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정치에 새롭게 돌출한 악성 종양, 그것은 바로 ‘묻지 마’ 식 네거티브 캠페인(negative campaign)의 횡행과 만연이다. 말이 좋아 네거티브 운운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협박과 공갈, 거짓말과 몰염치가 선거운동의 알파요 오메가가 되고 있다.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지하의 마키아벨리도 무서워 할 정도의 ‘막가파’식 모함과 흑색선전이 공당(公黨)의 일상이 되다시피 하고 있다.
한국 정치의 새로운 악성 종양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되어 있다. 정치를 들먹이며 업(業)을 유지하는 사람으로서 면목이 없다. 그래서 어떤 모임에서이건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거나 아니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느라 곤욕을 치른다. 그러면서도 내심으로는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한국 정치가 잘못되는 것이 왜 정치학자 책임이냐, 그리고 정치란 워낙 그런 것 아니냐, 오죽하면 ‘민주주의 1번지’라는 영국에서조차 “초면에, 그리고 밥 먹을 때는 정치 이야기하지 마라”는 격언이 생기겠느냐….’
12월 대선에서 맞붙게 될 이회창 후보. 이번 대선이 구태를 벗고 새로운 선거문화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인지 관심거리다
새삼스럽게 한국 정치가 중병(重病)을 앓고 있다고, 아니 중증의 배냇병을 안고 태어났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진부하다 못해 짜증나게까지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만은 해야겠다. 목하 진행되는 정치상황은 전에 없이 고약한 징후를 보이고 있다. 자칫하다가는 나라 전체를 나락에 빠뜨릴지도 모르겠다.
한국 정치에 새롭게 돌출한 악성 종양, 그것은 바로 ‘묻지 마’ 식 네거티브 캠페인(negative campaign)의 횡행과 만연이다. 말이 좋아 네거티브 운운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협박과 공갈과 거짓말과 몰염치가 선거운동의 알파요 오메가가 되고 있다.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지하의 마키아벨리도 무서워할 정도의 ‘막가파’식 모함과 흑색선전이 공당(公黨)의 일상이 되다시피 하고 있다. 그 결과 유력한 대통령 후보 전원이 회복불능의 내상(內傷)을 입기에 이르렀다.
이제 석 달만 있으면 누군가는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안다. 새 대통령은 만신창이 상태에서 취임선서를 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국정 운영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치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내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한국호(韓國號)가 거대한 빙산을 향해 무한질주하고 있다. 모두가 패자가 되고 마는 정치 게임의 늪에서 헤어날 줄 모르니, 이 일을 대체 어쩌면 좋을 것인가.
대통령 선거를 불과 3개월 정도밖에 안 남겨두었지만, 올해만큼 민심이 어수선한 경우는 전례가 없다. 이렇게 냉담할 수가 없다. ‘노풍(盧風)’인지 뭔지 정신없이 치솟았다가 이렇게 대책없이 곤두박질치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나라를 맡겨도 될지 어떨지 검증도 해보지 않은 무소속 국회의원 한 사람의 동향에 온 정치판이 요동치는 것에 대해서는 더 할 말도 없다. 이 와중에 제1당의 대통령후보는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병풍(兵風)’의 향방에 숨을 죽이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대통령후보로 누가 나설지조차 확언할 수가 없다. 신생 독립국도 아니고, 명색이 선진국 대열을 넘본다는 나라인데 국가 체면도 말이 아니다.
그러나 정작 더 심각한 것은 따로 있다. 이념과 정강을 앞세워 유권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야 마땅할 대통령선거가 상대방에 대한 음해와 흠집내기로 일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국민으로부터 인기 끌기가 승리의 관건이라면 어느 정도 상대 후보에 대한 비판과 공격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 나름이다. 아무리 정치판이라 하지만, 상식과 불문율은 지켜져야 한다. 지나간 세월 동안, 한국 정치는 이 정도의 염치는 유지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다 사라지고 말았다. 흉년이 심하다고 종자까지 꺼내 먹을 수는 없는 법이다. 작금의 한국 정치인들에게는 그 정도의 양식(良識)과 금도(襟度)를 기대할 수가 없다.
슘페터(Schumpeter)가 말했듯이, 민주주의란 유권자의 마음을 사는 사람이 정권을 잡는 정치제도다. 그것은 마치 장사하는 사람이 소비자에게 요령껏 물건을 팔 수 있어야 돈을 버는 것과 같은 논리다. 그래서 우스갯소리지만,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사막지대의 사람에게 난방기를 구입하도록 설득할 수 있어야 유능한 영업사원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도덕성을 결여한 상술은 오래갈 수가 없다. 이글루 안에서 냉장고가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은 한두 번의 경험만으로 단번에 알 수 있다. 시장은 그런 얄팍한 장사꾼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생산자도 살고 소비자도 유익을 얻는 상도(商道)가 중요한 것이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도 크게 보면 세일즈맨이다. 유권자에게 자신의 정치적 상품을 팔아서 표를 얻고자 한다. 나라살림을 이렇게 바꾸겠다, 나를 뽑아주면 당신들에게 이런 혜택이 돌아간다, 그러니 (좋은 상품인) 나를 선택하라, 이것이 정치세일즈맨인 정치인이 할 일이요, 선거전술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의 포지티브 캠페인이 민주정치를 살찌우는 영양제임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정치판의 공정거래위원회는 없는가
무릇 물건을 파는 사람은 자신의 제품이 성능면에서 어떻게 우수하고 가격면에서 어떻게 유리한가에 대해 집중 선전해야 한다. 그것이 상식이다. 다른 제품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은 뒤, 자기 물건을 사라고 한다면 세일즈맨으로서 자격이 없다. 그런 광고를 하면 공정거래위원회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 건전한 상거래질서를 해치기 때문이다. 그에 앞서 소비자가 용납하지 않는다. 공정거래위원회와 소비자가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시장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러이러한 비전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나에게 국정을 맡겨달라고 호소해야 한다. 만일 상대 후보가 이러저러한 약점이 있으니 나를 뽑아달라고 한다면, 정치인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정치에서 공정거래위원회 역할을 해줄 공의로운 기관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눈을 부릅뜬 유권자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한국 정치를 파탄의 수렁으로 내모는 중요한 변수들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하자.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네거티브 캠페인도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남을 욕해서 그 반대급부를 얻고 싶은 생각이 왜 안 들겠는가. 그러나 그것도 일정한 한계를 지녀야 한다. 정도가 지나치면 사람이 추해진다. 자신만 추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혼탁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라 기강이 제대로 잡혀있는 곳에서는 부끄러워서, 아니 실속이 없어서라도 네거티브 캠페인이 발을 못 붙인다. 하더라도 양념 정도이지, 그것을 주식으로 삼지는 않는다.
이 글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상식이 한국 정치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 거론되는 대통령후보라든지 각 정당이 어떤 종류의 포지티브 공약을 내놓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 대신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 공격이 선거전의 본체가 되고 있다. 자연 사람들이 치사하고 옹졸해질 수밖에 없는데, 어린아이들을 포함해서 국민 전체가 그런 오물을 함께 뒤집어쓰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도 이것까지는 참을 수 있다.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막연한 개연성에 입각해서 소설 쓰듯 작문을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없는 말을 지어내기까지 한다는 점이다. 이런 작태를 네거티브 캠페인이라는 말로 포장을 하면 그 말의 본 뜻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네거티브 캠페인이란, 점잖은 처지에서는 할 일이 아니지만 (상황이 급하다보니 할 수 없이), 상대방의 약점을 드러내보이는 선거전술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선거전술 치고는 하지하(下之下)에 속하는 것이 네거티브 캠페인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 정치판에서는 이 정도가 아니다.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은 기본이요, 거짓말까지 만들어내서 유포시킨다. 그 어느 조직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의 반도덕적, 반인륜적 음해가 정치인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정치란 무릇 세상을 바르게 한다(政者正也)는 그 포부가 무색할 지경이다. 이것을 네거티브 캠페인이라는 말로 규정하면 그 본질이 변질된다.
노무현 후보의 인기가 상종가를 칠 때, 시중에는 여러 소문이 나돌았다. 호사가들이 재미있으라고 지어낸 말도 있지만, 그 파장의 심각함을 볼 때 의도적으로 지어낸 것이라는 의심을 사기에 족한 것도 없지 않았다. 당시 노후보와 정치적 자웅을 겨루던 진영의 일각에서는 ‘하루 이틀만 지나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호언성 예언을 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예고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 진실도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불발탄의 당사자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다. 물론 그것에 대해 책임을 묻는 사람도 없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지만, 여당의 어느 국회의원은 이회창 후보의 ‘병역 비리’를 명확히 밝힐 물증이 확보되었다고 기자회견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그 결정적 증거를 이 시간까지 제출하지 않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국회의원이 그런 짓을 했다. 그는 거짓말을 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어느 경우이든 그 국회의원은 책임을 져야 마땅했다. 그는 지금도 건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유권자의 지지를 호소할지 모르겠다.
창피하지만, 이것이 우리 정치의 현실이다. 화급을 다투는 전쟁터에서도 적장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차릴 줄 알던 선조들의 그 넉넉한 아량과 염치는 눈을 씻고 살펴보아도 없다. 상대방을 거꾸러뜨려야 내가 산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여유도, 필요도 없다는 살기만 번뜩일 뿐이다.
우리는 기억한다. 한국 정치가 얼마나 모략과 모함의 모리배 놀음에 취약한지를. 재미를 보니까 흑색선전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안다면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정치꾼들은 치졸한 인신공격과 근거 없는 욕설의 위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국민이 어리숙하고 언론이 물에 물탄 듯하다는 사실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진실을 밝혀내서 억울한 피해자를 구제해줄 사정기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정치기류에 민감한지도 훤하게 꿰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무차별 흑색선전을 거듭한다.
뿐만 아니다. 개중에는 진실이 아님이 입증되는 경우도 없지 않은데, 이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기는커녕 ‘아니면 말고’ 식이다. 이런 선거전술이 몰고 올 도덕적 파탄에 대해 걱정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박하다. 당장 국정이 휘청거릴 것이기 때문이다.
승자도 패자도 모두 상처 입는 선거
이런 싸움을 펼치고 나니, 승자도 패자도 모두가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된 사람은 온 국민 앞에서 고개를 들기도 어려울 것이다. 사실이 아니니 믿어달라고 하더라도 그럴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패자 역시 그런 흑색선전 때문에 졌다고 생각할 터이니, 온전히 협조할 마음이 생길 수가 없다. 마음속으로 패배를 승복할 수 없으니 투쟁밖에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올 12월 대통령 선거 이후 전개될 우리나라의 정치 기상도다. 이미 우리 국민은 21세기의 서장을 지리멸렬한 기분으로 보내고 있다. 3김 시대가 비로소 끝나게 되었으나 자칫하면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나오기 십상이다. 우리 국민은 지난 월드컵에서 스스로 깜짝 놀랄 정도의 저력을 온 세계에 유감없이 과시했다. 이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수백만명이 거리로 몰려와서 대한민국을 외쳤고, 그 열기가 ‘광란’으로 이어지지 않을 정도의 자제력도 선보였다. 잘만 꿰면 보배가 될 구슬을 우리는 잔뜩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가 그것을 가로막고 있다.
박정희 유신독재와 전두환 강권통치를 경험하면서 우리 국민은 대통령 직선제로 압축되는 ‘한국적 민주화’에 대해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일까. 어쨌건 민선 대통령인 노태우 정권이 집권 중반을 넘기면서 ‘이게 아닌데…’하는 우려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 당시에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권위주의 체제를 불식하고 민주주의의 공고화로 이행하기 위한 과도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비로소 처음으로 우리 국민은 ‘레임덕’이라는 말을 접하기 시작했다. 장기 집권에 익숙해 있던 국민들이라, 그런 대가에 대해서도 즐겨 지불할 마음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정권 교체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가는 전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에 들어서서 국민들은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권력욕의 화신(化身)’이라는 비판을 듣던 김영삼대통령은 레임덕을 대단히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내 사전에는 레임덕이란 없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다. 빠져나가는 권력을 무리하게 붙들려 하다 그만 남아있는 것마저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1997년의 악몽을 잊지 못한다. 실질적으로 대통령이 유고(有故)상태에 빠지면서 다시 되뇌기도 싫은 국가적 위기를 맞고 말았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무사히 그의 임기가 끝나기만 기다리는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노태우 정권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오랜 정치적 경륜과 단단한 정치적 기반을 겸비한 두 김씨가 그토록 허망하게 몰락한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대통령 단임제의 병폐를 지적하면서 4년 중임제 개헌 등의 논의가 나오는 것도 전적으로 정치적 복안의 산물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나름대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레임덕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원인과 처방에 대해 논의할 생각은 더구나 없다. 단 한가지, 올해 12월 새로 등장할 대통령 또는 앞으로 줄줄이 탄생할 우리의 대통령이 이 레임덕이라는 유령의 덫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대통령의 임기 후반 들어 레임덕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이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집권 초기부터 대통령이 힘을 잃고 권위를 상실한다면,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지금 국민 사이에서 거론되는 대통령후보들은 두 김씨에 비교하면 장점도 있지만, 취약점도 두드러진다. 따라서 취임 초기에 ‘산천도 떨 정도로’ 국정을 확실히 장악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어느 유력 후보 스스로 ‘한 1년 버티면 성공’이라고 말할 정도다.
뒷부분에서도 밝히겠지만, 대통령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를 하자면 어느 정도의 혼란과 무질서는 불가피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대통령의 권위는 지켜져야 한다. 노(老) 대통령의 건강까지도 가십거리로 삼거나 정치적 계산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면, 이것은 나라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이 글이 문제 삼는 것은, 가뜩이나 취약한 대통령후보들이 장기간 진행되는 일련의 ‘청문회’ 과정을 통해 정치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재기불능의 공격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라. (사실 여부가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아들을 고의로 군대 보내지 않은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서야 나라 영이 서겠는가. (실체적 진실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빨갱이 집안’의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다면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흑색선전이 왜 난무하는가?
우리 정치가 이 모양으로 전락하게 된 것은 당연히 정치인들의 탓이 크다. 사람이 모여서 정치를 하는 것인데, 그 사람들이 변변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의인(義人)이 50명만, 아니 10명만 있어도’하며 부르짖던 아브라함 신세가 되고 있다. 의인까지 갈 것도 없다. 과거 정치인들이 그랬듯이, 낮에는 싸우다가 밤에는 술잔을 나눌 줄 아는 그런 평범한 낭만이라도 남아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죽기 살기 식으로 정치를 난장으로 몰고가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이것저것 바랄 것 없이, 지금 정치하는 사람들이 최소한 ‘영리한 이기주의자’만 되더라도 우리 정치가 한결 예측 가능해질 것이다. 비록 도의고 염치고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자기 보신(保身) 하나만은 진정 걱정할 수 있을 정도의 판단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모두 공멸할 수밖에 없는 그런 비열한 싸움을 계속할 리가 없는 것이다. 의인을 찾는 것도, 낭만을 부르는 것도, 이기적 타산능력을 기대하는 것도 다 부질없는 일이 되고 있다. 그러니 정치인들에 대한 논의는 아예 접어두기로 하자.
● 승자 독식, 권력 집중이 문제
정치가 이렇게 생사를 건 싸움으로, 그래서 꿩 잡는 게 매라고, 음해든, 모략이든, 이기고 보자는 식으로 치닫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정권 쟁취를 통해 얻을 것이 너무 많다는 엄연한 현실 때문이다. 과정이야 어찌 되든, 일단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고 집권당이 되고 나면 세상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달라지고 만다.
홍명희의 ‘임꺽정’에 보면 신분을 숨기고 비루먹다시피 하던 어느 양반 이야기가 나온다. 권세가 바뀌고 나서 이 양반이 고을 원님을 찾아가서 신분을 밝히고 나니 그 순간 당장 먹는 음식부터 휘황찬란해지는데, 그 변화라는 것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집권자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더구나 일단 이기고 나면, 그 시점부터는 역사에 대한 평가, 즉 자신의 크고 작은 잘못에 대한 재단권(裁斷權)까지도 수중에 들어오는 것이 관례 아닌가. 그러니 ‘성공하면 영웅이요, 실패하면 역적’이라는 신념으로 이 해볼 만한 싸움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승자가 모든 권력을 독식하는 현 정치제도는 근본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대통령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고, 제도보다는 인치(人治)가 호령하는 정치문화가 지양되지 않는 한, ‘이문이 남는 장사’에 사활을 걸고 싶은 유혹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 정권 교체 경험 미흡
로버트 달(Robert Dahl)이라는 정치학자는 영국에서 민주주의가 안착(安着)할 수 있었던 비결을 ‘패자의 신변 보호’에서 찾는다. 그는 민주주의라는 말을 잘 안 쓴다. 너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현실 속에서 우리가 추구해도 좋을 정치의 최고치를 정치 엘리트 상호간의 자유경쟁과 대중의 정치 참여 확대가 상당한 정도 이루어진 상태라고 정의한다.
그는 엘리트들 사이에서 자유로운 정치 경쟁이 제도적으로 확립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고 본다. 대중의 정치 참여 확대는 그 다음에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엘리트간의 자유 경쟁이란 어떻게 진행되는가? 그 조건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패자가 승복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패자가 후환(後患)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사후가 보장되어야 한다. 달은 이를 ‘상호안전보장 장치(mutual security)’라고 부른다. 이런 장치가 있으면 정당한 경쟁을 통한 패배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차기를 기약하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치 보복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 게임에서 지고 나면 밝은 태양을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그 누구라도 사생결단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중상모략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도(無道)한 짓도 서슴지 않을지 모른다.
우리 정치사가 바로 그렇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김영삼씨만 해도 새 정권 아래에서 얼마나 전전긍긍했던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수 없지만, 지금 한나라당과 민주당 공히 이런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전면전을 감행할 수밖에 없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허리 아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따위의 불문율이나 신사도를 생각할 여지도 없는 것이다.
권세를 잡았다고 정적(政敵)을 탄압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도 간단한 일만은 아니다. 앞선 정권에서 명백한 비리를 저지른 것이 포착되었음에도 눈감고 지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중남미 어느 나라처럼, 집권기간 동안 어떤 부정을 저지르든 모른 척하고, 그 대신 내 차례가 되면 또 그만큼 해먹겠다는 밀약이 재현되지 않는 한,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더 이상 논의를 확대시키지 말자. 어쨌든 현 한국 정치에서 ‘상호안전 보장’이 확립되지 않은 것이 정치를 이토록 혼탁하게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 불신 풍조 만연, 비판적 이성 결여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 정치인들은 본능적으로 어떻게 하면 표를 얻을 수 있을지 안다. 세일즈맨은 손해 보는 장사를 안하려 한다. 마찬가지로 정치인들도 비신사적인 언동을 하고 비열한 흑색선전을 했다가는 오히려 표를 잃는다는 두려움이 있으면 그런 선거전술을 채택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인들은 잘 안다. 오히려 무차별적 네거티브 캠페인이 효과를 본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그러니 이것을 아무리 도덕적으로 훈계한들 막을 길이 없다.
왜 그런가? 왜 이다지도 무지막지한 흑색선전이 통용되는가? 첫째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구체적인 물증도 없고,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도 작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미심쩍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총리 청문회에서 확인된 바지만, 우리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보여주는 도덕 수준이란 믿을 것이 못된다. 모두가 썩었다는 자조적 생각이 확산되다보니, 막연한 개연성에 입각한 인신 공격에 대해서도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만 탓할 일은 아니다. 우리 국민이 냉철한 사리분별력만 가지고 있으면 대다수의 ‘카더라 통신’은 발을 붙이기가 어렵다. 오히려 그런 식의 비도덕적 흠집내기를 시도하는 세력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모한 나라의 국민이 말도 안되는 선정적 보도에 대해 차가운 비웃음을 던지는 사례를 여러 차례 목격했다. 2000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선심성 공약을 했다 오히려 손해를 본 후보도 기억한다. 이런 정치 의식이 우리에게 부족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결론 부분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자.
● 흑색선전에 대한 처벌 불가능
근거 없는 모함을 하다가는 낭패를 본다면 아무리 무모한 정치꾼이라 하더라도 쉽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비겁하게 남을 모함하다가 오히려 일을 그르친다는 것을 깨우친다면 아예 그런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유권자의 판단력 못지않게 특정 사안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고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에게 책임을 묻는 일이다.
우선은 여론을 통해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 판정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어차피 민심을 얻기 위해 그런 모함도 하는 것인데, 대다수 국민이 제기된 의혹에 대해 입장을 분명하게 정리하고, 그에 따라 승부가 판가름난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흑색선전을 기도하는 그 어느 쪽도 책임을 져본 적이 없다. 그러니 마음놓고 거짓말을 하고 터무니없는 협박을 늘어놓는 것이다. 당하는 쪽도 달리 길이 없으니 또 다른 음해로 맞불을 놓을 수밖에 없다. 야바위 정치의 확대 재생산, 이것이 우리 정치의 슬픈 단면이다.
결국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사정기관이 뒷짐을 지고 나아가 아예 그런 진흙싸움의 조연으로 등장하니 이런 악습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길이 있기나 한가?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나면 결론은 명백해진다. 너무 뻔한 답이 되다보니 맥이 빠진다. 그리고 그런 대책의 실현가능성에 대해 자신도 없다. 그러나 달리 길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앞서 소개했던 슘페터는 민주주의에 대해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대중의 능력에 대해 불신을 감추지 않았다. 부도덕한 세일즈맨처럼, 엉터리 정치인들이 거짓말을 하고 나라 살림을 망치려들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판단할 능력을 구비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에스키모가 냉장고를 사려 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선택이다. 광고에 현혹되어 불필요한 냉장고를 사면서도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좋아한다면 장사꾼의 ‘조작된 의지’에 넘어간 것이다. 지금 한국의 정상배들은 음해와 중상으로 유권자들의 표심(票心)을 조작하려 하고 있다. 유권자들이 깨어있는 의식으로 그런 책동을 중단시켜야만 한국 정치가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시민들이 더욱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사안을 판단해야 한다. 근거 없는 모함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정정당당하게 정책 싸움을 펼치는 정치인에게 분명히 손을 들어주어야 한다. 네거티브 캠페인으로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믿음을 확실히 심어주어야 한다.
이 일에 언론이 앞장을 서야 한다는 것은 재삼 언급할 가치도 없다. 지금처럼 ‘사실 보도’라는 주문(呪文)을 내세우며 사실상 흑색선전의 확대에 일조를 한다면 한국 정치를 살릴 길이 없다. 어차피 모든 사실을 다 보도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독자에게 알려야 할 내용인지 여부에 대해 가치판단을 피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솔직히 중립 고수라는 미명 아래 선정적 보도가 쥐어주는 떡고물에 관심은 없었는지 반성해야 한다. 동업자라는 비판을 듣지 않으려면 언론부터 제 정신을 차려야 한다. 미우나 고우나, 언론이 한국 정치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쥐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언론의 분발을 간곡히 당부하고 싶다.
사법기관이 제대로 서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서는 더 말할 기력도 없다.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나 말았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바람이다. 그러기는 하나, 우리 정치의 파국을 모면하는 1차적 해법이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한국의 유권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다. 박정희가 그리운가? 히딩크의 카리스마가 그렇게 멋져 보이는가?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단념해야 한다. 선택의 책임, 자유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도, 의지도, 그리고 그런 능력도 없다면, 그리하여 ‘자유에서의 도피’를 꿈꾼다면 민주주의를 포기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정치가 이런 식으로 피폐한 책임을 정치인들에게만 미루어서는 안된다. 바로 우리들 자신이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12월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국민은 나라 살림의 주인으로서 책무를 통감해야 한다.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의 패륜 정치가 횡행하는데도 분기(憤氣)를 탱천(?天)시키지 못한다면 주인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때마침 박정희 신드롬이 불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