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준(鄭夢準) 의원의 도전은 성공할까. 불가능을 모르던 사나이 정주영도 이루지 못한 꿈, 아버지의 도전에 이어 10년 만에 다시 대권등정길에 나선 정몽준. 그를 막아설 무수한 장애물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정주영, 정몽준 부자 이외에 여지껏 2대에 걸쳐 대권도전에 나선 가문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 정주영은 실패했다. “정치인에게 돈 뜯기는 것이 싫어 직접 정치에 나섰다”며 당차게 도전했지만 돌아온 고통은 너무나 컸다. 실패도 여간 큰 실패가 아니었다. 현대그룹 자체가 심각한 위기에 빠질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아버지의 실패를 정몽준 의원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정의원은 1988년 13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울산 동구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아버지가 정계에 발을 디디기 전 먼저 국회에 진출해 척후병 역할을 했고, 대선 때는 아버지 근처에서 선거의 전체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대선의 물꼬를 바꾸기 위해 부산 초원복국집사건(여당의 선거 대책회의)을 폭로하는 등 만만치 않은 역할도 했다.
“정몽준이 가장 쉬운 상대”
하지만 아버지는 패했고 그후 현대그룹은 결정적으로 사운(社運)이 기우는 타격을 입었다. 정몽준 의원이 마지막까지 출마선언을 미루고 쟀던 데는 이런 과거의 경험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등 형제들의 반대도 적지 않은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정의원을 망설이게 했던 이유는 또 있다. 분명한 승리가 담보되지 않은 전쟁터에 나가기엔 그의 몸이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그러던 지난 17일 정의원은 마침내 대권도전 선언을 했다. 월드컵 유치 이후부터 끊이지 않았던 그의 대권도전설이 마침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정몽준 의원은 9월17일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본격적인 대권행보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 못지않게 정의원의 출마선언을 기다려온 사람들이 있다. 정의원과 대권을 놓고 경쟁을 벌여야 하는 여야의 후보들이 그들이다. 경쟁자들이 새로운 경쟁자들을 기다린다고? 앞뒤가 안 맞는 말이지만 현실이 그렇다.
먼저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진영. 이후보 대선기획단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오래 전부터 잠재적 경쟁자들에 대한 분석을 해왔다. 이회창 후보와 일 대 일로 맞 대결이 펼쳐질 경우 상대를 바꿔가며 시뮬레이션을 해봤다. 그 결과 가장 어려운 상대는 이인제(李仁濟) 의원이었다. 달변의 이의원과 TV 정책토론을 벌일 경우 힘겨운 대결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인제 의원과 맞 대결을 벌일 경우 초반에는 우리가 앞서지만 뒤로 갈수록 우리가 어려워지는 형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인제 의원 다음으로 부담스러운 상대가 노무현(盧武鉉) 후보다. TV토론이 벌어지면 노후보의 공격적인 언변에 이후보가 상당히 고전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노후보가 민주당의 후보로 나설 경우, 처음에는 어렵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후보가 유리한 국면으로 선거전이 전개될 것이다.
정몽준 의원이 일 대 일 맞상대로 나온다면 가장 쉬운 선거전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다른 민주당 후보들과 달리 정의원은 이후보가 토론에서도 능히 이길 만한 상대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다른 후보들에 비해 약점도 많다. 정후보는 이런 큰 선거전을 치러본 적이 없다. 자연 약점이 공개되면 제풀에 지쳐 주저앉을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 이후보 입장에서는 어쨌든 가장 쉬운 상대가 정몽준 의원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2파전이든 3파전이든 30% 이상의 고정표가 있는 이후보에게 절대로 유리한 선거가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시간은 우리 편”
노무현 후보 진영도 정몽준 의원의 출마선언을 은근히 기다려왔다. 비서실 한 인사의 전언.
“노무현 후보는 오래 전부터 정몽준 의원이든 누구든 신당에서 만나 한판 대결을 벌이자고 제안해 놓은 상태다. 그러나 정의원은 민주당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당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후보가 표를 얻는 데는 한계가 있다. 과거 선거가 이를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양대 정당이 각각 40%, 30% 이상의 지지율을 얻을 테고 무소속이나 군소후보들이 나머지 표를 나눠 갖지 않겠는가. 그럴 경우 무소속 후보의 당선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정의원도 어떻게든 정당을 기반으로 출마하기 위해 애를 쓸 것이다. 정몽준 의원의 지지율이 급속히 올라간 이유가 뭔가. 새롭다는 것 아닌가. 우리 노후보에게 쏠렸던 관심이 정의원에게 옮겨간 것이다.
현실적으로 정의원이 기댈 수 있는 원내 지지기반은 자민련과 민주당을 탈당한 일부세력이 될 것이다. 그들이 과연 새로운 정치인을 기대하는 국민들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시간은 우리 편이다. 선거전에 돌입하면 젊은층의 지지가 다시 노후보에게 돌아올 것으로 확신한다.”
이회창 노무현 두 후보 진영은 약속이나 한 듯 정몽준 의원이라는 제3 후보의 출현을 반기는 태도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속내는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다. 이미 지난 봄 노풍(盧風)에 혼쭐이 났던 한나라당으로선 정풍(鄭風)의 출현이 예사롭지 않은 게 사실이다.
노무현 후보 진영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까지도 정몽준 의원의 신당추진 움직임에 민주당 의원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노후보 진영도 이런 당내 여론에 힘입어 선대위 구성을 강행하는 등 자신의 의도대로 정치일정을 몰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김원길(金元吉) 박상규(朴尙奎) 김영환(金榮煥) 곽치영(郭治榮) 의원 등 수도권 출신 중도성향의 의원들 중심으로 탈당 움직임이 감지되면서 정국은 다급하게 돌아가고 있다. 만약 이들 중도성향 의원들이 탈당해 정몽준 의원 진영에 합류한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지도 모른다.
탈당 배경이 “노무현 후보로는 안된다”는 정세판단이고 보면 이들의 탈당움직임은 곧 정몽준 의원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행동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들의 탈당명분은 외곽에서 신당을 만들어 노무현 정몽준 의원을 한데 모으는 통합신당을 만들겠다는 것. 그렇다면 ‘정몽준 신당’에 급속도로 탄력이 붙을 가능성이 높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여야를 막론하고 더 이상 정몽준 의원을 가만히 둘 수 없다는 절박한 판단을 한 듯하다. 다급한 쪽은 의외로 노무현 후보 진영이다. 노후보 진영의 한 인사는 “우선 2위 탈환이 시급하다. 정몽준 의원을 꺾어야 본선에서 이회창 후보와 맞설 수 있다. 늦어도 10월 중순까지는 정의원을 따돌리고 2위 자리에 올라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 정의원의 자질을 집중 검증해 나갈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장 네거티브 전략을 사용하지는 않을 예정이다. 후보 비서실 일부 인사들은 적극적으로 정의원의 약점을 공략하자는 의견을 내놓았으나 노후보가 “정의원의 개인적인 신상문제는 거론하지도 말고, 이를 언론을 통해 상업적으로 활용하지도 말라”고 엄명을 내려놓은 상태. 다만 대통령감인가를 묻는 식으로, 즉 자질검증을 통해 정의원 문제에 대처해 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한나라당은 정의원에 대한 공격을 일단 자제하고 지켜볼 계획이다. 후보 비서실의 한 인사는 “지난 8월 초 서청원(徐淸源) 대표가 ‘재벌이 권력마저 잡으려 한다’며 정의원의 대권도전 자체를 비판한 적이 있는데, 일단은 이 정도에서 정의원에 대한 비판을 멈추고 움직임을 지켜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후보 진영이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가장 큰 이유는 여론조사 결과, 정몽준 의원이 이후보보다는 노후보의 지지층을 잠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 정몽준 의원은 연령대로는 30대에서 40대 초반, 지역으로는 호남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얼마 전까지 노풍의 영향권에 있던 지지층이다. 이후보측은 일단은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의원간의 ‘내분’을 느긋하게 지켜본다는 생각이다. 누구든 ‘예선’을 거쳐 올라오면 그때 가서 일합을 겨루겠다는 태도다.
통일축구대회 식전행사장에서 리광조 북한 단장(좌), 박근해 의원과 나란히 선 정의원
하지만 한나라당 역시 본격적인 정몽준 공략에서더라도 정의원 개인의 신상문제는 가급적 거론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한다.
앞서의 인사는 “노풍이 불 때도 당내 보수성향 의원들 사이에서는 노후보 부친의 좌익시비를 거론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이 전술은 채택되지 않았다. 대신 노후보의 국가경영능력에 대한 의문, 즉 실수도 많고 불안하다는 이미지를 집중 공략했고 성과를 거뒀다고 판단한다. 노후보를 불안하게 본 중간층들이 급속히 한나라당 지지로 돌아섰다. 정의원에 대해서도 국가 지도자로서의 자질문제를 집중 거론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태연한 척하지만 여야 모두 정몽준 의원을 비상한 눈으로 관찰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사생활에 대한 공격보다 대통령감으로서의 자질 검증을 하겠다는 점잖은 어휘를 사용하고 있지만 어디까지 이런 ‘신사협정’이 지켜질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여야 정치권의 정몽준 대응은 ‘부담없는 수준’에서 시작될 듯싶다.
하지만 정치권의 움직임과는 별도로 일부 언론사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정의원에 대한 ‘뒷조사’를 시작했다는 후문이다. 출마선언에 맞춰 정의원에 대한 그간의 검증내용을 공개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다. 정당 차원에서는 네거티브 캠페인을 자제하겠다는 신사협정을 내세우고 있지만 정보 수집능력이 있는 일부 의원들을 중심으로 정몽준 의원에 대한 의혹 파일이 준비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정가주변에서 현재 은밀하게 나돌고 있는 정의원 관련 소문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 정의원의 생모와 관련한 소문들이다. 정의원이 정주영 회장의 부인 변중석 여사 소생이 아니라는 소문은 이미 정설로 굳어졌다. 따라서 과연 누가 그의 생모인가가 정가 최대 화제로 떠오른 상태다.
둘째, 대학생활과 관련한 의혹들이다. 정의원의 특이한 대학생활에 대해서는 최근 한 주간신문에 그 내용이 소개됐다. 부정행위를 하다 적발돼 정학처분을 당했고 한 학기 학점을 몽땅 취소당하는 바람에 졸업이 늦어졌다는 보도에 대해 정의원은 “대강 맞는 얘기”라고 인정한 바 있다. 그런데 의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부정행위로 적발돼 한 학기 학점을 모두 취소당하고 정학을 당한 것이 지나치게 가혹한 처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정학을 당하고 학교를 쉰 데는 다른 사연이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떠돌고 있다.
셋째, ROTC복무에 관한 의문이다. 부정행위로 정학까지 당한 학생이 어떻게 ROTC근무를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과정에 주위의 배려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넷째는 존스홉킨스대 박사학위 취득과정에 관한 소문이고 마지막 다섯째는 정의원의 별난 성격에 관한 이런저런 구설들이다.
정의원은 평소 생모에 관한 질문에 대단히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다. 어떤 때는 질문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동안 분을 삭이지 못해 서성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언론의 관심사이긴 하나 개인적으로 그만큼 아픈 과거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정의원은 기자들에게 “때가 되면 밝히겠다”고 말해왔고 지난 15일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엠바고(일정 시점 비보도 조건)를 전제로 자연스럽게 이를 공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 이상 가리고 나가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정의원 진영은 이밖의 다른 질문에 대해서는 여전히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한 측근은 “도대체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리느냐”며 발끈하기도 했다. 정의원 측은 “대부분의 소문들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때가 되면 정의원 스스로 밝히겠지만 근거도 없이 소문을 퍼뜨리는 세력이 있다”고 불만스러워했다.
무엇보다 정의원을 다시 보게 하는 소문은 그의 언행에 관한 구설들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정의원의 이미지는 부드럽고 유연해 보인다. 한마디로 신사다. 틈나는 대로 축구를 즐겨 건강해 보인다는 것도 다른 대선주자들이 갖지 못한 그만의 장점이다.
그러나 항간에 떠도는 소문과 전언을 모아보면 실제 정의원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거리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정의원의 성품에 대한 공개적인 진술은 많지 않다. 정의원과 가까웠다가 지금은 소원한 인사들이 사석에서 흘리는 얘기가 거의 전부여서 일단 그 진실성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의 주장은 대체로 정의원이 “욕심이 많고 조직을 독점하려 한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지난 2월, 한 시사월간지에 눈길을 끄는 기사가 실렸다. “정몽준이 조직위(組織委)에서 손을 떼야 월드컵이 성공한다”는 제목의 인터뷰가 그것. 정의원을 향해 도발적인 공세를 편 주인공은 박세직 전 윌드컵조직위원장이다.
인터뷰의 배경은 이렇다. 지난 연말, 월드컵조직위원회가 내분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월드컵 조 추첨 행사를 전후해 정몽준 이연택 두 조직위원장의 서열을 둘러싸고 다툼이 생겨 한동안 조직위의 내부 기능이 마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정의원이 회장으로 있는 대한축구협회는 공동위원장제에 반대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했고 결국 정부의 중재로 ▲사무총장 중심으로 조직위 운영 ▲공동위원장을 비상근으로 전환 ▲FIFA 부회장, 축구협회장, 조직위원장 순으로 서열을 조정함으로써 내분 사태는 수습됐다.
이런 정부의 중재가 있은 직후 박세직씨가 발끈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정몽준 위원장의 욕심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인터뷰에서 밝힌 박씨의 주장이다.
“(두 조직위원장 간의 서열논쟁 원인은)한마디로 정몽준 위원장의 욕심과 처신 때문이다. 정위원장이 FIFA일이든 축구협회든 조직위든 다 자기가 하겠다는 과욕을 부렸다는 점과, 그로 인해 모두가 애쓰는 월드컵 준비과정에서 ‘화합과 인화’를 깨뜨렸다고만 말하겠다. 본인이 다 알 것이다. 가령 그 사람이 조직위에서 당장 뭐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 너무 바쁘거든. 그런데도 타이틀은 놓지 않겠다 이거다. 그러니 과욕이지.
우리가 그렸던 월드컵 전략, 그리고 거기에 따른 조직위 운영체제대로 굴러갔으면 무슨 서열이니 의전이니 하는 데 따른 갈등이 생길 수 없다. FIFA관련 국제행사라면 FIFA 부회장이 상위이지만 국내에서 월드컵 행사는 준비업무자 겸 조직위원장이 상위 서열에 있는 것이다. 기준이 그렇게 명확한데 문제될 것이 뭐가 있겠나. 그런데 전반적인 준비과정에서 ‘항상 내가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개인 욕심을 내세우고 힘겨루기를 하는 데서 모든 문제가 시작된 것이다.
자기홍보도 좋고 앞에 나서고자 하는 의욕도 좋다. 그렇지만 우선 자기 할일이 분명히 있잖은가. 정위원장과 이위원장의 갈등 문제만해도 그렇다. 가령 조 추첨 행사에서 누가 월드컵을 전달받느냐, 비행기에선 누가 상석에 앉느냐 그런 문제가 있었다고 하는데 상식적으로 그게 어디 갈등이랄 것이 있는가. 설사 정위원장이 공식적으로 자기가 나설 자리라 해도 이(연택)위원장을 선배 대우해서 ‘이위원장께서 앞에 서시라’고 하면 이위원장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그런데 그러지 않고 부득불 내가 위에, 내가 앞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화가 될 리 있겠는가.
정위원장의 직책이 몇 개인가. 10여개가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바쁘다는 국회의원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조직위에서 무슨 회의를 한다고 해도 얼굴 보기가 힘들다. 그러니 조직위 직원들이 결재를 받으려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서열로는 자기가 맨 앞에, 맨 위에 서야 한다 이거다.”
박세직씨의 지적처럼 대한민국에서 정몽준 의원처럼 현직이 많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느 하나 대충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신경을 써야 하는 직위들인데 그는 정치에 입문한 뒤 차곡차곡 현직을 늘려왔고 대부분 유지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정의원의 현직을 살펴보자. 근거 자료는 정의원이 언론사에 배포한 인물정보다.
먼저 정치관련 현직들이다. ▲16대 국회의원(무소속·울산동구) ▲국회 국제경제지원특별위원회 위원 ▲국회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 ▲국회여성특별위원회 위원.
다음은 외교 관련 현직들이다. ▲한·알래스카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 ▲한·중우호협회 상무 ▲국제위기관리그룹(ICG) 이사 ▲ASIA SOCIETY 재단이사.
다음은 축구관련 현직들. ▲대한축구협회 회장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 ▲아시아축구연맹 조정분과 위원장·재정분과 부운영위원 ▲2002년 월드컵조직위원회 위원장.
이어서 교육관련 현직들이다. ▲울산대학교 이사장 ▲현대학원 이사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재단이사 ▲경희대학교 체육과학대학원 객원교수 ▲고려대 경영대 석좌교수.
마지막으로 정의원의 오늘이 있게 한 경제관련 현직들이다. ▲현대중공업 고문 ▲아산재단 이사장.
자기 것에 대한 집착 강해
물론 이들 현직 가운데 시간과 정신을 그다지 빼앗지 않는 자리들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19개의 현직을 맡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정의원의 자리에 대한 남다른 집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의원을 평가할 때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런 평가의 배경에는 유난히 현직감투가 많다는 사실도 몫을 한다. 정의원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정의원에게 현직은 단순히 감투 문제만은 아니다. 대부분 보수가 없는 자리지만 일부 현직에서는 적지 않은 수입이 발생한다. 한달에 대략 3억~5억원의 보수가 들어오는 것으로 아는데 이 돈만으로도 정의원은 다른 정치인들보다는 자금문제에서 한결 자유롭다”고 말했다.
지난 8월말 국회운동장에서 열린 '사진기자체육대회'에서 우연히 만난 정몽준 의원과 이회창 후보
실제 정의원 진영의 요즘 최대 고민도 어느 자리를 버리고 어느 자리를 챙길 것이냐다. 재벌출신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현대중공업과는 당분간 인연을 끊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월드컵이 끝났으니 조직위원장직도 고집할 이유가 없다.
울산대 이사장과 현대학원 이사, 사회복지 비영리법인인 아산재단(아산병원 등) 이사장직은 재산권과 관련 없다는 게 정의원 측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들 단체의 선거개입 논란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직은 사퇴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결국 현직 가운데 상징적인 몇 개 자리만 내놓는 수준에서 마무리될 공산이 크다는 게 주변의 관측이다.
자신의 것에 대한 집착.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에게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품성임에는 틀림없다. 역대정권의 각종 부정부패가 바로 집착에서 비롯되지 않았던가. 자기 것을 놓치기 싫어하는 성격의 소유자가 어떻게 국민의 이익을 우선해서 판단하고 행동할 것인가. 의문이 꼬리를 무는 대목이다.
자기 것에 집착하는 정치지도자는 사람을 모을 수 없다. 김영삼 김대중(金大中) 김종필(金鍾泌)씨 등 세력을 이끌어왔던 정치지도자들의 남다른 ‘미덕’은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밖으로부터 끌어들여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나눠주는 정치로 3김씨는 40년 한국 정치를 주무르지 않았던가.
민주당의 한 초선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정의원 측으로부터 간접적으로 MJ(정몽준)신당에 합류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런데 솔직히 선뜻 나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MJ에게로 가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무언지를 알 수 없었다. 명분을 얻을 수 없다면 ‘실리’라도 있어야 하는데 실리에 대한 구체적 제안도 없었다. 도대체 왜 나한테 관심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다.”
실리란 당연히 돈을 가리키는 말일 터. 일부 정치인들은 갑부인 정의원과 당을 같이하면 적지 않은 이익을 챙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9월11일 언론보도는 MJ신당의 등장을 군침을 흘리며 기대했을 일부 정치인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처분이 아닌 처리”
정의원은 대권 도전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현대중공업 지분 정리가 불가피해지면서 9월 초 기자간담회를 통해 처분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며칠 뒤인 지난 9월10일 보도자료 등을 통해 “처분이 아니라 처리”라고 정정하고 나섰다. 정의원이 지분을 팔고 현대중공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다만 정치인으로서 기업경영에 더 이상 관여할 수 없어 선을 그을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대책을 마련중이라는 게 해명의 줄거리였다.
정의원은 현대중공업 지분 11%(836만주. 시가 1800억원 안팎)를 가진 최대주주다. 현대중공업은 현대미포조선(27.68%)과 현대기업금융(67.49%) 삼호중공업(100%)의 대주주이며, 현대기업금융은 현대기술투자와 현대선물의 대주주로 연결돼 있다. 정의원이 현대중공업그룹의 사실상 오너로 군림해 온 것은 이런 복잡한 지분관계 때문이다.
정의원이 재계 실력자로 성장하게 해준 결정적 배경인 현대중공업 지분의 ‘처리’를 두고 이런저런 관측들이 나왔는데, 정의원은 “명의신탁방식으로 처리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해 주식문제에 대해 자신이 구상중인 해법을 내비쳤다. 즉 결코 현대중공업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밝힌 것이다.
명의신탁이란 주식 등 유가증권을 은행 등의 이름으로 신탁을 해 신탁기간 동안 마음대로 사고팔 수 없고 주주권 행사를 못하게 한 제도. 미국 대통령에게 적용되는 ‘블라인드 트러스트(Blind Trust·백지위임)’ 제도가 그 대표적 사례다. 공직자가 재임중 재산을 공직과 무관한 대리인에게 맡기고, 절대 간섭하지 못하게 한 제도가 발전한 것으로 공직자는 임기가 끝나야 주식을 되찾을 수 있다.
이 제도를 정의원이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나오면서 정치권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갑부인 정의원이 사실상 ‘돈 안드는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야당의 한 인사는 “선거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전쟁 아닌가. 그것도 대통령 선거인데 돈을 쓰지 않겠다며 명의신탁에 맡겨놓은 사람을 따라나설 정치인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실제 정몽준 의원의 재산에서 현대중공업 주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공직자재산등록법에 따라 국회의원들은 매년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에 재산 변동사항을 신고하고 있다. 이는 매년 2월 말 국회 공보를 통해 일반에도 공개되는데 정의원도 1993년 9월7일 첫 재산공개를 한 후로 매년 변동사항을 신고해 왔다. 이를 근거로 정의원의 재산을 추적해 보자.
1993년 재산공개 때 정의원은 799억원의 재산을 신고해 국회의원 중 최대 재력가로 평가받았다. 당시 정의원이 공개한 재산 가운데 651억2000여만원 상당이 주식재산이었다. 그러니까 전체 재산 가운데 81.4%가 현대중공업 등의 주식이었던 것이다.
그후 매년 변동신고를 했는데 정의원의 재산은 수십억원 범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했다. 그러다가 몇 차례 정의원의 재산에 결정적 변화가 발생한다. 2000년 2월28일 공개한 재산변동을 보면 정의원은 현대중공업 보유주식의 가치 증가로 무려 1982억2200만여 원이나 재산이 늘어났다. 현대중공업이 1999년 8월24일 거래소시장에 상장하면서 주식 평가이익이 크게 늘어났던 것이다.
이듬해인 2001년 재산변동신고에서는 그동안 현대중공업의 주가가 하락해 1178억3200만여 원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신고했다. 그리고 올해 재산신고 때는 고(故)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상속받은 현대중공업 주식 등으로 재산이 547억여 원이나 늘어 있었다. 현재 정의원은 현대중공업 지분 11%를 보유한 최대주주로 주식가치만 1800억원에 이르는 재력가인데, 국회윤리위에 신고한 재산이 그의 전재산이라 가정했을 때 거의 90% 이상이 현대중공업의 주식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수천억원대의 재력가지만 재산의 대부분이 현대중공업 주식에 묶여 있는 까닭에 정의원이 만들 신당은 아버지 정주영씨가 만들었던 국민당보다 결코 넉넉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정가의 중론이다.
정의원은 재력가임에도 평소 돈 씀씀이가 헤프지 않은 인물로 유명하다. 어쩌면 아버지가 만든 국민당을 지켜보면서 ‘돈으로 만든 집단은 쉽게 망한다’는 진리를 확인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의원 스스로도 돈쓰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간접적이나마 여러 차례 밝혀왔다. 현역의원 중심의 원내정당을 만들겠다는 구상도 그 중 하나. 정의원이 접촉을 벌여온 의원들의 면면을 봐도 그의 속내를 알 수 있다. 정의원은 민주당의 김근태(金槿泰) 천정배(千正培) 의원, 한나라당의 김문수(金文洙) 의원 등 주로 재야 출신 의원들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여왔다.
이에 대해 정가사람들은 “이들 개혁적이고 능력있는 정치인들을 통해 정의원이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려 한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 선택’에서도 정의원의 ‘돈 안드는 정치’를 향한 신념을 읽을 수 있다. 정의원의 이런 선택이 ‘새로운 정치를 향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격려하고 키워나가야 할 소중한 새싹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많은 정치인들은 그를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으로 보고 있지 않는 분위기다.
앞서의 초선의원은 “정의원이 재산을 명의신탁으로 묶어놓았다가 나중에 그럴 필요가 없을 때 되찾겠다는 말을 들으면서 뭔가 중요한 게 빠져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의(結意)가 없다고나 할까, 대선에 나서 보고 안되면 다시 재산을 찾아 과거의 재벌로 돌아가겠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런 그를 믿고 누가 나서겠는가”라고 말했다.
정의원을 둘러싼 많은 의혹 가운데 가족사나 개인사에 관한 대목은 정의원이 제대로 밝히고 해명한다면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다. 가족사에 관한 한 그가 책임질 일이 별로 없다는 게 대체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들은 자질론과 맞물려 두고두고 그를 괴롭힐 것이다. 벌써부터 정가에는 ‘5불가론’이니 하는 정의원의 자질과 관련한 성어(成語)들이 나돌고 있다.
과연 정몽준은 무수한 난관을 뚫고 대선에서 승리할 것인가. 그를 통해 새로운 정치세력의 탄생을 기대하는 국민들을 만족시킬 것인가. 정몽준 의원은 지금 월드컵보다 더 큰 도전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