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1’ 개각으로 보건복지부장관직에서 물러난 이태복 전 장관이 2개월 만에 펜을 들었다.
- 그는 자신이 청와대 수석과 장관으로서 공직사회를 경험한 1년5개월 동안 느꼈던 정부조직 및 공직사회의 문제점들 그리고 그 개혁방안에 관한 개인적 견해를 밝힌 장문의 글을 ‘신동아’에 보내왔다.
- ‘신동아’는 지난 7월부터 꾸준히 이 전 장관과의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그는 끝내 고사했다.
- 그는 다른 언론매체와도 일절 인터뷰를 갖지 않았다.
- 이 전 장관의 견해를 최대한 전달하기 위해 가감없이 글을 싣는다(편집자).
그러나 장관은 재임중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우리사회의 통념에 어긋나고, 혹시 국정 마무리를 위해 노구를 이끌고 혼신의 힘을 쏟는 김대중 대통령께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버리지 못했다. 또 필자와 함께 밤낮없이 일한 공직자들도 적지 않았고, 필자의 인사쇄신책에 박수를 보냈거나 복지정책 정비, 건보재정대책 등으로 밤샘작업을 예사로 한 ‘공직사회 보배’들의 사기를 꺾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떨치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1년5개월간의 공직경험을 정리하지 않은 채 아무런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우리사회 발전과 국민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라는 비판도 타당하다. 공직자들도 이 글을 다 읽고나면 필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진심을 알 것이고, 그렇게 변해야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다는 상식적 진리를 갖고 있으리라 믿으며 정부쇄신론을 시작한다.
월드컵경기를 통해 우리 국민들이 느꼈던 일체감과 자신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정치권의 끝 모를 정쟁과 70년 만에 쏟아진 폭우의 상처만 고통스럽게 남아있다.
우리가 이런 내환(內患)에 허덕이고 있는 동안 바로 이웃한 거대한 대륙 중국은 꿈틀대는 수준을 넘어 무서운 태풍이 되어 세계경제의 최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한·중수교 초기 ‘한국의 1960년대’라는 평가를 받았던 중국은 국가목표를 명확히 설정하고 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과감한 개혁조치와 섬세한 관리를 함으로써 어느새 ‘한국의 1990년대’로 다가왔다. 특히 IT와 섬유·조선·철강분야에서는 수년 안에 한국을 앞지를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
물론 필자는 중국의 이런 비약적 발전을 우려하는 게 아니다. 진심으로 환영하고 격려해마지 않는다. 그들의 노력과 실력으로 쟁취한 ‘오늘의 중국’을 세계의 어느 누가 질시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중국지도부가 선택한 개혁개방노선과 발전전략, 경제·사회 각 부문에 걸친 치밀한 계획과 단호한 실천이 만들어낸 값진 열매이므로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렇다고 중국의 내일에 아무런 장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은 중국대로 숱한 내부 모순과 한계, 약점을 갖고 있다. 중국지도부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조건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혁정책 성패의 일차적 책임은 정부와 해당부처 관료들에게 있다. 사진은 지난 9월2일 국회에서 열린 재해대책 관련 국회-정부 간담회
한국경제의 위기 징후는 언제부터 감지된 것일까. 중국시장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이런 시장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업 차원에서 대처하고 있기는 하다. 효성은 쑤저우(蘇州)의 자싱(嘉興)에 스판텍스 공장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포철도 몇 곳에 특수강 공장을 가동중이다.
그러나 국내 섬유회사들의 부도와 워크아웃, 과잉생산시설과 인력문제는 몇 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철강은 어떤가. IMF 직후 고스란히 드러난 철강분야의 문제들은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IT·BT·ET와 같은 새로운 산업분야 국제경쟁에서 나름대로 상품성을 갖고 있는 것은 반도체와 전자통신의 일부 품목에 지나지 않는다. 바이오산업분야는 경쟁력은 고사하고 기초적 여건조차 마련돼 있지 않고, ET는 선진국기술을 카피(copy)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에 있다는 게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구호만 요란한 대표적인 분야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이렇게 신산업분야에서 허송세월하는 동안 선진국과의 기술격차가 더 벌어지고 그들 시장으로의 편입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다국적 제약사들의 국내시장 잠식속도는 유례가 없을 정도인데, 2001년도 공식적인 전체 제약시장 규모 5조4700억원 가운데 1조3000억원을 차지했다. 이 수치는 직접판매분만 계산한 것이므로 간접판매분까지 포함할 경우 시장 점유율은 25%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다국적 제약사들은 수년 안에 한국시장을 완벽히 장악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대로 가다가는 신산업분야에서도 하청구조화가 재연될 가능성이 높다. 경제분야에서만 시급한 현안들이 표류하는 건 아니다.
표류하는 사회현안들
주요한 사회현안들, 즉 교육·의약분업·실업·환경문제가 갑갑하게도 수년째 뒤엉켜 있다. 어느 사회에서든 사회 각계 이해집단간 갈등과 대립은 언제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사회문제가 제기되고 해결되는 과정은 6·29 이후 15년 이상 지났는데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원색적 비난과 자기주장만 난무할 뿐이다.
문제는 이를 조정하고 해결해야 할 실마리를 정부가 찾지 못하는 데 있다. 물론 이 책임이 전적으로 정부와 관료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사회 각계 지도층의 무능력과 무기력이 더 큰 문제다. 사회현안문제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사회적 컨센서스를 만들어내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총론적 비판에만 열을 올리는 풍토는 문제해결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정부 각 부처는 주요 현안의 실무적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문제를 어느 정도 걸러낸다면 현안들은 어느 정도 해결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와 해당 부처 관료들이 일차적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도 정부는 교육·복지·건강·환경·실업·농업 등 각 분야의 문제들을 해결하려 수십만명의 인력과 엄청난 정부재정을 쏟아붓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의 불만은 여전하다. 문제해결을 통해 국민들이 만족을 느끼는 게 아니라 거꾸로 새로운 불만의 원인이 돼서 민심이 떠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면 과거정권은 어땠는가. 멀리 거슬러올라갈 것도 없이 문민정부 시절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교육·경제·노사 등 많은 문제를 건드렸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주요한 사회 현안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고 국민의 불만이 크다는 사실은 정부쇄신과제가 특정한 정권이나 어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일정하게 신분보장을 해주면서 성과, 능력, 태도 등을 종합평가해 재임용하자는 것이다. 10년의 신분보장기간에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능력과 태도를 평가한다면 공직사회의 풍토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제도적 변화없이 사정과 상벌, 형식적인 개방직 도입으로 공직풍토가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냥 잘되기를 비는 것과 같다.
이렇게 10년 재평가제도를 고위 공직자급에서 실시하면 현재 연공서열식 인사관행과 봐주기 인사, 지연·학연에 의한 많은 부작용을 없애고 국민을 위한 봉사실적과 그 내용으로 평가하게 됨으로써 봉사의 질을 담보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제도의 도입도 잘못 운용되면 평생일터라는 긍정적 사고를 파괴해 적당히 일하는 풍토가 만연될 수 있다. 그리고 실적내기를 위한 각종 사업들이 독버섯처럼 자라나 빛이 나지 않는 일상적 업무를 기피하는 경향을 조장할지도 모른다. 그런 경향들은 무사안일이나 복지부동과 마찬가지로 공공의 적이다. 물론 6급 이하 하위직 공무원들까지 신분보장의 틀을 흔들 경우 정권교체의 혼란이나 다른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상위 공직자로 그 대상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
전문성을 보강하고 공직사회에 경쟁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도입한 개방형 제도는 아직까지 그 성과가 별로다. 말로만 개방직이지 실제 국장급 이상이기 때문에 고위공직자들이 그대로 임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단 임용되면 2∼3년의 기간을 보장해주므로 적당히 일하는 경우도 많다. 이 개방형 공직제도가 아무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는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데 있는 것 같다. 일을 제대로 하는지 안하는지를 평가할 근거가 분명하지 않고 애매한 계획서만 제출하게 돼 있는 것이다. 또 개방형 자리의 임기가 끝나면 공직자의 경우 과거의 지위를 반드시 보장하도록 해놓고 있다.
개방형 제도가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왜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런 개방형 제도는 하나마나한 것이다.
사업예산제로 부처예산 짜야
재계약평가제로 상위직 공직사회에 탄력성과 능률, 효율성을 제고한다고 해서 공직사회 풍토가 바로 개선될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한번 T.O가 잡히면 어느 누구도 손대지 못하는 인건비로 확보되기 때문에 그 인력이 해외로 파견나가 대학을 다니든, 대기중에 놀고 있든 봉급은 꼬박꼬박 지급되게 돼 있다. 이런 시스템이 그대로 작동하는 한, 해당부처의 주요사업이나 일상업무에 전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고, 평가제 도입도 T.O 안에서 진행되는 평가이므로 생각보다 효과가 적을 수 있다.
그러므로 보다 확실하게 공직사회가 당면한 주요현안을 해결해나가도록 하려면 미국정부가 실시하고 있는 사업예산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각 부처에서 인건비와 사업예산을 분리해 편성하고 국회 승인을 받는다. 이 구조에서는 각 부처 공무원들이 사업을 책임지고 수행하지 않아도 되도록 돼 있다. 사업이 어떻게 되든 인건비는 별도로 확보돼 있기 때문에 아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미국의 각 부처 예산제도는 인건비 예산을 따로 책정하지 않고 사업예산에 포함시킴으로써, 사업중심의 관점을 분명히 하고, 사업에 대해 확실한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다. 사업 성적이 부진하면 부처예산이 감축되고 자연히 인력도 감축된다. 물론 이 제도도 한국적 현실과 맞지 않을 수 있다. 어떤 부서는 그런 사업예산제가 무의미한 부서도 있다. 그래서 이 사업예산제를 정부의 모든 부서에 적용하는 데는 무리가 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부부처 예산을 무조건 인건비라는 경직성 예산항목과 사업예산을 분리해서 운용하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는 게 분명하다. 책임지지 않고 창의적으로 일하지 않는 풍토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니 말이다. 따라서 사업을 많이 하는 부처와 해당 과부터 적용해서 예산사용의 관점과 자세부터 고쳐나가야 한다. 한번 확보한 예산을 자기과의 돈이라고 생각하는 정부부처의 예산개념이 바뀌지 않는 한, 소중한 국민세금의 낭비와 비효율적 집행을 방지할 길은 없다.
글을 마치며
정부쇄신론에 대한 전술적 고려와 방안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례들이 소개됐고, 우리도 충분히 원용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다만 교육훈련문제는 매우 중요한 쇄신작업이지만,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그치려고 한다. 지금과 같은 판에 박힌 교육방식과 제도로는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할 공직자들을 훈련시킬 수 없다. 공직자의 마음가짐부터 바꿔나가면서 전문성을 담보해가는 전문적 교육과정과 인적 자원개발에 적극 투자하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글을 쓰면서도 내내 부담스러웠던 것은 역시 함께 일했던 국무위원들과 부하직원들이었다. 깨어있는 공직자들이 대한민국을 떠메고 나갈 동량들이란 점에서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공직자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렇게 중요한 정부쇄신과제가 우리 앞에 제기되고 있는데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은 정부부처와 행정관료들이다. 그동안 많은 구호와 정부개혁프로그램이 나왔음에도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행정조직과 업무스타일, 서비스는 변한 게 없다. 시간이 갈수록 국민들의 욕구와 사회발전 속도는 빨라지는데 정부 각 부처의 행정현실은 변화하는 현실을 선도하기는커녕 따라가지도 못하고 있다.
낡은 행정관행과 현장을 모르는 탁상행정, 맞거나 말거나 식의 주먹구구 통계, 책임전가와 책임회피의 직무유기, 업체이익을 대변하거나 유착관계에 빠진 일부 관료들, 정권은 유한해도 관료는 영원하다는 ‘철밥통’ 사고, 변화와 쇄신을 통해 국민에 봉사하려는 공직자들은 소수이고 적당히 자리보전하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거나 자리와 진급에 목을 매는 공직사회 풍토는 부분적인 쇄신작업으로는 바뀌지 않는다.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수술을 해야만 우리사회를 선진사회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한심한 행정현장들
실제 공직사회 현장을 몇 가지 사례로 들여다보자. 학급당 학생수를 35명으로 줄여 교육여건을 개선하려는 야심찬 교육여건 개선사업은 시행 초기부터 교육현장의 차가운 반응에 부딪쳤다. 교육부가 발표한 각종 교원수급계획이 자신들이 처한 현실과 동떨어졌던 것이다. 건강보험 재정안정화를 위한 복지부의 각종 통계들도 자주 수정됐다. 이는 현실을 반영한 측면도 있지만, 재정대책에 쓰일 기초 통계가 부실하거나 아예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2001년 5·31 대책 수립을 위해 의약분업정책에 쓰인 각종 통계와 자료를 제출하라고 하자 해당 부서에서 한 달이나 시간을 끌더니 연구보고서와 몇 가지 자료를 내놓은 게 전부였다. 처음엔 이런 빈약한 통계를 토대로 작성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저기 쑤셔봐도 나올 자료는 없었다. 애초부터 과학적 통계에 근거해 의약분업 재정대책을 세운 게 아니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주요 질병별·약품별 통계라도 확보하려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재정추계작업에선 기본적으로 국민들의 질병통계도 중요한 참고자료인데 복지부나 산하기관 모두 이런 자료를 생산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행위별 수가체계인 현행제도에서 신청한 건수의 잘잘못만 따지면 됐지 주요질환의 치료비 추이나 고액약품비 통계 등은 관심분야가 아니었다.
그들은 왜 그런 질병통계를 찾는지 의아해했다. 하지만 만성질환자의 치료비는 건보재정에서 큰 부분이 아닌가. 그런데도 암이나 고혈압·당뇨·심장질환 등의 정확한 연간치료비 현황조차 없었다. 실무책임자들을 불러 “현실을 분석하고 전망을 가져야 대책을 세울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따지자 “내 소관업무가 아니고 규정에도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거의 강제적으로 프로그램에 코드를 새로 넣고 정기보고를 하라고 지시하자 그제서야 기본통계의 일부만 받아볼 수 있었다.
현 정부의 대표적 개혁정책인 의약분업은 시행착오로 끝났다. 사진은 병원에서 대기중인 환자들.
전국적인 복지자원에 대한 통계도, 보건통계(Health data)도 사정은 비슷했다. 실업문제는 어떤가. 매년 수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국민세금을 밀어 넣었지만 정확한 전국민 고용실태와 실업통계가 없다. 통계청이 발표하는 실업통계만으론 실제적인 실업정책을 세울 수 없다. 공식적인 실업통계에서 빠져있는 장기실업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재취업훈련과 재취업문제는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어서 과학적인 자료생산이 기본작업이다. 이게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피부에 와닿는 실업정책이란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다.
고용안정 실태조사 결과도 충격적이었다. 전국 25개에 달하는 고용안정센터에 1000여 명이 일하고 있는데도 구인·구직수요 통계는 쓸 수 있는 게 없었다. 면담기록 양식이 형식적으로 돼 있어 어떤 사람들이 어떤 직장을 원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경리면 경리, 용접이면 용접 등 구체적으로 기록항목을 개선하고 나서야 지역의 구인수요가 드러났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직업훈련 관련 예산집행이 지역 구인수요에 근거해서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연간 실업훈련예산이 확정되면 각 지방노동사무소로 인원을 배정하고, 해당 학원에 인원을 할당하면 실업훈련은 끝나게 돼 있었던 것이다. 이러니 수조원의 예산을 쓰고서도 기업은 기업대로 인원부족에 시달리고 실업자는 실업자대로 일자리를 못 찾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일선 지방자치단체들은 주민들의 취업실태에 아무런 관심도 갖고 있지 않았다. 전 가구에 대한 자료를 갖고 있으면서도 가구원 취업실태자료가 없다는 것은 중앙과 지방의 행정조직들이 고용문제를 소화할 아무런 준비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이미 중앙정부가 국민경제 차원에서 실업정책을 세우면 각 지방정부 조직들이 고용실태를 파악하고 직업훈련 등을 통해 노동시장에 관여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공공근로사업을 열심히하는 것만이 실업정책의 전부인 줄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들
통계만 이런 게 아니다. 국민 불만의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는 의약분업의 준비과정을 따져봐도 그렇다. 필자는 의약분업은 선진 의료제도로서 우리나라도 도입할 필요가 있지만 여건이 미비하므로 더욱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막상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 앉아서 준비작업을 점검해보니 행정조직이 도무지 움직이지 않았다.
의약분업을 구체화하려면 우선 실무적으로 준비해야 할 작업이 네 가지다. 수가조정과 약값평가, 진료지침 마련, 만성질환대책이 그것이다. 낡은 의료관행을 고치기 위한 국민의식 쇄신이나 국민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처방약의 준비, 의료기관과 약국간 지리적 연계 등은 부차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필수 4개 사항에 대한 준비 여부는 의약분업정책의 성패에 중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무준비는 제로에 가까웠다.
수가의 경우 의료계가 파업할 때마다 적당한 수준에서 인상해줬기 때문에 진료군별·의료기관별 모순이 야기됐다. 저수가체제에서 국민부담과 건강보험재정을 고려한 적정수준의 수가체계로 발전시켜야 하는데 이게 충분한 검토없이 인상돼버린 것이다. 매우 섬세한 작업과 전문가의 신중한 검토를 필요로 하는 과정이었는데 그런 틀조차 제대로 만들어지지도, 작동되지도 않았다.
약값부문은 더욱 한심한 지경이었다. 1999년 11월 말에 도입한 실거래가제도는 의약분업 도입을 위한 정지작업이었다. 그러나 이 실거래가 도입을 위한 약가조사가 어찌된 영문인지 약품의 실제 거래가격을 반영하지 않고 오히려 약값 인상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복지부가 실거래가 제도를 도입하면서 약값의 30.7%를 인하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체 거래품목 1만6000여 개 가운데 불과 1300여 개 품목만, 그것도 1998년도에 조사해서 한참 뒤인 2000년도 약값에 반영했던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약값은 실제 거래가를 보험약값으로 인정한 게 아니라 명목상 약값을 그대로 청구하도록 방치했고, 일부 제약사들은 이런 허점을 이용해 거꾸로 가격을 인상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 국민들은 실거래가 도입으로 약값이 인하됐다는 복지부 발표를 믿지 않았다. 실제 약을 구입해보면 약값이 대부분 올라 있었으므로 복지부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10%도 안되는 약품만 인하해놓고 실거래가 도입으로 약가 거품을 제거했다고 선전했으니 국민들이 믿을 리 없었다.
복지부장관으로 부임한 초기, 간부회의 석상에서였다. 한 간부가 보고한 내용은 이미 지난해 수석시절에 보고했던 내용과 똑같았다. 그 점을 지적하자 그 간부는 우물쭈물했다. 장관이 지난해 보고사항을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다는 게 나중에 들은 얘기다. 청와대에 보고용 서류를 제출한 채 허송세월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기초생활수급자나 장애인 등에게 지급하는 중앙정부의 사회복지예산이 각 지방자치단체장 명의로 발송되고 있어서 국민세금으로 지원되고 있다는 사실을 명기하도록 조치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에 개선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간단치 않은 작업이기 때문에 일선 읍·면·동에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 직접 확인해봤더니 바뀐 지역이 없었다. 다시 반복지시를 내렸고 개선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복지부에 와서 점검해보니 개선된 게 아니라 그렇게 바꾸라고 공문만 내려보냈을 뿐이었다.
시·도에 내려가 그 점을 질문하면 전부 개선했다며 일선기관에 내려보낸 공문을 제시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수급자통장을 가져오라고 해서 점검해보면 여전히 자치단체장 명의로 송금되고 있었다. 이 문제는 필자가 그만둘 때까지 매주 이행상태를 점검했는데도 전국의 자치단체 가운데 75%밖에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이란 획기적인 제도를 도입하면서도 전국의 시설에 수용된 인원에 대한 조사작업이 한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예전 명단을 대부분 그대로 올려 적당히 인원을 짜맞추고 예산을 지급한 것이다. 정신시설의 문제점이 누차 지적돼 철저히 조사해서 개선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다. 별 문제 없다는 보고를 받고 어이가 없었는데, 복지부에 부임해서 다시 그 사실에 대해 물었더니 또 별 문제 없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부처의 전체인사 때 주무과장을 전보조치한 뒤 거의 강제로 일부 지역만 표본조사해보니 8% 이상의 부정이 발견됐다. 전면조사를 하면 이보다 훨씬 높은 부정이 드러날 것이다.
특히 약값 조사를 해놓고도 이를 즉시 인하하지 않은 사건 당시 필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청와대 수석시절 이미 인하됐다고 보고받은 적이 있었으므로 당연히 인하된 것으로 알았는데 1년이 다된 시점에서도 시행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건보재정 적자 문제로 그토록 국민의 걱정이 심각하고, 차입금으로 충당하고 있는 현실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2001년 3/4분기 약품조사분을 그때까지 인하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감사를 통해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자 그때서야 그 앞 시기에 조사한 것도 인하하지 않은 사실을 시인했다. 필자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문제는 담당자들이 내가 잘못한 게 무엇이냐며 공개적으로 반발하거나 별일도 아닌 것을 문제삼는다는 태도에 있었다. 이런 도덕불감증 현상은 비단 어느 한 부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까운 한 장관에게 이런 문제를 얘기했더니 “우리 부도 마찬가지”라는 거였다. 이처럼 도덕적 해이가 만성화됐기 때문에 산재예방예산을 수천억원씩 투입해도 산재사고는 줄어들 기미가 없고 수십조원의 예산을 농촌에 투자해도 농민들의 아우성은 그치지 않는 것이다.
낭비 부추기는 중복행정
이번 수해 때는 여러 지역에서 하천 둑과 교량이 무너져 농경지와 가옥의 침수로 이어졌다. 지난해 안전도 검사에서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한 교량과 하천 둑이 속절없이 무너져내린 것은 안전진단의 문제 탓도 있지만, 그보다 책임지는 부서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건교부, 행자부, 환경부 등 5개 부처가 하천업무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성지역에 퍼진 구제역은 그 지역 농장에서 근무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을 통해 전파됐을 것으로 농림부는 추정한다. 월드컵을 앞두고 발생한 구제역 파동이어서 농림부의 노심초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농림부장관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수차례 사과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외국에서 구제역이 전염돼 올 경우 그 책임이 농림부에 있다고 말할 근거가 뚜렷치 않다. 농가 축산물이기 때문에 구제역 파동은 농림부 소관이지만, 전염경로가 만일 사람이나 다른 물건을 통해 유포됐다면, 농림부와는 무관한 일이 된다.
현재 검역도 사람과 비행기, 배 등은 복지부의 검역소에서 담당하고 동·식물은 농림부의 각기 다른 부서에서 처리하고 있다. 복지부 산하 식약청까지 직접 나서기도 한다. 이런 중복기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하천도 하나이고 전염병도 하나인데 행정조직만 여러 개가 중복돼 있으니 효율성과 책임성이 확보될 리 없다.
앞에서 고용통계 문제를 언급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통계가 아니다. 실업자를 취업시킬 수 있도록 노동시장 변화를 파악하고 실제적인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도 각 지역에 고용대책회의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기구가 하는 일이라곤 공공근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앞으로 끊임없는 구조조정작업이 불가피하고 그에 따른 노동시장의 변화로 대량실업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사람들을 정부가 사회안전망으로 보호하는 작업도 제대로 해내야겠지만, 더 중요한 과제는 이들이 적시에 일자리를 갖게 만드는 것이다. 복지 중 복지는 일자리를 갖게 하는 것이다. 현행 제도상 국민기초생활대상자 가운데 근로능력이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은 고용안정센터를 방문해서 상담하도록 돼 있지만, 아무 성과가 없다. 두번 다시 방문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도 아니고 임시직을 뽑아 행정처리나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수준에서 될 일이라곤 거의 없다.
고용문제가 정부의 주요기능으로 대두되는데도 정부의 대처라곤 노동부에 부서를 신설한 것을 빼면 진행한 작업이 거의 없다. 고용과 복지를 서로 연결하고 중앙과 지방이 어떤 역할분담과 기능을 맡아서 일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손조차 대지 못하고 있다.
기업이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고, 망하는 회사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이 이렇게 행정조직에서 버젓이 일어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차라리 순수 아마추어라면 도덕적 열정이라도 넘쳐날 텐데, 국민들을 대하는 행정관료들은 그렇지도 못하다. 무엇이 문제인가. 필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런 한심한 사태를 접할 때마다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을 끊임없이 던졌다. 무엇이 잘못됐는가. 그리고 왜 국민의 정부는 정부쇄신에 소극적이었고 성과를 제대로 내지 못했는가. 왜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음에도 대통령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공직자들과 공직사회는 무사안일과 복지부동으로 시종일관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치 않다. 쇄신의 목표와 내용, 접근방법과 추진주체 등 여러 요인을 분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각 요소마다 일정한 문제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결과는 원인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주제들은 다른 글에서 본격적인 검토를 하고자 한다.
이러한 한심한 실태에 대해서 누차에 걸쳐 문제점이 지적됐고 국민의 정부도 정부혁신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쇄신을 추진했다.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란 말이다. 이전의 김영삼 정부도 정부쇄신에 의욕을 보였으나 별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그래서 정부쇄신은 집권초기의 거창한 구호일 뿐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과제라는 진단을 내리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정권을 잡았다고 해봐야 100명 남짓한 인원이 장관 등의 자리를 잡고 국정운영을 해보지만, 자주 교체되기 때문에 한두 차례 개각이 있고 나서부터는 정부쇄신론은 빈껍데기만 남고 오히려 관료들의 독무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예외없이 관료기구들이 팽창해 부처별 밥그릇 싸움이 재현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우리의 최근 경험에서 보면 이런 비관적 전망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게 사실이다. 어느 정권이 들어서도 거대한 관료조직을 변화시키는 작업이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월드컵 응원과정에서 보여준 성숙한 시민의식과 우리민족의 저력을 생각하면 우리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작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고질적인 문전처리 미숙과 체력부족, 작전 미스 등을 감독이란 키워드를 교체해 일거에 해결한 게 월드컵 4강 신화의 비밀이었다.
꿈은 이루어질 수 있다
왜 정부쇄신작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정부조직과 그 풍토의 고질적 문제들도 우리가 꿈을 갖고 분명히 달성하려고 노력한다면 일거에 해결할 수도 있다. 국민들은 우리사회를 선진사회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정부를 비롯한 공공분야의 여러 영역에서 법과 제도, 제공되는 서비스가 획기적으로 달라지길 고대하고 있다. 선수와 감독이 제대로만 한다면 신이 나서 박수를 치고 모두 거리로 나와 한마음으로 응원하듯, 정부쇄신이 제대로만 된다면 그것은 국민들의 거대한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는 최고의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4700만 국민의 생활과 직결돼 있기 때문에 모든 국민들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런 기대와 성원이 국민의 정부에 들어와서 없었던 건 아니다. 50년 만의 정권교체로 출범한 국민의 정부에 거는 기대는 남달랐다. 경제파탄의 책임 때문에 서슬 퍼렇던 고위관료와 재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2만 개가 넘는 사업장이 대량부도 사태를 맞아 노·사·정이 한자리에 서기도 했다. 금모으기 운동에 국민들이 얼마나 많이 참여했는가.
이렇게 중요한 프로젝트가 국민의 성원을 받던 시기에 국민의 정부에 의해 구체화되거나 중요한 과제로 되지 못한 정확한 이유를 필자는 알지 못한다. 현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정통관료 출신인 모씨가 ‘정권교체 직후 브리핑 잘하는 인사가 대통령의 신임을 받으면서 행정쇄신은 물 건너갔다’고 말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주관적 판단일 뿐이다.
아마 IMF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여러 현안에 밀렸거나, 고위관료들이 국민의 정부에서 중요직책을 맡게 되면서 문제의식이 희석된 채 규제쇄신위원회의 활동강화나 개방형 제도 확대에 그치고만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정부쇄신은 이제 더 이상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게 아니다. 쇄신 중 쇄신이며 가장 먼저 추진하고 가장 늦게까지 지속해야 할 쇄신작업이다. 공직사회의 업그레이드 없이는 우리사회의 업그레이드도 없기 때문이다.
뉴질랜드 개혁은 타산지석
그렇기 때문에 우리 현실과 국가목표에 맞는 행정조직 쇄신론을 가져야 한다. 정부조직 쇄신이나 쇄신에 대해 관심을 갖는 전문연구자나 행정가들은 거의 대부분 잉글랜드나 뉴질랜드의 정부조직 쇄신사례를 거론한다. 한국도 이런 과감한 인원축소와 기구 통폐합, 예산감축, 민영화를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 나라들은 과감한 행정쇄신을 통해 방만한 정부기구를 축소하고 지속적인 재정적자를 반전시켰다. 국민들의 호응도 컸다. 하지만 그 부작용도 컸고 다른 사회적 비용이 더 든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면 왜 한국정부는 이런 사례를 알면서도 자기화하지 못하는가. 의지문제나 작업 우선순위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무엇인가 우리가 부딪친 문제들과는 초점이 다른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건 아닐까. 말하자면 행정조직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둘러싼 역사적·문화적 형성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아, 참 대단하구나’ 하면서도 우리 현실에 적용하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대처식의 정부조직 쇄신과정에서 그녀가 동원한 다양한 전술이 갖는 함의를 무시한 채 대량해고와 기구축소만 부각되는 경향이다. 대처의 소프트웨어는 영국 노동당과의 정치적 역(逆)관계, 장기간에 걸친 국가사회보장체계 등을 고려한 점도 많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대처식 개혁은 영국이 1970년 말의 상황에서 선택한 방법이듯, 우리의 정부조직 쇄신도 21세기 이후의 한국사회 발전을 염두에 두면서 당면한 행정기구, 인원, 기능, 역할, 업무방식과 관행 등을 전면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행정쇄신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목표의 명확한 설정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듯 기구 통폐합과 인원감축, 재정축소, 민영화 등은 정부쇄신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다. 효율성과 능률, 성과 측정 등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이 중요한 목표설정문제는 겉돌고, 대신 그 수단인 인원감축과 효율성 등만 구체적으로 논의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장기간에 걸친 일제식민지 지배와 군사독재체제를 경과한 나라의 행정쇄신은 선진국의 그것과 같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김대중 대통령이 국정의 기조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과 생산적 복지로 제시한 것은 현 시기 우리시대의 과제를 적절하게 집약한 것이다.
필자가 보면 우리의 행정조직과 풍토에 깊이 뿌리박힌 관존민비 경향과 통제위주 행정기법들은 대부분 일제와 군사독재체제의 잔재들이다. 이 찌꺼기를 제거하고 국민을 우선하는 법과 제도, 풍토를 만드는 작업이 선결목표여야 할 것 같다.
또 공공이익에 봉사하는 행정조직은 우선 국가안보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이 중요하다. 국방부와 경찰의 역할이 그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가치있는 무엇’을 소중히 할 필요가 있다. 특히 급격한 사회변동과정에서 가치관의 혼란에 빠져있는 우리사회가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려면 기초를 튼튼히 다지는 일은 필수적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일은 공동체 구성원이 나눠먹을 ‘떡’을 생산하는 경제의 발전전략과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도록 각종 룰을 만들고 지키는 일, 돈의 흐름을 만들어가는 재정금융정책 등을 펼치는 경제업무다. 또 하나의 일은 대다수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공공서비스다.
이 세 가지 목표를 분명히 하는 행정쇄신작업에는 할 일이 많다. 국가안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분야의 쇄신도 복잡한 내용이 있을 수 있지만 군사전략 등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므로 구체적인 검토는 차후에 하고 싶다.
그러나 어떤 작업들은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도 있다. 일선 지자체 업무 가운데 주민증 발급업무가 전자카드화할 경우 지방정부의 주요기능과 성격이 주민통제적 체계에서 주민참여적인 개방형으로 바뀌어 주민의 삶의 질 향상을 돕는 서비스로 전환될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 일부 시민단체가 우려하는 바와같이 인권침해 소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정보 확보는 전자카드가 아니어도 방법은 많다. 불필요한 인력과 예산낭비를 그런 이유 때문에 지속할 이유는 없다. 일제시대부터 내려온 주민통제적 전통과 관행을 제거하기 위해 법과 규정을 대폭 손질한다면 21세기 사회에 걸맞은 행정쇄신이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삶의 질 향상서비스는 개방형의 주민참여방식을 적극 도입해야 한다. 정부가 국민생활의 구석구석을 챙길 수도 없을 뿐더러 챙겨지지도 않고 챙길수록 비효율이 발생한다. 민간조직에 역할을 적극적으로 부여하고 공개적인 국민참여 기회를 넓혀나가면 공공서비스의 질은 강화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용·복지·교육·환경·보건 등 생활상 서로 연결되는 부분의 기능을 통합하는 일을 서둘러야 한다. 정부의 여러 부처가 ‘따로따로 행정’을 하는 구조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는 불만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회적 요구와 행정적 필요에 따라 여러 부처에 편성된 각종 예산도 당연히 정비돼야 한다. 복지부의 공식예산은 7조6000억원 수준이지만 정부 전체의 복지성 예산은 12조에 달하는 현실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현재 정부부처 18개엔 기능별 부서도 있고 대인(對人)부서도 있다. 재경부, 산자부, 복지부가 기능별 부서이고 농림부, 노동부, 해양수산부, 여성부가 대인부서다. 정부조직개편에서 언제나 논란이 되면서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정부조직의 기능과 역할을 효과적으로 만들려면 어느 쪽을 우선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한민국 창건 이래 이 혼재된 형태의 정부조직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한칼에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고 효율성과 합리성 이외의 의미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성정책을 중시한 국민의 정부가 상징적 조치로 많은 비판을 무릅쓰고 여성부를 신설한 게 대표적 사례다. 그래서 지금도 여러 이익단체를 만나면 무슨 청이나 무슨 부의 신설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듣게 된다.
하지만 필자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정부조직개편의 원칙을 생각해보면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쉽게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정부조직의 기능과 역할을 21세기 한국사회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둔다. 둘째, 중앙부서와 지방자치단체의 조직규모와 단계를 대폭 축소해 권한의 하부이양과 민간이양, 국민참여를 실현한다. 셋째, 경제발전과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경제·복지·고용·교육·건강정책에 인력과 예산을 집중투입하되 부처간 중복기능을 단일화한다. 이렇게 되면 중앙부처의 기능을 대폭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특히 사회안전망을 지속적으로 확충하는 과정에서 관리기능의 중복과 비효율이 심각하고, 과거 공기업의 잘못된 타성과 관행이 남아있기 때문에 서비스의 질을 제고시키지 못하고 있다. 업무의 전자화를 통해 일정 수준의 통합을 시도하고 있는 만큼 고용안정과 노사협의를 통한 효율성과 서비스 제고 방안을 중심으로 한 기능재편을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산하기관의 업무 중 민간이나 국민들이 참여해서 해결해 나가는 게 보다 효율적이고 책임성이 담보될 수 있는 분야까지 정부조직이 장악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분야는 적극적으로 권한을 민간에 이양해 국민참여로 업무부담을 덜어내야 한다.
상위공직자 재평가 필요
정부조직과 인력을 축소하고 재배치한다 하더라도 다양한 행정서비스를 개발하고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체는 역시 사람이다. 사람이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열심히 노력해야 정부조직의 공공적 기능을 살려갈 수 있다. 이 점이 배제된 정부조직 쇄신론은 내용없는 형식만 추구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성과도 가져올 수 없었다.
공직사회가 무사안일과 복지부동으로 일관해도 괜찮은 것은 그렇게 근무해도 그들의 직장생활에 아무런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 공무원법상 신분보장이라는 안전장치가 철벽으로 작용해 한국사회에서 유일한 ‘철밥통’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신분보장이 관료제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은 분명하다. 앞으로도 일정한 안정성을 확보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국가고시에 일단 합격하고 나면, 정년퇴직까지 보장해주는 방식으론 정부조직에 부과된 시대적 사명이라는 자기역할을 담당할 수 없다. 철밥통이 유지되는 한 막대한 인력과 예산의 낭비를 방치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그럴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