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호

“팔려가는 탈북 여성 눈물이 내 삶을 바꿨다”

중국에서 탈북자 돕다 추방된 전도사 천기원 독점 수기

  • 정리·곽대중 editor@nknet.org

    입력2002-10-04 14: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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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텔 보이에서 탈북 전도사된 사연
    • 탈북자 140명을 한국으로 데려온 밀출국(密出國) 수괴로 기소
    • 밀가루떡 한 덩이, 모래가 가득 찬 물 한 컵이 한끼 식사
    • 부패한 중국 검찰. 그러나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 “DJ 노벨상 시상식장으로 달려가겠다” 하자 협조 시작한 한국대사관
    • 감상적인 마음으로 대북 선교에 나서는 것은 금물
    “팔려가는 탈북 여성 눈물이  내 삶을 바꿨다”
    “어, 이거 왜 이래! 놓으시오, 난 대한민국 국민이오! 더 이상 중국 감옥의 죄수가 아니란 말이오!”

    2002년 8월21일 오후 2시, 중국 네이멍구(內蒙古)자치주의 하이라얼(海拉爾) 역. 좁은 대합실 안에서 나는 한국말로 그렇게 외쳤다. 그래도 중국 공안원들은 막무가내였다. 순순히 손을 내밀지 않자 두 명이 달려들어 양쪽에서 팔을 비틀었다. 휴대전화를 압수했다. 그러고는 수갑을 차지 않으려 반항하는 나를 바닥에 무릎 꿇렸다. “찰칵” 차가운 금속질감이 느껴지면서 수갑이 채워졌다.

    “당신들 지금 실수하고 있는 거야. 재판 끝난 피의자를 이렇게 막 대해도 되는 거야!”

    거칠게 항의했지만 이들이 내 말을 알아들을 리 없었다. 곧이어 마치 중대한 범죄인을 다루듯 여러 명의 공안원이 에워싸고 나를 기차에 태웠다. 어이가 없었다. 사실 중국에서 이런 일을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무리 인권이 어떻고 떠들어봤자 이들에겐 씨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익히 알고 있다. 좌석에 앉자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렇다면 내 휴대전화라도 달라.”

    그러나 이들은 들은 체도 안했다.



    기차가 출발했다. 몇 번을 더 사정하니 그제서야 공안원들은 휴대전화를 돌려줬다. 수갑이 채워진 손으로 우리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전화를 받은 대사관 직원은 “왜 그러지? 그러면 안되는데…. 난 담당이 아니니, 언제 어디로 도착하는지 이야기해달라, 메모를 남겨놓겠다”고 했다.

    말끝을 흐리는 대답에 화가 났다. ‘그러면 안된다니! 말만 하지 말고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 것 아닌가. 내가 정말 대한민국 대사관에 전화를 건 것이 맞나’ 하는 의문이 생겼다. 도착하는 장소와 시간을 대강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지금 한국으로 추방되기 위해 베이징(北京)으로 가는 길일 것이다. 그렇다면 도착 시간은 내일 밤 10시 정도가 될 것이다.

    공안원들은 계속 수갑을 채워두었다. “나는 도망가지 않는다. 도망갈 이유도 없다”고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화장실에 간다고 할 때만 수갑을 풀어줬다. 그러나 공안원은 화장실까지 따라왔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또 일어났다. 볼일을 보려는데 공안원이 화장실 문을 확 열어젖힌 것이다. 깜짝 놀라 삿대질하며 큰 소리로 화를 냈다.

    상대도 중국어로 목소리를 높이며 대들었다. 내가 화장실 안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그것마저도 지켜봐야 한다는 뜻이리라. 서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고함을 그렇게 퍼붓다 수치심과 분노에 몸을 떨며 돌아왔다. 다시 수갑을 찬 채 눈을 감았지만, 머리끝까지 치민 분노로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5시30분. 베이징에 도착하긴 이른 시간인데 기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창춘(長春)역이었다. 이상한 느낌이 스쳐갔다.

    공안원들이 이끄는 대로 지하통로를 빠져나가니 ‘공안(公安)’이라고 쓰여있는 호송용 차량이 서있었다. 그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창춘공항에 도착했다. 차는 공항 대합실 쪽으로 가지 않고 뒤로 빠져 공항사무실 앞에 멈추었다. 사무실에서 한 시간 동안 꼼짝없이 앉아 있었다.

    7시45분이 되자 그들은 나를 다시 어디론가 끌고 갔다. 출국 수속을 밟는 곳의 뒷문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곧 한국으로 가는 8시5분 비행기에 태워질 것임을 알았다. 중국 공안원은 예상을 깨고 베이징공항이 아니라 창춘공항으로 나를 빼돌린 것이다. 베이징공항에는 벌써부터 세계 각국의 기자들이 몰려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중국은 탈북자들을 돕다가 체포돼 7개월간 옥살이를 한 한국인 전도사를 자국에서 추방하는 모습이 주요 외신에 실리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비행기에 올라타려는데 열댓명의 공안원이 다시 나를 에워쌌다. 그중 가장 상급자인 듯한 사람이 내 앞에서 무언가를 읽어 내려갔다. “피고인 천기원은 중화인민공화국 법을 어기고 비법(非法) 월경자들의 탈출을 방조한 죄로 강제 추방한다.” 일종의 ‘추방식(追放式)’이었다. 참으로 분하고 허탈했다.

    그래서 마지막 싸움이라 생각하고 “너희들 정말 이래도 되는가, 베이징으로 간다고 해놓고 왜 여기로 데리고 왔는가, 법을 집행한다는 놈들이 이렇게 사람을 기만해도 되는 건가” 하고 따졌다. 조선족인 듯한 통역 담당 공안원에게 내 말을 전달해주라 했다.

    돌아온 대답은 “우리는 그래도 된다”였다. 기가 차서 “너희들 양심이 있는가”라고 다시 물었다. 통역원은 내 말을 전달하지도 않고 자신이 직접 “우리는 한국 놈들처럼 그렇지는 않아!”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한국 놈들처럼 그렇지는 않다고? 동포를 돕겠다는 내 행동이 무슨 죄란 말인가. 너희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봉투를 건네면서 선생님이 조용히 한마디 덧붙였다. “한웅이 아버님. 한웅이 말을 들어보니 아버님이 북한 사람 돕는 일을 하신다는데, 자기 가정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돕는다고 하십니까. 일단 가정부터 살피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딱 멎는 듯했다.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른 채 집에 돌아와 한참 울었다. 사실 맞는 말이 아닌가. 자기 식구도 못 먹여 살리는 주제에 무슨 굶주린 북한 동포를 살리고 그들의 인권을 운운하단 말인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갈등과 시련의 시기였다.

    개인적인 갈등을 안은 채 계속 탈북자 선교를 추진했다. 두리하나선교회에서 한국으로 데리고 온 탈북자는 170명 정도인데, 그중 내가 직접 데리고 온 사람들이 150여 명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단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하는 탈북자 선교사업 중 한 부분일 뿐이다.

    선교활동 초기 우리는 쌀과 돈을 중국에 보내주고, 중국에 꽃제비들을 수용할 고아원을 마련하는 일을 추진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고아원 설립을 허가하지 않아 비밀스럽게 피난처(북한관련 NGO 관계자들은 대개 ‘쉘터 shelter’라고 부른다)를 마련해 탈북자들을 돌본 것이, 오늘날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우리는 보호를 받는 재중(在中) 탈북자들에게 한국행을 권유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가능한 한 그들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북한에서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선교활동을 벌이도록 하는 단체도 있지만, 우리는 북한 선교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북한에서 기독교인은 1급 정치범으로 분류되는데 그들을 억지로 사지(死地)에 몰아넣을 생각은 없다. 본인이 기어이 그렇게 하겠다면 말리지는 않지만 말이다. 우리는 한국에 가야 할 특별한 사연이 있는 사람들만 한국으로 데려온다.

    물론 금전적 대가는 일절 받지 않는다. 만약 대가를 받고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데려온다면 나는 하나님에게 벼락을 맞을 것이다. 내가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일을 시작한 계기는 두리하나선교회에서 일하는 청년 때문이었다. 그는 1997년 이른바 ‘핑퐁사건’ 때 한국으로 들어온 탈북자다.

    핑퐁사건은 중국과 베트남 정부가 서로 떠맡기 싫어 국경을 사이에 두고 탈북자 13명을 탁구공처럼 주고받은 사건이다. 베트남 국경 쪽에 서있는 13명의 탈북자가 중국으로 넘어오려고 하자 인민해방군은 총까지 들이대며 이들을 쫓아내, 탈북자들은 지뢰밭을 헤매고 다녔다. 이 사건은 지뢰밭을 헤맨 13명 중 10명이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그런데 그때 한국에 오지 못한 세 명 중의 한 명이 이 청년의 어머니다. 나는 그 청년을 위해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거쳐 17일 만에 그의 어머니를 한국에 데려왔는데, 이것이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활동의 시작이었다.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탈북자들이 베이징에 있는 외국 공관에 잇따라 진입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NGO들이 지원했다 하여 이것을 ‘기획(企劃)망명’이라 한다. 기획망명 성공 이후 중국 공안은 대대적인 탈북자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기획망명이 탈북자들의 처지를 더욱 궁지로 몰고 있다며 NGO의 행위를 비난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은 중국 내의 탈북자 형편을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다. 기획망명이 있기 전에도 탈북자들은 대단히 많이 잡혀갔다. 하루에도 몇 트럭씩 말이다.

    기획망명이 있자 그동안 무관심했던 언론이 앞다투어 탈북자 체포가 갑자기 벌어진 것처럼 보도하고 있는데 이것이 오히려 문제다. 버스는 오래전부터 계속 달리고 있었는데, 내내 잠자고 있던 사람이 깨어나 “이제야 버스가 달린다”고 소리치는 격이다.

    물론 기획망명이 중국당국의 탈북자 체포의지에 불을 댕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숨어 지내는 것이 대안은 아니지 않은가. 늘 쫓기고 당하고만 다녔던 탈북자들이 자신들의 인간적 권리를 주장하며 외국 대사관으로 뛰어드는 모습…. 수년간 탈북자들을 만나왔던 나로서는 정말 자랑스럽고 대견하게 보인다. ‘자꾸 떠들고 시끄럽게 해야’ 중국 당국도 탈북자들을 북한으로 송환하지 못하고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할 것이다.

    2000년 12월1일, 나는 20명의 탈북자를 몽골로 보낸 적이 있다. 다음날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로 들어가 한국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대사관측의 답변은 “몽골 정부에서 이들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대사관이 성의가 없어서 그렇지 몽골정부가 그들을 받지 않을 리 없다. 몽골 정부로서는 북한이나 중국보다 한국과의 관계가 더욱 중요하다. 최근에는 스무 명 이상의 탈북자가 한꺼번에 대사관에 진입해 망명신청을 하는 사례가 많지만, 당시에는 처음 있는 일이라 대사관측도 난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중국으로 보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며칠 뒤 대사관에서 전화가 왔다. 몽골 정부에서 이미 탈북자 10명을 중국으로 추방했다는 것이다. 나머지도 곧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나중에는 몽골 정부에서 나를 체포하려 한다는 소식까지 전해줬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이해가 안됐다. 그동안 탈북자 문제에 관대하게 나가던 몽골 정부가 왜 갑자기 추방 쪽으로 돌아섰다는 말인가.

    그제서야 나는 한국대사관측을 의심했다. 그래서 대사관에 “만약 탈북자들이 중국으로 갔다가 북한으로 송환된다면 나는 즉시 노르웨이로 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당시 노르웨이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곳에 달려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분이 대통령으로 있는 나라에서 탈북자들을 보호하지 않고 쫓아냈다’고 세계를 향해 외치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정말 CNN 기자를 불러 베이징으로 향했다. 베이징 공항에 도착하여 노르웨이행 티켓을 예약하려고 할 때 대사관에서 전화가 왔다. “탈북자들이 다시 몽골로 돌아오고 있다.” 모두 한국으로 보낼 것이라는 연락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안도의 숨을 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탈북자들을 데려온다고 해서 내게 물질적인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의 일이다. 판사와 검사는 아무 대가도 받지 못하면서 탈북자들을 돕는 동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나를 브로커 정도로 여기고 그동안 상당한 돈을 모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뇌물을 받으려고 선고장 발송을 늦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데려온 탈북자 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그들을 데리고 오면 어디에서 많은 돈을 받는다고 말이다. 나는 그런 오해에 일일이 대응하고픈 생각이 없다. 목회자로서 내 일을 열심히 할 뿐이다.

    요즘에는 북한 선교를 하겠다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탈북자를 돕는 NGO도 많이 생겨났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이런 일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감상적인 생각을 버려라”는 것이다. 북한 사람들을 머리에 뿔나고 붉은 털 난 사람으로 생각해왔던 반공교육의 역(逆)편향인지, 요즘 젊은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을 무조건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로만 본다. 그렇게 잘못 알고 있다가 탈북자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실망하여 ‘탈북자들은 다 저런가’ 하면서 되돌아가는 또 다른 편향성을 보기도 한다.

    사실 나는 중국에서 탈북자를 만날 때 그들을 100% 믿지 않았다. 도덕적으로 문란한 사례도 많이 봤고 서로 속고 속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들이 천성적으로 나빠서 그렇다고 생각지 않는다. 탈북자의 처지를 헤치고 들어가면, 나라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든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 앞에 체면은 허섭쓰레기다. 내일이라도 체포되어 북한으로 끌려갈지 모르는데 도덕이란 당치도 않은 소리이다.

    탈북자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오만인지 모른다. 탈북자는 우리의 오만을 깨닫게 하고 오만을 버리게 하는 선생인지도 모른다. 삭막한 환경 때문에 인성이 삐뚤어진 그들을 인내를 갖고 성실히 인도해야 한다. 우리의 잣대로 볼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으로 우리의 오만을 바꿔나가야 할 것이다. 220일의 감옥생활을 통해 나는 북송된 탈북자들이 겪는 고통이 이렇겠구나 하는 것을 배웠다. 북한의 사정도 이렇기 때문에 죽어라고 탈출을 하려는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하나님은 감옥의 나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앞으로 3년 이상은 중국에 가지 못한다. 그러나 할 일은 더 많아졌다.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선교회 내부 일을 돌보고, 나 대신 중국으로 갈 사람들을 교육할 체계도 세워야 한다. 부지런히 여기저기 얼굴 내밀면서 북한과 탈북자들의 실정을 알리는 임무도 생겼다. 바쁘지만 행복하다. 호텔 보이, 날라리 신자에서 선교사가 되어, 나이 마흔에 새로운 인생을 얻었다.

    중국에서 옥고(獄苦)를 치렀지만 나는 중국 정부에 대해 개인적인 원한이나 한치의 불만도 없다. 다만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중국 땅에서 눌러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다른 나라로 보내달라는 사람을 왜 중국 정부는 기어이 막아서고 있는가. 21세기는 인권의 시대다. 인권을 모르는 나라는 대국(大國)이 될 수 없다.” 내가 데려오지 못한 탈북자들을 북한으로 송환하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나라 대한민국으로 보내 줄 것을 중국 당국에 간절히 호소한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음이니라’(출애굽기 22장 21절) 아멘.

    두리하나선교회의 전도사 천기원(千琪元·46). 나는 이렇게 한국으로 추방돼 2002년 8월22일 11시30분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2001년 12월24일에 중국으로 갔으니 241일 만의 귀국이다. 그동안 내 몸은 더욱 호리호리해졌고, 얼굴은 덥수룩한 수염으로 덮였다.

    인천공항 입국 출구에 들어서니 선교회 관계자 몇 분이 환영한다는 피켓을 들고 서있었다. 취재기자 몇 명도 나와 있었다. 창춘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하기 직전 한국에 전화를 걸었다. 그것마저 할 수 없었다면 인천공항에서 나 혼자 집으로 가야할 뻔했다.

    241일 중 220일을 나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변방부대 감옥에서, 그 뒤로는 하이라얼(海拉爾) 구류소에서 혹독한 추위로 유명한 북방(北方)의 겨울을 그대로 보냈다. 요새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게 “중국 감옥생활은 어땠냐”고 묻는다. 그 대답은 감옥에 있을 때 보낸 옥중(獄中)서신으로 대신한다.

    ‘겨울 속에 모든 시간이 정지된 듯, 오월 중순까지 함박눈이 내리며 물러갈 줄 모른 채 길고도 지루했던 겨울…. 영하 30℃의 날씨를 포근하다고 표현하며 유월에야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는 중국의 오지 내몽고 사막 땅에서 유월의 봄소식을 전해봅니다. 혹독한 추위와 열악한 환경, 하루 두끼 나오는, 이제는 쳐다보기조차 두려운 누런 밀가루떡 한 덩이와 모래가 가득 섞인 물 한 컵뿐인 식사. 지금도 적응하지 못해 고통스러운 실내의 변기통…. 세수도 양치도 할 수 없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선배 수감자들의 구박을 받으며 변기통과 바닥청소를 하며 불안과 두려움으로 날을 지새던 변방감옥…’(2002년 6월19일 두리하나선교회로 보낸 편지)

    한국 언론에는 중국 감옥에서 내 하루 식사가 ‘만두(饅頭) 두개’라고 보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고기와 야채가 듬뿍 들어간 한국 분식점의 만두를 떠올렸다면 큰 착오다. 차마 목구멍으로 넘기기 힘들 정도로 퍽퍽한 밀가루만으로 만들어진 만두, 거기에 물 한 컵이 한끼 식사의 전부였다. 사막지대인지라 물컵을 가만히 놓아두면 금세 3분의 1 가량 모래가 가라앉았다.

    그나마 이러한 식사도 하루에 두 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운동시간도 없고, 책도 반입이 허가되지 않았다. 변호사와의 만남 이외에는 면회도 허용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국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하루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기도하는 일’뿐이었다. 내가 아무리 목회자(牧會者)일지라도 24시간 기도만 드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완전히 무인도에 유폐된 기분이었다.

    이대로 몇 년간 밀가루빵만 먹고 살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뢰인에게 희망과 용기를 줘야할 변호사는 ‘7년형을 받을 것 같다’며 도리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너무 힘들어 ‘뇌물을 써서라도 이곳을 빠져나갈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해보았다.

    변호사는 한국 돈으로 3000만∼4000만원의 뇌물이면 판사나 검사를 매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신명기 1장 17절)이라는 성경구절을 떠올리며 절대 뇌물을 쓰지 않고 이곳에서 걸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내 석방을 돕기 위해 김진홍 목사님을 비롯한 고마운 사람들이 상당한 돈을 모금해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나중에는 변호사마저 화를 내며 “당신이 스스로 변호하든 말든 맘대로 하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결국 나는 한푼의 뇌물도 주지 않고 지난 8월5일 중국 인민폐 5만위안(한화 약 75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뇌물 주지 않고 끝까지 버텨

    중국인민법정은 재판을 하고 보통 3일, 늦어도 1주일 정도면 선고장을 보낸다. 이것으로 판결이 최종 확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선고장을 받는 데 2주가 걸렸다. 그동안에도 변호사는 뇌물을 쓸 것을 끊임없이 종용했다. 이 기간이 제일 불안했던 시기다. 정말로 7년형을 받게 되면 어떡하나, 내가 너무 융통성 없이 처신한 것은 아닌가, 이제 내가 없으면 자식들과 두리하나선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판사와 검사는 내가 뇌물을 쓸 것으로 생각하고 일부로 시간을 끈 것 같다.

    선고장을 받은 후 체포되었을 때 빼앗긴 물건들을 되찾으러 갔다. 탈북자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첨단장비와 현금이 많이 필요하다. 갑자기 닥쳐오는 여러가지 상황에 대처해야 하기 때문이다. 체포 당시 나는 전자수첩 두 개, 휴대전화 두 개(한국용과 중국용), 위성정보를 이용해 위치를 알아내는 GPS, 캠코더 두 대, 중국 인민폐 3만위안, 한국 돈 200만원, 미화 2000달러 등 18가지 품목에 달했다.

    이 물건을 압수한 곳은 지방검찰이었다. 지방검찰청 담당자의 첫 대답은 “못준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범죄에 이용된 물건들이기 때문에 증거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보충 설명이 있었다. 중국 법원은 내 재판에서 이 물건을 증거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증거물이라 돌려줄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나는 “그렇다면 내 물건들을 압수한다는 판결문이 있으면 보여달라”고 따졌다. 당황한 검찰 직원은 “원래 못 주게 되어 있는데, 회의를 해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다음날 다시 찾아갔다. 그런데 담당자는 어제의 그가 아니었다. 새로운 담당자는 당당하게 “재판에 불만이 있느냐”는 말부터 꺼냈다. 그리고는 “그동안 누구에게 뇌물을 얼마나 바쳤느냐”고 엉뚱한 말을 꺼냈다. “지금 당신을 다시 잡아 가둘 수 있다, 우리는 다 방법이 있다”고 협박했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때까지 내 손에는 ‘대한민국 여권’이 없었다. 이들은 맘에 들지 않으면 무슨 죄를 뒤집어씌워서라도 나를 다시 잡아넣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내게서 압수한 물건의 목록이라도 달라”고 했다.

    잠시 후 검찰에서 압수한 물품의 목록을 보니 더욱 기가 찼다. 변방부대에 체포될 때 빼앗긴 인민폐는 3만위안이었는데 2만위안밖에 올라있지 않았고, 미화 2000달러는 아예 빠져 있었다. 두 대였던 캠코더 중에서 성능이 좋은 것이 빠져있었다. 기가 차서 물었다. “나는 당신네가 부과한 벌금을 물었다. 그렇다면 내게서 압수한 물품은 돌려주어야 도리가 아니냐”고. 그런데 대답이 너무 한심했다. “당신이 압수당한 물건을 돌려받지 않겠다고 해서 검찰은 판결에 불만이 있음에도 항소를 하지 않았다.” 중국은 정말 기가 막히는 나라가 아닐 수 없다.

    답답한 한국대사관

    벌금은 벌금대로 받고 증거물로 판정하지도 않은 물건도 갖겠다는 그들의 생각이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돈 한푼 없는 내가 어떻게 비행기 표를 마련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관계자는 “그것은 분명히 불법입니다. 나중에 국내에 들어가서 이슈화하십시오”라고 했다. 아니, 대사관도 못하는 일을 내가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리고 ‘국내에 들어가서 이슈화하라’는 게 대사관에서 할 말인가.

    2001년 12월29일 나는 중국-몽골 국경선에서 탈북자 12명을 몽골로 밀출국(密出國)시키려다 체포되었다. 늘 그랬지만 이번에도 작은 계기로 탈북자의 한국행이 기획되었다.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서 살고 있는 한 부부의 편지가 전달되면서부터다.

    그들은 아내가 식당에서 일을 해 벌어오는 월 300위안의 수입으로 근근이 살고 있었다. 탈북 여성은 서비스 업종에라도 종사하며 돈을 벌 수 있지만 남자는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다. 그래서 여자가 임신하면 중국에서의 생활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

    이런 사연이 담긴 편지를 받고 선교사를 보내 그들을 찾아보았다. 며칠 후 아파트를 사 피난처를 마련해주고 생활에 필요한 집기도 갖춰주었다.

    2001년 2월 나는 독일인 의사로 북한인권운동을 하는 노르베르트 폴러첸씨와 타임(TIME)지 기자를 탈북 여성들이 인신매매 되는 현장으로 안내했다. 그날 그곳에서 3000위안의 몸값이 붙은 채 팔려가길 기다리는 30대의 북한 아주머니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우리 셋이 돈을 모아 아주머니를 샀다. 아주머니의 고향은 함경북도 무산이었다. 그는 강만 넘으면 고향 땅인데 그곳에 있는 여섯 살 난 아들을 데려오고 싶다고 했다. 그가 집으로 갔다올 수 있는 경비까지 지원해주었다. 하지만 떠날 채비를 하던 중 그 아주머니는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北送)되었다.

    북송된 탈북자는 정치범과 일반 탈북자로 분류되는데, 일반 탈북자는 ‘노동단련대(勞動鍛鍊隊, 속칭 깡판)’로 보내진다. 정치범에 대한 처벌보다야 가볍지만 이곳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맞아 죽는다. 중국에서 선교사나 NGO 관계자들을 만난 것이 드러나면 여지없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다. 다행히 아주머니는 우리를 만난 것을 숨겨 깡판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몇 달 동안 고생하고 풀려난 아주머니는 그해 10월 말 두만강이 얼자 다시 국경을 넘었다. 그렇게 데려오고 싶어한 아들과 함께 말이다. 이 두 명이 내가 데리고 오려했던 12명 중 세번째와 네번째 사람이다.

    다섯, 여섯, 일곱번째 사람들은 이미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정재송(鄭在松)씨의 아내와 아들딸이다. 피혁공장 노동자였던 정씨는 조개잡이 외화벌이를 하던 중 사석에서 체제비판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북한을 탈출했다. 중국에서 체포되어 국경 인근까지 끌려갔으나 극적으로 탈출, 다시 중국 국경을 넘어 베트남과 미얀마에 있는 대한민국 대사관까지 찾아갔다. 그러나 대사관에서는 차비와 지도만 주고 되돌려 보냈다. 베트남에 가면 미얀마대사관에 떠넘기고, 미얀마에 가면 다시 베트남대사관에 떠넘기는 바람에 1년 4개월을 헤매다 1997년 가까스로 한국 땅을 밟았다.

    정재송씨는 한국에 온 후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들을 데려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러던 2001년 5월, 가족들이 중국으로 탈출하였다는 연락이 왔다. 때마침 가족을 한국으로 안전히 보내주겠다는 브로커가 접근했다. 800만원을 송금하면 보내주겠다고 했단다. 즉시 송금했지만 몇 차례 추가비용을 요구했다. 그러나 브로커는 11월경 돈만 떼먹고 잠적했다. 정착금을 다 잃은 정씨가 더 이상 돈으로는 가족을 데려올 수 없게 되자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1997년 정씨와 함께 입국한 탈북자 유영일(劉榮一)씨도 누이와 조카가 중국에 있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들이 여덟번째와 아홉번째 한국행 희망자다. 중국에 있는 탈북자는 거의 모두가 한국행을 희망한다. 하지만 이들을 모두 데려올 수는 없다. 그래서 임신했다든지, 한국에 먼저 간 가족이 있다든지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사람만 선별해 돕고 있다. 유영일씨 누나가 합류할 때 유씨의 탈북을 도왔던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원(한국으로 말하면 ‘국가정보원 직원’에 해당)이 따라왔고, 인터넷을 통해 도움을 요청한 탈북자 두 명까지 포함시켰다. 이렇게 해서 12명이 구성되었다.

    11월 말 방 세 개를 얻어 12명의 탈북자를 네 명씩 분산 수용했다. 우리는 많을 때는 380명 정도를 보호하는 피난처를 운영한 적이 있다. 한 도시에만 16개의 피난처가 있던 때도 있고 피난처가 발각되어 한꺼번에 27명이 체포된 적도 있었다. 제일 작은 두리하나선교회가 이 정도니 다른 선교단체와 NGO가 운영하는 피난처를 더하면 얼마나 많은 탈북자가 있으랴. 지금도 중국에는 이러한 피난처를 찾아내려는 중국당국과, 운영하던 피난처를 폐쇄하고 새로운 곳으로 탈북자들을 옮겨 보호하는 선교단체와 NGO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계속되고 있다.

    중국 국경 탈출을 결행할 날짜가 정해지자 우리는 12명을 몽골 방면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는 국경 근처까지만 동행하고 함께 국경을 넘지 않는다. 우리의 신분이 노출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탈북자가 국경을 넘으면 대기하고 있던 현지 안내인이 이들을 몽골 주재 한국대사관까지 인도해준다. 우리는 다시 중국의 대도시로 돌아와 비행기를 타고 몽골로 날아가 몽골주재 한국대사관에서 탈북자의 한국행을 보장받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한다.

    중국 국경 탈출 실패, 그리고 검거

    2001년 12월29일, 몽골 국경 5km 앞까지 탈북자를 이끌고 간 후 지도와 나침반을 주고 국경을 넘도록 했다. 임산부와 어린아이가 끼어 있어 걱정이 되긴 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무사히 국경을 넘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임산부의 출산 예정일이 1월 중순이라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그래서 캠코더로 국경지역을 찍어 몇 번을 보여주고 자세히 설명까지 했다. 만일을 대비해 현금도 충분히 챙겨주었다. 그들을 국경선으로 보내고 돌아서니 눈이 한바탕 퍼부을 듯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웬 바람이…’ 시계를 보니 저녁 6시였다.

    이번 탈북 시도에는 모 방송국의 프리랜서 기자가 동행했다. 그와 함께 택시에 올랐다. 네이멍구 자치주에서는 야간에 차량이 통행하려면 ‘야간통행허가’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택시기사는 이러한 절차가 번거롭기 때문에 택시요금에 조금 더 얹어주면 그냥 목적지까지 데려다준다. 그런데 그날은 미처 ‘웃돈을 달라’ ‘얼마면 되겠느냐’ 하는 이야기를 할 틈도 없이 기사가 택시를 몰고 경찰서 앞마당으로 들어가버렸다. 어쩔 수 없이 신분확인을 하러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호랑이 굴 속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격이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한국에서 여행 왔다며 여권 등을 보여주면 바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미 나는 중국 공안당국의 ‘수배자’가 돼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곳의 감옥에 들어갔을 때 나는 감옥 안에서 아는 사람 몇몇을 만났다. 그중 한 명은 예전에 내가 도와주었던 조선족인데, 나중에 그는 내 이름을 팔면서 브로커 일을 했다. 또 며칠 전 몽골로 보낸 탈북자 중 한 명이 조선족으로 밝혀져 다시 중국으로 추방되는 일이 있었다.

    이들은 중국 공안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모든 일은 천기원이 시켜서 했다”고 진술했다. 졸지에 나는 ‘밀출국(密出國)의 수괴’로 수배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 한 몸이 갇히면 그만이련만 다음날 새벽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는 변방부대로 이송되어 12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는데 조사를 받던 중, 무사히 국경을 넘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12명의 탈북자들이 잡혀 들어왔다.

    그날 저녁 국경지대엔 눈이 많이 내렸다. 이곳에 내리는 눈은 순식간에 무릎 높이까지 쌓여 길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런 날엔 속도를 높여 눈이 많이 쌓이기 전에 국경을 넘어 안전지대까지 진출해야 한다. 그러나 임신 9개월의 여성과 어린아이가 있다보니 속도를 내지 못해, 눈 속을 일곱 시간 동안 헤매다 길을 잃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매다 집을 발견해 들어갔는데, 그집 주인이 신고를 해버린 것이다. 그들을 다시 보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220일간의 감옥생활이 시작되었다.

    호텔 ‘보이’, 나이트클럽 사장

    사실 나는 전도사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목회자라면 깊은 신앙심을 갖고 평생 다른 이의 존경을 받는 삶을 살아왔어야 하는데, 나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나는 ‘날라리 신자’였음을 고백한다.

    어릴 적 우리 집은 무척 가난했다.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한참을 들어가는 용성(龍城)면 송림(松林)동 외딴 마을에서 나는 3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중학교도 못 다닐 형편이었지만 목사님의 추천으로 대구시내에 있는 고등기술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40세에 신학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내 학력은 이것이 전부였다.

    18세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무작정 상경하여 둘째누나 집에서 살면서 대연각호텔 객실부 웨이터 생활을 시작했다. 거창하게 ‘객실부 웨이터’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보이(boy)’일을 한 것이다. 손님이 손가락을 까딱하며 불러도 전혀 자존심 상해하지 않고,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오히려 어색하게 느끼던 ‘보이’ 시절이었지만 호텔 생활은 내 적성에 맞았다. 의지할 곳이 없었던 나는 일찌감치 25세에 결혼해 딸과 아들을 얻었으나 4년 만에 아내와 헤어졌다.

    입사한 지 5년 만에 나는 지배인이 되었다. 그후 엠베서더·서교·강남뉴월드호텔 등을 두루 거쳤다. 그렇게 17년을 보냈는데, 1989년에는 서울시에서 제정한 제1회 호텔 우수종사원 표창을 받기도 했다.

    고급호텔에 근무하면 자연히 상류층의 생활을 접할 기회가 많아 자기 생활의 눈높이도 높아진다. 호텔 지배인의 수입이 적지 않은 터라, 나는 1980년대 초부터 자동차를 몰고 다녔다. 의식(衣食)도 최고급만을 찾으며 먹고 노는 데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주일이면 교회를 찾아 태연히 죄사함을 비는 기도를 드렸다. 나는 ‘날라리 신자’였다.

    1988년에는 잠깐 호텔 나이트클럽의 사장을 했다. 이태원에서 가장 큰 호텔의 나이트클럽으로 종업원 350명 정도를 거느렸다. 하지만 그곳은 내 생리에 맞지 않았다. 6개월 정도 하다 팔아치우고 다시 모 호텔 과장으로 스카우트돼 들어갔다. 그리고 1992년 호텔계를 완전히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나이트클럽 이래로 내가 하는 사업은 번번이 실패했다. 대형 뷔페도 차려보고, 태국에 여행사를 만들고, 일본과 무역도 해봤지만 낭패를 보기만 했다. 1996년 나는 완전 빈털터리가 되어 있었다. 생활이 힘들면 누구나 한번씩 죽을 용기(?)를 가진다. 나도 약을 먹고 죽을 궁리를 했다.

    ‘쓸모 없는 사람’에서 목회자로

    그런데 내 인생을 바꿔놓은 계기가 생겼다. 오래전부터 나는 ‘목사가 되라’는 권유를 자주 받았다. 목사님들은 나만 보면 “목사를 해야 할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으레 하는 말이거니 생각하여 귀담아 듣지 않았다. 1996년 8월11일, 내가 다니던 교회로 부천 송내중앙감리교회 김종순 담임목사가 부흥회를 하기 위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날 예배를 마치고 나는 김종순 목사를 호텔까지 차로 모셔다 드리는 일을 맡았다. 한참을 운전해 가는 도중 뒤에서 김목사가 “집사님, 혹시 목사 하실 생각 없으세요”하고 말했다.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집사님은 목사를 하셔야 되는데…”라는 혼잣말이 들려왔다.

    다음날 부흥회에서 김목사님은 사람들 앞에 나를 불러 세웠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이 사람은 꼭 목사를 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비가 될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사람들 앞에서 무슨 창피를 주는가. 내가 제비라니’ 화가 났다. 그러나 목사님은 시간이 날 때마다 나를 사람들 앞에 세우면서 “목사가 되어야 할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나를 위해 기도했다. 자꾸 그러니 ‘무슨 뜻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내가 목사가 되면 나를 아는 사람들이 ‘저런 사람도 목사가 되는구나’ 하고 생각할 것 같았다. 목회자가 될까 말까 하는 생각으로 두 달을 고민하며 보냈다.

    어느날 호텔에서 친구들과 식사를 하던 중 나는 김종순 목사님의 제자 되는 장경우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는 “왜 나같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 보고 목사를 하라고 하느냐”란 질문에, “하나님이 집사님을 쓸모 있는 사람으로 보았다면 목사 하라는 말을 안했을 것이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목회자가 되라는 것이다”고 대답했다. 그 말에 나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다. 열심히 기도하여 새사람이 되겠다.’ 나는 신학대학에 입학하기로 결심했다.

    1997년 나는 천안대학교에서 운영하는 기독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신학대학에 다니던 어느 날 성경 구절을 읽어가던 나는 심장이 딱 멎는 듯한 내용을 만났다. ‘내 나이 사십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라는 여호수아 14장 7절이었다. 이 구절은 모세를 도와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에 닿게 했던 갈렙(caleb)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그 구절은 나이 사십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전혀 늦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김종순 목사를 만났던 1996년 8월11일은 내가 딱 마흔 살이 되는 날이었다.

    신학대학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많은 빚을 안고 있었다. 잠실의 아파트는 일찌감치 처분했으므로 부천과 수원의 월세방을 전전하고 있었다. 빚쟁이들이 교회까지 찾아오고 사기죄로 경찰서에 몇 번 불려다니기도 했다. 할 수 없이 신학대학을 한 학기 휴학하고 빚부터 갚기로 했다.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무역업을 하러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6개월 만에 모든 자금을 까먹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때 내게 남은 것이라곤 책상 하나에 컴퓨터 한 대가 전부였다. 차가 한 대 있었지만 자동차 값보다 밀린 세금이 더 많아 팔지도 못했다.

    가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40대

    어디에 얼굴을 내밀기도 겸연쩍어 집에서 컴퓨터 관련 책자를 뒤적이며 홈페이지 만드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그해 8월 내 인생을 바꿔놓은 또 하나의 계기인 ‘중국 선교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중국을 떠돌고 있는 탈북자들을 보았다. 얼굴이 시커멓게 된 채 먹을 것을 좀 달라고 울며 따라붙는 ‘꽃제비’라 불리는 북한 아이들, 단돈 500위안(한화 7만5000원 정도)에서 3000위안 사이에 성(性)노예로 팔려 다니는 북한 처녀들….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우리는 북한에 대한 지원과 선교가 시급하다는 데 뜻을 모으고 ‘선교회(宣敎會)’를 만들었다. 12명의 발기인으로 시작된 그것이 ‘두리하나선교회’다. 두리하나는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에스겔 37장 17절)는 성경 말씀에서 따왔다. 혼자 홈페이지 만드는 방법을 익힌 나는 그해 10월16일 홈페이지(www.durihana.com)를 열었다. 이것이 선교회의 첫번째 활동이다. 전용선 없이 모뎀으로 인터넷을 하다보니 한 달에 50만원이 넘는 전화요금이 나오기도 했다.

    빚은 늘어나기만 했다. 매우 힘들었다. 10개월 동안 월세를 내지 못해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 짐은 컨테이너에 넣어두고 딸은 친구 집에, 아들은 누님 집에 보냈다. 어느날 아들이 학교에서 쓰러졌다는 연락이 와 달려갔다. 병원에 입원시키고 보니 심장병이라 수술을 받게 되었다. 병원비가 45만원 정도 나왔는데, 생활보호대상자였기에 병원비가 싼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돈이 없어 절절 매는데, 아들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학교에 찾아가 보니 학급 아이들이 모은 돈이라며 봉투를 내놓았다. 20만원 정도의 돈이 들어있었는데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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