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호

외풍에 시달리는 ‘검찰의 꽃’

검찰 특수부 & 특수부 검사들

  • 이상록 myzodan@donga.com

    입력2002-10-08 17: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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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찰 중 검찰’로 통하는 특수부. 각종 대형 비리사건 수사의 중심엔 언제나 특수부가 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을 수사하다 보니 ‘정치검찰’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한다.
    • 진정한 ‘특수통’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검사들의 자조도 나온다. 대한민국 검찰 특수부, 과연 ‘정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가.
    "이런 때일수록 방법은 하나, 진실을 밝혀내는 것뿐이야. 그게 검찰이 사는 길이고 특수부가 사는 길이니까.”

    지난 8월22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고검 청사. 굵은 빗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A검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때 특수부 검사로 명성을 날린 그의 시선은 청사 정문 앞에 모여든 수백명의 시위대에 머물고 있었다.

    우산을 쓴 사람들이 울긋불긋한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확성기 소리에 맞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후보의 장남 정연씨의 병역비리 의혹 수사와 관련, 검찰에 항의시위를 벌이러 온 한나라당 의원과 당원들이었다. 시위는 하루 전 불거진, ‘검찰이 민주당측에 정연씨 병역비리 의혹 수사를 위한 분위기 조성을 요청했다’는 민주당 이해찬 의원 발언 파문에 따른 것이었다. 시위대는 “이번 수사가 정치공작이었음을 드러낸 증거”라고 외치고 있었다.

    수사 시작부터 ‘편파수사’ ‘수사팀 교체’를 주장하며 민감하게 반응하던 한나라당으로선 더 없는 호재(好材)였다. 이 사건의 수사를 맡은 박영관 서울지검 특수1부장의 유임 여부를 놓고 관심이 모아졌던 검찰의 8월21일 정기인사도 이의원의 발언 파문에 밀려 하루 연기된 상태였다.

    “어차피 특수수사는 외줄타기 같은 거야. 한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거든. 하지만 정도(正道)를 잊지 않는다면 줄타기가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아.”



    A검사는 특수수사와 특수부 검사의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수사의 기본 원칙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이른바 ‘병풍(兵風) 수사’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박영관 부장이 유임되고 난 뒤 한나라당의 반발은 김정길 법무부장관에 대한 국회 해임건의안 제출로까지 치달았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정치권의 대립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이번 수사의 결론은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가장 중요한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검찰 특수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비롯해 각종 대형 비리사건에 대한 수사의 중심엔 항상 검찰 특수부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는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되돌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한민국 검찰을 대표하는 검찰수사의 핵심, 특수부는 과연 어떤 곳인가.

    전국 13개 지방검찰청과 41개 지청 가운데 공식적으로 특수부가 구성돼 있는 곳은 서울지검 특수1·2·3부를 비롯해 인천 수원 대전 대구 부산 울산 창원 광주지검 등 9곳뿐이다. 이들 외에 서울지검 산하 각 지청과 대다수 합의지청에서는 ‘말석 형사부(서열이 제일 낮은 부장이 속한 부서)’가 특수부 역할을 담당한다.

    특수부와 소속 검사들을 총지휘하는 곳은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다. 1981년 4월 기존의 특별수사부에서 중앙수사부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중앙수사부장 아래 수사기획관과 중수1·2·3과 및 컴퓨터수사과, 특별수사지도과를 두고 있다. 검찰총장 직할부대로 운영되는 범죄정보기획관과 범죄정보 1·2 담당관도 검찰의 특수수사를 배후 지원한다.

    특수부의 주요 업무는 크게 하명(下命) 수사와 인지(認知) 수사로 나뉜다. 여기서 말하는 ‘하명 수사’는 정권 차원에서 내려오는 수사가 아니라 검찰총장 지시에 의한 수사를 의미한다. 하지만 실제 청와대 등 정부 고위층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포장’된 뒤 내려오는 수사요구도 적지 않다는 게 검찰 관계자들의 공통된 얘기다.

    ‘검찰청사무기구에 관한 규정’ 6조는 대검 중수부의 업무를 ‘검찰총장이 명하는 범죄사건의 수사 및 이와 관련된 범죄 수사’로 규정하고 있다. 같은 규정 16조 역시 ‘검사장이 지정하는 사건의 수사 및 처리에 관한 사항’을 서울지검 특수부의 업무로 정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특수부 검사들이 인정하는 특수수사의 ‘꽃’은 인지수사다. 다음은 현직 특수부장인 B검사의 얘기.

    “특수부는 수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자체 해결하는 유일한 부서입니다. 형사부가 일반 고소·고발사건이나 경찰 송치사건을 담당하지만 특수부는 그렇지 않죠. 직접 첩보를 수집하고 이를 근거로 내사를 벌인 뒤 피의자를 체포하고 증거를 수집해 기소할 때까지의 전 과정이 한 부서 안에서 통합적으로 이뤄집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나 사회적 파장이 예상되는 중요한 사건은 전국 특수부 중에서도 대검 중수부나 서울지검 특수부에 대부분 배당된다. 2002년 9월 현재 서울지검 특수부엔 1·2·3 부장검사를 포함해 18명의 검사가 배치돼 수사를 맡고 있다. 여기에 딸린 검찰 직원들과 수사 1·2·3과, 범죄정보과 요원을 비롯해 파견 경찰관과 국세청, 관세청, 금융감독원 파견 직원 등을 포함하면 전체 인원은 150여 명에 이른다.

    대검 중수부의 경우 중수부장과 수사기획관, 중수 1·2·3과장과 컴퓨터수사과장 등 6명의 검사로 구성돼 있지만 수사가 시작되면 통합운영되는 대검 연구관들을 비롯해 다양한 지원 인력을 활용할 수 있어 그 ‘화력(火力)’은 서울지검 특수부 이상이다.

    막강한 수사 권한과 사회적 영향력을 자랑하는 특수부 검사는 모든 검사들이 선망하는 대상이다. 하지만 어느 조직에서나 그렇듯이 원하는 모두가 특수부 검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002년 9월 현재 전국 검사 1356명(정원 1440명) 가운데 공식·비공식 인원을 다 합쳐도 특수부에서 일하는 검사는 전체의 7.3%에 불과한 100여 명 선이다. 게다가 특수부 말석 검사로 발령받기 위한 최소 경력 조건이 ‘3학년’임을 감안하면 특수부 검사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3학년’이란,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본청급 첫 발령지(1학년)와 지방 지청(2학년)을 거쳐 다시 본청급으로 발령받는 때를 뜻하는 검사들 사이의 속어다. 한 발령지에서 보통 2년 정도 근무하기 때문에 검사 경력으로 따지면 4∼5년차가 되는 시점이다. 초임 검사들이 배치되는 형사부나 공판부 등에 비해 특수부는 말석 검사라 하더라도 그만큼 경험과 검증된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대검의 한 간부는 “검사 경력이 5년 정도 되면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곳저곳에서 나오기 시작하고 10년쯤 되면 ‘○○○는 어떤 검사’라는 평이 굳어진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검사 경력 5년부터 10년까지가 검사의 능력과 성격, 전문성 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의미다. ‘특수통’ ‘공안통’ ‘기획통’ 등 자신의 전문분야를 가진 검사로 성장할 수도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영원히 한직으로 떠도는 검사가 될 수도 있는 때가 바로 이 시기다.

    일선 지검장들이 정기인사에서 가장 신경을 쓰는 부서 역시 특수·공안 관련부서다. 일선 지검장을 지낸 한 검찰간부는 “소위 말하는 ‘똘똘한 검사’를 이곳(특수·공안)에 배치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맡은 일을 잘한다며 한번 ‘특수통’ ‘공안통’으로 분류된 검사들이 계속 같은 일을 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대부분의 검사생활을 법무부와 대검 및 서울지검과 산하 지청에서 보냈던 전직 검사장 C씨는 이렇게 말한다.

    정권에 따라 춤추는 특수부 인사

    “초임 시절 우수한 성적을 받고도 ‘배경’ 좋은 동기들에게 밀려 지방 지청으로 발령받고는 너무 억울해 거의 매일 밤을 새다시피 하며 일에 몰두했습니다. 이렇게 4∼5년쯤 일해서 서울로 들어온 뒤 나는 소위 말하는 특수통 검사가 됐고, 그 뒤론 한번도 지방 발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내가 원해도 위에서 그렇게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검찰 고위 간부들의 특수부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때로는 ‘정치검찰’ 시비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서울고검의 한 검사는 “중요사건의 상당수를 맡고 있는 서울지검 특수부의 인사는 부장에서부터 말석 검사에 이르기까지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이 논의를 거쳐 정한다는 게 검찰 안팎의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귀띔한다.

    실제 특수부 검사처럼 정권의 의지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자리도 없다는 데 이견을 보이는 검사들은 없다. 군사정권 시절, 호남 출신으론 이례적으로 특수통으로 분류됐던 D씨는 “호남 출신이 대검 중수과장이나 서울지검 특수부장을 하기 위해서는 동료들보다 2∼3배 이상 능력을 인정받아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런 와중에도 대검 중수부장이나 서울지검 특수1부장 등 특수수사를 상징하는 자리에는 나처럼 지역적 한계가 있는 사람이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덧붙였다.

    현 정권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위기를 맞게 된 것 역시 검찰 특수부에 대한 지역 편중인사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는 시각이 많다.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이 G&G그룹 회장 이용호씨 사건. 2000년 5월 당시 서울지검 특수2부는 횡령 등 혐의로 이씨를 긴급체포했다가 하루 만에 석방한다. 그로부터 1년 뒤 대검 중수부가 이 사건 내사에 착수하고 이씨를 구속하면서 사건은 대형 게이트로 번지게 된다. 그리고 처음 수사를 담당했던 검찰간부들은 특별감찰본부의 수사를 거쳐 줄줄이 옷을 벗어야 했다.

    이씨가 처음 긴급체포될 당시 서울지검 수사라인에 있던 ‘임휘윤 서울지검장-임양운 3차장-이덕선 특수2부장’은 모두 호남 출신이었지만 특수통 검사는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중요한 사안을 다루는 만큼 사건 처리에 따른 특수부 검사들의 부침(浮沈)도 심한 게 현실이다. 특수검사들 사이에서 “수사가 본격화되면 사표를 써서 서랍 속에 넣어놓고 수사에 임한다”는 말이 일상적으로 쓰일 만큼 특수부 수사엔 직·간접적인 압력과 청탁도 끊이지 않는다.

    2000년 말 ‘정현준 게이트’ 수사 때 주임검사였던 E검사는 김형윤 당시 국가정보원 경제단장에 대한 소환조사를 주장하다가 인사조치를 당할 위기에까지 몰렸다. 검찰은 당시 “김단장에게 청탁과 함께 5000만원을 건넸다”는 이경자 동방금고 부회장의 진술을 확보해 놓고도 ‘외적인 요인’을 고려해 수사를 망설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단장은 지난해 말 이런 사실을 ‘동아일보’가 단독보도하면서 검찰의 재수사가 시작돼 결국 구속되고 말았다.

    재벌 회장이나 정치권 고위인사가 특수부에 소환됐을 때 이들의 구속 여부를 놓고 수사팀과 검찰 고위층간에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선처를 요구하는 윗선의 주문에 대한 수사팀의 거절은 대부분 ‘인사상 불이익’으로 되돌아온다. 고위층 인사의 구속 여부를 두고 마찰을 빚은 뒤 특수부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난 F검사의 얘기.

    “수개월간 내사를 거쳐 범죄 혐의에 대한 확신과 물증을 잡았습니다. 피의자를 긴급체포해놓고 조서를 받으며 한편으론 서둘러 구속영장을 만들고 있었죠. 영장청구 시한이 18시간쯤 남았을까… 검사장실에서 갑자기 ‘불구속으로 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나를 비롯한 수사팀은 그렇게 할 수 없다며 완강히 버텼지만 먹혀들지 않았죠. 하지만 우리도 구속영장 청구 의지를 꺾을 수 없었고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뜻에도 변함이 없음을 상부에 알렸습니다. 결국 영장 청구 시한을 1시간 남짓 남긴 상황에서 총장의 ‘OK 사인’이 떨어졌고, 우리는 영장을 청구했죠. 그리고 오래지 않아 영장은 발부됐고요.”

    외풍에 시달리는 ‘검찰의 꽃’

    지난 8월22일 검찰인사에서 예상을 뒤엎고 유임된 박영관 서울지검 특수1부장

    최규선의 열쇠가 빛을 발하다


    특수수사에 전문적인 수사능력이 요구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이에 못잖게 ‘운(運)’도 필요하다는 게 특수수사로 잔뼈가 굵은 검사들의 공통된 의견. 여기에 선배 검사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본능적인’ 수사기법과 수사검사의 임기응변 능력도 예상치 못했던 큰 효과를 발휘할 때가 종종 있다.

    지난 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며 김대중 대통령의 3남 홍걸씨의 구속으로까지 이어졌던 ‘최규선 게이트’ 수사의 에피소드 하나. 최규선씨의 비서였던 천호영씨의 고소·고발로 시작된 수사는 처음엔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최규선씨가 홍걸씨를 배경으로 타이거풀스인터내셔널(TPI)의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과정을 비롯한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는 천씨의 주장과 “전혀 사실무근”이라는 최씨 및 TPI측의 반박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지만 확실한 ‘물증’이 잡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최씨를 둘러싸고 제기된 수많은 의혹 가운데 ‘TPI의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의혹’을 수사의 핵으로 짚었던 수사팀은 초조해졌다. 의혹이 제기된 후 최씨가 검찰 출두에 불응하며 시간을 벌어놓고는 단서가 될 만한 자료들을 모두 치워버린 것도 수사에 큰 장애가 됐다.

    실타래같이 얽힌 것으로 보이던 수사의 실마리는 뜻밖의 장소에서 잡혔다. 검찰 수사관들이 압수수색 영장을 들고 들이닥친 최씨와 주변 측근 인사들의 집. 예상대로 이들의 집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단서가 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허탈한 표정으로 방에서 돌아나오는 순간, 한 수사관의 눈에 반짝거리는 금속체가 언뜻 비쳤다. 방 한쪽 구석에서 빛을 반사하고 있던 이 물건은 7∼8㎝ 정도 길이의 열쇠였다. 관련자들에 대한 검찰의 집중추궁 결과 이 열쇠는 최규선씨의 비밀 대여금고 열쇠로 밝혀졌다. 그리고 최씨의 대여금고 안에서는 최씨와 홍걸씨,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 김희완씨 등이 TPI 대표 송재빈씨와 TPI 주식을 비밀거래한 주식거래 내역서 등 사건의 결정적 단서가 된 기밀서류들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당시 한 수사관계자는 “금고를 여는 순간 ‘이제 됐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면서 “그때부터 관련자들에게 끌려가던 수사상황을 우리가 조절할 수 있게 됐다”고 회고했다.

    특수수사는 운(運)과 기지의 합작품

    당사자의 자백이나 비밀 장부 등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범죄를 입증하기 힘든 뇌물공여 사건 수사에서 담당검사의 기지가 빛을 발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특수부 재직시절 한 기업의 공무원에 대한 뇌물공여 비리를 포착하고 본격 수사를 벌였던 G검사의 얘기를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본다.

    G검사는 몇 개월간 내사를 거쳐 A사 경리부장 B씨를 긴급체포했다. A사가 회사돈으로 비자금을 조성해 사업과 관련 있는 공무원들에게 상습적으로 청탁과 함께 금품을 제공한 게 분명한데, 계좌추적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현금으로 줬겠지.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수표나 계좌로 거래를 하겠나.’ 게다가 그동안의 내사결과를 보면 모든 자금은 B씨가 관리한 게 틀림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G검사는 주저없이 B씨를 붙잡아왔다.

    하지만 수사는 순조롭지 않았다. B씨의 집에 대한 압수수색에서는 별다른 소득이 없었고, B씨는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24시간쯤 지나자 다급해진 쪽은 G검사.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특수수사에서 긴급체포는 ‘구속’을 의미합니다. 어떻게든 잡아다놓고 그제서야 조사를 벌이는 것은 특수수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피의자를 긴급체포한 뒤 영장청구까지 검사에게 주어진 48시간 가운데 절반 이상이 지나도록 단서를 잡지 못하면 주임검사는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급해진 G검사는 B씨에게 ‘초강수’를 던졌다.

    “이봐요 B선생, 끝까지 잡아떼면 여기 회계장부상 차이가 생기는 수억원을 당신이 횡령한 것으로 보고 구속영장을 청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G검사는 B씨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B씨는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잠시 움찔거렸지만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G검사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때론 협박도 하고 때론 설득도 하며 B씨와 실랑이를 벌이길 30분여. B씨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사실 비밀장부는 윗집에 있습니다. 검찰에서 압수수색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마누라를 시켜 그 장부만 윗집에 맡겨두라고 했어요.”

    B씨의 말대로 장부는 B씨가 사는 아파트 바로 윗집에 보관돼 있었다. 장부엔 A사가 관련 공무원들에게 금품을 건넨 일시와 목적, 액수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큰돈이나 비자금을 움직이는 경리 관계자들은 반드시 비밀장부를 만들어놓는 습성이 있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덮어쓰게 될 경우에 대비하는 것이죠. B씨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한번 넘겨짚어 허점을 찔렀던 게 주효했던 겁니다. 이후 수사는 ‘꼬챙이에서 곶감 빼먹듯’ 순조롭게 진행됐지요.” G검사의 얘기다.



    하지만 이런 행운이 항상 찾아오는 건 아니다. H검사는 비슷한 상황에서 재치를 발휘했지만 결국 성공에 이르지 못했던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몇 년 전 상당한 액수의 돈을 해외로 불법적으로 빼돌린 기업가 C씨에 대한 수사를 할 때였죠. 대부분의 혐의를 확인하고 서울 청담동에 있는 C씨의 집을 덮쳤지만 이미 눈치를 채고 달아난 뒤였고 집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급하게 도망쳤기 때문에 중요한 서류들까지 빼돌리지는 못했을 거라 생각했죠.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이 대여금고였습니다. 그때부터 C씨 집 근처에 있는 은행 수십 군데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두 곳에 C씨 명의의 대여금고가 개설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죠. ‘이제 됐구나!’하는 기쁜 마음에 법원의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금고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금고 안에는 반지, 목걸이 등 귀금속만 들어있었습니다. 허탕을 치고 만 거죠.”

    특수부만큼 밤낮없이 일하는 곳도 없다. 대형 비리사건 수사가 시작되면 수사가 끝날 때까지 2∼3달 동안 매일 밤을 새가며 사무실에서 ‘새우잠’을 자는 것은 기본. 이런 생활은 말단 주임부터 부장검사까지 큰 차이가 없다.

    이런 고된 생활에도 불구하고 모든 검사들이 특수부를 선망하는 이유는 뭘까. 최근 10여 년간 특수부를 거쳐간 역대 검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곧 해답을 찾을 수 있다(251쪽 표 참조). 1993년 4월 이후 현재까지 역대 대검 중수부장 11명 가운데 64%에 이르는 7명이 전국에 5석뿐인 고검장으로 승진했다. 이 가운데 김태정·박순용·이명재 중수부장은 검찰의 최고위직인 검찰총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1991년 5월 이후 서울지검 특수부장을 거쳐간 검사 29명의 이력도 화려하다. 이들 가운데 현재 검사장으로 승진한, 사법시험 18회 이상에 해당하는 역대 특수부장은 모두 16명. 이중 무려 75%에 해당하는 12명이 전국적으로 32석에 불과한 검사장 자리 이상으로 승진했다. 매년 검사장으로 승진하는 인원이 불과 4∼5명 선인 것을 감안하면 ‘특수부장은 검사장으로 가는 돌다리’라는 세간의 얘기가 헛소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8회 이하 특수부장 출신 검사들도 재경(在京) 지청장과 대검의 요직에서 활동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2002년 9월 현재 고검장 이상 10석 중 검찰총장(이명재)과 서울고검장(이종찬), 법무연수원 연구위원(김대웅) 등 3석이 ‘서울지검 특수부장-대검 중수부장’ 코스를 거친 특수통 검사인 것만 봐도 검찰 조직내 특수검사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검찰 특수부와 특수수사의 현주소는 지금까지의 명성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창설 초기 특수부는 민생과 관련된 중요범죄를 주로 다뤘다. 예를 들면 음식에 공업용 색소를 넣었다든가, 장마철 강물에 폐유를 버린 환경사범 등에 대한 단속에 주력했다. 물론 특수수사의 본래 목적인 공무원 비리 척결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른바 ‘게이트’로 일컬어지는 권력형 대형 비리사건들이 속속 불거지면서 특수부는 큰 벽에 가로막히게 된다. 짧아도 수개월, 길게는 1년 가까이 계속되는 대형 비리수사 때문에 공무원 비리나 민생사건 처리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게 오늘날 특수수사의 현실이다. 게다가 대형사건마다 검찰의 결론을 뒤집고 재수사가 시작되거나 심지어 특별검사제까지 도입되는 경우가 잇따라 생겨나면서 검찰 특수부에 대한 신뢰는 크게 떨어졌다.

    1999년 ‘옷로비 의혹 사건’을 시작으로 ‘진승현·정현준·이용호 게이트’ 등 최근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에서 검찰 특수부는 본래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이런 검찰의 불안정한 모습은 ‘신(新) 특수’란 신조어를 탄생시켰다. 수사에 착수할 때 수사의 범위와 윤곽, 깊이를 어느 정도 정해놓고 계획에 맞춰 수사를 진행하는 ‘꼬리 자르기’식 특수수사가 ‘구(舊) 특수’라면, ‘나오면 나오는 대로 모두 하는’ 새로운 방식의 수사가 신특수다.

    한 특수부 검사의 하소연. “이제는 검찰 특수수사에서 ‘사건종결’이란 말이 사라질 판입니다. 예전엔 중요 피의자들을 검거하고 기소하는 단계까지 밝혀지지 않거나 다소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도 전체적인 흐름에 문제가 없다면 사건을 종결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죠. 하지만 이젠 엄두도 못냅니다. 언제 또 의혹이 불거지고 재수사니 특검이니 하는 말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수사는 계속 ‘진행중’ 꼬리표를 붙이고 있어야 하는 형편입니다.”

    특수부가 이렇게 ‘하향곡선’을 그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다수 검사들은 “진정한 특수통 검사가 없다”는 지적에 고개를 끄덕인다. 검사생활 4∼5년차 시절에 특수부 말석 검사로 있으면서 일을 배우고, 본청 및 전국 지청을 돌며 자신의 적성과 경험을 꾸준히 쌓은 뒤 서울지검 특수부와 대검 중수부 등에서 잔뼈가 굵은 그런 검사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는 것. 지방에 근무하는 J검사(그도 한때 특수부 검사로 이름을 날렸다)는 “언젠가부터 특수부 검사 자리가 일하는 자리가 아닌 경력을 관리하는 자리로 바뀌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사권자나 정치권 고위 인사들과의 학연·지연 등이 수사능력보다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검찰 특수부에 대한 평가는 곧 검찰 전체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 ‘검찰이 제대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말은 어쩌면 ‘특수부가 제대로 서야 검찰이 바로 선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검찰이 바로 서고 특수부가 바로 서는 길은 ‘잘못을 저지르면 누구든 성역 없이 법에 따라 처벌한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지키는 데 있다. 지난해 말 ‘이용호 게이트’ 재수사를 맡아 국민적 지지를 받으며 수사를 끝마쳤던 차정일 특별검사가 수사 성공의 가장 큰 요인으로 꼽았던 것도 바로 ‘원칙과 정도’였다.

    어떤 압력에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의지와 청렴한 인품으로 일본검찰을 대표하는 특수검사로 일컬어지는 전 오사카고검 검사장 벳쇼 오타로(別所汪太郞)는 검찰을 이렇게 정의했다.

    “검찰은 정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업무를 다할 수 있었던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진실이 있고, 그것이 정의라고 믿었기 때문에 검사로서 일을 해온 것입니다.”

    원칙과 정도로 정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거기에 검찰이 있고, 검찰 특수부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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