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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기자가 만난 사람

“젊은 감각에 영합하지 않겠다”

장인정신으로 똘똘 뭉친 영화감독 임권택

  • 황호택 < 동아일보 논설위원 > hthwang@donga.com

“젊은 감각에 영합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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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감독 세대중에는 식민지와 전쟁 그리고 가난의 혼란 속에서 정규제도권 교육을 받은 사람이 드물다. 이 점에서는 임감독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 분야를 계속 파고들며 연구하고 실험한 현장실력은 정규교육과정의 박사학위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한국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감독의 98번째 작품 ‘취화선(醉畵仙)’이 ‘춘향뎐’에 이어 칸영화제 본선 경쟁부문에 들었다. 5월24일 개막되는 칸영화제에서 ‘취화선’이 상을 받게 되면 임감독의 영예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중흥기를 맞은 한국 영화계의 경사다.

임감독은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해 여러 차례 최다 관객동원 기록을 경신했다. 1990년에는 ‘장군의 아들’로 서울 단성사에서만 68만명을 동원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1993년 ‘서편제’는 전국에서 35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는 예술가로서 대중성과 예술성을 조화롭게 결합하는 드문 행운을 누리고 있다. 국제영화제의 상복도 적지않게 따라주었다. 강수연이 1986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씨받이’로, 1989년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여우주연상을 탔고 1987년에는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신혜수가 ‘아다다’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모두 그의 작품이다. 1993년에는 ‘서편제’가 제 1회 상해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오정해)을 받았다.

‘서편제’는 흥행에는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칸영화제 본선 진출에 실패해 임감독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한국 최초로 칸영화제 본선에 들어선 영화는 ‘춘향뎐’이다. 그러나 흥행에는 참담하게 실패했다. 50억∼60억원(한국영화 평균 제작비)을 들여 찍은 영화가 개봉관에서 일찌감치 간판을 내리면 영세한 제작자는 그야말로 존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고 감독은 죄인이 된 기분에 빠져든다.

언론은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과 정일성 촬영감독, 임감독을 ‘노인 트리오’ 라는 불경스러운 호칭으로 부른다. 노인트리오는 요즘 ‘취화선’ 일로 늘 함께 다닌다. 개봉 전날 시사회에도 극장 입구에 세 사람이 함께 서 있었다. 영화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 세 영화인들의 얼굴에서 대학입시를 치르고 발표를 기다리는 수험생 같은 초조함을 읽을 수 있었다.



태흥영화사는 서울 한남동 단국대학교 후문 근처에 있다. 이태원 사장이 옛날에 살던 집을 개조해 영화사 사무실로 쓰고 있다.

궁합 잘 맞는 ‘노인 트리오’

반백의 스포츠머리를 한 임감독은 기침을 하면서도 줄담배를 피웠다. 임감독은 말이 어눌한 편이다. 대답이 짧고 생각이 잘 안나면 ‘뭐인가’하고 더듬는다.

―이태원 사장은 “두 번씩이나 불러놓고 설마 이번에는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겠지” 하고 기대가 대단하던데요.

“두 번 왔다고 해서 인정으로 주어지는 상이 아니거든요. 작품 자체의 질이 수상을 결정합니다. 상에는 운도 따라요. ‘취화선’ 같은 영화를 좋아하는 성향의 심사위원이 많으면 유리하고 그렇지 않으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칸영화제 본선 진출 및 수상이 그렇게 어려운 겁니까.

“세계에서 알아주는 큰 영화제로 칸, 베니스, 베를린, 모스크바영화제를 꼽습니다. 모스크바영화제는 망했지만. 내 영화는 베니스·모스크바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베를린에서는 상을 못 받았지만 본선 경쟁에 두 번 올랐습니다. 칸은 본선에 들어가기도 힘들지요. 내가 1980년대 초부터 칸영화제에 출품하기 시작해 2000년에야 ‘춘향뎐’으로 본선에 들어갔으니 20년이 걸렸죠. 그렇게 벽이 높은 영화제입니다.”

―남양주에 있는 서울종합촬영소에서 영화미술사상 최초로 21억원을 들여 조선말기 서울거리를 재현했다지요. 영화 찍고는 그 아까운 걸 철거하는 겁니까.

“영화진흥위원회에서 6억원을 지원했습니다. 우리가 영화 찍고 난 다음에는 진흥위원회가 넘겨받아 관람객에게 공개할 계획이죠.”

‘JSA’의 촬영 세트도 거기에 있다. 서울종합영화촬영소는 로스앤젤레스 유니버설스튜디오처럼 유명 영화의 세트를 관광객에게 보여주고 입장료 3000원을 받는다. 주말에는 손님이 몰려들어 꽤 장사가 된다고 한다.

‘취화선’은 조선말기 천재 화가 장승업(1843∼97)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오원(吾園) 장승업은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과 함께 조선시대의 3원(園)으로 불린다. 아무 것에도 얽매이기를 싫어해 궁궐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궁에서 뛰쳐나갔다가 붙잡혀 들어오기 예사였다. 술과 여자를 좋아해 미인이 곁에서 술을 따라야 좋은 그림이 나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김홍도 신윤복에 대한 자료는 풍부하지만 장승업은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마흔 살에 화명(畵名)을 얻어 기행으로 얼룩진 삶을 살다가 쉰둘의 나이에 갑자기 전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소설 작품을 영화로 만드는 경우가 많던데 ‘취화선’은 소재를 어디서 취했습니까.

“기록과 구전을 토대로 도올 김용옥 교수와 내가 함께 시나리오를 썼지요.”

―언제 장승업을 영화화하겠다고 마음 먹었습니까.

“1978년 유신시절에 장승업을 찍어볼까 생각했죠. 왕이 불러서 그림을 그리라고 해도 자기가 싫으면 뛰쳐나가는 용기를 지닌 화가였습니다. 유신정권이 우리의 숨통을 완벽하게 조이던 시대에 자유인의 치열한 삶을 영화로 담아보려는 구상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여의치 않아서 덮어두었다가 이번에 하게 된 거죠.

‘춘향뎐’과 ‘서편제’에서는 판소리를 영상과 만나게 시도했습니다. 소리와 영화를 조화롭게 만나게 해서 판소리를 살려내고 영화로서도 성공시키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취화선’에서는 동양화와 영화가 만났습니다. 줄거리 자체는 장승업이라는 화가의 삶을 다루었지만 영상으로 그린 한국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취화선’에서는 서화, 도예, 판소리, 기악, 의상, 다도 등 한국 예술의 모든 부문이 등장하더군요.

“‘서편제’ 이후 내가 영화를 한다고 하면 도와주려는 쪽이 많아졌어요. 과거에는 외부의 도움 없이 미숙하고 모자란 대로 우리 안에서 해결했어요. ‘서편제’ 이후 문화 전반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영화에 얽히는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기 시작했어요. ‘취화선’에서 그런 참여가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진작 이런 풍토가 돼있었으면 우리 영화가 더 빨리 성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동안 서로 너무 갇혀 살고 있었는데 이제나마 열려서 고마울 뿐입니다.”

―‘춘향뎐’에는 조상현씨의 판소리가 영화 중간중간에 끼어들던데요. 춘향, 향단, 이도령, 방자, 월매가 서양 뮤지컬 영화처럼 각자 판소리를 하는 방식으로 했으면 어땠을까요. 판소리와 연기를 모두 잘하는 배우를 구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조상현씨 판소리가 자주 길게 나오니까 영화의 흐름이 끊기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각자 소리를 하는 창극식으로 해갈 것인가, 아니면 한 사람이 주는 소리의 감동을 일관성 있게 해갈 것인가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나눠서 하면 서양의 오페라하고 다를 게 뭐 있어요. 아마 외국에 나갔을 때 아무도 평가해주지 않았을 거예요. 서양음악의 아류 방식이거든요. 영상이 갖는 효과와 소리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서 영화의 평가가 높아집니다. 판소리의 맛에 빨려 들어오지 못하는 분에게는 아무 감흥이 없을 수도 있지만 그 안에 빨려 들어오면 지루함이나 단절감이 안 생깁니다. 우리의 원형을 추구하려는 모험적 시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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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 동아일보 논설위원 >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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