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호

“김일성은 동면요법, 향기요법으로 장수 꿈꿨다”

김일성장수연구소 출신 한의사가 말하는 ‘황제건강법’

  • 박은경·자유기고가 siren52@hanmail.net

    입력2002-10-06 12: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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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8년 귀순한 북한 출신 한의사 석영환씨가 최근 한의원을 개원했다.
    • 그는 일명 ‘김일성장수연구소’로 불리는 청암산연구소에서
    • 연구원 생활을 했던 북한내 인텔리. 남북한 한의학을 접목시켜
    • 한의학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는 석씨로부터 그가 보고 들은
    •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건강관리법에 대해 알아보았다.
    “김일성은 동면요법, 향기요법으로 장수 꿈꿨다”
    올해초 모 방송의 건강 프로그램 ‘잘 먹고 잘 사는 법’이 장안의 화제가 됐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유기농산물의 인기가 치솟자 축산농가와 육류 유통관계자들 사이에 “방송에서 채식을 강조하는 바람에 애꿎게 된서리를 맞았다”는 볼멘소리까지 흘러나왔다. ‘잘 먹고 잘 사는 법’은 음식 가려먹기를 통해 건강하게 오래 사는 법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대한 뜨거운 호응은 삶을 최대한 연장하고픈 인간의 원초적 장수(長壽) 욕망이 반영된 결과다.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꿈꾸며 수많은 방사(方士)들을 삼신산(三神山)으로 보내 불사(不死)의 선약(仙藥)을 찾아 헤매게 한 진시황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북한에도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장수를 위한 일명 ‘김일성장수연구소(이하 장수연구소)’가 비밀리에 가동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을 의식해 ‘기초의학연구소’란 공식 명칭을 붙인 장수연구소는 산하에 동의과학원(일명 동의연구소), 청암산연구소, 아미산연구소 등 여러 분과연구소를 거느리고 있다.

    청암산연구소와 동의과학원 연구원 출신 한의사 석영환(38)씨에 따르면 장수연구소의 핵심은 동의과학원이다.

    “철저히 베일에 가려진 장수연구소는 분과연구소마다 맡은 분야가 각기 다르다. 양·한방 기초의학에서 한약재, 식품에 이르기까지 연구분야가 세분화돼 있고, 김일성이 먹고 쓰는 생활필수품을 따로 재배·조달하는 기관이 있다. 쌀, 과일 등 북한 자체 농산품 관련연구와 함께 외국산 수입 농산품을 다루는 곳이 아미산연구소다. 내가 잠시 근무했던 청암산연구소는 한약재의 효능과 약리작용 등을 연구한다. 이외에 침 전문연구소 등이 따로 있다.”

    기초의학연구소 산하 분과연구소가 정확히 몇 개인지, 이들 기관에 종사하는 인원이 몇 명인지, 그 내부에서 어떤 연구들이 진행되는지에 대해 한때 몸담았던 석씨조차 제대로 모를 만큼 장수연구소는 비밀에 싸여 있다. 그가 동의과학원으로 옮기기 전 근무했던 청암산연구소의 인원은 대략 300명 정도였다.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건강상태를 살피고, 만수무강과 장수를 위해 과학적으로 효능이 입증된 자연요법과 양·한방 비법을 연구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주민 수백명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한 곳도 장수연구소다. 석씨는 “임상실험 대상자는 김일성 부자와 나이·체질이 같고 유사한 질병을 가진 남성들 중에서 가려뽑았다. 그 전에 동물을 대상으로 약리·생리학적 검사를 미리 했다”고 밝힌다. 동물과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은 장수연구소 명령에 의해 한방쪽은 고려의학병원에서, 양방쪽은 적십자병원에서 진행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봉화진료소에서 김일성 부자를 진료했다. 그들의 고혈압과 당뇨·중풍을 한방으로 다스릴 수 있도록 심혈관계 질병에 대한 한약재의 약리작용과 치료법을 연구하는 게 연구사(연구원)인 석씨의 임무였다.

    ‘위대한 어버이 수령’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최전선인 장수연구소에서 석씨가 경험한 ‘황제건강법’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에 앞서, 아무리 유능한 의사(혹은 한의사)라고 해도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없는 장수연구소에 그는 어떻게 몸담게 됐을까. 장수연구소는 김정일의 지휘 아래 운영되는 곳이다. 이곳 연구원이 되려면 학교 성적은 물론이고 출신성분에 대한 철저한 검증절차를 통과해야 한다. 석씨의 출신성분은 그의 부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북한 호위사령부는 남한의 대통령 경호실에 해당하는 곳으로 1호위부는 김일성, 2호위부는 김정일을 경호했다. 내가 귀순할 당시 아버지는 2호위부 상좌(국군 대령급)로 있었다.”

    노화 속도 줄이기에 진력

    석씨는 북한 최고의 평양의과대학 고려의학부(한의학부) 출신이다. “북한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면 성적순으로 병원에 배치된다. 북한 병원은 모두 국가가 운영하는데 시설과 규모에 따라 구분된다. 성적이 최상위여야만 소위 말하는 대형 종합병원에 배치받을 수 있다.” 그 가운데 장수연구소 연구원이 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장수연구소에서 ‘88호 병원’(군병원)으로 전보되면서 대위이던 석씨가 소령급인 진료부장으로 승진한 것만 봐도 그의 지위를 알 수 있다.

    88호 병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은 역으로 그의 출신배경이 문제가 됐다. “장수연구소는 김정일 측근의 핵심 권력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의 가족·친지 등은 못 들어간다. 가까운 그들끼리 모의해 반정치세력을 구축하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김정일 호위부대에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검열에 걸려 연구소를 나와야 했다.”

    6개월간 장수연구소에 근무하며 그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장수건강법은 숨쉬기부터 목욕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고 계획적으로 연구됐다. 장수연구소의 연구결과에 따른 비법을 충실히 실천한 ‘김일성 건강법’의 핵심을 살펴보자.

    “김일성 부자의 건강관리에서 가장 중요시한 건 환경적 요인이다. 집과 정원, 그가 마시는 공기 등 각종 생활환경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 즉 외적 환경과 건강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철저히 했다. 거기에다 국가 최고 책임자란 지위와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중요시했다. 스트레스 억제만을 집중연구하는 연구사들이 따로 있었다.”

    장수연구소가 목표로 한 ‘장수’의 기본개념은 노화는 막을 수 없지만 그 속도를 줄이자는 것이다. 핵심은 노화 및 스트레스 방지에 있다. 신진대사가 원활하도록 하여 몸속의 노폐물을 신속히 배출함으로써 노화를 방지하고, 외적 자극요인인 스트레스와 공해 등을 차단함으로써 장수를 돕는 것이다.

    석씨는 “귀순 직후 국가 관련기관에서 딱 이틀 생활하고 나니까 아침에 목에서 시커먼 가래가 나왔다. 남한의 공해가 이 정도로 심각한가 싶어 놀랐고, 폐암에 걸릴까봐 겁이 났다. 엄청난 공해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암에 안 걸리고 잘 사는가 싶어서 또 한번 놀랐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생전의 김일성이 실제 거주한 집은 묘향산이 있는 향산에 위치했다. 평양에서 자동차로 몇 시간 거리에 있는 그 집은 공기 좋고 경치가 빼어난 산속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 건강에 더없이 좋고 쾌적한 장소였다. 남한보다 상대적으로 공해가 덜한 북한에서도 청정지역만을 골라 거주했던 김일성은 계절별로 전 지역을 이동하며 생활했다.

    “여름엔 백두산 고산지대나 북쪽 삼지연 별장 등 서늘한 곳으로 옮겨 생활하고, 겨울이면 주로 남쪽 지방의 온천에 머물렀다. 북한의 명소로 손꼽히는 곳엔 어김없이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별장이 있다. 김정일이 북한에서 시찰이나 현지 지도를 나간 장소를 분석하면 그의 별장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 계절 따라 옮겨 다니는 별장 주변의 농촌마을이 현지 지도 현장이 되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호흡기 건강과 인체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 장수연구소가 제안한 것이 ‘동면요법’이다. 동면요법은 계절을 불문하고 야외에서 잠을 자며 폐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는 건강법이다. 석씨는 동면요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름엔 서늘한 산골짜기에서 자도록 하고 겨울철 기온이 영하 10℃라도 밖에서 자게 했다. 다만 겨울엔 얼굴만 내놓고 몸을 이불로 감싸 체온을 유지하도록 신경 썼다. 스트레스나 피로가 심한 사람이 동면요법을 실천하면 다음날 일어날 때 몸이 가뿐하고 기분도 상쾌한 것을 느낄 수 있다. 동면요법으로 신체를 단련하면 감기도 안 걸린다.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꾸준히 동면요법을 실천하면 몸이 건강해진다. 야외에서 잠 잘 때는 소나무나 잣나무 향기가 좋고 음이온이 많은 숲속이 제격이다. 면역력을 키우는 데는 이 방법이 최고다.”

    김일성이 거주하던 집과 별장은 특별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석씨에 따르면 김일성 초대소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전자파를 막기 위해 건물 외벽을 동(銅)으로, 내부는 흙벽으로 마감해 음이온을 발생하도록 설계됐다. 집안은 사시사철 은은한 향기가 나도록 장치했다. 향기요법엔 자연산 허브 또는 산삼꽃을 주로 썼다. 산삼꽃은 ‘공기를 통해 마시는 보약’이라 할 수 있는데 장수연구소에서 개발한 특이식물이다.

    화초에 산삼을 비롯해 사향이나 우황, 웅담 등의 농축액을 주입하면 일년 내내 향기로 농축액을 발산한다. 허브 향기는 사람의 뇌를 자극해 엔돌핀 물질의 생성을 촉진한다. 향기요법에 쓰이는 향은 정기적으로 바꿔줘야 자극이 지속된다. 한 가지 향기를 너무 오래 맡으면 감각이 무뎌져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석씨는 “북한 고위층이나 부유층 자녀들은 흙이 전혀 없는 아스팔트 생활을 한다. 그 자녀를 맡아 돌보는 일부 탁아소는 일부러 시골에서 흙을 퍼다 바닥에 깔아놓고 아이들을 뛰놀게 한다. 흙에서 뒹굴며 냄새를 통해 음이온을 섭취하게 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먹는 음식 또한 철저히 무공해 식품이다. 쌀 등 각종 농산물을 재배할 때 화학비료나 농약을 절대 사용하지 않는 대신 풀을 썩혀 퇴비로 만들어 토질을 보존한다. 육류는 들판에서 방목해 키운 가축만 사용한다. 모든 채소와 과일, 생선은 산지에서 직송해온 무공해 청정 식품만 식탁에 오를 수 있다.

    특히 산나물을 즐긴 김일성은 북한에서도 산세 좋기로 이름난 평남 양덕이나 백두산 등 고산지대에서 직접 채취한 것을 평양까지 공수해 먹었다. 김일성 부자의 먹을거리와 관련한 모든 업무는 재배 및 육종학을 연구하는 장수연구소 산하 ‘8호 작업반’에서 도맡고 있다고 한다.

    김일성 건강을 지키는 먹을거리 중 빼놓을 수 없는 게 식수다. 석씨에 따르면 남한에서 흔히 말하는 약수는 북한 약수와 다르다. 장수연구소는 김일성 부자가 마실 샘물과 약수를 철저히 구분했다. 샘물은 남한의 약수에 해당하며 식수로 쓰인다. “샘물보다 미네랄이 풍부한 북한 약수는 맛이 찝찔하고 씁쓸해서 그냥 마시기 힘들기 때문에 치료용으로 사용된다. 샘물과 약수는 깊은 산속에서 퐁퐁 솟는 것을 쓰는데, 자연 여과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세균 검사를 해보면 깨끗하다. 김일성이 거주하던 향산에도 샘물과 약수 구할 데가 많아 매일 물을 길어다 먹게 했다. 그 물 역시 8호 작업반에서 퍼왔다.”

    7월5일 한의원인 ‘웅선크리닉’을 개원한 석씨는 한약을 달일 때 수돗물을 절대 쓰지 않는다. 대신 생수를 사서 사용한다. “이미 사망한 김일성이 먹을 약은 아니지만 그래도 양심상 수돗물은 못 쓰겠다. 마음 같아선 물 맑고 공기 좋은 산속에 한의원 차려놓고 그곳의 약수로 한약을 달이고 싶다.”

    장수연구소는 김일성에게 계절마다 적절한 보약을 복용토록 했다. “여기 사람들은 보약을 봄·가을에 먹는 것으로 알지만 북한 동의학계는 보약을 철마다 먹어야 하는 것으로 본다. 김일성 부자가 철마다 먹던 보약은 탕제(탕약)뿐만 아니라 환(丸), 젤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제조됐다. 거부감이 적고 먹기 편하도록 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고안해낸 것이다.”

    특별한 약, 태고환과 유심환

    보약과 더불어 여름철 보양식으로 김일성이 즐겨 먹은 것이 단고기(개고기)다. 북한에선 ‘단고기 국물이 삼복더위에 발잔등에만 떨어져도 보약이 된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개고기를 보양식의 으뜸으로 친다. 그러나 북한의 단고기는 고위층만 맛볼 수 있을 뿐 일반 주민은 엄두를 못낼 만큼 고급 음식이다. 석씨는 “사람 먹을 식량도 없는데 어떻게 개까지 먹여 키우나? 어렵사리 개를 키운다 해도 도둑맞기 일쑤여서 주민들이 단고기를 먹을 기회는 거의 없다”고 한다.

    김일성 부자를 위해 장수연구소가 특별히 개발한 약이 태고환(太古丸)과 유심환(柔心丸)이다. 산삼을 주원료로 몇 가지 한약재를 발효시켜 만든 태고환은 탕제로 만들면 추출액이 휘발돼 약효가 떨어지기 때문에 환으로만 제조한다. 태고환은 노화 방지와 노폐물 배설, 중풍 예방에 도움이 되며, 특히 중풍 초기에 먹으면 후유증을 억제한다. 성인병을 다스리고 인체 면역력을 증강시키는 태고환은 김일성이 겨울철에 복용하던 약이다. 유심환은 스트레스 해소에 효능이 탁월한 약으로 동·식물성 한약재가 주원료로 쓰인다. 김일성은 가슴이 답답하고 어지럼증을 느끼는 등 특별히 신체에 이상이 없는데도 나른하고 기운 없을 때 유심환을 먹었다고 한다.

    석씨는 그의 한의원을 찾는 환자들한테서 주문을 받아 태고환과 유심환을 만든다. “태고환은 약재가 비싸 가격이 수백만원에서 1000만원까지 하기 때문에 웬만해선 만들지 않는다. 유심환은 한달 분 가격이 30만∼40만원 정도여서 찾는 환자가 가끔 있다.”

    보약 복용, 향기요법, 보양식 섭취 등을 통한 건강법 외에 보양과 질병 치료를 겸한 것이 김일성 특유의 목욕법이다. 장수연구소는 김일성의 몸 상태에 따라 한방제재를 달리해 목욕물에 첨가했다. “피부는 제2의 호흡기다. 목욕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약재가 몸에 스며들도록 한 것이다. 김일성은 나이가 많아 피부가 건조하고 각질화가 많이 진행됐는데, 이를 완화하기 위해 한약재 중 유분피를 쓰거나 자연산 약재에서 추출한 여러가지 물질을 목욕에 사용하도록 했다. 피부 산화를 막기 위해 장뇌삼 추출물도 썼다. 피부가 산화하면 탄력성이 저하되고 검버섯이 많이 생길 뿐만 아니라 상처가 났을 때 쉽게 아물지 않는다. 비누도 피부를 매끄럽게 해주는 한약재를 첨가한 무공해 비누만 썼다. 장수연구소는 한약재 냄새가 거슬릴 것을 우려해 냄새를 제거한 비누를 특별히 제조했다.”

    기쁨조는 스트레스 해소 도구

    “김일성은 동면요법, 향기요법으로 장수 꿈꿨다”

    한방병원 설립이 꿈이라는 한의사 석영환씨

    장수연구소가 특히 신경 쓴 부분은 스트레스 해소. 북한에서 신격화된 존재로서 헐벗고 가난한 인민을 먹여 살리는 일이 시급했던 김일성의 업무 스트레스는 엄청난 것이었다고 석씨는 말한다. “남한에선 기쁨조가 김일성·김정일의 성 상대로 부각됐지만 원래 김일성을 위한 기쁨조의 중요한 역할은 다른 데 있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김일성을 즐겁게 해주는 게 그들의 임무다. 장수연구소가 김일성에게 조언한 성생활은 나이 먹어도 일주일에 두세 번 관계를 갖는 게 좋다는 것이다. 그 정도면 신진대사와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권고한 것이다.”

    석씨에 따르면 기쁨조는 17세부터 20대 초반의 미모가 빼어난 여성으로 천진난만한 소녀교육을 철저히 받은 여성들이다. “김일성이 가는 곳마다 기쁨조 두세 명이 따라붙어 희희낙락하는 사이 걱정 근심을 잊게 했다. 마치 할아버지와 손녀 관계처럼 기쁨조 여성이 김일성에게 반말을 하고 투정도 부리고 재롱을 떨며 사탕 사달라고 떼쓰기도 했다. 한번 웃을 때마다 뇌세포가 활성화되기 때문에 일부러 김일성을 많이 웃게 하기 위해 기쁨조와 함께 생활하도록 한 것이다.”

    김일성은 평소 골프와 낚시를 즐겼지만 장수연구소는 그의 나이를 감안해 산책을 많이 하도록 했다. 특히 새벽녘에 소나무숲을 기쁨조와 함께 산책하도록 권했다. 이 산책은 호흡기 관리뿐 아니라 스트레스 해소에도 더없이 좋은 방법이다.

    “김일성이 나이가 들자 많은 업무를 김정일이 대신 처리했다. 김일성이 피곤할까봐 비서가 옆에서 서류를 읽어주면 듣는 식으로 업무를 처리했다. 특히 김일성이 사망하기 얼마전부터는 김정일이 업무를 도맡아 보며 민감한 부분은 감추고 줄여서 보고하도록 당 간부들에게 지시했다. 혹시 충격을 줄까 걱정했던 것이다. 경호원에게는 김일성이 밤늦게까지 일을 하면 말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만일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을 땐 책임을 묻겠다고 해서 김일성은 말년에 북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챙기지도 못했다.”

    석씨에 따르면 김일성·김정일 부자는 최측근 일부를 제외하곤 대다수 사람들을 믿지 못했다. 때문에 실무적으로만 사람을 대하는 데서 오는 짜증이 극심했다. 이런 짜증을 해소하는 법 중 하나가 경호팀 가족을 초대소로 불러 행사를 여는 것이었다. 석씨는 아버지가 김정일 호위부대에 복무한 덕분에 몇 차례 행사에 초대된 경험이 있다.

    “경호팀 가족을 초청할 때 자녀는 초등학생으로 제한했다. 어린이일수록 애국심과 충성심을 고취하기 좋기 때문이다. 초대소 행사는 집안 행사처럼 조용하고 조촐하게 열렸는데 남한의 운동회와 야유회를 섞어 놓은 형태였다. 여러 조로 편을 갈라 운동경기를 하거나 음식품평회를 열었다. 품평회에서 만든 음식은 김일성 부자가 직접 시식했는데 솜씨 좋은 경호원 부인에겐 ‘니 색시 음식 잘한다. 상 줘라’하면서 과일이나 술, 옷감을 하사하기도 했다. 초대소 행사가 있기 전이면 경호원 집집마다 음식품평회에서 뽐낼 요리실습을 하느라 바빴다.”

    석씨 가족은 평양에서도 특별한 구역에서 특별 대접을 받으며 생활했다. 호위사령부 소속 가족은 울타리를 친 사택에 거주한다. 경비가 삼엄해 일반인의 접근조차 없는 곳이다. 부모가 국가보위부·호위총국·중앙당 세 곳에 복무하는 자식끼리의 결혼은 금지된다. 이 또한 핵심 권력기관의 가족들이 뭉쳐 반정치세력을 형성할까 늘 불안해했기 때문이다.

    1998년 10월14일 강원도 철원군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귀순한 석씨는 남한에서 한의사 자격증을 따기 전까지 ‘왜 남한에 내려와서 이 고생을 자초했나’ 싶은 생각에 종종 후회하기도 했다. 선택받은 극소수의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김일성장수연구소 연구원 출신이자 북한 최고위층의 자식으로 갖가지 특혜를 누리던 그는 왜 귀순한 것일까?

    “북한은 생필품을 비롯해 모든 물자가 부족한 사회다. 때문에 아무리 의사라도 좋은 약재는 힘 있고 나중에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환자에게 처방한다. 돈 없고 배경 없는 사람은 제대로 된 약을 쓰기도 어렵다. 중앙당 고위 간부라 해도 북송 재일교포나 외화벌이 등으로 돈이 많은 사람한테 굽실거리는 곳이 바로 북한사회다. 이론상으로만 공산주의 사회이지 삶의 기저엔 자본주의가 흐르고 있다.”

    일찍이 북한사회 현실에 눈뜬 석씨는 외화벌이를 목표로 의대에 진학했다. “해외로 유학을 가거나 군병원에 복무하면 해외 병원에 파견나갈 기회가 생겨 달러를 만질 수 있다. 그런데 아버지가 김정일 호위부대에 있으니 비밀이 밖으로 새나갈까봐 가족을 절대 해외로 내보내지 않았다. 때문에 동유럽 의과대학으로 유학을 가려던 희망이 깨졌다.”

    석씨에 따르면 아버지는 당이 하라는 대로만 하는 원칙주의자이자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부자간 갈등이 심했다. “그렇게 살면 안된다. 군복 벗고 나와봐라. 누가 아버지한테 밥을 주나 옷을 주나. 좋은 자리에 있을 때 좀 챙겨라 했더니 아버지는 되레 ‘요즘 대학생은 그래서 문제야!’라고 호통을 쳤다.”

    1996년 북한은 최악의 식량난을 겪었다. 그때 석씨는 처음으로 심각한 위기감을 피부로 느꼈다. “당시 평양 밖으로 나가보면 인민이 들고 일어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민심이 흉흉했다. 만일 폭동이라도 일어나면 우리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타도대상 1호다 싶어 엄청난 위기감을 느꼈다.”

    서민생활과 담 쌓고 살다시피 한 석씨는 대학 때 처음으로 친구집을 방문했다 깜짝 놀랐다. “평범한 집안 출신인 그 친구의 집에 들어서자 이게 사람 사는 집인가 싶었다. 밥상을 내왔는데 목구멍에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음식이 형편없었다. 이때부터 북한사회와 정치제도에 회의를 느꼈다.”

    해외유학에서 돌아온 사람들 얘기를 듣고 석씨는 더욱 북한사회에 실망했다. “외국인들이 ‘꼬레아’라며 아는 체를 하면 처음엔 김일성 장군이 해외에서까지 이렇게 위대하구나 싶어 으쓱했다고 한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들이 말한 꼬레아가 남한이어서 너무 부끄러웠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이렇게 여러 경로로 남한사회 소식을 접하면서 귀순 결심을 굳혔다.”

    석씨는 남한에 가더라도 북한에서 배운 동의학(한의학)으로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귀순 후 서러운 생활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실업자 신세니 비참했다. 그래도 북한에선 대위 계급의 군의관이자 한의사였는데….” 국가기관의 보호를 벗어나 사회로 나온 석씨는 제일 먼저 통일부로 가서 한의사 면허를 달라고 했다. 그러나 북한에서의 자격은 인정할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의사 면허증을 딸 수 있게 시험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하니까 그것도 안 된다고 했다. 한의대에 진학해 공부하라는데 교육내용 및 방식이 북한과 차이가 있어 막막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의사 면허시험을 볼 수 있는 실력 테스트 관문을 통과한 석씨는 두번의 실패 끝에 올해초 한의사 면허를 따냈다.

    “북한 대학에선 한방을 전공해도 의사들과 똑같이 양의학을 배운다. 다만 강의시간이 조금 짧을 뿐이다. 졸업 전 6개월 동안 양방 임상실습 과정까지 거친다. 남한에서도 당연히 북한처럼 한의사 시험을 칠 때 양·한방을 다 알아야 되는 줄 알고 맨처음 면허시험 공부할 때 양방부터 공부하기 시작했다. 엉뚱한 짓을 한 셈이다.”

    석씨는 북한에는 양방을 모르는 한의사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한의사라도 한방 약리는 물론 양방 약리까지 의과대학 시절에 다 배운다는 것. 석씨는 의과대학 임상실습 때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받았다. 귀순 전 그가 진료부장으로 있던 88호 병원은 한방병원이 아닌 일반병원으로 당시 운구과(응급실)를 맡았다.

    석씨에 따르면 북한 동의학(한의학)과 남한 한의학은 차이점이 많다. 북한에선 한의학도 양의학 못잖게 객관화된 통계와 과학적 검증을 중시한다. 과학적으로 한방의 효능과 우수성을 증명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양의학과 접목한 한의학 연구결과도 방대하게 축적돼 있다. 이런 배경에 힘입어 김일성장수연구소에서 양·한방을 아우르는 각종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는 것이다.

    “남북한의 한약재엔 큰 차이가 없다. 다만 북한 동의학은 천연 자연물을 한약재로 쓰는 외에 세포공학을 이용해 새로운 약재를 개발하는 연구가 활발하다. 천연 한약재를 특수 방법으로 숙성시키거나 특정 성분을 분리해 제2의 약재로 만들어 사용하는 기술도 발달해 있다. 북한에선 급성질환은 양방으로 치료하고 만성질환의 70∼80%는 한방으로 치료하는 게 보편화돼 있다. 예를 들면 만성간염이나 결핵, 고혈압, 당뇨 같은 질병은 한방으로 치료한다. 한방은 약물에 내성이 없어 만성질환 치료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북한 동의학은 양의학을 응용해 매우 과학화돼 있다. 그런데 남한에선 양·한방의 벽이 두터운 것 같다. 내가 북한에 있을 당시의 추세대로라면 머잖아 북한에선 양·한방 구분이 없어질 것이다.”

    88호 병원에서 함께 근무한 동료이자 애인 송명순(28·당시 중사)씨와 동반 귀순한 석씨는 남한에서 그녀와 결혼해 올해초 건강한 아들을 얻었다.

    장차 한방병원을 설립하는 게 꿈이라는 석씨는 남북한 한의학 비교연구 등 한의학 분야에서 ‘우리나라’에 뭔가 기여할 수 있는 한의사가 되고 싶다며 의욕을 내비친다. 이미 사회봉사 계획까지 세워둔 그는 “북한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못 먹어서 몸은 약하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흔한 비만, 당뇨, 고혈압 등 성인병을 앓는 환자는 많지 않다. 인스턴트식품에 든 첨가물 중 합성화학물질은 심장병 등 혈액관계 질환에 특히 나쁜 영향을 미치므로 자제하는 게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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