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이른바 ‘IMF 사태’가 터졌을 때, 한국의 경제학자들이 도매금으로 봉변을 당했다. 도대체 경제학자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했기에 한국 경제가 이 모양이 되었냐, 이 지경이 되도록 왜 방치하고 있었냐는 힐난이 봇물처럼 쏟아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런 비난이 고스란히 정치학자들에게 쏠릴 판이다.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 차라리 정치인들을 몽땅 수입해라, 정치학자라는 사람들은 무엇하고 있는 것이냐….
한국 정치의 새로운 악성 종양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되어 있다. 정치를 들먹이며 업(業)을 유지하는 사람으로서 면목이 없다. 그래서 어떤 모임에서이건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거나 아니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느라 곤욕을 치른다. 그러면서도 내심으로는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한국 정치가 잘못되는 것이 왜 정치학자 책임이냐, 그리고 정치란 워낙 그런 것 아니냐, 오죽하면 ‘민주주의 1번지’라는 영국에서조차 “초면에, 그리고 밥 먹을 때는 정치 이야기하지 마라”는 격언이 생기겠느냐….’

12월 대선에서 맞붙게 될 이회창 후보. 이번 대선이 구태를 벗고 새로운 선거문화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인지 관심거리다
이렇게 마음 편하게 먹고 살아가려는 정치학자의 눈에도 요즘 돌아가는 한국 정치는 정말 심상치 않다. 이러다가는 정치 자체가 완전히 파산선고를 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들 지경이다. 그 옛날 지옥같이 생각되던 군사독재 시절에도 이 정도로 위기의식을 느끼지는 않았다. 세월이 가면 되겠지, 이런 희망이라도 안고 살았다. 요즘은 그런 희망조차 잃어버렸다. 아니 시간 가는 것이 무섭다. 12월의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오는 것이 시한폭탄 초침 돌아가는 소리처럼 들린다.
새삼스럽게 한국 정치가 중병(重病)을 앓고 있다고, 아니 중증의 배냇병을 안고 태어났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진부하다 못해 짜증나게까지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만은 해야겠다. 목하 진행되는 정치상황은 전에 없이 고약한 징후를 보이고 있다. 자칫하다가는 나라 전체를 나락에 빠뜨릴지도 모르겠다.
한국 정치에 새롭게 돌출한 악성 종양, 그것은 바로 ‘묻지 마’ 식 네거티브 캠페인(negative campaign)의 횡행과 만연이다. 말이 좋아 네거티브 운운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협박과 공갈과 거짓말과 몰염치가 선거운동의 알파요 오메가가 되고 있다.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지하의 마키아벨리도 무서워할 정도의 ‘막가파’식 모함과 흑색선전이 공당(公黨)의 일상이 되다시피 하고 있다. 그 결과 유력한 대통령 후보 전원이 회복불능의 내상(內傷)을 입기에 이르렀다.
이제 석 달만 있으면 누군가는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안다. 새 대통령은 만신창이 상태에서 취임선서를 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국정 운영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치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내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한국호(韓國號)가 거대한 빙산을 향해 무한질주하고 있다. 모두가 패자가 되고 마는 정치 게임의 늪에서 헤어날 줄 모르니, 이 일을 대체 어쩌면 좋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