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 대한민국 정부를 대신해 북한에 15만t의 쌀을 보내준 것은 정부투자기관인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였고, 실무자는 이 회사의 홍지선(洪之璿·57) 북한실장이었다. 홍실장은 무려 9년간 KOTRA 북한실장으로 근무하며 대북 쌀지원을 비롯한 숱한 대북 사업을 추진해왔다. 최근까지도 북한에 KOTRA 무역관을 개설하는 문제를 심도 있게 추진해왔는데, 그는 9월16일자로 KOTRA에서 퇴직했다.
1980년대 후반 한국 정부는 동유럽 국가를 시작으로 소련·중국과 국교를 맺는 북방정책을 펼친 바 있다. 수교를 맺기 전 한국은 이 나라에 KOTRA 무역관을 개설하는 데 성공했다. 동유럽과 소련·중국에 무역관을 개설하는 데 첨병 역할을 한 사람이 홍실장이다. 1990년 중국 무역관 설치를 끝으로 한숨을 돌린 그는 1993년 북한실장이 돼 최근까지 북한에 KOTRA 무역관을 개설하는 일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남북문제는 팔팔 뛰는 ‘生物’
북한실장 재임중 그의 별명은 ‘자물통’이었다. 북한문제를 다루는 기자 치고 홍실장에게 접근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홍실장은 남북문제를 묻는 질문에 “모르겠는데”로 일관했다. 그리고 한참 지나면 지나가는 말로 한두 개 힌트를 던져주었다. 그 다음부터는 퍼즐 맞추기처럼 기자 스스로 취재력을 발휘해 남북관계를 추적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그가 1995년 대북 쌀지원의 모든 것을 밝힌 것이다. 서울대 사학과(66학번) 출신인 홍실장은 이렇게 말했다.
“남북문제는 온 국민과 관계된 것이라 백인백색(百人百色)의 의견이 나올 수밖에 없다.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남북문제와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남북문제에는 ‘공작’ 분야가 적지 않으므로 사실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랬을 것이다’는 가상현실을 만들어, 자기 마음대로 의견과 논리를 꿰맞춰 자기만의 남북관과 통일관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잡게 되면 현실과 맞지 않아 남북관계는 삐걱거리게 된다. 이것이 남북문제를 힘들게 한 중요한 요인중의 하나다.
남북문제는 결코 간단한 주제가 아니다.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묘안을 짜내도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어찌 보면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그 운동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활발하게 살아있는 ‘생물(生物)’이 남북문제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주제일수록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필요하다. 과거를 정확히 기록하고 우리의 오류를 정직하게 분석할 때, ‘팔팔 뛰는’ 남북문제를 제어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길 수 있다.”
홍실장은 1995년 쌀지원 과정에서 벌어진 일을 소상히 밝혔다. 여기에 당시의 자료와 다른 관계자의 증언을 추가해 1995년 쌀지원이 어떻게 이뤄졌는가를 재구성한다. 북한에 KOTRA 무역관을 설치하려는 노력은 홍실장의 증언을 토대로 정리했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