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호

“헌병대는 현장 사진 보여주지 않았다”

타살로 밝혀진 허원근 일병 사건 당시 부검의 증언

  • 황일도 shamora@donga.com

    입력2002-10-10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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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번 뒤틀린 진실이 제자리를 찾는 것은 이렇게 힘든 일인가.
    •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 9월10일 허원근 일병 사망사건에 대한 최종 조사결과를 발표했지만
    • 논쟁은 끝나지 않고 있다.
    • 진상 규명의 열쇠를 쥐고 있는 당시 부검의 박모씨를 만나 허일병이 타살됐음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를 들어보았다.
    1984년 4월2일, 육군 7사단에서 복무중이던 허원근 일병은 4월2일 아침 9시50분경 소속 중대본부에서 30m 가량 떨어진 폐유류고 울타리 옆에서 자신의 M16 소총과 함께 발견됐다. 시신에 나 있는 총상은 모두 세 군데. 좌우 가슴과 머리에 한 발씩이었다. 당시 이 사건을 수사했던 헌병대는 “허일병이 자살하기 위해 스스로 우측 가슴과 좌측 가슴을 쐈지만 치명상을 입지 않자 마지막으로 머리를 쐈다”고 결론 내렸다.

    “헌병대는 현장 사진 보여주지 않았다”

    허원근 일병의 사체사진. 왼쪽과 오른쪽 가슴의 총상 색깔이 다르다.

    유족들은 납득할 수 없었다. 총상은 세 군데지만 총성은 두 발이 울렸다는 주변인들의 증언과 사체 주변에서 발견된 탄피 역시 두 개뿐이었다는 점은 의혹의 실마리를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기나긴 싸움 끝에 국방부 재조사가 몇 차례 이루어졌지만 공식결론은 변함이 없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가 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월. 1년 7개월여의 조사 끝에 위원회는 지난 8월20일 허일병이 중대본부 안에서 상급자 노모 중사의 총에 맞았다는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술자리 말다툼 끝에 난동을 부리던 간부가 허일병을 쏘는 것을 봤다는 중대원 두 사람의 증언이 있었다는 것. 이후 헌병대 수사과정에서 부대 간부들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사망 현장과 시간, 중대원들의 알리바이 등을 조직적으로 조작했다는 충격적인 내용도 전해졌다.

    “압력이나 위협은 없었다”

    그러나 논란은 오히려 시작이었다. 8월28일 조선일보는 “총을 쏜 당사자로 지목된 노중사와 다른 부대원 9명이 ‘총기사고는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보도했고, 의문사위가 이튿날 이를 다시 반박하고 나서며 “9월10일 최종발표 때 모든 것이 명확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창 논란이 진행중이던 8월30일, 기자는 당시 허일병의 사체를 검시했던 부검의 박모씨를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어렵사리 신원과 전화번호를 확인했지만 박씨는 “국가기관이 아닌 이상 대답할 수 없다”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직접 만나 설득하기 위해 오후 늦게 박씨가 살고 있는 지방도시로 출발했다.

    밤 9시. 숨바꼭질에 가까운 우여곡절 끝에 “먼 길 왔으니 차나 한잔 하고 가라”는 박씨의 승낙이 떨어졌다. 막상 그의 사무실에서 얼굴을 맞대고 나니 박씨는 허일병이 타살당했음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와 함께 검시 당시의 상황, 지금의 소회 등을 가감 없이 들려주었다. 이 가운데 일부 내용은 십여 일 뒤 열린 위원회의 최종조사결과 브리핑에서 핵심내용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억지로 찾아 온 셈이 됐습니다.

    “허일병 사건으로 논란이 불거지고 나서 정신이 없어요. 아마 기자들이겠지만 정체를 안 밝히는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와서 사람을 속이니까 거부감이 심해졌어요. 의문사위라면서 이것저것 묻는데 얘기를 하다보니까 영 아닌 거야, 이름도 안 밝히고. 그런 일이 두어 번 계속되니 마음이 불안해지더군요. 발표 나기 전부터 논란이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당시 상황을 듣고 싶습니다. 검시보고서에 자타살 여부에 대한 판단을 기록하는 것은 아니지만, 합리적인 지휘관이나 부검의라면 가슴에 두 발을 쏘고도 죽지 않아서 결국 머리를 쏴 자살했다는 게 쉽게 납득이 됐을까 궁금하네요.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은 어떤 명시적인 압력이나 위협, 부탁도 없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하도 그걸 물어보니까 이제는 나도 그런 게 좀 있었다면 좋았겠다 싶어요. 그러면 제가 위원회나 언론에 나가서 논란을 간단하게 끝낼 수 있었겠죠. 그렇지만 그건 분명히 아닙니다.

    그럼 뭐냐, 부검에 대해 좀 아는 사람들은 가장 민감한 것이 ‘선입견’이라고 합니다. 본인이 스스로 의식하지 않아도, 그게 꼭 강압적이지 않아도, 검시에 임할 때 누군가 정보를 주면 자기도 모르게 끌려가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그걸 얼마나 잘 이겨내는가가 검시관의 능력을 판단하는 한 기준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니까요.

    특히 군대는 상당히 통제된 사회입니다. 검시관은 헌병대에서 사건의뢰서가 오면 지시에 따라 부검만 하면 끝이죠. 어차피 군 검찰관이든 헌병대장이든 수사를 책임지는 사람은 따로 있다 보니 검시관에게는 재량권이 거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젊은 군 검시관들은 대개 ‘세월만 가라’고 생각하며 복무 기간만 세는 경우가 많아 수동적입니다. 사건의뢰서를 검토하다 거기 들어있는 정보나 방향에 자기도 모르는 새 경도되는 거예요. 허일병 사건 당시 나는 군생활 만 2년 무렵이었는데, 한창 타성이 생길 때죠. 그동안 많은 검시를 문제 없이 넘겼으니까 조심성이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요즘은 변사사건 처리는 단기 군의관이 할 게 아니라 경력도 있고 계급도 높은 사람이 맡아야 하지 않을까, 검시할 때만이라도 일정정도 수사지휘나 재수사 요구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미국의 경우가 그렇거든요.”

    현장에 가보지도 못해

    -당시 사건의뢰서에 ‘자살자’라는 표현이 있었다는 건가요.

    “‘자살 추정’이라고 기록돼 있었죠. 아주 드물긴 하지만 두 발 이상 총을 쏴 자살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요소들이 종합되면 찜찜하지만 그냥 넘어가게 되는 겁니다. 다음 일은 계속 쏟아져 들어오고, 감정서는 얼른 써줘야 하고. 결국 적극적으로 살펴봐야 할 곳을 미처 감지하지 못하는 거죠.

    검시를 수십년 한 대가라면 ‘이건 이상하다’ 하는 감이 있겠지만, 그 당시만 해도 학교를 갓 졸업한 풋내기였죠. 나는 그런 의학적인 소견만 제공하면 나머지 사건처리는 담당부서에서 알아서 하겠거니 생각했던 겁니다. 지금까지 조사한 것이 이상하니까 다시 조사하라고 지시할 권한도 없고요. 검시관은 피동적입니다. 결론은 이미 내려져 있는 경우가 많아요. 많은 경우 검시관들은 그 결과를 확인해주는 역할밖에 못하게 됩니다.”

    -검시과정에서 ‘이건 좀 아니다’라고 느낀 부분이 있었습니까.

    “검시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선진국에서 부검의는 사건의 방향을 가늠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를 위해 제일 중요한 게 시체가 발견된 현장에 나가보는 겁니다. 검시관이 도착할 때까지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사체를 다른 데로 싣고 와서 부검을 시작하죠. 현장에 가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그 사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체가 발견됐다는 현장에도 못 가봤고, 내무반에도 못 가봤고, 그런 중요한 현장을 직접 내 눈으로 목격하지 못했으니까 정보가 제한될 수 밖에 없었던 거죠. 오로지 해부하도록 준비해놓은 병참대에 가서 검시만 하고 돌아온 거니까요. 늘 그래왔으니 저도 일부러 안 보여주는 것인지 어떤 건지는 아예 생각을 안했던 겁니다.”

    결정적 증거, 상처의 색깔

    -사체에 나타난 특징 중에도 이상한 점이 있던가요.

    “일단 보기 드문 경우였습니다. 총상이 난 범위가 가슴과 머리로 퍼져 있는 것도 생소한 거고. 또 자살자가 옷을 관통하도록 총을 쏘는 경우도 드물죠. 칼로 자살하는 경우 거의 대부분 옷을 젖히거나 벗겨 찌릅니다. 총의 경우에도 사람의 심리상 맨살에 쏘는 게 자살케이스에서는 일반적이에요. 탄환 각도가 수평으로 나 있었던 것도 이상한 대목이었어요. 탄피 숫자가 안 맞는다는 얘기도 언뜻 들었습니다.

    선입견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건을 보다 보니 ‘의식은 있으니까 꼭 죽어야겠다는 생각에 머리를 쐈을 수도 있겠지’ ‘급하다 보니 옷을 못 제치고 쐈나 보다’ ‘탄피야 뭐 금세 어디서 나오겠지’ 그런 식으로 자꾸 추정을 하게 된 겁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뭔가 이상했어요. 그래서 지난 18년 동안 제한된 정보를 갖고 이리저리 따져보았죠. 다른 사람이나 전문적인 식견이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 묻기도 하고, 옛날 책도 다시 들여다보고요. 그렇지만 검시라는 게 본인이 아니면 열심히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듣는 사람들은 ‘아, 그런 게 있었나. 묘하네’ 그러고 말거든요.”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증거를 꼽자면 뭡니까.

    “가장 아쉬운 것은 시간 간격 부분입니다. 상당히 오랫동안 그 부분은 아예 감지도 못했어요. 내가 사체를 봤을 때의 기억으로는 양쪽 가슴에 난 각 상처의 반응이나 색깔이 똑같았는데, 몇 해 전 허일병 아버님이 어디선가 구해온 사진을 보여주시더라고요. 그걸 보니 색깔이 다르더란 말입니다. 이게 왜 내가 본 것하고 다른가 생각하고 말았는데, 이번에 그 사진이 해부할 때 찍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사건이 발생했던 날 헌병대에서 찍었던 사진인 거죠.

    이건 상당히 중요합니다. 해부는 사건발생 이틀 후에 실시했거든요. 사망 후의 이틀은 상당히 긴 시간입니다. 상처의 색깔이 똑같아지죠. 그래서 나는 두 개의 상처가 한참의 시간을 두고 난 것일 수 있다고는 미처 생각을 못했던 거죠.

    사진을 보면 왼쪽이 희미하고 오른쪽이 진합니다. 오른쪽을 먼저 쏘고 한참 지난 후에 왼쪽을 쏜 거예요. 이건 거의 확신할 수 있는 증거거든요. 그 사진을 보고 나서야 시간 차가 분명히 있다는 것, 그것도 꽤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걸 보고 나서 타살을 확신하게 됐어요. 자살하는 사람이 한 방을 쏘고 한참이 지나서 ‘생각해보니 죽어야겠다’ 싶어서 다시 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위원회에서는 처음 총을 맞고 7~8시간 후에 두번째 총알을 맞았다고 추정합니다만.

    “아마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하는 얘기일 겁니다. 검시 소견을 갖고 그렇게까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수시간이다’ 정도만 알수 있죠.”

    -그럼 검시 당시에는 왜 사진을 못 봤을까요. 당시 그 사진을 봤더라면 사건 방향을 타살로 틀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을 텐데요. 원래 검시관에게 당일 사진을 반드시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헌병대가 일부러 감춘 것은 아닐까요.

    “일부러 감췄는지는 알 수 없죠. 다만 당연히 보여줘야 하는 건 맞습니다. 그러나 경찰도 아니고 헌병대에서 브리핑하듯 세세하게 사건을 설명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쪽도 대부분 성의가 없으니까요. 사진을 찍은 줄도 몰랐고, 알았다손 쳐도 인화하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못 보여줄 수도 있겠다 생각하고 넘어가는 겁니다. 내가 나중에라도 요구를 하면 볼 수는 있었겠죠.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고 그 부분에 아쉬움이 남는 거죠.”

    군 검찰관은 얼굴도 못봤다

    -위원회 중간발표대로 헌병대가 사건을 조작했다고 보십니까.

    “조작을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헌병대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고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군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라 감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특히 군대라는 건 수사대상이 불특정 다수도 아니고 수십명에 불과합니다. 부대원들도 대부분 20대 초반의 어린 친구들인데 감히 수십년씩 군 생활한 헌병대의 나이 많은 고참 간부들 앞에서 무슨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러니까 우리 같은 검시관들은 그냥 알아서 잘하겠거니 믿게 되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조사해서 아무것도 안 나왔다는데 뭐가 숨겨져 있겠나’ 생각하는 거죠.”

    “헌병대는 현장 사진 보여주지 않았다”

    지난 9월3일 강원도 화천 군부대 현장에서 실시된 허일병 사망사건 현장조사

    -헌병대의 조사태도에 이상한 징후가 있었던 기억은 없습니까.

    “출장 나가서 그 사람들을 대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 특별한 기억은 없어요. 굳이 꼽자면 유족을 못 만난 점이죠. 검시를 가보면 항상 유가족들의 반응이 격렬합니다. 당연한 일이죠, 나라 지키라고 보낸 아들이 죽었으니. 검시관들에게 주먹다짐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경계를 하게 되고, 헌병대도 가능한 한 가족들을 격리시키려고 해요. 그때도 헌병대가 유가족을 격리시켰죠. 그래서 허일병 아버님을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이번에도 유가족들이 항의해서 헌병대가 막는구나’ 생각하고 넘어갔죠.”

    -군검찰관은 어땠습니까.

    “검찰관은 얼굴도 못 봤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점 또한 이해가 안되는 부분인데, 검찰관은 어찌 됐건 검시하는 자리에 나와야 합니다. 다른 부대에 가면 언제나 담당 검찰관이 나옵니다. 그러다 보면 검시관하고도 친해지죠. 아무래도 사건수사를 주도하는 헌병대 조사계장들은 나이도 있고 해서 다소 거리감이 있으니까요. 그때 친해진 검찰관 중에는 지금까지 연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꼭 일 때문이 아니라도, 사람이 죽었으니 그 내용을 알고 싶어서라도 나와야 될 텐데 왜 안 나왔을까, 그게 이상한 겁니다. 아예 본 적이 없어요.”

    -18년이 지난 지금의 소감은 어떻습니까. 아쉬운 점은 없는지요.

    “그런 느낌이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이죠. 누구나 나이 들어 생각해보면 ‘그때 참 미숙했다’고 느끼는 거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18년 동안 그 사건을 잊지 않았습니다. 찜찜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나 혼자 어디 가서 이거 이상하다고 얘기해봐야 뭐가 달라질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1980년대에 그런 얘기를 여기저기 하고 다녔다면 아마 회사도 그만두고 야인생활을 각오해야 했을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때는 시대가 그랬으니까요.

    조교시절 제 선생님이셨던 분이 하시던 말이 있어요. ‘검시는 인권에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에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 실수가 있으면 그 직업을 그만둬야 한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이제 직장을 그만두고 떠나야 하는데…. (담배를 피워 물며) 요즘 생각이 유난히 많습니다.

    죽은 허일병은 물론이고 그 아버지에게도 미안합니다. 기사를 보니 그 동안 고생이 많으셨던 모양인데. ‘설령 누군가 쐈다 해도 용서하겠다, 진실을 말하기만 해라’ 그렇게 이야기하시더군요. 누군가 제게 책임감을 느끼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해야겠지요. 거짓말을 하거나 조작한 적은 없으니 법률적인 책임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의 진실을 알아낼 수 있었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도의적인 책임을 느낀다고 말입니다.”

    박씨의 입에서 긴 한숨이 배어나왔다. 어느새 자정을 지나 있었다.

    “오히려 내가 고맙다”

    그로부터 11일이 지난 9월10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허원근 일병 사건과 관련한 최종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위원회의 이날 발표는 ‘허원근 일병이 타살됐음이 입증됐고 여기에는 부검의 박씨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중간 발표 이후 새로 밝혀진 것은 거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은폐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어느 선까지 개입됐는지, 국방부 재조사는 왜 헌병대 조사와 같은 자살 결론을 내렸는지는 9월16일 위원회의 조시기한이 만료됨에 따라 ‘향후과제’로 정리한다고 위원회는 설명했다.

    이날 기자회견장에서 만난 허일병의 아버지 허영춘(63)씨에게 “부검의 박씨가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하더라”고 전했다. 허씨는 “당시 군검찰 기록에 ‘부검의가 자살이라고 판정했다’고 돼 있길래 한동안 부검의를 원망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중에 확인한 감정서에는 객관적인 소견만 있을 뿐 자타살 여부는 언급이 없더라는 것.

    “알고보니 수사 책임자들이 부검의 핑계를 댄 거였습니다. 지금은 제가 오히려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요. 정작 미안하다고 해야 할 사람들은 모르는 척하는데….”

    당시 7사단 헌병대장과 조사계장은 지난 9월5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한상범 위원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중대장은 1999년 사망했고 전모 대대장은 끝내 연락이 되지 않았다. 김모 연대장은 기자에게 “위원회에서 조사를 받았고 알고 있는 얘기는 모두 했다. 그러나 군을 이렇게 몰아붙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모 사단장은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지겠지만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기억에 없다. 향후 국방부 재조사를 지켜보겠다”고 전했다. 당시 7사단의 고위간부들 상당수는 전역 후에도 공기업 사장, 정부기관장 등을 지내며 승승장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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