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호

한나라당 ‘민중계’가 잘 나가는 이유

실패한 정치 실험, 각개약진, 새로운 도전

  • 글: 김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ades@donga.com

    입력2002-10-04 14: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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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년 전 재야운동권 세력의 독자신당으로 모습을 드러냈다가 2년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정치 실험, 민중당의 주인공들이 하나 둘 돌아오고 있다. 이재오 김문수에 이어 장기표 이우재까지. 8·8재보궐선거는 ‘민중계’의 등장을 알리는 이벤트였다.
    • 과연 이들은 누구인가. ‘보수의 땅’ 한나라당에서 굳세게 자리잡은 저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3김시대가 끝나가는 지금 새로운 민중당을 향한 도전은 가능할까.
    8 ·8재보궐선거는 한나라당의 완승으로 끝났다. 전국 13곳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호남을 제외한 11곳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139석을 확보한 한나라당은 원내 과반 정당으로서 명실상부한 정국주도권을 장악하게 됐고, 반면 민주당은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대부분의 정가 논객들은 8·8재보선을 정치권이 대혼란에 빠진 복잡한 현정국의 출발점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착잡한 심경으로 8·8재보궐선거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 1990년대 초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던 민중당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한나라당 ‘민중계’가 잘 나가는 이유

    1987년 6월항쟁 이후 재야가 모두 모여 전민련을 구성했다. 이부영 김근태 이재오씨 등이 한자리에 모여 문익환 목사 방북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후 전민련은 민중당 창당세력과 잔류세력으로 분열된다.

    8·8재보궐선거에서 민중당 출신 두 명의 ‘거물’이 출마했다. 민주당 공천으로 영등포을구에 출마했던 장기표(張琪杓)씨와 한나라당 공천으로 금천구 후보로 나섰던 이우재(李佑宰)씨가 그 주인공들.

    장기표씨는 누가 뭐래도 민중당을 대표하는 논객으로 민중당뿐만 아니라 한국 재야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가 가진 상징성만큼이나 그를 따르는 후배들도 적지 않다. 최근까지도 그는 고집스럽게 독자세력화의 가능성을 타진하며 정치권 외곽에 머물러 있었다. 민중당에서 장기표씨의 역할은 정책위의장, 그러니까 민중당의 창당이념과 정강정책은 그의 손을 거쳐 조율되고 다듬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우재씨는 농민운동가 출신으로 민중당 상임대표를 맡아 당의 얼굴로 활약했던 인물. 민중당을 이끌었던 두 거물, 장기표씨와 이우재씨가 여야로 나뉘어 출마했다는 현실은 곧 과거 민중당 주체들의 치열했던 고민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들이 한 곳에 정치적 호적을 파지 못하고 다른 길을 선택한 모습은 민중당의 탄생 때부터 드러났던 문제점의 연장으로 비쳤다.



    8·8재보선 전까지 민중당 출신 국회의원은 세 사람이었다. 한나라당의 이재오(李在五), 김문수(金文洙), 안영근(安泳根) 의원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여기에 이우재 의원이 이번 재선거에 당선됨으로써 이력서에 민중당 경력을 적은 현역 의원은 4명으로 늘어났다. 가히 ‘민중계’라 부를 만한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8·8재보궐선거는 정치권에 잊혀졌던 민중당 출신들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서울지역 최대 경합 선거구에 각각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간판주자로 출마한 것부터가 이들의 녹슬지 않은 정치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한 장기표씨는 끝내 낙선했고 그의 낙선은 민중당 출신들에게 또 다른 아픔으로 남게 됐다.

    ‘민중당의 간판’ 장기표씨가 원내진출에 다시 실패함에 따라 세력으로서 민중당 출신들의 행보를 지켜보기란 당분간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한나라당을 ‘휘젓고’있는 두 명의 민중당 출신 의원들의 활약을 정치권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지켜보고 있다. 이재오 의원과 김문수 의원이 그들인데, 두 사람은 현정국 최대 이슈인 병풍공방에서 최일선에 나서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보호하고 민주당에 반격을 가하는 데 맹활약을 하고 있다. 이재오 의원이 병풍대책반인 ‘김대업 정치공작 진상조사단’ 단장이고 김문수 의원은 ‘핵심 단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물론 이 두 사람의 활약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병역기피 의혹이 짙은 이후보의 자제들 문제에 재야출신인 두 사람이 전면에 나서서 감싸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으냐는 지적이 그것이다. 민주당에서는 “두 사람이 공안검사 출신들보다 더 밉다”는 불만도 터져나온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일당백’의 자세로 민주당과 병풍수사 검찰과 맞서고 있다. 그들이 보여주는 배짱과 뚝심은 재야나, 민중당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민중당 출신 인사들의 평가다.

    민중당 출신 한 인사는 “두 선배를 보노라면 그들이 민중당 지구당위원장으로 활약할 때 모습을 보는 듯하다”고 말했다. 언뜻 보면 안될 것 같은 일들도 저돌적으로 밀고 나가 끝내 관철시키는 추진력, 비록 민중당 시절의 이념이나 이상과는 거리가 있지만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그들의 모습은 어렵던 민중당 시절 그대로라는 것이다.

    이재오 의원은 지역구 활동에 관한 한 따라올 사람이 없다. 한나라당뿐 아니라 민주당에서도 그의 극성스러운 지역구 관리에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오죽했으면 그가 지구당위원장으로 있는 서울 은평을구는 민주당의 단골 ‘사고지구당’이 됐을까. 웬만해선 이재오 의원을 당할 수가 없어 거물들이 이곳을 피해가기 때문이다.

    ‘독고다이’ 이재오

    민중당 사무총장 시절, 이재오 의원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꺼리는 재정문제를 책임졌다. 재야 운동권 출신들이 모여 만든 정당인 까닭에 돈이 있을 리 없었다. 돈을 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이재오 총장은 여타 운동권 출신과는 달리 어떻게 해서든 돈을 구해오고 없는 형편이나마 당이 돌아가게끔 했다. 당내에서 그는 튀는 인물이었다. 운동권 출신들의 일반적인 모습과도 거리가 있었다. ‘독고다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런 그에 대해 찬사도 있지만, 한편에선 기성 정당의 행태와 뭐가 다르냐는 비판도 있었다.

    지난 14대 총선에서 민중당 공천으로 은평을구에 출마했을 때 그의 선거 운동 모습을 보고 민중당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이총장은 매일 아침 동네 목욕탕을 찾는 것으로 하루일과를 시작했다. 목욕탕에서 벌거벗고 만난 유권자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등도 밀어주고 하면서 얼굴을 익혀나갔는데 이런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했다고 한다. 그것도 매일 목욕탕을 바꿔가면서 말이다.

    이런 이재오 의원의 처신에 대해 주변에서는 “그렇게 표를 구걸해가면서까지 국회의원이 돼야 하나” 하는 비아냥도 나왔다. 그러나 이의원은 그런 사람들에게 “동네 목욕탕에서 만나는 사람들이야말로 민중이다. 민중과 어울려 그들의 얘기를 듣고 교류하는 것이 뭐가 문제 되느냐”며 반박했다고 한다.

    치열한 지역구 관리 덕에 민중당 후보로 나선 총선에서 이의원은 17%의 득표율을 올렸다. 물론 당선에는 실패했지만 민중당 후보로 이 정도의 득표를 한 것 자체가 경이로운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민중당 시절부터 지역구 관리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이재오 의원은 지금도 새벽 4시면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지역구를 누빈다. 가는 곳마다 조직을 만드는 그의 비상한 조직관리 능력은 지역구 활동에서도 빛을 발했다.

    15대 총선 직전인 1996년 신한국당에 입당한 이의원은 입당 초기 당내 색깔논쟁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입당 후 90일 만에 서울에서도 신한국당이 가장 약한 곳으로 분류되던 은평을구에 출마해 서울지역 최다 득표라는 기록을 세우며 당당히 당선됐다.

    한나라당 ‘민중계’가 잘 나가는 이유

    이재오 : 민중당 사무총장 시절부터 지역구 관리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지금은 이회창 후보의 든든한 근위대로 활약하고 있다.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이의원은 ‘당내정치’에 나섰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친(親)이수성(李壽成) 성향의 ‘정치발전협의회(정발협)’의 멤버로 활약하면서 이회창(李會昌) 당시 총재와 팽팽하게 맞서기도 했다. 하지만 16대 총선 직후 사무부총장에 기용되면서 이회창 후보의 측근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는 쑥스러움을 잘타는 재야출신답지 않게 친화력이 대단한 사람이다. 병풍대책단에서 이재오 의원과 손발을 맞추는 의원 가운데 정형근 의원은 안기부 대공수사국장 시절 민중당을 결정적으로 와해시킨 사건인 이선실 간첩사건의 수사를 지휘했던 인물이다. 이재오 의원과는 안기부 조사실에서 만난 적도 있는데 정의원과 함께 일하는데 문제는 없느냐는 질문에 이의원은 “사적인 감정은 전혀 없다. 같이 일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말했다.

    이의원의 일처리 방식 또한 꼼꼼하고 치밀하다. 그런 이의원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지난 2000년 여름에 있었던 한나라당 의원들의 청와대 방문 항의시위다.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은 국회에서 청와대까지 침묵시위를 하기로 했는데 시위의 실무를 맡은 이의원은 국회에서 청와대까지 구간을 직접 걸어가본 뒤 “마포대교 연결부분에 건널목이 없어 행진하기가 어렵겠다”며 출발점을 서울역 앞으로 옮겼다. 이처럼 몸을 아끼지 않는 성실성은 당내 의원들에게 깊은 감동을 줬고 지난해 그가 의원들이 직선으로 뽑는 원내총무에 당선되는 배경이 됐다.

    민중당 출신 인사들은 김문수 의원을 “대단히 점잖고 머리가 좋은 사람”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필요할 때는 엄청난 추진력을 발휘해 주위를 놀라게 하는 이가 김문수 의원이다. 1992년 총선을 앞두고 민중당은 구로구지구당을 창당하면서 구로구민회관을 사용하기로 예약을 마치고 공고까지 했다. 그런데 행사 당일 구로구청 공무원들이 구민회관 입구를 막아서고는 사용을 방해했다.

    공무원들의 거센 저항에 부닥치자 민중당 젊은 실무자들은 결국 장소를 못쓰는 것으로 알고 체념했다. 이때 점잖던 김문수 노동위원장이 불같이 화를 내며 공무원들에게 항의를 했다. “우리도 구로구민인데 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당당한 김문수 노동위원장의 항의에 공무원들은 막는 생색만 하고는 물러갔고 민중당은 구로구민회관에서 지구당 창당대회를 할 수 있었다.

    한나라당 ‘민중계’가 잘 나가는 이유

    김문수 : 점잖고 머리 좋은 사람으로 평가 받지만 때로는 주위가 놀랄만큼 저돌성을 보이기도 한다. 이재오 의원과 단짝으로 병풍대책반에서 활약하고 있다.

    김문수 의원은 서노련 등 노동운동의 일선에서 조직활동의 밑바닥부터 닦아온 현장 활동가다. 그의 치밀함과 맡은 일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그가 딴 국가기술자격증 목록이다.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이지만 일찍이 노동운동에 뛰어든 김의원은 노동운동을 제대로 하기 위해 각종 국가기술자격증을 땄는데, 그가 딴 자격증의 종류도 가지가지다. 환경관리기사, 안전관리기사, 열관리기능사, 전기기기기능사, 전기안전기사2급, 원동기취급기능사1급, 위험물취급사1, 2급 등이 그것이다.

    1996년 신한국당에 입당하면서 김의원은 당시 김영삼 대통령 입장에서 눈엣가시와도 같은 박지원 국민회의 대변인의 저격수로 낙점됐다. 경기 부천소사에 출마하는 박대변인을 떨어뜨리기 위해 YS는 김문수 의원을 이곳에 내보냈다. 상대는 DJ의 총애를 받는 박지원 대변인, 당초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를 깨고 김의원은 당당히 박지원 후보를 물리쳤고, 그후 이재오 의원과 함께 당내 실천가 그룹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이회창 후보가 무슨 일이 생기면 두 사람을 찾는다”고 귀띔했다. 최근 두 사람이 병풍대책반에서 활동하는 것도 이후보의 각별한 부탁이 있었던 까닭이라고 한다. 이후보가 어려울 때 늘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사람으로 낙점받았다는 것이다.

    이들 외에도 안영근 의원과 원외의 정태윤(강북갑), 김성식(관악갑)지구당위원장 등도 한나라당 개혁세력의 일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안의원은 민중당 정책위원 출신으로 한때 이회창 후보의 특보를 지냈다. 특보시절 안의원은 직설적인 질문으로 가끔 이후보를 곤혹스럽게도 했는데 이후보는 그런 안의원을 집으로까지 따로 불러 의견을 듣는 등 중용했다고 한다.

    민중당 기조실장 대변인을 지낸 정태윤 위원장은 후보비서실 부실장으로, 민중당 총무국에서 일했던 김성식 위원장은 기조위원회 상근부위원장으로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의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민중당 출신이기는 하지만 민중당의 이력으로 한나라당과 인연을 맺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민중당 출신들이 정치권에서 한나라당에 유독 많이 몰려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이재오 김문수 정태윤씨 등은 1996년 총선을 앞두고 개별적으로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에 영입된 케이스. 이들이 민주당의 전신인 국민회의가 아닌 신한국당에 입당한 계기는 김영삼 정권의 개혁정책에 동참하고 힘을 보태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들이 굳이 국민회의가 아닌 신한국당을 택한 데는 DJ와의 뿌리깊은 악연도 자리잡고 있다.

    1990년 민중당이 창당되자 당시 여당이던 민자당은 오히려 민중당의 등장을 반겼다. 노태우 대통령은 장기표 이재오씨 등 민중당의 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회담을 하는 등 민중당을 공개적으로 대접하는 모양도 보여줬다.

    하지만 DJ는 민중당의 등장을 크게 달가워하지 않았다. 야권의 구심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DJ로서는 재야가 별도의 정치세력으로 몸집을 키우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당시 DJ가 이끌었던 평민당(그후 신민당, 민주당으로 개칭)은 민중당을 민자당의 2중대라고 몰아붙였고 민중당도 그런 평민당의 태도에 강한 불만을 품게 됐다.

    세월이 흘러 이재오씨 등이 신한국당에 입당한 것도 민중당 시절 형성된 반DJ정서 때문이었으며 이후 민중당 출신들은 국회 안에서건 밖에서건 DJ당과는 충돌하게 된다.

    한나라당에 입당한 민중당 출신 인사들의 출신지가 대부분 영남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운동권이 영남과 호남으로 나뉘어 정치적 선택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87년 대선 이후다. 김영삼 김대중 두 김씨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운동권은 나누어졌다. 당시 김대중씨를 지지했던 세력은 민중당에 합류하지 않은 채 순차적으로 DJ당으로 흡수된다. 따라서 민중당의 핵심에 호남출신보다 영남출신 운동가들이 포진하게 되는데 그들이 세월이 흘러 YS를 따라 신한국당에 입당함으로써 오늘날의 인맥구조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개별적으로 신한국당을 선택했던 이재오 김문수 의원과 달리 안영근 의원과 김성식 위원장 등은 다른 경로로 한나라당에 둥지를 틀게 된다. 이들은 1995년 개혁신당을 통해 정계에 복귀하는데 개혁신당은 그후 DJ가 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을 데리고 탈당한 뒤 남은 민주당 세력과 통합해 ‘꼬마민주당’에 합류한다. 그후 1997년 조순 후보를 앞세워 대선출마를 준비하다가 신한국당과 합당함으로써 지금 한나라당의 일원이 됐다.

    장기표씨는 민중당 실패 이후로도 꾸준히 독자 정당을 꿈꾸며 활동해왔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국민당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정치실험을 했지만 끝내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지난 보궐선거 때 마침내 제도권 정당인 민주당에 참여해 보궐선거에 나서게 됐다.

    이밖에 지난 지방선거 때 민주당 공천으로 경남도지사에 출마했다 낙선한 김두관 전 남해군수도 민중당의 지역책임자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정치권에서 이름을 내고 있는 민중당 출신은 이들이 전부다. 하지만 민중당 출신들은 정치권 외에도 여기저기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시민운동가로 변신한 대표적 인물이 신철영 경실련 사무총장이다. 민중당 노동위원장을 지냈던 신철영씨는 민중당 해산 뒤 부천에서 지역운동을 하다가 경실련에 참여해 활동하고 있다. 정태윤 위원장도 민중당 실패 이후 잠시 경실련 정책연구실장을 맡아 활동했던 인물이다.

    지은희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도 민중당 상임집행위원이었는데 민중당 해산 이후 여성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민중당 대외협력위원장을 지낸 조춘구씨는 자원재생공사 감사로 있고, 민중당 사무차장을 지냈던 김영준씨는 김영삼 정권 때 대통령 비서실 교문사회비서관을 지내기도 했다.

    민중당의 경험을 이어 진보정당에서 활동을 하는 이들도 있다. 청년진보당의 최혁씨가 대표적 인물.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하승찬, 환경운동연합의 서형원씨도 민중당 출신 시민운동가다.

    정계나 시민단체로 외연을 넓혀간 일부를 제외한 386세대가 주축인 민중당의 젊은 실무자그룹은 당 해체 이후 정치와는 그다지 인연을 맺지 않고 있다.

    민중당 정책위원회에서 일하다 지금은 선거전문 기획사에서 일하는 박석민씨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열정적으로 일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결국 재야세력의 독자 정치세력화에 실패한 뒤로 당시 실무 주축이었던 386세대 가운데 상당수는 정치권이 아닌 시민단체로 자리를 옮겼다. 또 민중당 출신들을 주축으로 각종 청년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울러 교육사업, 벤처사업, 기획사업 쪽으로 방향을 틀어 현실에 적응했다”고 말했다.

    민중당의 실무자로 일하다 사업가로 변신한 대표적 인물이 ‘창의와 탐구’라는 브랜드의 교육사업을 하는 오수진씨다. 오수진씨의 ‘창의와 탐구’사에는 민중당 출신 386세대들이 다수 참여해 일하고 있다. 이밖에도 민중당의 젊은 실무자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벤처기업을 하거나 사설학원을 차려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이들을 포함, 민중당 중앙당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지금도 민중동우회(민동회)라는 친목모임을 결성해 1년에 1~2차례 모임을 갖고 우의를 다지고 있다. 회원은 대략 100여 명.

    이 모임의 연락간사 역을 맡고 있는 최규문씨는 “정치적인 이해관계 없이 그냥 한때 고생했던 동료로서 격의 없이 연락하고 만나고 있다. 민중당 출신들의 모임이지만 그때 일은 별로 화제가 되지 않는다. 다같이 보며 겪은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번 모임을 가지면 30~40명 정도가 나온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은 민중당이 창당된 지 만 10년 되던 달이었다. 민동회 회원들은 정기모임을 갖고 10주년을 자축했는데 장기표 이재오씨 등 민중당을 대표했던 선배그룹들도 참석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민중당이라는 거창한 실험은 민중당과 함께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추억으로만 남아있는 듯했다. 이미 제도정치권에 진입한 선배그룹도, 정치와는 무관한 생활전선에서 달리고 있는 후배그룹도 이제 와서 민중당이라는 이름으로 뭔가를 하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민중당의 상징으로 가장 최근까지 독자 정치세력화의 길을 모색해왔던 장기표씨는 처연하지만 민중당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난 7월4일은 나 개인적으로 역사적인 날이다. 그날은 내가 지금까지 해온 독자정당론을 사실상 접은 날이다. 10년 전 민중의 정치세력화라는 목표를 내걸고 민중당을 창당하면서 제도권 합법정당론을 내세웠지만 민주당을 선택함으로써 그동안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게 됐다. 민주당에 입당한 이상 이곳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 하지 않겠나.”

    김성식씨는 “민중당을 할 때는 당시의 시대정신에서 프런티어에 서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세상이 달라졌다. 오늘날 개혁을 이끌 시대정신은 분명 민중당을 하던 시대와 다르다. 시대정신이 달라진 만큼 주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세력이 나와서 정치개혁을 주도한다면 몰라도 이제 와서 민중당이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민중계’가 잘 나가는 이유

    장기표 : '마지막 재야'의 삶을 청산하고 민주당에 입당했다. 그는 "독자세력화의 꿈은 접었지만 정치개혁은 계속할 것"이라고 말한다.

    최규문씨도 “실패한 시도였던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당시 함께 고생한 동료들과는 인간적인 친분관계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 386세대의 대부분은 생활전선으로 돌아갔다. 물론 언젠가 기회가 오면 다시 정치일선에 나설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민중당을 재건하는 식의 시도는 어려울 것 같다”고 내다봤다.

    이제 장기표씨마저 제도정당의 문을 두드림으로써 가늘게 이어져오던 민중당의 실험이 마침내 끝을 맺게 됐다는 것이 민중당 출신 인사들의 공통적인 반응이다.

    물론 민중당 출신 한나라당 재선의원들을 중심으로 개인적 인연을 근거로 민중당 출신 후배들의 정치적 입문을 도와주고 배려해주는 유대관계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번 보궐선거에서 장기표씨의 한나라당 입당을 적극 권유했던 사람도 김문수 의원이다.

    김문수 의원은 “이회창씨 다음에 누가 대안이 있느냐. 적극 도울 테니 한나라당에 입당하라”며 장씨를 설득했다고 한다. 장기표씨는 “물론 한나라당으로 가면 당선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온 정치개혁을 구현하기에는 민주당 쪽에 더 많은 변화의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김의원의 간청에도 민주당을 택했다”고 말했다.

    밀고 당겨주는 일차적 인간관계는 여전하지만 ‘세력’으로서 민중당은 사실상 빛이 바랬다는 것이 민중당 출신들의 일관된 반응이다. 재야가 활력을 유지하는 비결은 내부에서 활발한 사상투쟁이 있을 때다. 조직의 전략적 과제를 놓고 노선투쟁이 없다면 그 조직은 죽은 조직이다.

    사실 이번에 당선된 이우재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15대 국회 때 국가보안법 개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공개해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이재오 김문수 의원도 한나라당의 보수적 당론을 적극 옹호함으로써 진보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이들 선배그룹의 ‘사상적 변화’에 대해 민중당 출신 후배들은 의외로 이를 수긍하는 분위기다.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민중당 출신 가운데 개인적으로 한나라당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한나라당에서 활동하는 선배들을 욕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김문수 이재오 의원을 과거 민중당의 이념을 전파하는 사람들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은 안된다고 인정했고, 철저히 개인의 선택에 따라 제도정치권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개인적으로 책임질 문제이지 민중당이라는 조직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두 사람은 개인적 역량이 대단한 선배들이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의 컨트롤타워는 김문수였고, 서울의 사령탑은 이재오 의원이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런 체념을 뚫고 좀더 큰 틀의 정치권 변화가 온다면 민중당의 실험은 다시 조명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런 낙관의 근거는 독자정당론을 둘러싸고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주체들이 아직도 정치권과 그 주변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또 재야의 단일한 대오형성에 최대 걸림돌이었던 김대중 김영삼 두 김씨의 정치적 영향력이 급속히 퇴조하는 것도 새로운 가능성의 단초가 된다고 보고 있다.

    실제 제도정치권에 진출한 정치인들 상당수가 민중당 창당논의에 가담했던 인물들이다. 그들은 여야 정치권에 만만치 않은 숫자로 포진해 있다. 이부영 의원 등 일부는 중진급으로 성장했다. 여야를 망라해 수백명의 재야운동권 출신 현역 정치인들이 정치권에 흩어져 있고, 이런 토양은 곧 제도권 진보정당이 출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 그것이다.

    그 가능성을 살펴보기 위해 민중당의 탄생과 해산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봉암의 진보당 이후 가장 거대한 규모의 진보세력이 결집한 제도권 정당이었지만, 근대화 과정에 있는 국가와 사회가 노출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2년이라는 단기간에 다 쏟아내고 사라져버린 민중당의 짧은 역사는 새로운 도전에 앞서 음미해볼 만한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89년 재야운동권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거대한 단일대오를 형성하고 있었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바로 그것이었다. 장기표 김근태 이부영씨 등 쟁쟁한 재야의 명망가들이 모두 뭉쳐 만들어낸 재야 단일조직의 등장으로 민주화운동진영은 한껏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장애물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1990년대는 이념적 혼란기였다. 소련과 동구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운동진영의 이념적 방황이 시작됐다. 민정·민주·공화당이 합당해 민자당을 창당했는데, 이 또한 재야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여소야대가 일순간 여대야소로 바뀌면서 정국은 급랭했다. 1980년대 이후 잠시 사라졌던 학생들의 분신자살이 이어진 것도 이 무렵이다. 방향을 잃은 운동권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로 이 순간 전민련 내부에서도 노선투쟁이 벌어졌다. 장기표 이부영씨를 중심으로 재야세력의 독자정당 추진론이 제기됐다. 재야로 남아서는 더 이상 국민의 지지를 끌어들일 수도 없으며 더 늦기 전에 제도권정당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김근태씨는 ‘시기상조론’을 들고 나왔다. 아직은 독자적으로 정당을 만들어 선거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얻기에는 역부족이므로 제도권 정당을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김근태씨를 제외한 장기표 이부영씨 그룹을 중심으로 독자정당론자들은 신당 구성에 착수했다. ‘민중의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가 바로 그 준비기구였다.

    그러나 진보정당 구성을 위한 논의 도중 이부영 박계동 유인태 김민석씨 등이 이 대오에서 이탈한다. 이들은 그 뒤 평민당의 후신 민주당에 합류해 다른 사람들보다 한발 앞서 현실 정치인으로 변신 한다.

    장기표씨를 중심으로 한 독자신당 추진세력은 크게 두 분파로 구성됐다. 장기표 김문수 이재오 등의 독자정당파와 현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인 노해찬씨를 중심으로 한 인민노련세력이 그들이다. 여기에 1987년 대선 때 백기완 후보의 독자출마를 도왔던 정태윤 오세철씨로 대표되는 백본그룹과 기타 사회주의 운동세력이 가세했다. 일찍이 대중정당을 표방했던 한겨레민주당 세력도 민중당 논의에 참가했다. 사노맹, 혁노맹 등 당시 비합법 노동자 조직들도 민중당에 자신들의 조직원을 보내 노선투쟁을 전개했다.

    한마디로 한국 재야 노동운동의 모든 정파가 총망라된 조직이 민중당이었던 셈이다. 다양한 세력이 모이다보니 당의 노선을 두고 내분이 그치지 않았다. 장기표씨는 “한마디로 ‘안팎곱사등이’ 신세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한편에서는 왜 계급노선을 분명히 한 노동자 정당을 하지 않냐고 불만을 터뜨렸고 밖에서는 지나치게 급진적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당 안팎의 논란에 대처하느라 제대로 된 정당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혼란과 우여곡절 끝에 민중당은 1990년 11월 마침내 창당됐다. 51개 지구당에 2000여 명의 당원이 참가했는데 창당대회장은 감동의 물결이었다. 1991년 지방선거에 42명의 후보를 내 1명의 당선자를 내기도 했다. 출마자들이 얻은 평균 지지율은 13.27%, 갓 출발한 정당 치고는 꽤 높은 득표율이었다.

    1992년 들어 민중당은 한국노동당창당준비위원회와 합당해 몸집을 키웠다. 그리고 그해 3월, 14대 총선에서 51개 지역구에 후보를 출마시켰다. 후보당 평균 득표율은 6.5%, 장기표 이우재 이재오씨 등 당의 간판들이 출전한 곳에서는 20% 가까운 지지율을 올렸지만 한 사람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다.

    결국 전국적으로 2% 이상의 유효득표를 하지 못한 정당은 자동적으로 해산되는 정당법에 따라 민중당은 해산의 길을 걷게 된다. 비록 충분한 돈을 갖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만성적인 자금난은 구성원들의 의욕을 꺾어놓기에 충분했다.

    엎친 데 덮친 격, 1992년 가을에 터진 ‘이선실 간첩사건’은 민중당을 결정적으로 주저앉히는 계기가 된다. 장기표 김낙중씨 등 당의 핵심 인사들이 구속된 이 사건으로 민중당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민중당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져가고 있다.

    민중당의 생성과 소멸은 한국 진보정치의 희망이기도 했지만 어떻게 하면 망하는가를 보여준 생생한 드라마였다. 관계자들은 “구성원들의 열정은 대단했지만 각종 한계를 모두 드러낸 경험”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장기표씨는 “비록 민중당은 실패했지만 지금도 당시의 민중당 노선이 옳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민중당 이전의 당은 운동권의 한 분파에 불과했다. 진짜 민주운동권 세력이 광범위하게 모여 정치세력화를 도모한 것은 민중당이 유일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장씨는 시기상조론을 주장하며 민중당에 참여하지 않았던 세력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았다.

    “당시에 시기상조론을 주장한 세력들은 그 뒤에 어떠했나.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DJ당에 흡수되면서 재야는 형해화의 길을 걷지 않았나. 만약 당시 모든 운동권이 단결해 독자정당을 만들었다면 지금 한국의 정치환경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장씨는 “비록 독자정당론은 접었지만 DJ의 그림자가 걷혀가는 민주당 내에서 본격적으로 내 꿈을 펼쳐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보궐선거에서 다시 실패한 만큼 장기표씨의 새로운 도전은 2004년 총선 이후로 연기해야 할 상황이다. 아무튼 현재로는 민중당의 정치실험을 계승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장기표씨 한 사람이다. 하지만 장씨도 과거와 같은 독자정당을 구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민주당 안에서부터 정치개혁의 바람을 일으키고 이를 모든 정치권으로 확대시키겠다는 계획인 듯하다.

    이런 장씨의 계획에 동조하는 이도 있고, 방관하는 이도 있다. 민중당을 향수로 기억하는 과거 민중당 사람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민중당이 했던 실험은 과거의 경험으로 묻히고 말 것인가. 아울러 민중당 출신 정치인들은 민정계 민주계 공화계와 함께 명실상부하게 ‘민중계’라 부를 만한 정치세력으로 자라날 수 있을까. 관심이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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