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호

홍지선 KOTRA 북한실장의 대북 밀사 10년 X파일

YS의 오기, 김현철의 농단, 허수아비 협상팀, 배짱부리는 북한

  • 글: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대우 hoon@donga.com

    입력2002-10-04 12: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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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흑민경 총사장 최수진씨 중계 대북 쌀 지원 성사
    • 김현철 라인과 연결돼 베이징에서 활개치고 다닌 비선 에이전트들
    • 지방선거에 이기기 위해 개입한 김현철 세력, “이석채 차관을 대표로 하라”
    • 신변보호각서도 없고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출항한 씨아펙스호
    • 6월25일 간신히 쌀 제공 계약서 작성한 후 곧바로 씨아펙스호 출항시켜
    • 삼선비너스호 억류사건 때 이석채 차관 북한에 사과문 보내
    • 안기부, 권영해 파와 김기섭 파로 양분
    • 홍지선, 북한의 김문성과 북한 무역관 설치 의향서 체결
    • 북한의 유령조직과 협상해온 한국 정부 대표단
    9월19일부터 한국은 장기 저리차관의 형태로 북한에 40만t의 쌀을 지원한다. 한국은 김영삼(金泳三) 정부 때인 1995년 6월25일부터 15만t의 쌀을 무상으로 북한에 지원한 바 있으므로, 이번 지원은 7년 만에 이뤄진 두 번째 직접 쌀 지원에 해당한다. 이번 지원은, 남북의 정부기관인 재정경제부와 국가계획위원회의 차관급 인사가 서명한 ‘제2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합의문’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다. 정부기관간에 합의가 이뤄졌으므로 이번에 지원되는 쌀포대에는 ‘대한민국’이라는 원산지가 표시된다.

    홍지선 KOTRA 북한실장의 대북 밀사 10년 X파일
    그러나 1995년에는 남북 정부 대표간에 서명한 합의서가 없었다. 단지 한국에서는 차관급 정부 대표가 서명했으나 북한에서는 공식 정부기관이 아닌 외곽기관의 대표가 그 기관에 없는 직함을 사용해 서명했을 뿐이다. 북한에 지원한 쌀포대에는 ‘대한민국’이라는 원산지도 표기하지 못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한국 정부는 실체가 모호한 북한의 유령기관과 협상해 ‘누가 주는지도 모르게’ 15만t의 쌀을 무상으로 지원한 것이다. 왜 이러한 사태가 일어났을까.

    당시 대한민국 정부를 대신해 북한에 15만t의 쌀을 보내준 것은 정부투자기관인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였고, 실무자는 이 회사의 홍지선(洪之璿·57) 북한실장이었다. 홍실장은 무려 9년간 KOTRA 북한실장으로 근무하며 대북 쌀지원을 비롯한 숱한 대북 사업을 추진해왔다. 최근까지도 북한에 KOTRA 무역관을 개설하는 문제를 심도 있게 추진해왔는데, 그는 9월16일자로 KOTRA에서 퇴직했다.

    1980년대 후반 한국 정부는 동유럽 국가를 시작으로 소련·중국과 국교를 맺는 북방정책을 펼친 바 있다. 수교를 맺기 전 한국은 이 나라에 KOTRA 무역관을 개설하는 데 성공했다. 동유럽과 소련·중국에 무역관을 개설하는 데 첨병 역할을 한 사람이 홍실장이다. 1990년 중국 무역관 설치를 끝으로 한숨을 돌린 그는 1993년 북한실장이 돼 최근까지 북한에 KOTRA 무역관을 개설하는 일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남북문제는 팔팔 뛰는 ‘生物’



    북한실장 재임중 그의 별명은 ‘자물통’이었다. 북한문제를 다루는 기자 치고 홍실장에게 접근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홍실장은 남북문제를 묻는 질문에 “모르겠는데”로 일관했다. 그리고 한참 지나면 지나가는 말로 한두 개 힌트를 던져주었다. 그 다음부터는 퍼즐 맞추기처럼 기자 스스로 취재력을 발휘해 남북관계를 추적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그가 1995년 대북 쌀지원의 모든 것을 밝힌 것이다. 서울대 사학과(66학번) 출신인 홍실장은 이렇게 말했다.

    “남북문제는 온 국민과 관계된 것이라 백인백색(百人百色)의 의견이 나올 수밖에 없다.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남북문제와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남북문제에는 ‘공작’ 분야가 적지 않으므로 사실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랬을 것이다’는 가상현실을 만들어, 자기 마음대로 의견과 논리를 꿰맞춰 자기만의 남북관과 통일관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잡게 되면 현실과 맞지 않아 남북관계는 삐걱거리게 된다. 이것이 남북문제를 힘들게 한 중요한 요인중의 하나다.

    남북문제는 결코 간단한 주제가 아니다.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묘안을 짜내도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어찌 보면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그 운동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활발하게 살아있는 ‘생물(生物)’이 남북문제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주제일수록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필요하다. 과거를 정확히 기록하고 우리의 오류를 정직하게 분석할 때, ‘팔팔 뛰는’ 남북문제를 제어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길 수 있다.”

    홍실장은 1995년 쌀지원 과정에서 벌어진 일을 소상히 밝혔다. 여기에 당시의 자료와 다른 관계자의 증언을 추가해 1995년 쌀지원이 어떻게 이뤄졌는가를 재구성한다. 북한에 KOTRA 무역관을 설치하려는 노력은 홍실장의 증언을 토대로 정리했음을 밝혀둔다.

    1994년 6월까지 북핵 위기로 미국과 북한 관계는 매우 험악했다. 이런 가운데도 김영삼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다. 그해 7월8일 김일성(金日成)의 사망은 남북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미국과 북한 관계는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한 갈루치 차관보와 강석주(姜錫柱) 부부장간 회담이 10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한국 정부가 김일성 빈소 조문을 금지함으로써 크게 소원해졌다. 김일성 사망을 계기로 미북 관계와 남북관계가 역전된 것이다. 한국 정부는 북한을 다시 회담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4자회담을 전제로 한 각종 지원책 등을 발표하였다.

    1995년의 대북 쌀지원은 그해 3월7일 독일 베를린을 방문중이던 김영삼 대통령이, 동·서독이 통일 조약을 체결한 황태자궁에서 ‘서울과 베를린, 자유와 번영의 동반자’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며, “북한이 원하는 어떤 분야에서도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 곡물을 비롯해, 북한에 필요한 원료와 물자를 장기 저리로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김대통령의 이러한 제의는 그때까지 나온 것 중에서 가장 의미 있고 구체적인 것으로 해석됐으나 북한에서는 곧바로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일본에서 북한에 대해 식량을 지원하겠다는 움직임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은 1992년 11월까지 북한과 수교 예비회담을 여덟 차례나 가졌으나 1993년 북한이 동해로 노동미사일을 발사함으로써 모든 접촉을 중단시켰었다. 1995년 일본은 자민·사회·신당사키가케로 이뤄진 연립여당이 집권하고 있었다. 연립 3여당은 북한과의 수교 협상을 재개시켜야 한다며, 3월28일 와타나베 미치오(渡邊美智雄) 전부총리를 단장으로 한 대표단을 북한에 보냈다.

    방북 사흘째인 3월30일 이들은 김용순(金容淳·68) 조선로동당 대남담당 비서 겸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아태) 위원장과 ‘조·일 협상 재개를 위한 합의서’에 서명했다. 와타나베 일행이 북한을 방문하기 전 일본에서는 ‘북한과 수교 회담을 재개하는 조건으로 일본쌀 100만t을 제공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일본은 재고미(在庫米)를 처리하며 북한을 회담으로 끌어내기 위한 포석으로 쌀지원을 검토한 것이다. 여기서 밀사 역할을 한 사람이 한국계 일본인 요시다 다케시(吉田 猛) 신일본산업 대표였다.

    요시다는 조총련계로 그의 부친인 요시다 시즈오(吉田鎭雄·사망)는 만주에서 항일 투쟁을 함께한 인연으로 김일성과 아주 가까웠다. 신일본산업은 평양의 보통강호텔에 지사를 두고 북한과 무역했다. 요시다는 자민당의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간사장과 가까워, 가토 사무실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요시다는 가토 간사장의 주선으로 연립3당 대표의 방북을 성사시켰다(요시다는 1998년 6월16일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소떼를 이끌고 북한을 방문하기 전에도 중요한 밀사 역할을 했다).

    요시다가 밀사로 뛰는 것이 우리 정보 당국에 포착돼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YS가 승부사 기질이 강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 즉각 김대통령은 “일본보다 먼저 우리가 북한에 쌀을 제공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러한 지시를 내릴 때는 사전에 ‘누가 북한과 접촉할 것인지’ ‘어떤 형식과 경로로 한국 정부의 쌀지원을 대행할 것인지’ 등의 각론이 정리돼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에 쌀을 지원하라는 지시만 내려왔다.

    당시 북한 진출을 바라는 한국 대기업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이 한국 정부의 쌀지원 업무를 대행한다면, 이 회사는 대북 진출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된다. 특히 적극적이었던 기업이 현대·대우·LG·고합 등인데 이 회사의 베이징(北京) 지사들은 앞다퉈 “우리가 한국 정부의 쌀지원을 대행한다”며 바람을 잡았다. 북한과 선을 가진 데이비드 장(張)이나 김양일(金洋一·61·미주 한인식료품상총연합회장)씨 같은 미국계 한국인들도 이 사업을 노리고 베이징에 자주 나타났다.

    한국 회사보다 북한인 접촉이 자유로웠던 이들은 베이징에 나와 있는 북한의 대외경제추진위원회(대경추)와 국제무역촉진위원회(무촉) 주재원 등을 만나 청와대를 팔며 자신의 영향력을 자랑했다. 이들이 거론한 청와대는 구체적으로 말하면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金賢哲)씨 세력인데, 이들은 뭉뚱그려 청와대로 표현했다. 당시 베이징에서 대북 광고사업을 추진했던 한 사업가는 “베이징에는 청와대에서 조깅하고 칼국수를 먹었다는 사람이 즐비했다”고 말했다. 이들의 ‘펌프질’로 베이징에서는 한국이 북한에 아무 조건 없이 100만t의 쌀을 주려고 한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이러한 혼란을 정리해준 것이 권영해(權寧海)씨가 이끌던 안기부였다. 당시는 안기부도 대북 접촉선이 끊어져 있었다. 안기부는 “그냥 쌀을 지원해서는 안된다. 쌀지원을 끊어진 남북관계를 복원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북 쌀지원을, 민간기업에 대행시키지 말고 정부투자기관인 KOTRA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대북 에이전트들에게 경도돼 있었던 김현철씨 세력은 그러한 조건 없이 쌀을 보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현철씨 측은 대북 쌀지원이 여당 지지율을 높여줄 것으로 보고 그런 주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립은 YS가 안기부 편을 들어줌으로써 일단락되고, 대북 쌀지원을 전제로 한 북한과의 접촉은 KOTRA에게 맡겨졌다.

    홍지선 KOTRA 북한실장의 대북 밀사 10년 X파일

    1993년 9월11일 베이징의 차이나 트레이드 호텔에서 만난 남북의 밀사들. 왼쪽부터 한사람 건너 최정근 고민발 회장, 박경윤씨(女), 홍지선 실장, 북한의 박종근씨.

    KOTRA의 홍지선 북한실장은 이미 여러해 전부터 북한측과 접촉을 해왔던 터였다. 홍실장은 동유럽과 소련에 무역관을 개설하고 난 다음인 1989년 도쿄(東京)에서 주목받는 대북 접촉선이던 박경윤(朴敬允)씨를 만났다. 중국에 무역관을 개설한 이듬해인 1991년, 그는 베이징에서 다시 박경윤씨를 만나 “이제 마지막으로 북한에 무역관을 개설하고 싶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그 즉시 박경윤씨는 금강산국제항공 부이사장 직함으로 베이징에 나와 있던 북한인 박종근(朴鍾根·58)을 소개해 주었다. 박종근은 북한에서 방첩과 대(對)전복 업무 등을 하는 정치보위부와 외국으로 공작원을 파견하는 조선로동당 조사부에서 오랫동안 근무해왔다. 당시에는 베이징에 나와 있던 북한인 중에서 남조선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허가받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1992년부터 홍실장은 박종근을 자주 만나 북한 무역관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다 박종근의 소개로 조선로동당 중공업부 부부장(차관급)과 정무원 무역부장(장관급)을 두 차례 지낸 최정근(崔鼎根·78) 고려민족산업발전협회(고민발) 회장과 무역부 부부장을 지낸 이성록(李成錄·69) 국제무역촉진위원회(무촉) 위원장을 만났다. 1993년 한국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때 이미 북한의 경제사정은 극도로 피폐해 있었다. 최정근 회장은 홍실장에게 “남조선이 헐하게 쌀을 팔아준다면, 북조선은 다른 물품을 구상무역 형태로 남조선에 판매할 수 있다”고 넌지시 제의했다.

    홍실장은 무역관을 개설하기 위해 최회장을 만났는데, 최회장은 북한의 식량난 해결 방안을 홍실장에게 부탁한 것이다. 이 만남 직후 홍실장은 북한의 식량사정이 긴박한 것 같다는 보고를 안기부와 통일부에 올렸다. 김일성(金日成)이 죽기 직전인 1994년 홍실장은 베이징의 샹그리라 호텔에서 남북 정부 대표의 만남을 비밀리에 주선했다. 한국에서는 대북 협상 전문가인 안기부의 김용환(金勇煥·작고) 대북 협의보좌관이 나왔고, 북한에서는 대남전문가인 전금철(본명 전금진·70)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이 나왔다.

    전금철은 한국에서 식량을 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러 나왔으나, 김용환 보좌관은 진짜로 북한의 식량사정이 절박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나왔다. 이렇게 속내가 다르니 회담은 성과 없이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 김일성이 사망(1994년 7월8일)하고 이어 조문 파동이 이어지면서, 한동안 남북 채널이 모두 멈춰 섰다. 김영삼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은 이런 가운데 나온 것이었다. 청와대에서 일본보다 먼저 쌀을 지원하는 방안을 찾으라는 지시가 떨어졌으니 홍실장은 다시 북한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최수진 총사장의 협조

    1995년 5월 베이징으로 날아간 홍실장은 조선족 사업가로 성공한 흑룡강성민족경제개발총공사(흑민경) 총사장 최수진(崔秀鎭)씨를 만났다. 최수진씨는 김일성과 아주 가까운 인물로 대단한 민족주의자였다.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큰 그는 민족문제 차원에서 홍실장과 의기가 투합했다. 홍실장은 “한국 정부도 쌀을 제공할 의사가 분명히 있으니 북한에게 협상을 하자고 제의해달라”고 부탁했다. 며칠 후 최총사장은 평양을 방문해 홍실장의 뜻을 전하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6월초 북한의 삼천리총회사 측에서 KOTRA 무역관으로 “만나자”는 연락을 보내왔다. 이것이 YS의 제의 이후 북한이 보인 최초의 반응이다. 베이징으로 달려간 홍실장은 조선국제무역은행 총재 출신으로 삼천리총회사의 총사장을 맡고 있는 김봉익(70)을 만났다. 홍실장은 김봉익 총사장에게 한국 정부가 쌀을 제공하는 것이 분명하니 당국자 회담을 갖자고 제의했다.

    김봉익은 한국의 민간기업과 청와대에 연결돼 있다고 큰소리를 치고 다닌 교포들이 “한국이 100만t을 지원할 수 있다”고 떠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김봉익은 즉각 “당신도 쌀 주러 왔는가? 누구의 위임인가?”라며 떠보았다. 그리고는 “얼마만큼 줄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홍실장이 “얼마나 지원받고 싶은가”라고 되묻자, 그는 “한 장은 돼야지. 일본에서도 100만t을 지원한다는데 피를 나눈 형제는 그 이상이어야지…”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홍실장은 북한이 기대치가 너무 높다는 것과 대북 에이전트들이 물을 흐려놓았다는 것을 간파하고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당국자 회담을 해야 1만t이라도 북한에 갈 수 있다”고 못박았다. 이때 한국 측의 대북 접촉라인에서 또 혼란이 일어났다. 한발 뒤로 물러났던 김현철씨 세력이 다시 “당국 회담 없이 쌀을 주자”고 치고 나오며 교포 에이전트를 베이징에서 활발하게 가동시킨 것. 이들은 6월27일로 예정된 지방선거를 의식하고 이러한 움직임을 펼쳤다. 이 시기 ‘김현철 맨’인 김기섭(金己燮) 안기부 운영차장은 안기부에서 불법으로 조성해 관리해오던 비자금 257억원을 한나라당의 강삼재(姜三載) 사무총장에게 보내 지방선거용 자금으로 활용케 했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지난 9월호 신동아의 ‘국정원 양우공제회 미스터리’ 기사 참조).

    이같은 혼란을 다시 한번 정리해준 것이 권영해씨 세력이었다. 이 시기 안기부는 권력 핵심인 김현철씨를 추종하더라도 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세력과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세력으로 쪼개져 있었다. 당시 권력의 심장부에 있었던 한 인사는 “안에서는 안기부의 비자금을 깔고 밖으로는 북한에 쌀을 지원하면, 6·27 지방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이 김현철씨 측의 판단이었다”고 말했다. 홍실장은 통일부의 김영일 교류협력국장으로부터 “당국자 회담을 전제로 쌀지원을 추진하라”는 분명한 지침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 삼천리총회사에서 당국자 회담을 준비하자는 연락이 왔다. 며칠후 홍실장은 남북의 대표 명단을 받아보고 깜짝 놀랐다. 북한 대표는 1981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부위원장을 시작으로 1985년 조평통 서기국장, 1994년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차관급)이 된 대남전문가 전금철인데, 한국 대표는 이석채(李錫采·57) 재정경제원 차관이기 때문이었다. 이차관은 재경원의 전신인 경제기획원에서만 근무해온 전형적인 경제통으로 김현철씨와는 경복고 동문이다.

    홍실장은 ‘북에서는 노동당 통전부의 차관급 대남 전문가가 나오니 우리도 대북 전문가인 송영대(宋榮大) 통일부 차관을 대표로 내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두 차례 건의했다. 그러나 이미 김현철씨 측의 입김이 작용한 듯 “이것은 경제회담이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는 대답이 날아왔다. 홍실장은 방향을 바꿔 북한측에 대해 “한국에서는 경제 전문가가 오니 북한에서도 경제 전문가로 대표를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노련한’ 북한은 전금철의 직함을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대경추) 고문’으로 바꾸는 것으로 대응했다.

    합의서 공개 안한 대표단

    대경추는 북한이 나진-선봉 경제특구에 외국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만든 외곽기관이므로, 한국의 KOTRA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대경추 위원장은 김정우(金正宇·60)인데, 대경추에는 고문이라는 직책이 원래 없었다. 홍실장은 다시 서울에 “대경추는 북한 정부의 공식기구가 아니며 대경추에는 고문이라는 직함도 없다. 그런데 우리 정부의 차관이 북한의 외곽 단체 고문과 마주 앉는 것은 ‘등가성(等價性)’을 놓치는 것이다. 회담을 재고하라”고 건의했으나 타박만 들었다. 이 시기 안기부와 통일부 등 대북 전문부서에서도 “왜 이석채 차관이 대표로 가야 하는가”란 문제를 제기했으나, 김현철 세력은 “경제문제니 이차관이 가는 게 좋다”고 우겨 관철시켰다.

    이로써 말만 당국자 회담이지 실제로는 비당국자 회담이 베이징에서 열릴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홍실장의 카운터 파트너는 북한 대경위의 이성덕(李成德·54) 참사였다. 홍실장은 이성덕에게 “한국이 줄 수 있는 쌀은 10만t 정도일 것 같다”고 떠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이성덕은 통 크게 나왔다. “그거 너무 적소. 남조선 쌀값은 국제시세보다 5∼6배 비싸지 않소. 차라리 그 돈으로 태국산 쌀을 사주면 어떻겠소. 아니면 중국에서 옥수수를 사주면 100만t이 넘을 텐데….”

    이석채 차관은 6월16일 베이징으로 출발했는데, 이때 한국 정부는 이차관의 출국 사실을 숨겼다. 본격적인 협상은 다음날부터 베이징의 샹그리라 호텔에서 시작되었다. 한국 정부는 이 협상을 ‘남북차관협상’으로 불렀다. 차관급인 남북의 당국자가 공식으로 마주 앉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6월21일 남북은 합의서를 작성했는데 이차관은 합의서에 대한민국 재경원 차관으로 사인했다. 반면 전금철은 대경추의 고문으로 서명했다. 이 문제 때문에 합의서는 공개되지 않았다.

    그후 이 합의서는 사라져버렸다. 통일부의 남북회담사무국은 남북협상 과정에서 나온 각종 합의서를 보관하는데, 쌀지원 합의서는 이곳에 보관돼 있지 않다.

    남북 접촉에서 등가성 상실은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북한은 1949년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할 때부터 계속해서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한반도의 정통성은 북한에 있으니, 남한 정부는 일개 단체에 불과하다는 것이 북한의 시각이다. 그런데 무려15만t의 쌀을 주면서 한국은 북한의 외곽단체와 사인했다. 1995년의 쌀 협상 합의문은 북한의 일관된 주장을 증명하는 자료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일설에 따르면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김현철씨 측은 이 문서를 통일부에 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 협상에서 남북은 한국산 쌀 15만t을 제공하는 창구를 KOTRA와 삼천리총회사로 지정했다. 두 회사가 쌀을 주고받으려면 실행 계약서를 체결해야 한다. 계약서는 합의서를 근거로 만든다. 계약서를 만들기 위해 홍실장이 합의서 사본을 달라고 하자, 한국 대표단은 “각하한테도 보여드리지 못했는데…” 하며 화를 냈다.

    그러나 대표단은 회담에 나오기 전에 김현철씨 세력으로부터 “일본보다 먼저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난 6월25일 이전에 한국에서 생산한 쌀을 북한에 보내야 한다”는 지침을 받았었다. 6월25일은 지방선거를 이틀 앞둔 날이다. 홍실장은 “6월25일 이전에 쌀을 보내려면 계약서를 써야 할 것 아니오. 합의서 없이 어떻게 계약서를 만듭니까”라고 항변했다.

    그제서야 한국 대표단은 구두로 합의서 내용을 불러줘, 홍실장은 이를 받아 적을 수 있었다. 염려했던 대로 전금철은 대경추 고문으로 서명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합의서가 작성된 바로 그날 한국에서는 ‘북한에 쌀을 보내기 위해 전국의 방앗간에서 나락을 도정(搗精)하기 시작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러한 보도는 즉각 팩스로 베이징으로 입수되었다. 그러자 삼천리총회사 측은 홍실장에게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았는데 이런 보도가 나와도 되는 거요” 하며 은근히 야료를 부렸다.

    계약서는 KOTRA와 삼천리총회사의 대표가 서명해야 한다. KOTRA의 박용도(朴鎔道·66) 사장이 베이징으로 날아왔다. 그런데 한국 측이 6월27일 지방선거를 위해 6월25일 이전에 쌀을 보내려고 매우 서둔다는 것을 눈치챈 삼천리총회사 측이 돌연 여유를 부리기 시작했다. ‘받아가는’ 처지인데도 계약서 작성을 차일피일 미룬 것이다. 다급해진 것은 ‘주는’ 쪽인 KOTRA였다.

    한국전쟁 발발 45주년인 6월25일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따라서 서울에서는 토요일인 24일 강원도 동해항에서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거창하게 쌀 대북 수송식을 열겠다며 빨리 계약서를 작성하라고 채근했다. 6월24일이 되자 동해항에서는 최초로 쌀을 싣고 북한으로 갈 남성해운의 씨아펙스호(선장 김예민)가 바쁘게 2000t의 쌀을 실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이홍구(李洪九) 총리와 박재윤(朴在潤) 통산부 장관, 최인기(崔仁基) 농림수산부 장관 등이 헬기를 대기시킨 채 베이징에서 작성된 계약서가 공수돼 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계약서가 도착하면 이들은 헬기를 타고 동해항으로 날아가 쌀 지원선 출항식을 개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날 삼천리총회사 측은 끝끝내 계약서 작성에 응하지 않았다. 코너에 몰린 홍실장은 25일 새벽 베이징 호텔의 김봉익 총사장 방으로 전화를 걸어 “찾아가겠다”고 알렸다. 아침 6시쯤 호텔 방으로 찾아간 홍실장은 대충 옷을 주워 입고 나온 김봉익에게 박사장과 자신의 서울행 비행기표를 내놓고, “보시오. 계약이 되든 안되든 우리는 오늘 서울로 돌아갑니다. 계약을 하지 못하면 나는 정부가 합의한 것을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목이 날아가겠지만, 당신도 평양에 돌아가면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오”라고 쏘아붙였다.

    동해항에 쏟아진 뇌성벽력

    당시 서울-베이징 간에는 대한항공기가 하루 한 편씩 다녔다. 홍실장은 25일 배가 출항하도록 계약서를 작성하라는 지침을 받았기 때문에 24일 이전에 계약이 성사될 것으로 예상하고, 25일 서울행 비행기 표를 사놓았었다. 두 시간 후 김봉익 총사장 측에서 귀빈루 호텔에서 계약서를 쓰자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서울행 비행기 출발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홍실장은 자신이 미리 만들어둔 계약서를 들고 가 박용도 사장과 김봉익 총사장에게 사인할 것을 요구해 이를 관철시켰다.

    남북은 똑같이 한글을 사용하지만 문서를 만드는 어법은 다르다. 예를 들어 남측 문서에는 ‘남북’ ‘상호’라고 표현하는 것을 북측 문서에는 ‘북과 남’ ‘호상’으로 적는다. 그러나 이날 양측은 홍실장이 만들어둔 것에 서명했기 때문에, 북측 계약서에도 ‘북과 남’이니 ‘호상’이란 단어 대신 ‘남북’과 ‘상호’란 표기가 들어가게 되었다. 비행기 출발시간이 너무 급해 박용도 사장은 김봉익 총사장과 악수도 하지 못하고 비행장으로 달려갔다. 박사장이 김포공항에 도착한 순간 기다리고 있던 이총리 등은 헬기를 타고 동해항으로 이동했다.

    대북 쌀지원 수송식은 동해항에서 오후 5시20분쯤 열렸는데, 이 행사에는 동해시 인근에서 긴급히 끌어모은 1000여 주민들이 참석했다. TV는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출항식 장면을 방영했다. 20분쯤 행사를 진행하고 있을 때 갑자기 동해항 일대에 뇌성이 울리며 소나기가 쏟아졌다. 기묘한 천지의 조화였다. 이런 가운데 마스트에 태극기를 단 씨아펙스호는 12노트(약 시속 23㎞)의 속도로 북한을 향해 출항했다. 이날 밤 각 방송사는 북한이 남침했던 6월25일 씨아펙스호가 한국 쌀을 싣고 떠났다며, 밤 늦게까지 속보를 내놓았다.

    그러나 씨아펙스호는 북한으로 가지만, 북한으로부터 ‘들어오라’ ‘어느 항구로 오라’는 통보도 받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출항했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정처 없이 출항한 씨 아펙스호가 공해를 통과해 북한 영해에 도달할 즈음인 26일 오후 북한은 청진항으로 들어오라고 통보했다. 이날 저녁 저녁 5시쯤 씨아펙스호는 청진항 방파제 부근에 도착했다.

    다른 나라 항구에 들어갈 때는 배에서 가장 높은 마스트에는 입항하는 나라의 국기를 달고, 배꼬리에는 선박이 속한 나라의 국기를 다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씨아펙스호에는 인공기가 없었다. 씨아펙스호는 국기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라는 지침을 정부로부터 받지 못한 채 떠났으므로, 국제 관례대로 마스트에는 어떤 국기도 달지 않고 배꼬리에 태극기만 걸고 있었다. 그런데 씨아펙스호를 청진 내항으로 안내하기 위해 도선(導船)을 타고온 북한 관계자가 “태극기를 내리라”고 요구했다. 이어 북한은 인공기를 갖고와 마스트에 인공기만 게양할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옥신각신하며 하룻밤을 보냈다. 선장은 본사에 국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냐며 물었으나 정부의 지침이 없었으므로 본사는 답을 줄 수 없었다. 27일 오전 씨아펙스호는 태극기는 내리고 인공기만 단 채 내항에 들어가 쌀을 하역했다. 그런데 하역하던 오전 10시45분쯤 삼천리총회사의 박헌명 과장이 청진항에 도착해, “베이징에서 합의한 것은 북한항에 들어온 남조선 선박은 남북한 양쪽의 국기를 모두 올리지 않는다였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원님 떠난 뒤에 나발 분 격’이었다.

    씨아펙스호가 인공기를 강제로 게양한 채 청진항에 들어가 쌀을 내렸다는 소식은 지방선거가 열린 27일 전국에 퍼져나갔다. 뇌성벽력과 함께 소나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출항식을 가져 ‘불행’을 예고했던 씨아펙스호는 28일 오후 2시쯤 청진항을 출항해,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린 29일 밤 부산항에 도착했다.

    이로써 대북 쌀지원으로 지방선거에서 이겨보려던 김현철 세력의 꿈은 무산되고, 오히려 성급한 대북 쌀지원을 비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기자는 김현철씨 측근에게 대북 쌀지원과 관계된 질문을 하고 답변을 기다렸으나 김씨측은 반론을 보내오지 않았다). 보수세력은 원산지도 표시하지 않은 쌀을, 태극기는 내리고 강제로 인공기만 게양한 채 하역한 게 말이 되냐며 정부를 성토했다.

    서울과 베이징 사이에는 매일 비행기가 다닌다. 그러나 평양과 베이징 사이에는 월요일에만 항공편이 있다. 합의서에 서명한 21일은 수요일이니, 북한 대표단은 다음 월요일인 26일까지 베이징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베이징에 머무는 사이 이들은 KOTRA와 계약서를 작성하고(25일) 다음날 평양에 들어갔다. 평양에 도착한 다음에야 이들은 씨아펙스호가 북한 영해 근처까지 와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청진항으로 들어오라고 통보했다.

    그리고 부랴부랴 박헌명 과장을 청진으로 보냈다. 북한은 교통사정이 열악하다. 그런 이유로 박과장은 27일 오전 10시30분쯤 청진항에 도착했는데, 그 사이 청진항 관계자는 태극기는 내리고 인공기만 강제로 게양한 씨아펙스호를 끌고 들어와 하역 작업을 시작한 것이었다. 성급한 쌀 수송선 출항이 인공기 강제 게양이라는 불행을 낳았으니 이는 ‘인재(人災)’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YS 정부의 경쟁심을 자극했던 일본의 쌀지원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을까. 북·일 수교라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쌀 지원을 추진한 일본은, 6월23일 아태 부위원장 이종혁(李種革·66)을 단장으로 한 북한대표단을 일본으로 불러들였다. 호리 고스케(保利耕輔) 자민당 정조회장 대리를 단장으로 한 일본측은 29일 북한측과 ‘일본쌀 30만t을 무상으로 지원한다’는 합의서에 서명하였다. 이 합의서에 이종혁은 아태 부위원장으로 서명하였다. 그러나 일본 역시 정부 대표가 아닌 정당 대표가 서명하였으므로 등가성 시비는 제기될 수 없었다. 일본은 이 회담을 당국자 회담으로 부르지도 않았다.

    인공기 게양 사건으로 여론이 크게 나빠진 29일 밤 나웅배(羅雄培) 통일부총리는 기자 간담회를 통해 “씨아펙스 호의 인공기 게양은 합의사항 위반이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나부총리는 합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공개하지 않았다. 이어 나부총리는 두 번째로 쌀을 싣고 북한으로 간 한진해운 소속의 돌진호(선장 김수배)에 대해 회항지시를 내렸다. 돌진호는 청진항 동남방 70해리 공해상에서 회항해 30일 오후 동해항으로 돌아왔다.

    즉각 인공기 게양에 대한 북한측의 사과를 받아내라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이 임무도 홍실장에게 하달되었다. 베이징으로 날아간 홍실장은 파트너인 대경위의 이성덕을 만나 사과문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성덕은 “아니, 항구도 정하지 않았는데 배부터 보내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화를 냈다. 홍실장은 “그렇다고 해서 인공기만 올리고 들어가게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반격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따지면 한국 측이 너무 서둘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이성덕을 설득할 수 없었다. 이때 홍실장은 흑민경의 최수진 총사장이 평양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최수진 총사장의 사무실이 베이징호텔에 있었는데, 그 사무실에서는 평양과 바로 전화가 된다.

    홍실장은 그 사무실에서 평양에 있는 최총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북측의 사과문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최총사장의 노력으로 북측은 전금철 명의로 된 사과문안을 보내왔는데 문안을 받아본 YS 정부는 사과 내용이 미흡하다고 퇴짜를 놓았다. 홍실장은 최총사장에게 다시 더 분명한 사과문을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6월30일 전금철은 “남측의 첫 선박이 우리측 항구에 입항하면서 서로 합의사항을 이행하는 과정에 아래 일꾼들의 실무적 착오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면서 앞으로 호상 그런 일이 없도록 하자는 데 대해 언명한다”고 쓴 사과문을 보내왔다.

    이날 북한은 우리의 경찰청장에 해당하는 사회안전부장 백학림(白鶴林) 명의로 된 ‘신변안전보호각서’도 함께 보내왔다. 사실 한국은 이 각서를 받은 후 선박을 북한에 보냈어야 했다. 그러나 빨리 배를 보내 지방선거에서 이기겠다는 생각에 이 각서를 챙기지 않았다. 김현철 세력의 정치우선주의는 국민의 안전을 도외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홍지선 KOTRA 북한실장의 대북 밀사 10년 X파일

    1998년 2월 비료-농산물 구상무역을 논의하기 위해 베이징의 아시아호텔에서 만난 남북대표. 왼쪽부터 한 사람 건너 최수진 총사장, 홍지선 실장, 북측의 민경연 부회장, 민경연 서기장(오른쪽 두명은 북측 실무자).

    7월1일 나부총리가 이 사과문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함으로써, 대북 쌀지원은 7월4일 재개되었다. 이때부터 북한을 성토하던 여론은 정부를 공격하며 남남갈등으로 비화하기 시작했다. “왜 김정일한테 쌀을 주느냐”고 비판하던 보수세력은 시간이 흐르자 “식량을 지원하는 마당에 북한에 억류된 86우성호 선원을 송환해야 한다”며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한 것.

    86우성호는 85우성호와 함께 중국 연안에서 조업하다, 중국 어업지도선에 나포돼 4만달러의 벌금형을 부과받았다. 중국은 벌금을 받아낼 요량으로 85우성호는 계속 억류시킨 가운데 86우성호만 풀어줘 벌금을 마련해오게 했다. 중국 산둥반도를 떠난 86우성호는 1995년 5월30일 오후 12시40분쯤 백령도 부근을 지나다, 북한 해군 경비정의 사격을 받고 나포되었다.

    7월16일 정부는 베이징에서 열린 제2차 쌀회담에서 86우성호 선원 송환을 제기했으나 북측은 답을 주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정부는 2차 회담부터는 당국자 회담이 아닌 ‘쌀회담’으로 고쳐 불렀다는 점이다. 전금철이 대경추 고문으로 서명한 것을 현실로 받아들인 조치였으나, 정부는 왜 쌀회담으로 이름을 바꾸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86우성호 선원을 송환하라’는 여론이 들끓는 중인 7월24일 옌지(延吉)에서 전도활동을 하던 순복음교회 소속의 안승운(安承運) 목사가 북한으로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리고 8월6일 삼선비너스호 억류사건이 터져나왔다. 삼선비너스호는 쌀 5000t을 싣고 8월1일 청진항에 들어갔다. 그런데 청진항의 하역 능력이 달려 6일까지 항내에 머물렀는데, 이때 1등 항해사인 이양천씨가 청진항 사진을 찍었다. 그러자 북측은 이항해사가 찍은 필름을 빼앗고 6일 하역을 끝낸 배까지 억류하였다. 이어 8월10일로 예정된 3차 쌀회담에 응하지 못한다고 발표함으로써 대북 쌀 수송은 또 한번 위기를 맞게 되었다.

    삼선비너스호 억류사건은 한국 측의 조급함이 단초가 돼 터져나온 씨아펙스호 인공기 사건에 대해 북측이 사과문을 써준 데 대한 보복 성격이 짙었다. 홍실장은 다시 이성덕과 마주 앉아 “청진항은 군항이 아닌 민항(民港)인데 왜 사진을 찍는 것이 문제가 되느냐. 빨리 배와 선원을 풀어주라”고 항의했다. 이성덕은 “민항이라도 공화국 법은 청진항 같은 특정지역에서는 사진을 못 찍게 돼 있다. 이양천이 우리 법을 어긴 것부터 시인하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실무협상을 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는 “오는 8·15는 광복 50주년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의미 있는 경축사를 해야 하니, 그때까지는 삼선비너스호의 억류를 반드시 풀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또 시일을 정해놓으니 쫓기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칼자루’를 쥔 이성덕은 “씨아펙스호 사건 때는 우리가 사과문을 보냈으니, 이번에는 남조선에서 사과문을 줘야 한다”며 ‘이양천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형법 몇 조 몇 조를 어겼음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사과문안을 보여주며 이석채 차관의 서명을 받아오라고 요구했다.

    문안을 받아본 홍실장은 아연 실색했다. 문안대로라면 이양천 항해사는 간첩죄를 범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북한은 배와 다른 선원은 내려보내도 이양천씨는 내려보내지 않고 구금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후 두 사람은 본국의 지침을 받아가며 다시 협상에 들어가 문안 타결에 합의했다. 이 합의에서는 8·15 전에 이씨의 신병을 인수하려는 청와대 측의 조급함이 큰 역할을 했다. 때문에 이석채 차관이 서명한 사과문에는 이양천씨가 북한법을 어겼다는 것을 인정하는 문구가 들어갔다.

    대한민국 정부의 대표가 북한의 법을 인정하는 사과문을 만들어 북한의 외곽단체 대표에게 보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애초의 합의문부터 잘못 서명했으므로, 한국은 꼼짝 못하고 이석채 차관 명의로 된 사과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사과문 작성은 진통이 매우 심했기 때문에 8월14일 저녁무렵에야 합의문안이 나왔다. 14일 밤 늦게 홍실장은 이차관이 서명한 사과문을 이성덕에게 전했고, 이성덕은 자정 무렵 이를 팩스로 평양에 보냈다. 그리고 50회 광복절 날이 밝아오는 15일 새벽 4시쯤 북한은 이양천씨가 포함된 삼선비너스호를 석방해주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전혀 엉뚱한 발표를 했다. 한국 정부는 ‘12일 밤 정부는 이차관 명의로 이양천씨가 북측의 법을 어겼다는 것을 인정하는 유감 전문을 보내고, 13일 북한이 이를 수용해 삼선비너스를 풀어주었다. 삼선비너스호는 14일 포항항에 입항했으며 그에 따라 대북 쌀수송은 13일부터 재개하게 하였다’라고 발표한 것이다.

    삼선비너스호 억류사건이 풀림으로써 다시 문제는 86우성호 선원 송환과 안승운 목사 납치사건으로 집중되었는데, 특히 86우성호 선원을 송환하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대북 쌀 수송이 거의 끝나갈 때쯤인 9월27일 베이징에서 제3차 쌀회담이 열렸다. 한국 측은 86우성호 선원 석방을 요구했으나 북한측은 거절했다. 당국 회담에서 성과가 없으면 모든 일은 홍실장에게 돌아온다. 홍실장이 “왜 86우성호 선원을 돌려보내지 않느냐”고 물으니, 이성덕은 “86우성호 선원은 군부가 관리하고 있어 우리는 개입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YS의 돌변

    10월7일 코렉스부산호의 동해항 출항을 끝으로 대북 쌀수송은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국민 지지도는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10월15일 김영삼 대통령은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더 이상 남북대화는 없다”고 밝혔다. 하루아침에 남북관계가 온탕에서 냉탕으로 변했음을 선언한 것이다.

    10월17일 뜻밖의 사건이 휴전선 부근에서 발생했다. 이날 남방한계선 3㎞ 남쪽 임진강으로 인민군의 정찰조 두 명이 침투했다가 한 명은 사살되고 한 명은 북으로 도주했다. 북한 정규군이 휴전선을 침투한 것은 심상찮은 조짐이었다.

    1주일 후인 10월24일에는 조선로동당 대외연락부 소속 공작원 두 명이 충남 부여에서 나타나 한 명은 사살되고 한 명은 생포되었다(부여간첩 김동식 사건). 당연히 한국에서는 ‘쌀을 주는데 북쪽에서는 간첩을 침투시켰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YS 정권의 대북정책은 완전히 그로기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YS 정권을 ‘조롱하려는 듯이’ 북한이 살려주었다. 12월22일 북한은 삼천리총회사를 통해 전금철 명의로 된 86우성호 선원 석방 통고문을 보내고, 26일 판문점을 통해 사망자 세 명의 유해와 함께 생존 선원 전원을 보내준 것이다. 북한은 종종 국민 지지도가 떨어진 한국 정권을 냉온탕 요법으로 다룬다. 북한은 86우성호 선원을 석방함으로써 자기 스스로 냉탕으로 뛰어든 YS 정권에 뜨거운 물을 퍼부어주었다.

    정치인들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은 현실을 타개하는 것은 언제나 전문가들의 몫이다. 남북관계가 계속 경색되면 한국에게 유리할 것이 없다. 해가 바뀐 1996년 봄 안기부는 홍실장에게 대화 창구를 마련해줄 것을 부탁했다. 홍실장은 흑민경 최수진 총사장에게 중개를 요청했다.

    최수진 총사장은 싱가포르에도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의 주선으로 북한의 전금철이 싱가포르로 날아왔다. 한국에서는 안기부의 김용환 대북 협의보좌관과 홍실장이 날아갔다. 전금철은 1996년에도 한국으로부터 쌀을 받기 위해서 나온 듯했다. 그러나 YS가 “더 이상 쌀 지원은 없다”고 선언한 바 있기 때문에, 김보좌관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못하고 남북 대화의 중요성만 강조했다.

    홍실장은 전금철을 별도로 만나 KOTRA가 대북사업을 벌인 고유의 목적인 북한 무역관 설치 문제를 거론했다. 전금철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인지 협조적으로 나와, 홍실장과 전금철은 무역관 개설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그러나 MOU는 구속력이 없다). 싱가포르 접촉을 끝낸 후 홍실장은 많은 신세를 져온 최수진 총사장에 보답하기로 했다.

    북한 남포에는 황해제철소가 있는데, 이곳은 유연탄을 제때에 수입하지 못해 가동률이 형편없이 떨어져 있었다. 이 황해제철소의 대외경영권을 최수진씨가 갖고 있었다. 당시 한보그룹이 베트남에 철강공장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홍실장은 한보 측에게 “베트남에 진출할 생각이 있다면 북한과도 사업해보라”고 권유했다. 이로써 한보와 황해제철(최수진) 사이에 협력문제가 심도 있게 논의돼 나갔다.

    강릉 잠수함 사건으로 또다시 위기

    때마침 북한 대경추의 김정우 위원장은 나진-선봉지구에 외국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대규모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었다. 홍실장은 대경추 측에 “나진-선봉지구에 KOTRA 무역관을 설치하면 다른 외국기업들도 많이 따라 들어올 것”이라며 설득해 동의를 받아냈다. 1995년 쌀제공의 악몽은 끝나가고 북한의 필요에 따라 북한에 무역관이 설치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돼 갔다.

    그런 와중인 1996년 9월18일 강릉시 안인진리에서 북한군 정찰국 소속의 상어급 잠수함이 침투했다가 좌초되는 초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정규군을 태운 잠수함 침투에 깜짝 놀란 한국군은 제1야전군을 동원해 근 한 달간 잠수함에서 빠져나온 공비 소탕작전에 들어갔다. 이렇게 되니 남북관계는 더욱 꽁꽁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여론은 북한 성토 일색이 되었고, YS는 여기에 편승해 대북 강경노선을 견지하며 북한이 사과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게 되었다.

    북한 무역관 개설 노력이 ‘도로아미타불’이 되겠다고 생각한 홍실장은 12월 베이징으로 날아가 대경추 부위원장 김문성(金文成·59·현재는 무역성 부상을 맡고 있다)을 만나, “빨리 잠수함 사건에 대해 사과 성명을 발표케 하라. 이대로 가면 남북 교류는 물론이고 다른 나라와의 교류도 끊어진다. 나진-선봉에 투자할 나라가 없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김문성은 홍실장의 충고를 주의 깊게 들었다.

    한보사건으로 무역관 개설 무산

    12월29일 북한은, 북한 주민은 듣지 못하는 대남용 라디오 방송인 평양방송을 통해 동해안 잠수함 침투사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하는 외교부 대변인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로써 암울했던 북한 무역관 설치는 다시 가능성이 엿보이게 되었다. 해가 바뀐 1997년 3월 북한의 대경추는 그들의 대화 파트너인 홍실장을 평양으로 초청했다. 홍실장은 농산물 계약재배와 김책제철소에 대한 한국 기업 투자 문제 등을 논의했다. 그리고 평양이나 나진-선봉지구에 KOTRA무역관을 개설하자는 의향서(protocol)를 작성해 김문성과 서명했다(의향서도 구속력은 없다).

    실낱같이 이어져가던 북한 무역관 개설 꿈은 그후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간 한보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깨어졌다. 부실기업 한보가 대출을 받기 위해 여야의 유력 정치인에게 돈을 준 사실이 밝혀지면서 파문이 일파만파로 번져나간 것. 1997년 3월17일 한보사건 연루자에 대한 첫 재판이 열렸는데, 비등한 비판 여론 때문에 3월27일 대검 중수부는 한보사건 재수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4월7일에는 국회에서 한보청문회가 개최되었다.

    그로 인해 최수진 총사장과 한보를 연결시킨 홍실장의 행보에도 브레이크가 걸렸다. 홍실장은 한보를 북한과 연결시켜준 것이 특혜가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될 때까지 대북 접촉을 완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한보사태는 그해 말 김현철씨를 구속 기소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한국경제는 IMF 관리체제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가 출범했다. 홍실장은 북한에 무역관을 개설할 생각으로 베이징으로 날아가 새롭게 북한의 대외접촉 창구로 생겨난 민족경제연합회(민경연) 측과 접촉했다. 홍실장은 “KOTRA가 비료를 제공해줄 테니, 북한은 농산물을 재배해 한국에 판매하는 구상무역을 하자”고 제의해 호응을 받았다. 그런데 DJ 정부는 바로 북한과 차관급 회담을 추진해 4월11일 베이징에서 남북 차관회담을 갖게 되엇다. 이 회담에 한국에서는 정세현(丁世鉉) 통일부 차관이 대표로 나왔고, 북측에서는 전금철이 ‘정무원 참사’라는 직함을 달고 대표로 나왔다.

    정무원은 한국의 내각에 해당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참사라는 직함은 북한의 정무원에는 없다. 정무원 참사는 굳이 한국식으로 옮긴다면 무임소 장관쯤에 해당할 텐데, 이러한 자리가 북한의 정무원에는 없다(무임소 장관도 정부직제에 있어야 한다). 1995년 당국자회담을 하면서 등가성을 상실했던 과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은 북한 정무원의 유령 직함을 가진 사람과 다시 회담하는 실수를 반복한 것이다. 이후 북한은 남북 접촉을 할 때마다 ‘참사’라는 유령직함을 남발하며, 비정부기구 대표를 내세워 한국의 정부 대표를 상대하는 관례를 만들어갔다.

    이 회담에서 남측은 비료 무상제공을 전제로 남북 이산가족 만남을 주장했으나 북측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남측이 비료를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밝힘으로써 홍실장이 추진한 비료-농산물의 남북 구상무역안이 깨져나갔다. 북측은 ‘공짜’로 먹을 방법이 있는데, 굳이 구상무역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8년에는 북한에 비료가 제공되지 않았다.

    이듬해인 1999년 6월15일 연평해전이 일어나 북한 해군이 참패했다. 그 직후인 6월22일 베이징에서 남측의 양영식(梁榮植) 통일부차관과 북측의 박영수(朴英洙)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국장을 대표로 한 차관회담이 열렸다(이 회담에서도 북한은 비정부기구의 부국장을 내보내 한국의 차관과 대면하였다). 이 회담에 앞서 한국은 북한의 시비(施肥) 시기를 맞춰준다며 비료 10여 만t을 무상으로 지원했다. 양영식·박영수 회담은 사전 비료지원에 대한 대응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이 회담은, 차수를 바꿔가며 두 차례나 열렸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북한이 유령 직함을 내세워 한국 정부 대표를 상대하는 것이 이제는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 8월12일 시작된 제7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남측의 정세현 통일부 장관을 만난 북측대표 김령성은 ‘내각 참사’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다. 내각은 과거 정무원으로 부르던 것을 이름만 바꾼 것인데, 앞서 지적했듯 북한 내각 조직도에는 내각 참사라는 직함이 없다. 김령성의 진짜 직함은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부회장이다(얼마 전까지는 국장이었다).

    사회단체의 회장도 아닌 부회장을 대한민국 정부의 장관이 동급으로 만나주는 현실은 매우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국 언론과 정부는 남북대화가 이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에 집착해, 이를 공개적으로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 9월19일부터 시작된 40만t의 대북 쌀지원도 정세현 장관과 김령성 참사간의 합의에 따라 이뤄진 것이다.

    1999년 대북 비료지원이 이뤄진 후 홍실장은 자력으로 북한에 무역관을 개설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였다. 북한이 사회단체의 부회장·국장급을 내세워 한국의 장차관을 상대하며 식량과 비료를 받아가는 현실이 반복되는 한 북한은 무역관 개설에 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홍실장이 북한 무역관 개설에 집착해온 이유는 “북한에 대한민국 여권을 가진 사람이 상주하고 있는 것이 남북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다”는 믿음 때문이다. 상주기관이 없는 상태에서의 교류는 단것만 빼어먹고 험악하게 헤어지는 것이 반복돼 오히려 남북관계가 나빠진다. 한국에서는 남남갈등의 회오리가 거세게 일어나는 것이다.

    ‘진짜 햇볕정책’ 펼쳐야

    홍실장은 북한에 상주 무역관을 개설하려면 북한 쪽에서 먼저 무역관을 개설하겠다는 의지를 가져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올해 초 마지막 ‘공작’을 펼쳤다. 그는 옌지(延吉)로 날아가 조선족 자치주 국제공공관계협회 김영만 회장에게 협조를 구했다. 김영만 회장은 북한에 한국 상주기관이 있는 것이 남북관계 개선에 훨씬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홍실장의 요청을 받은 김회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홍실장은 김영만 회장을 통한 편지의 답을 듣지 못한 상태에서 KOTRA를 사직했다. 그는 “남북관계는 정상적인 루트를 통해 발전해나가야 한다. 당국자 회담은 정부 대 정부로 하고 직급도 맞추어야 한다. 정략적인 차원에서 남북문제에 접근하면 우리는 백전백패한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짧은 햇볕정책’이 실패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단편적인 지원을 통한 남북협력보다는 남북이 서울과 평양에 상주기관을 두고 협력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해야 한다. 가상현실을 그려놓고 펼치는 대북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 상주기관 건설을 추진하는 진짜 햇볕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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