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록에 의거하더라도 우리는 김두한의 일생에서 한국 현대사의 격랑을 읽어낼 수 있다. 아마 이런 이유로 한국 근현대사에서 수많은 주먹들이 명멸했지만 김두한만큼 지속적으로 재현되는 인물이 없을 것이다. 만화에서부터 소설, 영화,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김두한은 장르와 시대를 뛰어넘어 지속적으로 재현되고 있으며, 그것도 ‘긍정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현대사의 올바른 복원이 한창 진행되는 오늘날 다중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김두한의 삶이 이렇게 일관되게 긍정적으로 재현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비밀을 김두한 실제 삶의 궤적을 추적해 살펴보자.
김두한은 1918년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에서 출생했다. 청산리에서 일군에 맞서 싸우다 순국한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았고 이리저리 쫓겨다니다보니 교동 보통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장군의 아들은 청계천의 수표교 밑에서 자랐다. 청계천은 옛 서울의 남쪽과 북쪽을 나누는 경계였으며 그 위에는 여러 개의 다리가 있었다. 수표교(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8호, 현 장충단공원으로 이전)는 청계천 상류에 위치한 다리로 지금은 복개되어 수표교길(현 가회동에서 내려와 종로를 지나 영희전에 이르는 길)이라는 이름만 남아있다.
‘주먹’이 된 장군의 아들
조선이 개항한 뒤 서울에 외국인의 거주가 허용되었는데 그들의 거주지역은 궁궐을 기준으로 할 때 개천의 바깥쪽으로 한정되었다. 먼저 개천의 남단에는 중국인들이 둥지를 틀었다. 수표교 남단, 지금의 소공동과 서소문 일대에 중국인 상가가 형성된 것도 이 시기다. 그후에는 일본인 세력이 커지면서 그들의 거주지역이 충무로 일대에서 남대문과 수표교 남단, 을지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여전히 청계천을 넘지 못했고 넘으려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 일본은 과거 청계천을 경계로 구분되었던 지역간 위상을 역전시켜 나갔다.
도시기반 시설 정비를 위한 모든 재원이 청계천 이남으로 집중되면서 청계천은 우리의 옛것이 지켜지는 야만의 조선 ‘북촌’과 일본화된 문명의 ‘남촌’을 가르는 차별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니 천변의 북촌 조선인 거주지역의 생활조건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러나 청계천은 조선인에게는 여전히 빨래터요 야채 세척장이었다. 이 지역에는 계속 물장수가 돌아다녔고 아낙네들은 빨랫감을 들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