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호

勞風 2002 대선 찍고 2004 총선 간다

정치세력화 깃발 올린 노동계

  • 김진수 jockey@donga.com

    입력2002-10-08 16: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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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는 12월19일 치러질 제1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과거의 대선 양상과는 확연히 다른 국면이 조성되고 있다. 한국정치 사상 지역주의의 주역이던 3김이 퇴장한 최초의 대선이란 점 외에도 이회창 대세론, 노풍(盧風), 정풍(鄭風) 등 ‘절대강자’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대선주자간 지지율 변화를 극심하게 하는 유동적 변수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가 노동계의 행보다. 그럼에도 노동계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그다지 받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노동계 일각에선 “아직도 언론이 정치와 노동을 별개로 보는 후진성을 보인다”는 불평마저 나오고 있다.

    노동계의 정치참여는 1998년 노조 정치활동이 합법화되면서부터 이미 시작됐다. 그러나 이번 대선을 향한 노동계의 행보에 특히 관심이 쏠리는 건 대선에 임하는 노동계의 의지가 예전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적극성을 띤다는 점 때문. 이런 배경엔 ‘노동자 정치세력화’란 목표가 달성가능한 여건이 본격적으로 조성됐다는 노동계 내부의 분석이 깔려 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새로운 정치공간을 형성해 지역 일변도였던 기존 정치지형을 변화시킬 수 있는 변수다. 자연히 이번 대선에서 노동계의 행보가 갖는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대선가도에 한발짝 먼저 발을 내디딘 곳은 민주노동당(이하 민노당). 민노당 권영길(61) 대표는 지난 8월9일 당사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대선 도전을 공식선언한 데 이어 민노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단독출마, 대선 D-100 이틀 전인 9월8일 민노당대통령후보선출대회에서 대선후보로 확정됐다.

    대선체제 돌입한 민주노동당

    권대표의 대선 출마는 이번이 두번째. 1997년 제15대 대선 당시 권대표는 재야 및 노동계 연합체인 ‘국민승리21’ 후보로 출마해 30만6026표를 얻었다. 이는 전체 유권자의 1.2%에 그친 득표율. 그러나 민노당은 올해 6·13지방선거에서 8.1%의 정당지지율(134만표)을 얻어 자민련을 제치고 제3당으로 떠오르는 기염을 토했다(한나라당 51.2%, 민주당 29.0%, 자민련 6.5%). 또 당초 큰 기대를 걸었던 송철호 울산시장 후보가 낙선하긴 했지만, 광역의원 11명, 구청장 2명, 기초의원 32명 등 모두 45명을 당선시켜 정치적 입지를 한층 강화했다.



    민주노총 주도로 2000년 1월 창당해 불과 2년여 뒤인 6·13지방선거 정당투표에서 1997년 대선 때의 7배에 육박하는 득표율을 올렸다는 사실에 민노당측은 상당히 고무돼 있다. 당초 목표한 득표율 5%를 훨씬 웃도는 8.1%의 정당지지율은 전혀 예상치 못한 성과이기 때문.

    “두 가지 덕을 봤다. 이전보다 군소정당에 대한 사표(死票)심리가 크게 줄었고, 이중 일정부분이 민노당 몫이 됐다. 기성정치권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이 민노당을 ‘대안’으로 선택했다고 본다. 또 1인1표 비례대표제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판결을 내림으로써 도입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덕분에 소수정당의 원내진출 진입장벽도 낮아졌다.” ‘6·13 약진’에 대한 민노당의 자체 분석이다.

    이같은 순항이 대선국면에도 그대로 이어질 수 있을까. 민노당의 이번 대선전략이 사실 특별한 건 아니다. 민노당은 일단 본격적인 선거국면에 접어들면 민노당에 대한 지지도가 급상승하리란 낙관적 전망을 내놓는다. 특별한 전술을 구사하기보다 선거운동 자체를 일상활동의 연장선상에 놓고 불신의 대상인 기성정치권과는 다른 민노당만의 차별성을 부각시켜 주지지층인 노동자·농민·도시빈민의 지지를 이끌어낸다는 계산이다.

    현재 민노당이 내부적으로 목표하고 있는 대선 득표율은 6·13지선 때의 2배인 15∼16% 가량. 이는 지선 때처럼 사표심리가 낮을 것이란 가정을 전제로 한 것이다. 민노당은 다른 대선후보들의 지지율을 급등락케 하는 국면들이 앞으로도 계속될 경우 의외로 지지율이 더 높아질 수 있을 것으로도 기대한다.



    민노당의 이런 자신감과는 달리, 기성정치권에서 점치는 권대표의 당선 가능성은 낮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권대표의 지지율은 5∼8%대에 그친다. 그러나 민노당이 제3당으로 떠오른 만큼 대선에서 적잖이 변수로 작용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실제 1997년 대선에서 권대표가 얻은 30만여 표는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간 표차(39만557표)에 근접한 것이다. 민노당은 특히 민주노총의 전폭지지를 받고 있는 데다 당비를 내는 당원이 3만명에 육박할 정도로 당세를 확장해왔기 때문에 박빙의 혼전이 빚어질 경우 주요 후보의 당락을 가르는 변수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게다가 권대표는 민노당을 포함한 진보세력의 총연대를 통한 역량 강화를 위해 범진보진영 대선후보 단일화에 나설 것이란 의사를 이미 밝힌 바 있다. 민노당은 지난 7월16일 단일후보 선출을 위한 범국민추진기구(범추) 구성을 제안했다. 민노당측은 “당 규모에 연연하지 않고, 사회당 등과 당 대(對) 당의 대등한 위치에서 후보 단일화를 논의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후보 단일화가 이뤄질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민노당과 함께 진보정당의 한 축을 이루는 사회당(대표 김영규) 역시 2004년 총선에서의 국회 원내 진출을 위한 교두보 확보 차원에서 이번 대선에 적극적으로 임한다는 방침이다. 사회당은 오는 10월 전당대회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표방하는 독자후보를 선출할 예정. 그러나 대중정당을 표방하는 민노당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다양해서 사회주의를 이념으로 삼는 모든 좌파진영이 연대해 대선에 임하자는 사회당의 입장과는 일정한 간극이 있기 때문에 양당간 연대가 순조로울지는 미지수다.

    사회당 강인성 부대변인은 “7월16일의 ‘범추’ 구성 제의는 사회당의 입장과 무관하게 나온 것이어서 7월19일 민노당측에 불참의사를 분명하게 밝혔다”며 “이후 아무런 진전도 없다”고 말했다. 사회당, 전국연합 등 진보진영과의 단일후보 논의를 통해 노동계 및 시민·사회단체의 광범한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대선에서 얻을 수 있는 몫이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데 민노당의 고민이 있다.

    민노당 ‘과녁’은 2004년 총선

    그러나 민노당의 속내는 기실 다른 곳에 있다. 민노당으로선 이번 대선이 2004년 총선에서 원내진출을 하기 위한 디딤돌 성격이 짙다. 권대표의 출마는 민노당의 대중적 지지도를 굳히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전초전’이란 것이다.

    민노당의 핸디캡은 ‘원내에 의석이 없는 정당’이란 점. 권대표는 2000년 10월호 월간 ‘말’지와의 인터뷰를 비롯,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의석의 필요성’을 강하게 피력해왔다. “당장의 당선이나 득표율은 중요한 게 아니다”는 그의 말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대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총선이라는 심중의 우회적 표현인 셈이다.

    민노당은 6·13지선에서 획득한 정당지지율 8.1%를 그대로 유지할 경우 2004년 총선에서 정당명부식 투표에 의한 비례대표로만 6∼8개의 의석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한다. 민노당은 그 여세를 몰아 2008년 총선에선 원내교섭단체를 꾸린다는 계획까지 세워둘 정도로 의석 확보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비록 민노당이 6·13지선에서 ‘잠재적 능력’을 보여줬다고는 하지만, 이후 실시된 8·8 재보선에 출마한 후보들이 3∼6%대의 지지율에 그쳐 ‘정책정당’으로서 표심을 이끌지 못한 한계를 드러낸 바 있다. 때문에 기성정치권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신을 얼마만큼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로 전환시킬 수 있을지에 총선의 운명이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지선과 대선의 성격이 판이하다는 점에서 지선의 득표율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아직까진 의문이다. 군소정당이 대선에서 지지율을 높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선업무를 총괄하는 민노당 노회찬(46) 사무총장은 “의석이 하나라도 있는 것과 없는 것과는 정당의 정체성과 관련해 큰 차이가 난다”며 “민노당은 2004년 총선의 사전포석으로 이번 대선에서 지역성 심화지역인 영·호남에서 제1야당이 될 수 있도록 주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勞風 2002 대선 찍고 2004 총선 간다

    9월5일 개최된 '한국노총 대선선택을 위한 정치 심포지엄'

    대선을 향한 한국노총(위원장 이남순)의 행보도 민노당 못잖게 빠르다. 한국노총은 지난 8월초 언론을 통해 독자정당 창당의 ‘애드벌룬’을 띄운 데 이어 9월5일 국회 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한국노총 대선선택을 위한 정치심포지엄’을 열어 창당 의지를 공론화했다.

    한국노총의 이같은 행보에서 새롭게 읽히는 것은 기존 정당과의 전략적 제휴라는 오랜 관행과의 단절을 표명했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한국노총의 대선전략은 이른바 ‘승자편승전략(bandwagon strategy).’ 즉 대선에서 집권 가능성이 있는 정당을 지지하는 대가로 노동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보장받는 긴밀한 협조관계(전문용어로는 국가조합주의적 노조-정당관계)를 고수해온 것이 한국노총이 보여준 궤적이다. 때문에 한국노총의 이런 궤도 이탈에 의아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독자정당 창당계획은 사실상 4년 전부터 한국노총 내부에서 싹텄다. 제대로 알려진 바 없지만, 한국노총은 1998년 2월 정기 전국대의원대회에서 1997년을 ‘지역정치 타파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원년’으로 규정하고, 노동자와 국민대중의 독자정당 건설을 핵심내용으로 한 ‘21세기 정치활동 플랜’을 확정한 바 있다. 이 ‘플랜’에서 주목할 것은 2012년 대선에서 노동자와 국민대중이 중심이 되는 독자정당의 집권을 목표로 하여 2004년 총선 이전에 독자정당을 창당해 총선에 임한다는 점을 밝혔다는 것이다(190쪽 표 참조). 한국노총이 창당에 나서게 된 또다른 내적 조건은 자체 조합원들의 독자정당 선호표출이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4차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조합원의 56∼63%가 독자정당 창당에 찬성했다.

    창당의 필요성은, IMF경제위기 이후 혁명적으로 변화한 국내 노동시장의 변화 속에서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명분으로 한 구조조정이 감원 중심으로 이뤄져 대규모 실업이 발생하고 부의 불평등이 심화된 현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거기에다 한국노총 출신 국회의원들의 활동만으론 한국노총의 의견이 정책에 반영되는 데 한계가 있고, 기존 노동시장 중심의 노동운동만으론 정리해고, 임금삭감, 근로조건 악화 등의 문제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없어 정치영역에서 새 활로를 모색해야만 한다는 위기의식이 조합원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는 게 한국노총측의 설명이다.

    한국노총 이상연 기획조정실 차장은 “한국노총이 전통적으로 보수정당과 정책연합을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1997년 대선에서 제1야당인 국민회의를 전폭 지지하는 ‘정책연합’을 했음에도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며 “1999년 정책연합을 파기한 이후 창당은 한국노총의 절체절명의 과제가 됐다”고 말한다. 알려진 바 없지만, 한국노총이 민주노총처럼 지난 수년간 사민당 정권이 득세한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 등 해외에서 이른바 ‘정치교육’을 해왔다는 점도 창당 추진의 한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재 한국노총이 계획하고 있는 중앙당 창당시기는 오는 10월말∼11월초. 왜 하필 대선을 앞두고 독자정당 창당 추진을 공식화한 것일까. 여기엔 몇가지 까닭이 있다. 그 하나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으로 이념정책 중심의 소수정당 창당여건이 좋아졌다는 점이다. 시기적으로 볼 때 대선국면은 정당들간 이합집산과 힘겨루기가 활발한 때여서 국민적 관심을 끌어내기에 마침맞은 호기(好機)이기도 하다. 한국노총이 당초 ‘21세기 정치활동 플랜’에서 계획했던 창당시기(2004년 총선 이전)를 2002년 대선 이전으로 옮긴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또다른 까닭은 6·13지선에서 민노당이 거둔 성과에 큰 자극을 받았기 때문. 한국노총도 지선에서 단체장 3명, 광역의원 17명, 기초의원 18명 등 38명의 당선자를 내긴 했지만, 자칫 창당을 늦출 경우 노동계 정치세력화의 주도권을 민노당에게 완전히 빼앗길 것이란 위기의식이 창당을 서두르게 한 요인이다.

    한국노총이 지향하는 독자정당의 이념적 성격은 이른바 ‘개혁적 국민정당(catch-all party).’ 정치 스펙트럼상으로 보면 한국노총이 포진할 지형은 민주당 좌측, 민노당 우측의 중도노선이다. 선진국의 경우 민주주의, 복지사회, 인간존중의 사민주의 영역에 해당한다.

    한국노총은 기존 16개 지역본부와 51개 지역지부를 일사불란하게 활용하면 창당 실무작업엔 별 무리가 없다며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한국노총은 9월 중순경 산하조직을 대상으로 전국순회 창당설명회를 갖고 9월말∼10월초 임시 대의원대회를 열어 창당방침을 최종 확정할 계획이다. 또 한국노총 지역본부들을 중심으로 23개 지구당을 만들기로 한 상태다.

    “창당은 노총 역사상 최대 사건”

    독자정당 창당이 성공적 결실을 본다면, 한국노총측의 표현대로 ‘노총 50년 역사상 최대의 사건’이 될 전망이다. 그러나 창당가도엔 걸림돌이 적지 않다.

    진보적 성향이 확실해 노동자들 사이에 상당부분 독자적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민노당과 달리, 한국노총 출신 인사들의 경우 기성 정당 공천에 관심이 크다는 한계가 있다. 아직도 보수정당과의 제휴를 선호하는 기류가 여전히 한국노총 내부에 흐르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창당 이후에도 전국적 정당으로의 도약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전망이다.

    한국노총이 기존 정당지지 흐름과의 갈등을 극복해 조직을 개혁하겠다고 공언하고는 있지만, 창당을 위한 인프라는 조성되지 않은 상태다. 창당의 성공을 위해선 산하조직의 적극적 동참이 필수적인데, 한국노총 일각에서는 창당이 결국 향후 한국노총 출신 인사들을 제도권에 편입시키는 ‘뜀틀’ 역할을 하는 데 그칠 수도 있다는 불신감이 여전하다. 게다가 민주노총에 비해 조합원들의 정치적 각성이 높지 않다는 내재적 한계도 있다.

    한국노총 박동 대선기획팀장은 “물론 한국노총 내 28개 산별 회원조합 및 16개 지역본부 관계자들 중엔 당원 신분으로 기성 정당과 연계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며 “이들을 일시에 ‘쾌도난마’할 수는 없는 만큼 창당 이후 장기적으로 이들과 선을 긋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밝힌다.

    한국노총의 또다른 고민은 마땅히 낼만한 독자후보가 없다는 것이다. 대선후보 문제와 관련해 노총이 가정하는 경우의 수는 4가지. 독자후보를 내든가, 안 내든가, 다른 정당과 공동창당해 후보를 내든가, 개혁적 정당의 후보를 지지하든가 하는 것들이다. 한국노총 내부적으론 가장 바람직한 방안을 민노당과의 합당으로 보고 있다. 때문에 한국노총은 ‘권영길’의 지명도를 뛰어넘을 만한 대안이 없는 최악의 경우 대선후보를 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노총의 한 관계자는 “현재 명망 있는 외부인사들을 상대로 영입 의사를 타진중”이라고 밝혔다. 한국노총이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로 염두에 둔 인물은 1995년 11월∼2000년 2월 제16, 17대 한국노총 위원장을 지낸 민주당 박인상(63) 의원(전국구). 하지만 그는 한국노총 지도부의 비공식적인 추대 제의를 고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박인상 의원실 관계자는 “한국노총의 다급한 입장을 모르진 않지만, 노무현 후보의 노동특보로서 친노(親盧) 성향의 중진의원으로 분류되는 박의원의 입장에서 그런 제의를 받아들인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냐”고 반문했다. 타천으로라도 거론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속타는 재계

    겉으로 내색은 않지만, 대선을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전기(轉機)로 삼은 노동계의 움직임에 대해 재계는 꽤나 당혹스런 눈치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노동계 출신 인사들의 국회 진출이다. 그들은 국회의원이 되면 상임위원회 활동을 대부분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한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들이 노동관련 입법에서 노동단체의 이해를 대변해 노동계 편향으로 흐른다는 것 자체가 재계로선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사용자 대표기구인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회장 김창성) 정책본부 의정팀의 한 관계자는 “노동계의 정치활동 강화로 인해 솔직히 곤혹스럽다. 그렇다고 거기에 대응해 재계가 정당을 만들 순 없지 않은가”라며 “그저 관망하고 있는 상태”라고 답한다.

    재계의 이런 속앓이는 2004년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원내 진출이 확실시되는 민노당을 크게 의식한 것이다. 현재 한국노총 출신의 국회의원은 박인상·조한천(60)·조성준(54) 의원(이상 민주당), 김낙기(61)·김문수(51) 의원(이상 한나라당) 등 5명. 여기에다 그야말로 ‘역동적’인 활동이 예견되는 ‘민노당 의원’들이 등장하게 되면 노동법 개정 등 현안을 두고 재계를 맹렬히 압박하는 ‘악재’로 작용할 것은 불보듯 뻔하다. 반면 재계 출신 의원들은 대개 환경노동위원회가 아닌 다른 상임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데다, 여론을 의식해 재계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하는 일엔 소극적이어서 큰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게 경총의 푸념이다.

    게다가 지난 3월 경총이 노동계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방안으로 사업장내 노조의 정치활동을 일정범위 제한토록 하는 내용을 포함한 ‘2002 단체협약 체결지침’을 각 회원사에 배포했지만, 노동조합법상 노조의 정치활동 금지조항은 이미 폐지된 상태여서 실효를 거두지 못한 바 있다.

    그러나 경총은 다른 한편으로 한국노총의 독자정당 창당에 대해선 그다지 우려하지 않는 분위기다. 창당하더라도 민노당처럼 단일정당으로 존속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자체 분석에서다. 이런 분석은 한국노총의 창당에 반신반의하는 기성 정당의 시각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한국노총 출신인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독자정당 창당에 대한 한국노총 내부의 인프라가 약해 목전에 다다른 대선에서 어떤 ‘성과’를 거두긴 어렵지 않겠느냐”며 “일단 세력화한 뒤 다른 정당과의 제휴를 통해 ‘지분’을 보장받는 방법을 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독자정당을 창당하더라도 그것이 기성 정당과의 또다른 제휴를 위한 ‘선언적 의미’의 창당인지, 진정한 ‘홀로서기’인지는 더 두고봐야 한다는 것이다.

    미묘한 격전지 울산

    노동계의 최근 행보와 관련해 이번 대선정국에서 미묘한 격전지로 점쳐지고 있는 지역이 바로 울산이다. 이곳에서 정몽준과 권영길이란 지극히 상반된 두 인물 사이에 펼쳐질 대결은 자못 흥미로운 부분이다. 울산은 그만큼 두 후보에겐 상징성을 지닌 곳이다.

    특히 월드컵 이후 지지율이 급상승한 정풍(鄭風)의 주인공 정몽준(51) 의원(무소속)은 한때 현대중공업 회장을 지냈고 지금도 대주주인데다 울산 동구에서만 내리 4선을 한 만큼 지역적 기반이 누구보다도 탄탄하다고 볼 수 있다.

    민노당 역시 울산을 ‘텃밭’으로 여긴다. 6·13지선에서 현대중공업 8대 노조위원장 출신인 이갑용(44)씨와 현대자동차 2대 노조위원장을 역임한 이상범(45)씨를 각각 울산 동구청장과 북구청장에 당선시키는 성과를 거둔 바 있어 민노당의 입지도 만만치 않다. 특히 이갑용 울산 동구청장은 잇따라 세 번 지선에서 당선될 만큼 노동자들의 지지도가 높다. 울산 전체 유권자의 90%가 노동자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8월22일 울산 현대중공업 노조가 ‘주가와 회사경영에 미치는 부작용을 고려해 정의원의 대선출마에 반대한다, 출마하려면 지분부터 처분하라’는 요지를 담은 ‘또다시 국민당 망령인가?’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자, 정의원측은 8월25일 이를 반박하는 보도자료에서 “대선 때 현대를 이용할 생각이 전혀 없다”며 현대중공업 노조의 성명이 노조가 소속된 상급 노동단체인 민주노총의 정치적 의도에서 나온 것 아니냐고 반박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현대중공업 노조 관계자는 “정의원의 출마로 회사 사정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노조 독자적으로 낸 성명이지 민주노총과의 ‘교감’은 없었다”고 답한다. 민주노총을 현대중공업 성명의 배후라고 지목한 정의원의 주장은 단지 억측일 뿐이란 반응이다.

    이번 대선에서 민노당은 정의원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정의원이 울산 동구에서 이룬 ‘철옹성 신화’는 이미 2000년 4·13총선에서 깨졌다는 것이다. 민노당측은 그 근거로 에피소드 하나를 제시한다. 정의원이 결과적으로 4·13총선에서 당선되긴 했지만, 당시 그는 3선 때까지는 ‘안하던 행동’을 했다는 것. 퇴근하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에게 일일이 지지를 호소한 게 그것이다. 이는 과거와 달리 정의원에 대한 노동자들의 지지가 상당부분 철회됐다는 사실에 대한 방증이라는 게 민노당의 분석이다. 민노당측은 “조만간 어떤 형태로든 정의원의 대선 출마에 대해 울산지역 노동계가 분명한 입장 표명을 할 것”이라 전망한다. 반면 정의원측은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정의원에 대한 지지율이 전지역에서 골고루 높게 나온다. 울산이 ‘특별’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밝힌다.

    어쨌든 대선후보들의 당락과는 별도로, 근로자가 대다수인 울산 표심(票心)의 향방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에 노동계 안팎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민노당이나 정의원 공히 기성정치권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재(好材)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 대통합 이뤄질까

    노동계의 정치세력화 기류는 이제 한국에도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처럼 노동자들의 이익을 적극 대변하는 노동자 정당의 출현이 본격화하고 있는 방증이라 볼 수 있다. 온도 변화와 지형의 차이에 의해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듯, 한국사회에도 노동자계급이 선거참여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무르익었다는 것이다.

    이화여대 김수진(47) 교수(정치학)는 “시기적 차이가 있을 뿐, 한국에서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서구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지극히 자연스런 과정으로, 이는 그동안 정치세력화를 가로막아온 법적·제도적 제약요인들과 지역주의 정치의 틀이 깨졌기 때문에 가능해졌다”면서도 “한국의 노동자 중심 정당이 서구에서 광범한 지지를 받는 집권당이나 제1야당같이 지배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할 것이란 전망은 현행 선거법에서는 시기상조”라고 분석한다.

    그렇더라도 향후 2년간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급속도로 진전될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민노당과 한국노총 둘다 2004년 총선으로 줄달음치려는 공통의 목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노총의 독자정당이 계획대로 창당되면 짚어볼 수 있는 전망은 크게 두가지다. 이 정당이 지속가능한 정당으로 발전해갈 것인가, 아니면 민노당 또는 제도권내 개혁세력과 연대해 새로운 정당으로 외연을 확대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다. 한국노총은 민노당과의 통합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누구도 예단하기 힘들다. 한국노총의 창당 추진을 두고 노동계 분열이 심화되는 게 아닌가 하는 일부의 시각도 그래서 쉽게 거두어지지 않는다. 노동계 주변에선 민노당과 한국노총 독자정당이란 두 개의 정당이 공존할 경우 장기적으론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란 견해가 지배적이다. 만일 노동계 대통합이 이뤄진다면 시너지 효과에서 나오는 파장이 결코 작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두 당이 대선 전에 전격 합당해 노동계 단일정당을 탄생시킬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민주노총 손낙구 교육선전실장은 “한국노총이 지난 50여 년간 지속해온 보수정당과의 밀월관계를 단기간내 청산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기대”라며 “민노당과 한국노총 독자정당은 각자 장기간 ‘실험’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합당의 수순을 밟게 될 것”이라 전망한다.

    어쨌든 새로운 방식의 노동운동과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강력한 요구에 직면한 2002년 한국 노동계의 ‘뜨거운 겨울맞이’는 시작됐다. 노동계 위상 강화를 예고하는 서막이 오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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