명했다. 당초 무슬림 수학자들은 대수학에서의 문제풀이 절차가 마치 외과의사가 부서진 상처를 다시 원상으로 회복하는 수술과정과 비슷하다고 하여 외과 전문용어인 ‘알 자브르(al-Jabr, 접골, 깁스)’를 빌어 대수학을 ‘자브르’라고 했는데, 그것이 영어 ‘algebra(대수학)’의 어원이 되었다. 대수학의 발달과 더불어 기하학이나 삼각학에서도 큰 진전이 있었다.

    끝으로, 이슬람의 학문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화학의 발달과 직결된 연금술인데, 그것이 동방의 연단술(煉丹術)과 상관되어 우리의 주목을 끈다. 일반적으로 금속공예의 발달은 연금술(鍊金術, alchemy)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연금술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의 화학기술로 구분된다. 첫째는 동, 연, 주석, 금, 은 등 귀금속 제조기술이고, 둘째는 불로장생의 선약(仙藥) 제조기술이다.

    연금술의 기원은 로마시대의 이집트(알렉산드리아)와 중국 도가 출현시대로 소급하고 있는데, 전자는 귀금속의 제조에서 비롯되고, 후자는 선약의 제조에 역점을 두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자비르 이븐 하얀(일명 Geber, 723~815)을 비롯한 중세 무슬림 화학자들에 의해 양자가 비로소 결합되어 의학과 화학의 발전을 촉진시켰으며, 그것이 13세기 이후 유럽에 전파됨으로써 비로소 현대실험과학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중국을 비롯한 동방에서 출현한 연단술의 주 소재는 금가루인데, 고구려의 것이 잘 정련되어 진품으로 중국에서도 각광을 받았다. 이것은 고구려 금가루의 중국 유입을 시사해준다. 그런데 중국의 연단술은 아랍-무슬림 상인들이나 마니교도들에 의해 중앙아시아와 아랍 지역에 소개되었다. 특히 8세기 중엽 우마위야조 귀족 상층들은 장생을 갈구하여 연단술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독교 수사이며 연금술사인 마리아누스를 예부터 연금술의 본거지인 알렉산드리아에서 수도 다마스커스로 이주시켜 연금술 연구를 전담케 했다. 이를 계기로 이슬람 세계에서 연금술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중앙아시아의 후라싼에서 약초상의 아들로 태어난 최초의 무슬림 연금술사인 자비르는 당시 중국에 왕래하던 아랍-무슬림 상인이나 중국 연단술을 수용한 마니교도들로부터 연단술을 전수 받아 큰 각광을 받았다. 그러자 압바스조의 칼리파 라시드는 그를 궁전 어의로 기용했다. 자비르는 이크시르(elixir)라는 특수한 연금영약으로 재상 애처의 중병을 치유했다고 전해온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제 무슬림들의 연금술이 종래의 순수 금속제조술에서 탈피해 동양식 선약제조술로 변신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필경 중국의 선약재(仙藥材)로 이러한 영약을 제조했을 것인데, 이 선약재 속에는 당시 중국에서 인기 있는 금석 같은 고구려 약재가 포함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슬림 연금술사들은 연금과정에서 증류, 용해, 결정, 승화, 여과 등 화학실험과 붕산, 진사, 녹반, 나트륨, 백연 등 화학품의 제조까지 주도함으로써 현대실험과학의 개창자로 인정받고 있다. 영어에서 연금술과 화학을 뜻하는 ‘alchemy’와 ‘chemistry’는 아랍어의 ‘알 키미야(al-kimiya, 연금술 또는 화학, al은 정관사)’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런데 아랍어의 ‘알 키미야’는 또 4세기부터 나타난 그리스어 ‘케미아(chem ia)’에서 차용한 외래어다. 라틴어나 영어의 연금술과 화학관련 용어 중에는 그 어원을 아랍어에 둔 것들이 적지 않다. 예컨대 alcohol(al-kuhl), alkali(al-qili), camphor(kafur) 등이다.

    이상에서 이슬람 학문의 주요 영역 몇 가지에 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슬람 학문은 10세기를 전후한 이슬람 문명의 전성기에 그 문명을 주도하면서 학문 일반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향상시킴으로써 근대 학문의 밑거름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슬람 학문은 여러 분야에서 개창적인 업적을 쌓아올렸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고스란히 유럽에 넘겨줌으로써 수세기 동안 학통(學統)을 잃고 방황하던 유럽으로 하여금 ‘르네상스’ 할 수 있는 지적 기반을 마련하도록 했다.

    삭막한 사막에서 어느 날 한 가닥 신기루마냥 홀연히 나타난 이슬람에게 학문이란 애당초 불모지였다. 다행히 학문의 중요성을 자각한 무슬림들은 그 어디로부터를 불문하고 학문이라면 수입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리스와 로마, 페르시아와 인도 등 문명국들의 학문서적을 그대로 번역하고 받아들여 이슬람 학문의 개발과 정립에 능동적으로 활용했다. 그 결과 이슬람 학문의 기조는 처음부터 여러 갈래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다원성으로 인해 상당기간 전통학문과 외래학문이라는 큰 틀 속에서 전통은 전통대로, 또 외래는 외래대로 여러가지 학맥(學脈)이 병존하는 다원상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다원적인 여러 학문이 공존하는 과정에서 이슬람 학문이란 하나의 복합체가 이루어졌다. 흔히들 이것을 이슬람 학문의 통일성이라고도 말하는데, 그 기저에는 고유의 수용성과 관용성이 깔려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이슬람의 다른 영역과는 달리, 심지어 같은 문화 영역의 다른 분야와도 달리, 이슬람 학문만은 신학 같은 특정 학문을 제외하고는 이례적으로 이슬람교라는 종교색채에서 탈피해 초종교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유대인이건, 기독교인이건, 조로아스터인이건, 개종자건 아니건, 이슬람 학문 분야에서만큼은 평등하고 공동 기여자가 되었다. 이것은 이슬람 학문이 지닌 하나의 슬기였다.

    이러한 이슬람 신학을 구성하고 있는 세부 학문으로는 경전 ‘꾸르안’을 해석하는 주석학(釋學, 타프시룰 꾸르안), 무함마드의 언행을 연구하는 성훈학(聖訓學, 하디스), 이슬람교의 법과 교리를 연구하는 성법학(聖法學, 샤리아)과 교의학(敎義學, 아끼다), 경전 중에 은폐되거나 내재된 심오한 함의를 해명하는 은둔학(隱遁學, 일물 바톼니야)이 있다.

    종래 이슬람 신학에는 신앙과 이성(자유의지)에 대한 입장의 차이로 4개의 신학파가 나타나 치열한 신학 논쟁을 벌여왔다. 범죄는 정명(定命)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자유의지를 주장하며 숙명론을 반대하는 까다리야파, 범죄 재판 등 신학문제는 현세가 아니라 내세로 미루었다가 해결해야 한다는 중용적인 무르지야파, 이성이 계시보다 더 중요하다는 자유의지론을 주창하는 유리(唯理)주의적인 무아타질라파, 자유의지론을 반대하고 정통을 고수하는 보수주의적인 아슈리야파 등 4파가 있다.

    이슬람 신학의 이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슬람 신비주의(아랍어로 타솨우프, 서양어로 수피즘)다. ‘수프’는 아랍어로 ‘양털’이란 뜻인데, 초심자들이 거칠게 짠 양털 옷을 입고 금욕생활을 하는 데서 ‘타솨우프’나 ‘수피’란 말이 유래되었다. 물론 수피즘은 종교사회운동의 색채가 농후하기는 하나, 거기에는 이슬람 신학을 확대 심화시킨 이론과 사상이 있어 신학의 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수피사상은 한마디로 인간이 신비의 체험을 통해 ‘신과의 합일’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너무나 막연하고 경외심만을 강조하는 전통 신관(神觀)에서 벗어나 신과 좀더 가까이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신과 함께하는 영원으로 가려는 욕망을 반영해 8세기경부터 나타난 것이 바로 수피즘이다.

    수피들은 신비의 체험을 하면서 길고도 험난한 길(톼리까)을 걸어가는 자신을 순례자라고 자부하는데, 그 길은 하나하나의 상승단계(마깜)로 이어져 끝내는 ‘자기소멸(파나)’, 즉 ‘신과의 합일’의 최종단계에 다다른다. 상승단계에 대한 견해는 학자마다 좀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회개와 참회, 단념과 포기, 금욕 절제, 청빈, 인내,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신탁, 신비적 직관인 영지(靈智), 오직 신만을 애모하는 사랑, 만족, 자기소멸 등으로 보고 있다. 단계마다 신의 은총에서 오는 신비로운 영적 심리상태(할)를 체험하게 된다. 수피즘에서 ‘신과의 합일’에 의한 자기소멸은 결코 ‘무(無)’로의 종말이 아니라 동시에 영존(永存, 바까)인 것이다.

    이렇게 독특한 신관을 가지고 출현한 수피즘은 12세기에 이르러 가잘리(~1111)에 의해 정통 쑨니파 신학에 접목되고, 이븐 아라비(1165~ 1240)에 의해 이론적으로 체계화되면서 도처에 종단이 결성되어 활발한 종교사회운동으로 승화되었다. 그후 루미(1207~73)에 의해 수피즘은 가일층 발전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슬람의 신학과 사회운동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슬람 철학(팔사파)은 사상 최대의 현자라고 한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의 형이상학적 관념철학을 체계화하여 그 진수를 부활시켰을 뿐만 아니라 논리학, 영혼불멸론, 종교와 철학의 관계 등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그리고 그것이 유럽의 성당이나 수도원의 부속학교인 스콜라에서 추구하는 신학적 철학체계인 스콜라 철학으로 전환되었다. 그리하여 이른바 무슬림-아리스토텔레스파라는 특유의 이슬람 철학이 생겼다.

    이슬람 철학은 철학 외에도 논리학이나 심리학, 수학, 천문학, 심지어 음악이론에도 박식하여 2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캔디(~873)가 기초를 마련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자연학’ 등을 주석하여 제2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리운 팔라비(870~950)가 가일층 발전시켰다. 그러다가 그들의 뒤를 이어 철학의 기본개념들을 정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총정리한 이븐 시나(Avicenna, 980~1031)에 의해 체계가 갖추어지기 시작했으며, 마지막으로 계시된 교의(敎義) 외에도 모든 것이 이성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한 합리주의자 이븐 루쉬드(아베로스, 1126~98)가 그 체계를 집대성했다.

    이들에 의해 정립되고 체계가 잡힌 이슬람 철학을 통관하면, 비록 신관을 비롯한 이슬람 신학의 제약에서 완전히 탈피한 것은 아니나, 그리스-로마 철학과 기타 동양사상의 영향을 직접 받음으로써 급기야 경험지식을 중시하고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며 자연철학과 논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심지어 범신론적 및 유물론적 경향까지 보였다.

    이슬람 철학을 최종 집대성한 루쉬드는 물질과 운동의 영원성을 논증하고, 개인의 영혼불멸과 사후부활을 부인하면서 철학과 과학의 진리가 종교의 진리와 병존한다는 이른바 ‘2중진리설’을 제창했다. 12세기 이후 이슬람 철학사상을 담은 논저들이 속속 유럽어로 번역되어 소개됨으로써 유럽인들로 하여금 망각· 단절했던 고전 그리스-로마 철학을 복원 계승하고, 중세 유럽 철학의 기틀을 마련하도록 했다.

    인문 사회학 분야의 여러가지 내용을 포괄한 이슬람 역사학(아크바르)은 무함마드와 그 제자들의 생애나 영웅담을 기술한 일종의 ‘성훈학(하디스)’ 분과로 출범하여 점차 편년체(編年體)나 기전체(紀傳體), 기사체(記事體)의 체계를 갖춘 독립 학문으로 발전했다. 이슬람 사학사상 첫 역사서는 이스하끄(~768)가 무함마드의 평생 활동을 집약한 ‘선지자 약전’이다. 이어 9세기에는 초기 이슬람군의 몇 차례 전투와 대외 원정사를 기록한 무공기(武功記)들과 첫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로 이슬람 출현 후 100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바라줄리(~892)의 ‘귀족가계보’가 나왔다.

    대부분의 무슬림 역사가들은 각지를 편력하면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하여 편년체나 기사체 같은 진일보한 서술체계로 방대한 역사서를 찬술했다. 대표적인 편년체 역사가로 퇴브리(838~923)를 들 수 있다. 경전 주석가로도 저명한 그는 역작 ‘역대 선지자와 제왕의 역사’에서 창세기로부터 915년까지의 기간에 전개된 아랍-이슬람 역사를 편년체로 자세히 기술했다. 후일 역시 유명한 편년체 역사가인 이븐 아시르(1196~1234)도 선행한 톼브리의 저서 내용을 집약·녹취한 데 기초해 1231년까지의 역사를 ‘역사대전(歷史大全)’이란 책에 묶었다.

    중세 이슬람 역사학의 태두인 마스오디(~957)는 기사체로 장장 30권에 달하는 세계역사 전서 ‘황금초원과 보석광’을 저술했다. 역사학자로서의 마스오디의 면모는 중세 무슬림 역사가들이 진행한 학문활동의 축도(縮圖)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슬람제국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출생하여 청년시절에 지리학과 여행에 각별한 흥미를 가지고 대부분의 청·장년기를 여행으로 보냈다.

    그는 바그다드를 떠나 페르시아만을 경유해 인도 각지를 돌아본 다음 중국 남해안까지 와서 여러가지 풍물을 목격했다. 귀로에는 인도양을 횡단해 동아프리카의 잔지바르와 마다가스카르까지 남하했다가 다시 북상하여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오만을 거쳐 수년 후에 바그다드로 귀향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여정에 올라 카스피해 남안과 소아시아 지방을 차례로 방문하고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지나 이집트에 이르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마스오디는 평생을 통해 수많은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수집한 자료와 선학들의 저서들을 참조하여 이 희유의 세계역사 전서를 펴냈다. 이 노작은 역사와 지리, 인간생활과 과학, 견문과 신화 등 다양한 소재로 엮어졌고, 이 방면에 관한 폭넓은 지식이 수록되어 있으며, 연구방법론에서도 사실주의를 강조하여 근거없는 억측이나 절취를 극력 배제함으로써 최대한 사실적 접근을 기했다. 그는 이밖에도 ‘경고와 감독’ ‘아랍 및 이민족사’ ‘종교근원설’ ‘시대견문’ 등 다수의 저작을 남겼다.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이 멸망(1258)한 후 이슬람 세계가 분열하던 역사적 격동기에 활동한 세계적 역사가로 이븐 칼둔(1332~1406)이 있다. 튀니지에서 태어난 그는 청·장년 시절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의 그레나다에서 왕족들의 가정교사를 하다가 정치적 불안 때문에 이집트에 이주하여 아즈하르 대학교수와 말리크 법학파의 재판관, 재상 등을 역임하고 나서 만년에는 다마스커스에서 보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아랍과 페르시아, 베르베르의 역사를 서술한 3부작 ‘교훈의 서(이브라)’를 지었다. 그 중 서론과 제1부를 ‘서설(序說, 무깟디마)’이라고 하는데, 이 책은 최초의 문명비판서이자 역사철학서, 그리고 사회학서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이븐 칼둔은 이 책에서 사회현상은 자연조건 등 제반 환경에 의해 규제된다는 사회현상의 변화요인, 개인·계급·민족 간의 역학관계가 역사 발전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회관계와 역사 발전의 상호관계, 그리고 아랍 세계에서는 정주민과 유목민의 교체에 따라 왕조나 문명의 성쇠가 결정된다는 경제생활과 문명 성쇠의 함수관계 등 사회 변화와 역사 발전에 관한 근본문제들을 처음으로 밝혔다.

    그는 역사학의 진가는 사실(史實)들 간의 변증법적 상관관계를 규명하여 역사 발전의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역사의 법칙성을 주장함으로써 역사철학의 비조가 되었다. 아울러 그는 고전 사회학의 개조로서 그의 ‘서설’은 사회학의 제1호 고전으로 읽히고 있다.

    이슬람 역사학을 접하면서 우리에게 특별한 감명을 안겨주는 것은 그 속에 한반도에 관한 기록이 있다는 사실이다. 한 문명권 밖의 이방인으로서 처음으로 한반도(신라)의 존재를 소개한 사람들이 바로 무슬림 역사학자들이다. 그 역사는 자그만치 1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이슬람 역사학의 태두인 마스오디는 신라의 위치와 자연환경에 관해 “중국 다음의 바닷가에는 신라와 그의 섬들을 제외하고는 알려지거나 기술된 왕국이라곤 없다”, “신라는 공기가 맑고 물이 좋으며 토지가 비옥하다”(‘황금초원과 보석광’), “육지의 거주 지역 동단은 중국과 신라국의 맨 끝이다”(‘경고와 감독’)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는 또 역사학자답게 신라의 역사에 관해 몇 가지 주목할 만한 기사를 남겨놓았다. “그들(신라 주민)은 그곳에 정착한 아무르의 자손들이라고 한다”(‘황금초원과 보석광’), “일곱째 인종군은 중국과 신라 및 그와 관련된 주민들인데, 그들은 노아의 아들인 야페트의 아들 아무르의 자손들이다. 그들은 모두 한 임금을 섬기고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경고와 감독’).

    이 글에서 마스오디는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손자인 아무르 일가의 후손이 오늘의 터키 동단에 있는 창세기 속의 아라라트산 일대로부터 동천하여 중국인이나 신라인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라인의 인종적 계보까지도 언급했다. 즉 그는 세계의 인종을 7군(郡)으로 나누면서 신라인을 중국인과 함께 제7군에 소속시켰다.

    이렇게 중국과 신라를 같은 군에 묶어놓으면서 중국과 신라, 그리고 이 두 나라와 관련이 있는 주변 여러 나라들은 언어도 같고 한 사람의 왕을 섬긴다고 했다. 한 가지 더 주목되는 것은 “신라인들은 중국인들이나 중국 왕들과 선물을 주고받는데, 이러한 선물교환은 줄곧 단절되지 않고 있다”(‘경고와 감독’)라고 한 중국(당)과 신라간의 밀접한 교류관계에 대한 언급이다.

    이슬람 학문 중에서 지리학과 그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천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며, 그 성과 또한 괄목할 만하다. 중세 이슬람 지리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첫째로, 종교의식을 위한 필요성이다. 무슬림들의 예배 방향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방향이므로 방향각(方向角)에 대한 지리지식이 있어야 하고, 또 5대 종교의무의 하나인 메카로 성지순례를 해야 하므로 경유지와 여행에 관한 지리지식이 필수였다.

    둘째로, 상술에 능한 무슬림 상인들이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상업과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항해와 육상교통 및 교역지에 관한 지리지식과 정보가 필요했다.

    셋째로, 이슬람의 대정복과 세계적 이슬람제국의 건립에 따르는 통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지역 간의 도정(道程)이나 역체(驛遞) 등 교통수단들을 효과적으로 관리 운영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적절한 지리지식이 요구되었다.

    이상의 요인들은 무슬림 지리학자들로 하여금 세계의 광활한 지역을 종횡무진으로 여행하면서 인류가 아직 알지 못하고 있던 많은 지리지식과 천문지식을 탐구해내도록 했다. 그들은 프톨레마이오스(90~168) 이래 통설이 되어온 지구중심설을 부정하고 지구공전설을 제창했다.

    13세기초 현 이란 북부의 마라카에 천문대를 세우고 유명한 ‘일칸천문표’를 작성한 투시(~1247)는 저서 ‘천문학 입문’에서 전래의 지구중심설을 비판하면서 지구의 공전을 주장하고 지구의 형태와 운동법칙, 지구의 측정법과 지표구분법을 제시했다. 지구의 둘레 측정에서 무슬림 지리학자들은 그리스인들이나 인도인들보다도 훨씬 더 정확한 수치를 계산해냈다.

    무슬림 지리학자들과 천문학자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구형설(球形說)을 받아들여 육지를 ‘주위의 대양’에 둘러싸여 있는 반구(半球), 즉 반을 자른 달걀의 흰자위 속에 있는 노란자위로 보았다. 따라서 육지 전체를 일종의 큰 섬으로 간주했으며, 이 ‘대양’은 육지의 틈 사이에 있는 여러 개의 작은 바다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지구는 완전한 구형이 아니라, 극 부분이 조금 평평하고 적도 부분이 약간 튀어나온 편평타원체(扁平楕圓體)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리스-로마 지리학의 영향을 받아 적도선에 평행하게 일정한 간격으로 선을 그어 육지를 7등분하는 이른바 ‘7지대설(地帶說, 일명 7기후대설)’을 주장했다.

    이슬람 지리학의 백미(白眉)는 지도 제작이다. 고대 그리스 지리학, 특히 프톨레마이오스 지리학의 영향을 받은 무슬림 지리학자들은 9세기 초부터 점과 선, 면 등의 정성적(定性的) 기호에 의해 지형, 행정경계, 도시, 교통로 등을 표시한 일반지도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슬람 지리학의 정초자이자 수학자인 카와리즘은 명저 ‘지구의 형태’(9세기 초) 속에 이미 알려진 지역은 물론이거니와 무슬림들이 새로이 정복한 지역에까지도 경·위도를 정확히 표기한 일반지도를 그렸다.

    지리학자 마끄디시는 자신이 직접 이슬람 세계의 대부분 지역을 역방하는 과정에서 얻은 지리지식과 경험에 기초해 초유의 이슬람 세계지도를 제작했다. 그는 이슬람 세계를 14개 지역(이끌림)으로 나누고 지역마다 대상물을 각기 다른 색깔과 기호로 표시했다. 그가 그린 지도는 거의 원형인데, 적도선을 기준으로 이등분되고 경도는 360도, 적도선과 남북 양극간은 각각 90도로 나눠지고 있으며, 남반부는 대부분이 물로 뒤덮여 있는 반면에 북반부는 주로 건조지대로 되어 있다.

    이븐 하우깔이 저술한 ‘지구상’(地球像)은 초기 무슬림 지리학자들의 전형적인 세계지도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슬람 중심주의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그려진 그의 세계지도의 중심에는 이슬람 성지 메카를 에워싼 아랍국이 배치되어 있고, 남은 위, 북은 아래, 서는 오른쪽, 동은 왼쪽으로 방위가 설정되어 있으며, 육지는 대양으로 몽땅 둘러싸여 있다. 지중해가 서쪽에서, 인도양이 동쪽에서 대륙 깊숙이 뻗어 들어가고 있으며, 동북 방향으로 인도와 티베트, 중국이 순차적으로 위치해 있다.

    지도 제작에서 나타난 이러한 부분적인 착오는 12세기에 이르러서야 시정된다. 중세의 가장 걸출한 무슬림 지리학자인 이드리시(1099~1166)는 전래의 지리지식을 집대성하여 명저 ‘천애 횡단 갈망자의 산책’(1154)을 찬술하고, 그 속에 1장의 세계지도와 70장의 지역도를 첨부했다. 그는 재래의 7기후대설을 좇아 지역도를 그렸는데, 지역마다 서에서 동으로 다시 10등분해 각기 지도 1장씩 제작함으로써 총 70장의 지역도를 완성했다.

    그러나 그의 세계지도는 여전히 남을 위로, 북을 아래로 하는 방위 설정이나, 대양이 육지를 에워싼 점이나, 지중해와 인도양의 접점을 수에즈 해협(홍해를 무시)으로 한 것 등, 전통적인 이슬람 지리학의 오류를 답습했다. 이드리시는 지도뿐만 아니라, 무게 400라틀(1라틀=3.944g)의 은제 지구의(타원형)도 제작했는데, 그 표면에는 7개 기후대 내의 국가와 지역의 이름, 해양, 하천, 지역간의 거리까지도 상세히 음각했다.

    이드리시는 스페인의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시칠리아섬에서 루제르 2세의 궁전학자로서 일생을 지리학 연구에 바쳤다. 16세 때부터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유럽과 아프리카, 아랍제국 그리고 아시아까지 역방하면서 지리 지식의 현지 고증과 지도 제작에 전념했다.

    루제르 2세의 특별칙령에 의해 조직된 전문위원회가 각지에 파견되어 자료수집과 확인·고증을 담당함으로써 이드리시의 저술과 연구활동을 적극 뒷받침했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천애 횡단 갈망자의 산책’은 그 이전까지의 어떤 지리서도 필적할 수 없는 중세 지리학의 진서로서 17세기 초부터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 대학들에서 지리학 교재로 채용되었다.

    지리학과 더불어 천문학 분야에서의 성과도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슬람제국 초기부터 도처에 건립된 천문대를 통해 황도(黃道)의 경사와 세차(歲差)운동, 태양년의 길이가 관측되고, 지구 궤도의 불안전이동설이 제시되었으며 여러 가지 천문정수가 개정되었다.

    무슬림 천문학자들의 저서는 대부분 번역되어 유럽에 소개되었다. 아직까지도 천정(天頂, zenith), 천저(天底, nadir), 반대측(反對側, nazir), 각종 성좌의 별 이름 등 아랍어에 어원을 둔 천문학 용어들이 여러 유럽어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소박한 지리지식을 계승·발전시킨 중세 무슬림 지리학자들은 자신들이 직접 체험한 견문이나 진행한 연구 및 기타 여행가들의 전문을 토대로 하여 지형과 지리적 위치를 비롯해 신라에 관한 지견(知見)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기술했다.

    그들은 신라를 바다로 에워싸인 섬과 산이 많은 나라로 묘사하고, 그 위치는 중국의 동편, 지구의 동쪽 끝에 놓았다. 이것은 중국보다 더 동쪽에 신라가 위치하고 있음을 제시함으로써 육지의 동단(東端)을 중국으로만 보아오던 종래의 지리관을 타파하고 동방에 관한 새로운 지리 지식을 첨가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들의 저서들에는 신라를 이상향적(理想鄕的)으로 묘사한 데가 적지 않다. 그들은 아랍-무슬림들이 신라를 신비의 이상향으로 선망하고 그곳에 정착까지 하게 된 데는 그 아름다운 자연경관이나 풍부한 지하자원과 함께 신라인들의 쾌적한 생활상이나 환경이 또한 주요한 동인(動因)으로 작용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페르시아 출신의 지리학자 까즈위니(1203~83)의 저서 ‘피조물의 기적과 존재물의 기이’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 그 일례를 찾아볼 수 있다.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절호의 나라다. 그곳에서는 공기가 순수하고 물이 맑고 토질이 비옥해서 불구자를 볼 수 없다. 만약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이 풍긴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질병에 걸린 사람이 그곳에 오면 말끔히 치유된다.”

    그러면서 그는 또 “(신라)주민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다”고 찬사를 보낸다.

    지리학자들이 놀라는 것은 신라의 황금이다. 이드리시는 앞 책에서 신라의 황금 성산상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곳(신라)을 방문한 여행자는 누구나 정착하여 다시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 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한 바, 심지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쇠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지리학자 마끄디시도 신라인들은 “가옥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하며 식사 때는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고 했다.

    오늘날까지도 유럽인들에게 무슬림들로부터 받은 가장 큰 혜택이 무엇인가 물으면 으레 의술이라고 대답한다. 무슬림 의학자들은 페르시아나 그리스-로마의 의학서적을 고스란히 번역하고 의술을 받아들여 임상에 도입하는 과정에 새로운 이슬람식 의학을 개발·정립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론 연구와 임상실험에서 얻은 모든 결과는 의학 개설서나 전서(專書)에 빠짐없이 수록되고, 그것이 또한 번역되어 유럽의 의학학교들에서 교과서로 채용되고 임상치료에 직접 도입됨으로써 유럽 현대 의학의 밑거름이 되었다.

    원래 페르시아의 서남부에 위치한 준디 샤푸르(Jundi-Shapur) 의학원과 그 부속 병원은 당대 서아시아 일원에서는 가장 높은 수준의 의술을 갖춘 의학의 전당이었다. 638년 준디 샤푸르가 일차적으로 이슬람 동정군(東征軍)에게 정복되어 그 치하에 들어가자 불모의 이슬람 의학을 개척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의학원은 하리스 븐 가르다란 최초의 무슬림 의사를 배출했으며, 이 의학원 출신인 페르시아계 유대인 의사 마사르자와이흐는 683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의학자 아론(기독교도)이 쓴 ‘의학총론’의 시리아어 역본을 아랍어로 역출했다.

    이 책은 아랍어로 씌어진 최초의 의학전서이며, 고대 그리스 의학계가 알지 못하고 있던 천연두에 관해 처음으로 밝혔다. 마사르자와이흐는 그밖에 ‘약품의 대용’같은 의학서도 저술했다고 한다. 준디 샤푸르 의학원파에 의해 주도된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비로소 이슬람 의학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이슬람 의학은 압바스조 시대 바그다드에 개설된 ‘지혜의 집’(830)에서 그리스 의학서적이 다량 번역되면서부터 발전의 획기적 전기를 맞게 되었다. 이 집의 번역총감인 아랍 의학의 아버지 후나인 빈 이스하끄는 갈레노스의 의학서 거의 전부, 히포크라테스의 ‘금언(金言)’ 오리바시우스의 ‘의학개관’ 디오스고리데스의 ‘약물지(藥物志)’ 등 여러 의학서들을 시리아어나 아랍어로 번역했다. 이스하끄는 번역 외에도 최초의 안과 전문서인 ‘10대 안과론’과 ‘의학의 제 문제’ 등 의학전서도 다수 저술했는데, 이 두 책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알려졌다.

    그리스 의학서적의 번역과 의술의 수용은 이슬람 의학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왔으며, 그 과정에서 탁월한 무슬림 의학자들이 속속 배출되었다. 그 선구자가 바로 사상 가장 위대한 의학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라지(Rhazes, 865~925)다. 그는 의학뿐만 아니라 철학, 천문학, 연금술에도 박학다식하여 총 2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 중 의학서만 무려 117권이나 된다.

    그의 의학서 중 백미는 단연 이론과 임상 경험을 총 망라한 20권의 ‘의학집성’(醫學集成, 자미올 하쉬드)이다. 이 책은 1279년 시칠리아섬에 사는 한 기독교 의사가 라틴어로 번역한 후 부분적으로 간행되어 오다가 4차례의 재간을 거쳐 16세기 초에 완간되었다.

    라지의 ‘천연두와 홍역’은 천연두와 홍역을 의학적으로 정확하게 구분한 최초의 의학 전서로서 라틴어로 번역된 후 여러 유럽어로 중역되어 1860년까지 약 40판이나 증판되었다. 그의 다른 의학전서 ‘만수르의 서’도 라틴어로 번역되어 ‘의학집성’과 함께 유럽 의학교에서 교과서로 채택되어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라지는 그리스 의학의 전통을 계승했지만, 인도 의학의 정수도 받아들여 충분히 활용한 슬기로운 의학자였다.

    이슬람 의학에는 의술 못지않게 인술(仁術)을 강조하는 면도 있다. 파티마조(909~1171)의 어의인 유대 출신의 이스하끄(850~932)는 저서 ‘의사의 길잡이’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비록 자신은 없다고 하더라도 환자에게 치유의 신심을 주는 약속을 잊지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환자의 자연회복력을 북돋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를 문병하여 치료하는 일을 잊지 말 것이다. 왜냐하면 의술보다 고귀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술이 바로 히포크라테스의 ‘금언(金言)’의 정신인 것이다.

    조로아스터교(배화교)로부터 이슬람교로 개종한 페르시아 출신의 의사 압바스(~994)가 찬술한 ‘왕의 서’는 또 하나의 의학백과전서다. 이론과 임상경험을 반반으로 나누어 서술한 이 책에서 저자는 혈액순화 이론을 펴면서 분만과 암에 관해 논하는데, 암에는 특효약이 없으니 애당초 절제수술을 하는 것이 최상의 치료법이라고 못박고 있다. 또한 그는 영양학 부분에서 식이요법을 제창하고 있다.

    질병의 치유력은 인위적인 것보다 자연 그 자체이므로 건강 유지는 치료보다 더 중요하며, 환자는 약물보다 식이요법에 유의해야 한다고 권한다. 이처럼 압바스는 예방의학을 중시했다.

    이들을 이어 혜성같이 나타난 의학자는 탁월한 철학자이기도 한 이븐 시나다. 이슬람 의학서의 권위로 평가 받는 명저 ‘의학전범’(醫學典範, 까눈 핏 툿브, 총 5부, 약 100만 단어)에서 이븐 시나는 병리현상을 심리현상과 결부시켜 면밀히 분석한 데 기초하여 늑막염과 폐염, 간염을 정확히 구별하고, 폐결핵의 전염성, 피부병, 성병, 상사병(相思病), 신경병 등 질환에 대한 임상학적 관찰을 면밀히 진행하고 그 치료법을 제시했다. 상사병에 관해서 그 증상으로는 체중과 체력의 감퇴, 발열 등 만성적 질환이 나타나며, 그 치료법은 사모하는 상대방과 결혼시키는 방법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이븐 시나가 병리현상과 심리현상을 결부시킨 이른바 ‘심신의학(psychosomatic medicine)’법으로 한 왕자를 치료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다. 망상증에 걸린 왕자는 자신을 소라고 믿고 소의 울음소리를 내면서 자기를 잡아먹어 달라고 한다. 그러자 이븐 시나는 도살꾼으로 가장하고 이 왕자가 너무 여위어 앙상하니, 우선 살찌워 놓아야 잡아먹을 수 있다고 했다.

    이에 왕자는 마음껏 먹다보니 병이 어느새 가시고 건강이 회복되었다고 한다. 심신의학법의 효험이다. 그밖에 이븐 시나는 알콜을 소독제로 추천한 최초의 의사이기도 하다. 그의 전서는 저술된 후 얼마 안 있다가(12세기) 라틴어로 번역된 후 15세기 후반 밀라노에서 출간되어 16세기까지 유럽 각지의 의학학교에서 주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약 한 세기 이후 동방 이슬람 세계의 이븐 시나와 비견되는 철학자이자 의학자인 이븐 루쉬드가 서방 이슬람 세계의 안달루스(이슬람 스페인)에서 나타났다. 역시 의학백과전서 격인 주저 ‘의학대전’(醫學大全, 쿨리야트 핏 툿브, 7부)에서 이븐 루쉬드는 눈의 망막작용을 바르게 설명하고, 천연두의 면역성을 처음으로 밝혔다. 이 책은 13세기에 라틴어로 역출된 후 곧바로 유럽의 의학학교에서 중요한 교과서로 채용되었다.

    이슬람 의학계에서는 일찍부터 약초를 비롯한 약물학의 개발에도 주의를 돌렸다. 10세기 중엽부터 그리스의 약물학 서적들을 번역하기 시작한 후 특히 이슬람 세계 특산의 약초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13세기 초 바이다르(~1248)가 ‘약물지’와 ‘약초학’을 펴낸 데 이어 저명한 안과의사이자 약초학자인 아비 오스바(1203~69)가 명저 ‘약초학’을 저술해 이슬람 약물학을 집대성했다. 즉시 라틴어로 번역된 이 책은 15세기 이래 25판이나 증판되었으며, 영국 의과대학의 약국법 제정에서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의학의 발전은 병원의 운영과 상보상조적 관계에 있었다. 이슬람 초기에는 페르시아의 준디 샤푸르 의학원 산하의 병원만이 운영되었으나, 의학이 점차 발전함에 따라 병원의 병설(倂設)은 필수였다. 우마위야조 칼리파 왈리드 1세(705~715 재위) 치세시 나병 환자를 격리 치료하기 위해 병원이 처음 설립되었다.

    그후 압바스조 때인 780년 바그다드에 아두드 병원이 세워진 것을 비롯해 이슬람 세계 도처에 병원이 나타났다. 병원들은 비교적 정연한 운영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의사들은 전문별 시험을 거쳐 채용되고, 병원은 외래 진료동과 병동을 분리했으며, 등록 약제사가 관리하는 약국을 설치하여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이 조제되었다.

    병원은 종교기금(아우까프)의 지원으로 운영되었다. 병원 원장은 담당의사와 조수들을 대동하고 입원 환자들을 회진하고 의사들이나 학생들에게 강의도 한다. 병원에는 대개 의학교와 도서관이 부설되어 있다. 환자들은 등록된 순서에 따라 입원하되, 입원시는 반드시 목욕을 하고 환자옷으로 갈아 입는다.

    이와 같이 이슬람 의학의 특출한 기여는 이론과 임상의 결합, 천연두와 홍역의 병원(病源) 구명과 치료, 혈액순환, 식이요법, 병리와 심리의 결합, 각종 염증의 병원과 전염성 구명, 각종 초약의 제조 등으로 집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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