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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의 書海유람

과학자들이 쓴 베스트셀러

  • 표정훈 < 출판칼럼니스트 >

과학자들이 쓴 베스트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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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중반의 역사학자 이븐 할둔(1332∼95)은 스페인과 북아프리카 지역 아랍 왕조에서 정치가로 활동했고, 은퇴한 뒤 전 7권의 방대한 저서 ‘역사’를 집필했다. 그 ‘역사’의 서론 부분에 해당하는 제1권이 바로 아놀드 토인비가 가장 위대한 역사철학이라고 극찬했던 ‘역사서설’이다.

이븐 할둔에 따르면 문명은 그 구성원들을 하나의 목표 아래 결속시킬 수 있는 집단의식을 통해 발전한다. 그리고 그 집단의식이 붕괴될 때 문명은 쇠퇴한다. 이븐 할둔의 통찰은 어디까지나 아랍 문명권의 역사에 대한 관찰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광대한 유라시아대륙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의 역사에서도 어느 정도 유효하다.

‘바람에 새겨진 역사’를 부제목으로 하는 ‘유목민 이야기’(김종래 지음, 자우출판)는 몽골제국을 중심으로 유목민들의 역사와 문화를 서술한 책이다. “길게는 40년 짧게는 3년”에 걸쳐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는 저자의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수록한 사진 자료도 훌륭하고, 부록의 유목제국사 연표는 활용도가 높으며, 속도감 있는 필치도 특기할 만하다. 여러모로 훌륭한 인문·역사 교양서다.

그런데 저자는 “유목민의 역사를 단지 소개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것들에서 드러나는, 그리고 미래의 인류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하나의 관점, 즉 유목이동문명적 관점을 제시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한다.

저자는 몽골의 칭기즈칸이 시행한 파발마 역참제도를, 인터넷과 더불어 인류 역사상 단 두 번에 걸쳐 나타난 반(反)중앙집중적 정보 전달체제로 평가한다. 또한 칭기즈칸이 자기 체제로 들어온 사람이라면 종교나 인종을 불문하고 차별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타자와 공존할 줄 아는 인간’이 유목적 인간관계의 미덕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현재 우리는 오랜 정착문명 시대에서 벗어나 매우 낯설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 상품과 지식과 정보가 ‘생각의 속도’로 이동하는 시대가 그것. 저자는 시대의 이런저런 징후들을 정주에서 유목으로의 변화로 총괄하여 읽어낸다.

이 책에 시비를 걸면 이렇다. 칭기즈칸의 파발마 역참제도는 그 의도에서 볼 때, 드넓은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지극히 중앙집중 지향적인 정보 전달체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무력으로 정복한 타자를 억압하여 그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시도를, 타자와 공존할 줄 아는 인간이라는 미명으로 일컬을 수 있을까? 몽골인, 색목인, 한인, 남인, 이렇게 사실상의 차별제도를 유지했던 몽골제국이 아니던가?

우리 시대의 여러 새로운 징후들을 ‘유목’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파악하려는 시도는 무척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아날로그적 유목’과 비트의 파도를 타고 네트워크를 주유하는 ‘디지털적 유목’을 유비하려는 시도는, 자칫하면 역사적 상대성을 무시하고 범주 착오나 시대 착오에 빠지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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