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호

김정일, 푸틴에게 항모·수호이27·디젤잠수함 요구하다 거절당했다

김정일 방러단 선발대가 말하는 북·러 비밀거래 내막

  • 글: 최영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yi@donga.com

    입력2002-10-04 13: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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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8월23일 북한과 러시아의 정상회담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회담에서 러시아는 철도 연결에 대한 희망을 강력하게 나타냈고, 북한은 과도한 무기제공을 요구했다. 러시아는 북한의 요구를 딱 잘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 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하기 열흘 전인 8월10일경 북한 보위부 요원 12명이 선발대로 러시아에 파견되었다. 이 선발대 요원 대부분이 40대였고 해·공군의 대좌급 무기 전문가였다. 선발대 책임자는 최진철(가명) 소장(한국군 준장에 해당). 최소장은 북한인 러시아 벌목공 관련 업무 때문에 극동 러시아 지역에 자주 파견되던 인물이다.

    이 선발대는 기차를 타고 북·러 국경선에 있는 두만강역을 거쳐 러시아의 하산역으로 넘어왔다. 이후 선발대는 러시아 정보기관 요원과 함께 김위원장의 방문지를 미리 돌며 안전상태를 점검하고 일정을 조정했다. 기자는 이 선발대와 접촉한 한 인사를 통해 언론에 드러나지 않은 김정일 위원장의 방러 일정과 북·러 회담의 전말을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수호이 27기 공장 견학

    김정일 위원장은 8월20일 오전, 북·러 접경도시인 하산역에 도착해서 절친한 콘스탄틴 폴리코프스키 러시아 극동지구 전권대표의 영접을 받으며 방러 일정을 시작했다. 김위원장은 둘째날인 8월21일 군수산업도시인 콤소몰스크 나 아무르로 향했다. 그는 이곳에서 수호이 27전투기 공장(KNAAPO)을 2시간30분 동안 견학했다. 전투기공장에서 김위원장은 설계-조립-프레스 등 주요 부서를 돌아보았다. 그는 수호이 27기 조종석에 직접 올라 주요 기기 작동 방법과 성능을 묻고 부품을 눈여겨 살피기도 했다.

    전투기 공장 견학을 끝낸 김위원장 일행은 아무르스키 조선소를 방문해서 건조중인 디젤 잠수함 바르샤반카를 시찰했다. 일행은 이날 저녁 아무르강 샤르골섬에 있는 보이스카우트, 걸스카우트 야영장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김위원장은 러시아 어린이들의 공연을 관람했다. 그는 러시아 청소년과 기념촬영을 한 뒤, 러시아 어린이 100명을 북한에 초청했다.



    김정일, 푸틴에게 항모·수호이27·디젤잠수함 요구하다 거절당했다

    지난 8월23일 열린 북러정상회담은 별 성과 없이 끝났다.

    다음날인 8월22일, 김위원장 일행은 콤소몰스크 나아무르에서 360km 남쪽에 자리잡은 하바로프스크를 방문했다. 오전 9시 김위원장이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했을 때 도시 상공에는 수호이 27·31·35기가 곡예비행을 하고 있었다. 김위원장 일행의 방러를 환영한다는 의미였다. 하바로프스크 시내에서 김위원장은 북한에서 공수해온 무장 메르세데스 벤츠를 타고 각 방문지에 들렀다. 첫 방문지는 하바로프스크 화력발전소 옆에 있는 ‘달힘파름’제약회사. 이 회사는 야생 천연물질로 폐결핵과 소화기 질환 치료약을 만드는 기업이다. 김위원장은 이 회사와 기술을 제휴해 백두산에서 나는 버섯 같은 천연물질로 의약품을 생산하는 방안을 연구하라고 수행단에게 지시했다.

    시내로 다시 돌아온 김위원장 일행은 ‘아모르 카벨’이라는 통신케이블 공장에 들렀다. 이곳은 수중케이블을 만드는 곳이다. 이 공장에서 김위원장 일행은 전기 케이블 기술 제휴문제를 협의했다. 아모르 카벨에서는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일행은 이어 하바로프스크 시내에 있는 ‘김유경 거리’를 방문했다. 김유경 장군은 항일빨치산 활동을 벌인 독립운동가다. 김위원장 일행은 아무르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는 러시아정교회 성 이노켄트 이르추크 교회도 방문했다.

    김정일 5개 사항 요구

    김위원장은 8월23일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여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미 국내외 언론보도에도 나왔듯이 회담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관심을 모았던 북한 미사일 발사 유보에 대해서도 김위원장의 구체적인 입장 표명이 전혀 없었다. 지난해만 해도 양국 정상은 모스크바에서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재확인하는 모스크바 공동선언을 발표하는 등 굵직한 성과를 거둔 바 있다.

    회담 직후 러시아는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앞으로도 책임 있는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강조했고, 북한은 ‘러시아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이미 지난해 ‘전략적 동반자 관계’수립 과정에서 거론되었던 내용이다. 철도연결 문제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발표가 나오지 않았다.

    김정일 방러단 선발대를 만난 앞서의 인사는 회담이 이렇게 된 것은 “푸틴의 성급한 철도연결 제안과 김정일의 과도한 무기제공 요구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김위원장을 만나자마자,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한반도 철도를 연결하자”는 말부터 꺼낸 것으로 알려졌다. 정상회담 직전에 열린 극동개발 대책회의에서도 푸틴 대통령은 “철도연결이 내가 김위원장을 이곳으로 초청한 이유”라며 “이 사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면 중국에 빼앗기게 될 것이다. 중국보다 좋은 조건으로 사업을 따와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

    사실, 김정일 방러단 선발대가 러시아에 들어오던 8월10일 무렵만 해도 양국 정상회담은 확정되지 않았던 사안이다. 러시아 국내 사정 때문에 푸틴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날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이 당시에는 우세했다. 더욱이 김정일 위원장의 방문은 지난해처럼 국빈 방문이 아니라 비공식 방문이었다. 러시아쪽 초청자도 푸틴 대통령이 아니라 콘스탄틴 폴리코프스키 러시아 극동지구 전권대표였다. 따라서 푸틴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날아온 것은 상당히 무리한 행보였다.

    푸틴이 목을 맬 정도로 대륙철도와 한반도철도(TKR)를 잇는 문제는 러시아와 중국이 경합을 벌이고 있다. 중국으로 연결하는 노선은 경의선과 중국횡단철도(TCR)를 잇고 이를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에 연결하는 방안이다. 이 노선을 따를 경우 신의주와 중국의 단둥(丹東)을 연결하고,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자우랄리예를 거쳐 모스크바에 이른다. TSR을 통해 극동과 시베리아를 개발해야 하는 러시아로서는 이럴 경우 실익이 거의 없다. 러시아는 어떻든 한반도 철도를 두만강 건너 러시아의 하산역으로 이어서 극동 러시아와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노선을 관철해야 한다.

    김위원장이 러시아의 이런 이해관계를 놓칠 리 없다. 김정일 방러단 선발대는 러시아측의 이런 속내를 파악하고 김위원장에게 “좀 무리하게 요구해도 먹힐 것 같다”는 보고서를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 선발대 보고서를 토대로 김위원장은 푸틴에게 다섯 가지 요구 사안을 내놓았다. 첫째는 러시아 극동 함대의 잠수함 기지가 있는 볼쇼이 카멘항에 정박중인 퇴역 항공모함(민스크급, 5만t)을 달라는 것이었다. 핵추진시설 등 핵심 시설은 떼내고 껍데기라도 제공하라는 요구였다. 또다른 요구사안은 △디젤 잠수함 4척 △수호이 27 전투기 1개 편대(4대) △SS미사일(500km미만) 공동생산(극동지역의 생산공장에 북한 기술자를 파견하여 기술을 제휴하고 공동 생산) △러시아제 전투헬기 제공 등이었다.

    조금은 터무니없는 김위원장의 요구에 푸틴 대통령은 “그러면 무력을 계속 증강하겠다는 말이냐?”며 거절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 회담은 철도연결 등 기존에 진행되던 사안을 빼고는 합의내용이 없이 결렬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런 정황은 푸틴 대통령이 회담 직후 내놓은 발표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는 “양측은 그동안 여러 수준에서 다양한 논의를 해왔으며 이번에 사업의 여러 부분에 대해 다각적으로 논의했다”는 수준으로만 언급했다. 정상회담 직전 그가 “철도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며 강한 의욕을 보인 점에 견주면 회담 성과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샤라포프 보고서

    그러나 북한과 러시아의 철도연결 문제는 지난해 북·러 정상회담 이후 전문가 사이에 이미 세세한 부분까지 합의가 되어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실무 사항은 이미 집행 직전까지 논의가 성숙한 상태다. 2001년 11월27일 러시아연방철도부(MPS) 부소장 샤라포프(S.N. Sarapov)가 일본 니가타에서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북한과 러시아가 진행한 철도 협력 세부 사항을 알 수 있다. 이 보고서를 보면 러시아는 TSR과 TKR을 잇기 위해 북한 철도 현대화 작업 지원 계획을 이미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양국은 그 노선도 하산역-두만강역-청진-원산-평강역을 잇는 구간으로 거의 확정한 것으로 알려졌다(경원선에 이어짐). 이 보고서의 핵심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러시아 철도부 산하 연구소 전문가들은 2001년 9월부터 10월까지 북한 철도를 기술적으로 연구했다. 이 연구를 기초로 볼 때 북한에서 철도 화물을 수송할 때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러시아 하산역과 북한 평강역 구간의 철도를 개량해서 화물운송 용량을 확대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두만강역-평강역 구간 철도는 단선이며 러시아 국경에서 라진역까지는 표준궤(철도폭 1435mm)와 광궤(1520mm)가 같이 깔려 있다. 나머지는 모두 표준궤로 전철화되어 있다. 두만강역에서 평강역 구간의 길이는 781km다(실제 궤도 길이 767km). 평강역에서 휴전선까지 14km 구간은 선로가 연결되어 있지 않다. 두만강역-평강역 구간의 철도 상황은 파손 직전 상태다. 화물열차의 구역 속도는 평균 시속 30km지만, 특정 구역에서는 시속 17km밖에 낼 수 없다. 화물열차의 운행속도를 시속 60∼80km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제1방안 : 북한 구간의 모든 궤도를 러시아식의 광궤(폭 1520mm)로 바꾸는 방안이다. 이 방안은 철도 레일을 모두 걷어내고 플랫폼, 접속망을 바꾸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터널과 교량도 새로 건설해야 한다.

    제2방안 : 북한 구간의 궤도를 광궤와 표준궤가 혼합된 복합 궤도로 건설하는 방안이다.

    제3방안 : 북한 구간의 궤도를 현재의 표준궤를 유지하며 보수하는 방안이다. 이를 위해서는 선로의 윗부분과 교량 건설, 터널의 수리가 필요하다. 이 안은 앞서 두 가지 방안보다 작업량이 적을 것이다.

    이 세 방안에 들어가는 예산은 제1안이 31억5900만달러, 제2안이 34억4100만달러, 제3안이 24억9600만달러다. 이 세 방안 중 어느 것을 선택하더라도 평강역에서 휴전선까지 14km 구간은 공통적으로 건설해야 한다.’

    북한과 러시아는 샤라포프 보고서에 나온 방안 가운데, 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세번째 안을 택하기로 잠정 합의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고서는 또 ‘북러 국경선에 있는 러시아의 하산역과 북한의 평강역에 컨테이너 터미널을 만들어 이 역에서 국경 세관검사를 한다. 북한 철도청 산하의 중앙운송과정통제집행위원회는 컨테이너 국제열차가 이동한 뒤, 검사를 보장하기 위해서 러시아 철도부에 열차운행 정보를 전달할 방침이다’고 적시하고 있다.

    이처럼 북·러간의 철도협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다. 러시아 언론 보도에 따르면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철도대학교에 북한 학생 30여 명이 올해 입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24명은 학부생이고 나머지 6명은 연구원 자격이며 전공은 북한 철도의 앞날을 대비한 ‘철도 경영’으로 알려졌다. 이미 북한은 철도 연결을 대비해서 인력을 기르고 있는 것이다.

    푸틴과의 회담을 끝낸 뒤 김위원장 일행은 연해주지사 세르게이 다르킨의 안내로 연해주 극동함대사령부 뒤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최고급 상가인 이그나트 쇼핑센터(월마트를 벤치마킹한 상가)를 방문해서 30여 분간 둘러보았다. 김위원장은 일반인 출입이 차단된 가운데 엘레나 칼리니나 부사장의 안내로 6층 매장 중 5층까지 둘러보면서 매상과 손님 규모, 러시아제 상품의 비중 등을 물었다. 김위원장은 쇼핑센터 사장에게 도자기를 선물했으며, 쇼핑센터측은 답례로 러시아정교회의 성화인 ‘이콘’ 한 점을 증정했다.

    북·일 회담 전격 발표 내막

    국내의 한 북한전문가는 “김정일이 이런 자본주의 시장을 몸소 둘러본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는 북한이 시장경제로 전환할 경우 어떻게 될 것인가를 김위원장 자신이 눈으로 보아두려는 것이다”고 분석했다. 이 쇼핑센터에서 김위원장은 이 지방의 향토술인 발삼(Balsam·우수리 약초로 만든 술, 알코올 순도 38%) 1000병을 구입했다. 쇼핑을 마친 뒤에도 김위원장은 우수리강변 옆 철길에 전용열차를 세워두고 시장을 자세히 관찰했다.

    북한으로 돌아가는 김위원장의 기분은 상당히 언짢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푸틴과의 회담에서 별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김정일 방러단 선발대를 만난 인사는 “푸틴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도 좋다는 보고서를 올린 선발대 관계자가 문책당한다는 소문도 있다”고 전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언짢은 심사는 그가 달고 왔던 전용열차 차량에서도 드러난다. 김위원장이 러시아로 넘어올 때 달고 왔던 차량은 모두 16대. 그는 선물을 실은 차량 14량을 보태 모두 30량을 달고 귀국하려고 했다. 기관차를 두 대나 끌고 왔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회담에서 김정일이 끌고 돌아간 차량은 22량뿐이다. 예상치 30량에서 8량을 채우지 못한 것이다. 러시아에서 새로 붙인 6량에는 쌀, 중유, 철도수리기계 부속 등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 위원장이 애초 방문하려 했던 곳은 콤소몰스키 나 아무르의 수호이 27 전투기 생산공장, 하바로프스크의 철도기지창, 볼쇼이 카멘의 잠수함 기지(민스크급 퇴역 항모 정박중), 연해주 아르세네프의 SS미사일 생산공장 등이다. 이 모두가 군사력 증강과 관련된 기지다. 이 가운데 볼쇼이 카멘의 극동 잠수함 기지와 아르세네프의 SS미사일 생산공장을 방문하지 않았다. 방러단 선발대는 이 두 곳에 미리 가 있었으나 푸틴과의 회담이 결렬되는 바람에 일정이 취소된 것이다. 이런 사정을 아는 한 북한전문가는 “8월말 북·일 회담이 전격 발표된 것은 성과 없는 북·러 회담 때문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원래 11월경에 평양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7월1일부터 경제개혁을 진행하고 있는 김정일은 외국의 지원이 절실했고, 북·러 회담이 불만족스럽자 다급해졌던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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