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호

계란으로 바위치기…그러나 진실은 살아 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680일의 명암

  • 김남권 south@yna.co.kr

    입력2002-10-10 10:1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2000년 10월17일 ‘지나간 시대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힌다’는 목표로 출범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기한이 9월16일 만료된다.
    • 조사권한의 한계와 내부갈등, 관계기관들의 비협조를 넘어 고군분투한 의문사위의 활동은 한국사회에 적지않은 화두를 남겼다.
    • 성공과 실패, 화합과 갈등을 넘나든 의문사위 680일을 정리한다.
    최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이하 의문사위)는 18년 전 중대장의 이상성격을 비관, 스스로 총을 쏴 자살한 것으로 군이 발표했던 허원근 일병이 사실은 전방 부대 내에서 벌어진 술자리에서 만취한 상관의 총에 맞아 사망한 뒤 자살로 조작됐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 국민에게 충격을 주었다. 군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서둘러 특별조사단을 구성, 진상조사에 나서겠다고 발표하는 등 허일병 사건에 대한 의문사위의 발표는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가슴이 새카맣게 타버린 군 의문사 유가족들에게 뒤늦게나마 ‘진실은 언젠가 드러난다’는 진리를 보여준 의문사위는 그러나 9월16일로 조사활동을 마감하게 된다. 기간연장과 조사권한 강화를 골자로 한 의문사특별법 개정안과 특별검사제를 골자로 하는 개정안이 의원발의로 국회에 제출됐지만, 대선을 앞두고 정치사안에 집중할 가능성이 큰 정치권의 현실을 볼 때 시한 내 개정안이 통과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여 현행 특별법상 9월16일 조사활동 종료가 확실해 보인다.

    그간 베일에 가려져 있던 죽음들의 진실을 밝히며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아온 의문사위. 그러나 곁에서 지켜본 의문사위의 22개월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는 어울리지 않는 갈등과 고민의 연속이었다. ‘비밀은 알려지고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성경구절을 모토로 삼았던 위원회는, 이 기간동안 비단 억울한 죽음에 얽힌 비밀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들도 함께 드러내주었다.

    사상 초유의 실험 ‘반관반민’

    의문사 유가족들은 ‘위원회는 유가족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에 이의를 달기는 쉽지 않다. 의문사특별법이 국회에서 제정되기까지 유가족들은 꼬박 422일 동안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노숙투쟁을 벌였다. 정치권으로 하여금 비록 미흡한 점은 많지만 귀중한 특별법을 제정하게 하고, 그 결과 2000년 10월17일 의문사위가 정식으로 닻을 올릴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다름아닌 유가족들의 힘이었다.



    의문사위가 사상 초유의 ‘반관반민(半官半民)’ 형태로 구성된 것은 위원회 탄생의 주체가 유가족이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유가족들은 수십년 동안 죽은 아들딸의 선후배들과 함께 핏줄 죽음의 진실을 파헤쳐 왔다. 그 과정에서 이 선후배들은 전문가가 되었다. 그들만큼 의문사가 안고 있는 의혹에 대해 잘 아는 이들이 없었다. 이들이 위원회에 ‘조사관’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당초의 판단이었다. 수십년 전의 수사 기록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식으로 보관돼 있는지, 당시 수사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고 있는 ‘기술적인 전문가’가 필요했다. 이 전문인력들은 피진정 기관을 포함한 국가기관에서 파견돼 민간 조사관들과 함께 진상규명에 참여하게 됐다.

    ‘역사 바로세우기’ ‘옛 정권하의 과오를 바로잡고 새로 태어나기’라는 목표를 가진 사상 초유의 반관반민 조직은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신념과 전문적 수사기법, 이 두 가지 요소를 함께 버무려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것이 당초 이 생소한 조직이 바라는 바였다.

    그러나 의문사 피해자들의 친구로, 형으로, 아니면 소위 ‘운동’을 같이했던 사람들로 이루어진 민간 조사관들과, 어쩌면 그들이 찾아 헤맨 원흉이 있을지 모를 기관에서 온 파견 조사관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은 분명 의미 있었지만 상처도 큰 모험이었다.

    한 사건에 대해 6개월, 한차례에 걸쳐 3개월 이내에서 조사기간 연장 가능. 당초 특별법에 명시돼 있던 조사기간이었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수십년 전에 발생한 사건을 1년도 안되는 시간 동안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유가족들의 애는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조사관들의 법적 권한 역시 미약하기 짝이 없다보니 유가족의 입장에서는 하루하루가 금쪽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마음처럼 전개되지 않았다. 조사시한은 어렵사리 3회에 걸쳐 3개월 내에서 연기할 수 있도록 법개정이 이뤄졌지만 강제력 있는 권한은 여전히 갖지 못했다. 따라서 ‘1순위’인 몇몇 유명인사와 관련된 사건을 제외하고는 시간이 흐르면서도 별다른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고, 유가족들은 민간 조사관과 위원회에 답답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대책마련을 호소했다.

    그러나 초기 의문사위는 이러한 유가족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유가족들이 요구한 사건조사 중간결과 발표에 대해서도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응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위원회 입장에서는 미진한 조사상황을 일일이 공개할 수 없는 까닭이었겠지만, 유가족들 사이에서는 ‘의문사위가 대충대충 하다가 제대로 진실규명도 하지 않고 끝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민간 전문위원이나 민간 출신 위원회 간부들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담당 과장의 사표 소동

    이런 기류 속에서 위원회가 출범 1년을 갓 넘기자 ‘민 대 관’ 사이의 갈등이 한 사건을 계기로 폭발하게 됐고, 이는 언론보도를 통해 외부에 알려졌다. 최근 전직 대통령의 관련성이 드러난 ‘녹화사업’ 관련 의문사에 대해 담당 과장과 민간 조사관들이 ‘강제징집된 운동권 학생들의 프락치 활용의혹과 당시 사회·정치상황 전반을 포함해 철저히 조사한다’는 방침을 밝히자 기관파견 조사관 일부가 ‘사망 전후의 행적과 사인만 밝히면 되지 않느냐’며 사실상 항명한 사건이었다.

    결국 담당 과장은 “현 체제에서는 진정한 진상규명에 한계가 있다”며 사표를 내던졌다. 유가족이나 민간 조사관들은 단순히 사인을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죽음이 발생한 시대적·사회적 배경까지 드러내기를 원했지만, 위원회 활동이 끝나면 자신의 친정으로 돌아가야 하는 기관파견 조사관들은 이에 소극적이거나 반대했다. 어쩌면 이는 반관반민을 시도할 때부터 예견된 ‘구조적 필연’에 가까웠다.

    문제가 계속되면서 유가족 단체들은 위원회에 더욱 강력한 내부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조사활동 기조에 찬성하지 않는 기관파견 조사관들은 원 근무지로 복귀시키고, 새로 조사관들을 구성해 실질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특별법을 개정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원회가 법 개정에 난색을 표하면서 유가족들과의 대립이 시작됐다. 유가족들은 “기관을 조사하는 데 소극적인 파견 조사관들과 이에 대해 ‘어쩔 수 없지 않느냐’며 동조하는 간부들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여기에는 대부분의 민간 조사관들이 동의했다.

    반대 의견도 있었다. 기관파견 조사관들과 직원들 일부는 과장의 “사표 제출은 민간 조사관들 사이의 내부갈등에서 빚어진 것인데 공연히 기관파견 조사관들을 걸고 넘어졌다”며 이 간부를 비난하기도 했다. 1년간 서로 사이에 파인 골이 상당히 깊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와 함께 유가족과 의문사위 사이의 연락창구 역할을 맡아왔던 대외협력팀의 민간 전문위원 3명이 사표를 던지며 “대외협력팀 축소방침은 유가족을 배제하고 기관에 면죄부만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집행부에 항의한 일도 신뢰가 무너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때부터 유가족들은 지금까지의 관망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의문사위의 조사활동 기조와 지도부의 운영방식에 대해 본격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했다.

    그 전초전은 2000년 12월에 처음 시도된 기무사령부 실지조사였다. 대학생 강제징집 및 녹화사업 관련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기무사를 방문했던 조사관들이 부대 측의 거부로 성과 없이 돌아왔다. 이후 양승규 위원장 등 위원회 고위관계자 3명이 기무사령관을 면담했지만 결과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유가족 단체 관계자들은 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위원장이 기무사령관에게 제대로 항의도 하지 못하고 돌아온 것은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불만을 털어놓곤 했다. 유가족들은 “기무사가 조사활동에 협조하지 않으면 대통령에게 보고라도 해서 이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위원장에게는 그런 적극적인 의사가 없다”고 비판했다.

    “위원장은 사퇴하라”

    이같은 기류는 결국 사흘 뒤 위원장의 퇴진이라는 파국으로 표면화됐다. 유가족들은 대다수 사건 조사가 진척되지 못한 채 종결되는 상황인 만큼 위원장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촉구했다. 유가족들이 기자회견 직후 급기야 위원장실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가면서 출범 이후 곪아왔던 종기는 결국 터지고 말았다. 유가족 측은 급히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쇄신을 위한 비상대책위’를 조직하는 등 빠르게 움직였다.

    유가족들의 위원장에 대한 불만은 농성중에 가진 위원장과의 대화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유가족들이 “도대체 진상규명을 하려는 의지가 있는 거냐”며 양위원장을 매몰차게 몰아붙이는 모습은 법 제정 전 국회 앞 농성장에서 울부짖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이들은 이해 중순부터 시작된 ‘유가족들을 위한 사건 중간설명회’에 위원회가 성실하게 응하지 않은 데는 위원장의 ‘미적지근한’ 태도가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위원장은 법학자답게 “법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자신들의 주장과 다르다고 해서 물리력을 동원하는 것은 결국 위원회 활동을 방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유가족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이들에게는 ‘투쟁 끝에 얻어낸 위원회가 몇몇 명망가의 의문사에 대해서만 언론플레이를 펼친다면, 다른 의문사는 영원히 풀지 못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이런 유가족들이 법적 한계라는 원칙론을 납득할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민간 조사관들도 유족들의 주장에 비공식적으로 지지의 뜻을 표했다. 당시 민간 조사관들 사이에서 위원회의 전면 쇄신을 요구하는 단체 행동의 움직임도 있었음은 출입기자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결국 사태 해결을 위해서는 유가족 측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쪽에 힘이 실렸다. 안병욱 위원 등 비상임위원 3명이 ‘근본적 대책마련’을 촉구하면서 사표를 제출했고, 위원 7명도 기간연장을 포함한 법개정과 상임단 재편성 등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위원회는 ‘실효성이 없다’며 부정적 반응을 보였던 법개정을 추진하기로 결정했고, 개정안에는 유가족 측에서 강력하게 요구해온 ‘조사시한 연장’과 ‘조사권한 강화’ 조항 등을 모두 포함시키기로 했다(이후 법률은 개정됐지만 권한강화나 형사소송법상 공소시효 적용배제 등 민감한 사안은 일절 배제됐다. ‘조사기간 연장’과 ‘진상규명 불능조항 신설’만이 첨가된 ‘반쪽짜리 개정안’이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그러나 진실은 살아 있다

    지난 9월4일 '녹화사업'과 관련해 전두화,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동행명령장 집행에 나선 의문사위 직원들

    유가족들의 위원장실 농성은 결과적으로 법개정을 이루어냈지만, 유가족·민간조사관 대 위원장·기관 조사관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때가 의문사위 활동 22개월 중 가장 어수선한 시기였다.

    유난히 우울했던 겨울

    2000년의 마지막 날, 의문사위는 양위원장 등 상임위원 3명의 교체를 요청하는 공문을 청와대에 보냈다. 이어 새해 첫날에는 양위원장이 1, 2상임위원과 함께 청와대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파행에 대한 책임이 공식적인 이유였지만, 주변에서는 유가족 및 민간 조사관들과의 관계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데 대한 자괴감과 섭섭함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양위원장이 사퇴의 변을 통해 “역사 앞에 떳떳한 성과물을 내기 위해서는 진실이 드러남에 따라 예상되는 피진정 기관 및 일부 유가족들의 반발에 굴하지 않을 수 있는 역사적 책임의식과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은 이같은 심경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위원장의 사퇴는 상황을 더욱더 가혹하게 몰아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위원회 분위기는 극단적인 ‘민 대 관’의 대결양상을 띠게 된다. 기관 출신인 실무급 간부 10여 명이 “상임위원단과 함께 현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진다”면서 사퇴서를 제출한 것이 한 예다.

    당시 위원회에서는 민간출신은 민간출신끼리, 그리고 파견출신은 파견출신끼리 모여 향후 상황전개를 논의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근무 시간이 끝나면 삼삼오오 모여서 대책을 논의한다는 이야기도 간간이 들려오곤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사활동이 제대로 이뤄질 리 없었다.

    청와대가 후임 위원장 선정에 신경을 쓰지 않는 상황에서 유가족 단체들이 직접 나서서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접촉했지만, ‘아무리 재봐도 앞길이 험난한’ 의문사위 위원장직을 선뜻 맡으려는 인사는 없었다. 민주화운동 원로인 이돈명 변호사가 유력한 위원장 후보로 추대됐지만 본인이 건강을 이유로 고사하는 바람에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위원회의 비상임위원의 경우 위원장이 임명돼도 국회 동의가 필요 없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개인적인 이유를 들어 위원장직을 고사했다. 이미 위원회의 전면쇄신과 개혁을 요구했던 바 있는 비상임위원들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민간 조사관들 사이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높았다.

    위원장과 상임위원이 공석이 되면서 위원회의 각종 행정과 새로운 조사사업은 후임 한상범 위원장 임명 때까지 긴 공백기를 겪어야 했다. 외부로 드러난 큰 문제는 없었다 해도 민관 갈등이 봉합되지 않은 위원회는 한동안 주인 없는 집처럼 어수선했다. 위원회의 반관반민 시도에 시행착오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듯 커다란 후유증을 남기며 위원회를 무력화시키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한민국이 거꾸러져도 안된다”

    유가족과 위원회 사이의 대결 구도는 한상범 후임 위원장이 임명되고 김준곤 변호사가 제1상임위원으로 영입되면서 비로소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민족문제연구소장을 역임한 한위원장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역사 바로 세우기에 앞장서왔던 인물인 만큼 전임 위원장보다 강한 자세를 견지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한위원장이 취임사에서 ‘유족의 회한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로, 유가족이 제기하는 의혹은 납득할 수 있는 수준까지 최선을 다해 조사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위원회가 봉착한 문제를 잘 짚어낸 제스처였다.

    유가족과의 관계가 호전되면서 갈등과 대립의 전선은 피진정 기관들로 옮겨갔다. 법적인 조사권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이전보다 적극적인 조사활동을 펼치다 보니 피진정 기관과의 갈등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상당한 조사가 이뤄지고도 발표가 계속해서 미뤄져 의문을 자아냈던 서울법대 고 최종길 교수 사건. 위원회는 이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공작 과정에서 발생한 조작극’이라는 점을 밝혀내 과거 국가정보기관의 부도덕성을 통렬하게 고발했다. 또한 위원회가 1987년 숨진 당시 한총련 투쟁국장 김준배씨 사건의 수사지휘자 정모 검사에게 동행명령거부에 대한 과태료를 부과한 것도 획기적인 일이었다. 동행명령장 발부 여부에 대해서도 민간 대 파견 조사관간의 의견 충돌을 겪던 전 위원장 시절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1988년 구사대 폭행에 의해 숨진 문용섭씨 사건을 맡았으나 회사 측 관련성에 대해 수사하지 않은 의혹이 있는 명모 검사, 대우중공업 창원공장에서 일하다 죽은 정경식씨 사건에 대해서는 자살이 아니라고 의심할 수 있는 증거를 고의로 배척한 혐의를 받은 최모 검사 등이 줄줄이 동행명령장을 발부받았다. 이전과는 다른 ‘강공’이었다.

    또한 위원회는 국가정보원이나 기무사령부에 대해서도 위원회 담당자가 직접 가서 자료 존재여부를 보겠다는 ‘정면돌파’식 실지조사를 시도했다. 그동안 위원회는 이들 기관이 “수십, 수백 차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자료가 없거나 폐기됐다는 주장만을 되풀이한다”며 볼멘소리를 하곤 했지만, 이처럼 정공법을 구사한 적은 처음이었다. 의문사위를 취재하던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조치들에 대해 시원한 기분이 든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강공’에 대해 국정원과 기무사는 예상대로 거부로 일관했다. 이들은 ‘관련자료 제출은 모두 이뤄졌고 자료보존실 확인은 정보기관의 성격상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조사를 거부했다. 특히 기무사는 문서존안실로 안내해줄 것을 요구하는 위원회 관계자에게 “대한민국이 거꾸러져도 안 된다”는 상식 이하의 발언을 함으로써 보는 이들을 아연케 했다.

    의문사위의 법적 강제력이 미비하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일까. 기관들 뿐 아니라 개인들도 위원회에 반발하는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동행명령장이 발부되거나 과태료 부과조치를 받은 검사들은 하나같이 ‘명백한 월권행위다’ ‘서면·방문조사 협조의사를 밝혔음에도 굳이 소환조사를 하겠다는 것은 현직검사에 대한 망신주기다’라는 주장을 펴며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심지어는 일반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80년대 초 보안사에서 녹화사업을 담당했던 서모씨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제출하겠다고 약속한 뒤, 직접 자료를 소각하는 사진을 위원회에 버젓이 보내고 조사에 협조할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혀 관계자들을 당혹케 했다.

    의문사위는 서씨의 소재를 알아낼 방법이 없다. 통화내역 감청이나 계좌추적도 불가능하다. 당황한 위원회는 처음으로 ‘공개수배’라는 용어를 써가며 언론에 도움을 청했다. 의문사위의 한 관계자는 기자에게 “얼마나 힘이 없어 보이길래 이렇게 함부로 하는지 모르겠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의문사위는 힘이 없다. 전직 대통령을 나오라 마라 하고, 검사들에게 과태료를 물리는 것을 보면 대단한 권한이 있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 조치들은 전혀 실효성이 없다. 동행명령장이 발부됐지만 거부하면 그만이고 과태료가 부과되면 이의신청을 해 법적 효력을 다투면 그만이다. 더 이상 의문사위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암흑 속에서 절대권력으로 군림해온 기관이나 그 기관 내에서 떵떵거리며 활동하던 이들이 ‘쉽게 생각해서는 안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만한 권한은 하나도 없다. 그런 상태에서 이들에게 진실의 장으로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기침에 불과할 터. 모든 것을 양심선언과 자발적 진술에만 의지할 수는 없는 위원회 활동의 한계는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어려움이 많았던 22개월이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의문사위는 적잖게 의미 있는 작업들을 해냈다. 물론 의문사위의 결정이 100%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일부에서는 위원회가 유가족과 민간출신 조사관들에게 휘둘려 없는 사실을 진실로 왜곡한다는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근거가 없는 비판보다는 수개월에서 1년이 넘는 기간동안 입수한 자료와 진술에 의한 판단이 더 옳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이같은 성과는 민간이냐 파견이냐는 대립구도와 상관없이 사건처리에 놀랄만한 열성을 보여준 일부 조사관들의 공이다. 이들은 남도의 끝 거문도나 최전방 GOP를 드나들며 주민 수백명과 당시 부대원들을 상대로 탐문조사를 벌였다. 의문사가 발생한 현장을 수없이 방문해 사실확인 작업을 벌이거나 항공사진으로 지형을 찍어 모형으로 만든 뒤 연구를 계속하는 경우도 있었다. 숨진 이들의 부검 자료를 국내는 물론 해외 법의학자에게까지 검토 의뢰하고, 첨단 기법을 동원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사건당시 상황을 간접적으로 재현하려 애쓰는 일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조사관들이 사건조사에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보여주는 에피소드 하나. 지난 1989년 거문도 해수욕장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전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이내창씨 사건은 그 경위에 대한 의혹이 특히 큰 사건 중 하나였다. 위원회 조사결과 이씨의 사인이 실족사라는 당시 수사결과와는 달리 타살 혐의가 짙다는 점은 밝혀졌지만 이씨가 전혀 연고가 없는 전남 거문도까지 왜 내려갔는지, 당시 이씨와 동행했던 것으로 알려진 안기부 여직원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속시원히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위원회가 보여준 ‘사진 그림자를 통한 알리바이 깨기’는 이들의 치밀함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이씨와 동행한 것으로 추정됐던 안기부 여직원은 이씨와 함께 거문도에 간 사실이 없고 사망추정 시간에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증거로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위원회에 제시했다. 조사관들은 알리바이를 깨기 위해 함께 사진을 찍은 이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던 조사관들은 사진 속 그림자에 주목했다. 그림자 방향 분석을 통해 각각의 사진이 찍힌 시간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 사진을 찍은 날짜의 일출·일몰 시간을 토대로 이들이 당시 사진을 찍었다고 경찰에서 진술한 시간은 거짓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보호받지 못하는 고발자들

    그러나 이같은 열성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의문사 사건 조사는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시스템상의 한계뿐 아니라 이른바 ‘내부 고발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보호조치의 부족도 작용했다.

    권한미비와 비협조로 관련자료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은 경우, 관련자들의 진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원회에는 진실을 털어놓는 사람을 법적으로 용서하거나 현실적으로 보호해줄 방법이 없었다. 사면권은 물론 반대세력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권한도 없다.

    허원근 일병 사건의 경우 내부 고발자에 대한 인식부족이 조사에 얼마나 큰 차질을 불러올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다. 이 사건에서 위원회가 진실의 단초를 잡을 수 있었던 데는 사건현장을 목격한 부대원 두 사람이 ‘만취한 선임하사의 오발로 허일병이 쓰러졌다’고 증언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이 보도가 나간 후 일부 언론은 이들 이외의 다른 병사들과 접촉한 뒤 위원회의 발표를 뒤집는 보도를 했고, 이에 따라 어려운 진술을 했던 참고인들은 자신들의 신분이 노출된 것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에 따라 위원회는 2차 발표 이후로 사건 조사에 거의 진척을 보지 못했다. 당초 강원도 화천의 모 부대에서의 실지조사에 참가하기로 했던 한 참고인은 민통선 진입 직전에 ‘자꾸 전화가 온다’는 가족들의 연락을 받고 “보호해주지 못할 거면 차라리 진술을 공개하지 말라”며 그냥 돌아가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했듯 위원회의 한 축인 기관파견 조사관들은 새 정부의 출범을 맞아 자신이 속한 기관의 어두운 옛 과거를 바로잡는다는 생각으로 위원회 근무를 자원한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활동기간이 끝나면 친정으로 돌아가 동료들의 얼굴을 마주 대하며 살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친정조직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어찌 보면 내부자 고발이나 다름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위원회의 기관 조사관들 중 일부는 ‘친정’에 대한 조사가 이뤄질 경우 어쩔 수 없이 몸을 사리게 된다. 이런 경향은 조사활동이 종료 시점에 다가오면서 더욱 불거졌다. 9월 초순 있었던 기무사 관련 브리핑에서는 한 기무사 출신 조사관이 “의문사위의 발표가 기무사에 대한 잘못된 판단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걱정스런 마음에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다”며 나서 위원회의 입장과 배치되는 발언을 해 브리핑룸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위원회는 바로 “개인적 견해일 뿐”이라고 진화를 시도했지만, 위원회 활동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체감할 수 있게 한 사건이었다.

    문제는 팀워크

    역사는 길다. 앞으로 또 어떤 역사가 우리 앞에 놓여있을지, 한국사회가 풀지 못한 역사적 과제는 또 어떤 것이 있는지 미리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언젠가 의문사위와 유사한 목적이나 조직형태를 가진 기관이 다시 세워진다면 무엇보다 ‘친정을 의식한 몸사리기’를 방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의문사위의 가장 큰 문제였던 민관의 갈등 또한 길게 보면 이 뿌리에서 파생된 가지인 까닭이다.

    이를 위해서는 파견근무가 끝난 뒤 본인이 원하는 다른 기관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거나 국가인권위와 같이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상설 기구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정책이 고려돼야 한다. 조사권한 확보에 비하면 부수적일 수도 있는 이 문제가 큰 의미를 갖는 것은, 흙속에 묻힌 진실을 캐내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사건에 임하는 사람들의 자세와 팀워크이기 때문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680일 동안 걸어온 쉽지 않은 행로가 그것을 증명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