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호

“안경 쓰는 것과 휠체어 타는 게 뭐가 다릅니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신용호 사무국장

  • 정호재 demian@donga.com

    입력2002-10-10 1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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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0만명이 넘는 장애인들이 오늘날 미흡하게나마 누리고 있는 복지는 그저 주어진 게 아니라 쟁취한 것이다.
    • 그 ‘싸움판’의 핵심에 신용호라는 인물이 있다. 브레인이자 행동가로 장애인복지법 개정과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의 산파 노릇을 해온 그는 장애인 운동의 ‘젊은어른’이다.
    “안경 쓰는 것과 휠체어 타는 게 뭐가 다릅니까?”

    신용호 사무국장

    태풍 ‘루사’가 한반도를 할퀴던 날,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신용호(41) 사무국장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이윽고 날아온 소식. 충남 서산의 ‘함께걸음농장’이 큰 수해를 입었다는 내용이다. 중증 장애인 30여 명이 손수 농장을 가꾸고 기러기와 닭 등을 키우며 홀로서기를 하고 있는 곳이다.

    “이 농장과 부천에 있는 세차장, 그리고 광주의 재활용 공장에서 중증 장애인들이 취업해 일하고 있습니다. 정식으로 고용했기 때문에 월급도 주고 4대 보험 혜택도 제공합니다. 장애우들이 일을 통해 자립, 공동체생활을 복원하는 게 목적입니다. 경제성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쓰면 부족하지 않습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부리나케 달려가 보니 서산군 호서대 앞에 자리한 농장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밤새 몰아친 비바람에 오리새끼 3000마리가 저체온증에 떨다 죽었고, 정성스레 세운 비닐하우스와 울타리도 죄다 무너졌다. 감나무들은 뿌리째 뽑혀 여기저기에 나뒹굴었다. 몇몇 장애인들이 망치를 들고 울타리를 손보고 있었다. 팀장 김태웅씨는 신국장에게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 마리에 7000원씩 치면 2000만원쯤 피해가 났겠어요. 작년에는 배추값이 폭락해 헛농사를 지었나 싶더니 올해는 태풍이 속을 썩이네요. 어제 밤새도록 장애우들과 하우스 지붕을 붙잡고 있었는데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포기했어요.”

    힘들게 가꿔온 삶의 터전이 하룻밤새 허물어졌으니 망연자실할 법도 한데, 일하는 이들의 낯빛은 그리 어둡지가 않았다. 왁자하게 이곳저곳을 함께 오가며 망치질을 하고, 간간이 시원스런 웃음까지 터뜨리며 점심을 먹는 정경은 자잘한 일상에 일희일비하며 사는 이에겐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기자의 그런 심정을 눈치챘는지, 신국장이 낮은 목소리로 상황설명을 한다.

    “이 정도는 시련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다시 일하면 되는 거니까. 중증 장애인도 얼마든지 열심히 일해서 사회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번에도 우리 스스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줘야죠.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서라’는 보조선사의 격언도 있잖아요.”

    장애인 인권운동의 선봉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맞서 싸운 험한 여정에 밀알이 된 사람들의 희생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1987년에 문을 연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장애인의 복지 향상을 위한 전문가들의 모임으로 출발한 이 연구소는 장애인에 대한 정책적 배려와 인권 수호를 위해 헌신해온 장애인운동의 중심축이다. 이곳의 살림을 꾸리는 이가 바로 신용호 국장이다.

    “제가 가진 장애를 장애라고 하기엔 좀 쑥스럽지요.”

    신국장의 인상은 학자처럼 차분하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는 바람에 3급 지체장애인이 된 신국장은 1980년대 이래 장애인 인권운동의 최일선에서 싸워온 주역이다. 하지만 투쟁가가 감수했을 고난의 삶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언제나 온화한 표정을 잃지 않는다.

    “장애인 복지투쟁은 법률 제·개정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법부터 장애인을 배제한 탓에 무슨 주장을 해도 소용없던 시절이 그리 오래전 얘기가 아니에요. 그러다보니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가장 소외된 이가 장애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애인 스스로 입법활동

    1980년대에 국회와 주요 정당의 당사로 뛰어들어 농성을 벌인 장애인들은 “여기 이 땅에 장애인도 살고 있고 투표권도 있음을 기억하라”고 외쳤다. 지난한 정치투쟁의 결과 1989년에 장애인복지법 개정안이 통과됐고, 그후 1999년까지의 10년간은 제도상의 차별을 철폐하고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바꿔나가는 투쟁의 시기였다. 그 시기를 거쳐 오늘날의 장애인운동은 법이 실질적으로 강제하지 못하는 구체적인 권익보호를 위해 힘쓰고 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초대 회장은 국회의원을 지낸 이성재 변호사였고, 김성재 문화관광부 장관, 이남진, 도창영, 고재후 변호사 등이 초창기부터 몸담아왔다. 법과 사회운동을 공부한 이들은 장애인문제를 복지의 차원을 넘어 인권문제의 차원에서 이해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장애인을 위한 법과 제도 확립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연구소를 꾸려왔다. 이후 여러 시민·사회단체들과 연대하면서 지방연구소까지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장애인 관련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특별하다. 사회복지 관련법은 대개 이해당사자보다는 전문가, 주로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법안을 만든다. 그러나 장애인 관련법의 경우 1980년대 중반 이후 장애인 스스로 법안을 만들고, 공청회를 열고, 입법청원을 하고, 투쟁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켰다. 장애인이 아닌 사람은 장애인의 고충을 속속들이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너무나 오래 지속된 것도 또 다른 원인이다.

    장애우인권센터 조문순 간사는 “지금까지의 장애인운동은 신용호 국장 같은 선각자들이 틀을 만든 후 이해당사자인 장애인들이 그 내용을 채우기 위해 사안별로 싸우는 방식으로 진행됐다”고 설명한다.

    신국장은 “장애인운동을 하면서 장애인문제를 전문적으로 고민할 브레인 할 조직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연구소를 활성화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일단 제도 부문에서 기반을 다져놓으면 관련 장애인 조직들이 그 위에서 활기를 띠게 되리라 확신했다.

    1990년대 이전까지 복지 중심의 관변단체 성격을 띠던 장애인 단체들은 이 연구소를 매개로 차별 철폐를 지향하는 인권 중심 단체들로 빠르게 탈바꿈했다.

    “1980년대 초에는 장애인을 위한 법과 제도가 전무했기에 우선 큰 그림부터 그려야 했어요. 중증 장애인은 복지로 끌어안고, 경증 장애인에겐 일을 줘서 사회화시키자는 게 그것이죠. 그 결실이 바로 장애인복지법과 장애인고용촉진법입니다. 큰 그림은 그린 셈인데, 막상 현실에선 그림대로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죠.”

    법과 제도는 장애인을 배려하는 복지규정으로 넘쳐나지만 실제로는 장애인 차별이 계속됐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장애인은 고용에서 차별받지 않아야 함에도 공무원법에는 나이 제한과 함께 신체검사 규정이 오랫동안 존재했다. 장애인 관련법을 아무리 잘 만들어놔도 기업들이 이런 공무원법을 적용하기 때문에 장애인이 취업하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건물 앞에 설치된 장애인 이동 경사로나 지하철역의 리프트 역시 마찬가지다. 법에 의거에 형식적으로 설치하긴 했지만, 경사가 급하고 추락위험이 있어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장애우인권센터를 통해 장애우들이 처한 고통스런 현실을 생생하게 접하다보니 이젠 좀더 세밀한 그림이 필요한 때가 됐다고 느낍니다. 장애인운동이 생활운동으로 전환해야 할 시기를 맞은 거죠.”

    장애인이 노동현장에서 겪는 문제들도 많이 개선됐다고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 복지에 대한 인식이 좀체 바뀌지 않고, 중증 장애인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도 여전하다는 게 신국장의 질타다.

    “노동계에선 자꾸만 시장논리로, 그리고 경증 장애 중심으로 방향을 틀려합니다. 중증 장애인은 계속 소외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업주는 ‘장애인을 고용하니 한 사람당 2500만원의 비용이 들더라. 그러니 장애인 취업 대신 그 돈을 주는 게 좋지 않냐’는 황당한 얘기를 하더군요. 도대체 복지 마인드라는 게 없는 거죠. 사회안전망이 왜 있어야 하는지도 몰라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활동은 정책 및 제도개선, 사회교육과 인권운동 등으로 요약된다. 정책 분야에서는 특수교육진흥법, 장애인복지법,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법 등 장애인과 관련된 4가지 법의 제·개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장애인 복지 개선의 큰 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처음에는 장애인 변호사들을 활용했다. 법률을 제·개정하기 위해 단식농성하고, 대학생들과 연대해 서명운동을 벌이는 일이 1999년까지 반복됐다.

    법과 제도를 정비한 뒤부터는 연구소의 정체성 확립과 장애인 인권운동 확산을 위해 뛰었다. 월간 ‘함께걸음’을 발간했고, 장애우대학을 세웠다.

    “1995년 장애우대학을 열었습니다. 장애인문제는 결국 장애인의 손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장애인 스스로 깨어나야 하고 이는교육의 힘에 달려 있습니다. 그 전에도 대학에 장애인을 위한 특별 강의를 나갔지만, 결국 그때뿐이지, 장애인의 인권과 복지에 대해 전문적으로 고민할 사람들이 좀체 모이지 않더군요. 그래서 용기를 내서 시작했더니 전국에서 교육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장애우들이 몰려왔지요.”

    그때까지의 장애인 관련 교육은 휠체어 미는 법, 환자 돌보기, 시설관리 같은 기초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장애우대학은 단지 협의의 복지적 접근이 아니라 장애우의 권리나 인권의 측면에서 장애인문제에 다가서자는 원칙을 세웠다. 또한 그런 시각에 입각해 배운 것을 사회에 나가 직접 실천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그 결과 현재 1000명이 넘는 장애우대학 수료생들이 직업을 갖고 사회 각 영역에서 장애인 차별을 무너뜨리기 위해 발로 뛰고 있다.

    2000년에는 연구소에 인권센터를 만들었다. 이곳에선 장애인들이 현실에서 부딪히는 구체적인 인권침해 사례를 중심으로 제도를 보완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장애인 관련 법과 제도를 살펴보면 총칙의 이념과 내용은 어느 나라 법에도 뒤지지 않지만, 구체적인 법령으로 들어가면 ‘예산의 범위 내에서’라는 유의 단서조항 때문에 실천성이 떨어진다. 시행령이나 시행규칙도 장애인이 처한 현실을 배려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장애인들의 유년시절은 대개 차별과 외로움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기억으로 가득하다. 장애 어린이 스스로 장애를 ‘차이’가 아닌 ‘차별’로 인식하게 되는 현실은 혹독한 시련이 아닐 수 없다. 신국장의 어린 시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외할머니의 극진한 사랑으로 버거운 시련을 견뎌낼 수 있었다고 한다.

    악으로 버틴 유년시절

    “대부분의 장애우들은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특별해요. 아이에게 장애가 있으면 대개 여자 쪽에다 책임을 전가했거든요. 그러다보니 외할머니가 장애아를 맡아 키우는 경우가 많았죠.”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신국장은 외할머니의 권유로 여덟 살 때 서울에 올라왔다. 교육여건이 좋지 않은 시골은 장애아에게 더욱 불편할 수밖에 없어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서울에서도 차별은 심했다. 그래서 가끔 고향에 내려갈 때면 설움에 복받쳐 외할머니를 붙잡고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그래도 학교는 다녀야 했다. 할머니는 그런 손자를 다독이기도 하고, 독한 마음을 갖도록 자극하기도 했다.

    “안경 쓰는 것과 휠체어 타는 게 뭐가 다릅니까?”

    신국장의 장애인 복지와 인권에 대한 논의는 자신이 20년간 현장에서 싸웠기에 더욱 설득력이 있다. 사회교육원에서 강의하는 신국장.

    “학기 초에 한번 눌리고 들어가면 1년 내내 시달리곤 했습니다. 한번은 놀림을 받고 돌아가니 할머니께서 ‘친구들이 또 놀리거든 짱돌로 때려 죽여버려라. 똑같은 밥 먹고 왜 만날 맞고 다니냐’고 호통을 치셨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아예 작심을 하고 내가 먼저 가장 힘센 아이에게 싸움을 걸었어요. 제일 센 녀석과 싸우면 지더라도 2등은 하니까요. 그렇게 하면 사는 게 조금은 편했습니다. 그때부터 정치의 이치를 깨우쳤나 봅니다.”

    1980년대 초만 해도 장애인은 대학도 마음대로 갈 수 없었다. 기업이 자의적인 판단으로 장애인의 취업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처럼 대학도 제멋대로 장애인의 입학을 거부했다. 그래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던 시절이다. 1981년 법무부가 장애인의 법관 임용을 거부한 사례가 있었다. 1986년에는 장애인 김순석씨가 “휠체어로 오를 수 있게 도로의 턱을 3cm만 낮춰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이런 사건들을 기화로 장애인들의 투쟁이 계속됐다. 신국장도 선배 장애우들과 함께 항의집회에 참가하며 장애인문제를 사회적 차원에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신국장은 그나마 장애 정도가 덜했기에 대학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그가 택한 전공은 불교학. 집에서는 의과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랐으나 그는 종교 공부를 통해 자아를 찾고자 했다. 공부는 적성에 맞았지만, ‘시대상황’이 그를 종교에 안주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상아탑의 진리도 역사와 사회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에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다. 1년 가까이 선반 일을 했다. 노동운동을 통해 사회참여와 자아실현을 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의 선의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변 동료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생각해준다는 이들도 “몸도 불편한데,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하는 게 어때?” 하면서 혀를 차곤 했다.

    장애인으로서 노동운동에 참여하는 데 한계를 느낀 그는 필연적으로 장애인문제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 노동운동에 앞서 장애인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고민하던 장애인 대학생들과 함께 모임을 만들었다. 신국장은 그전부터 활동해온 친목단체 성격의 장애인 대학생 모임을 ‘전국지체부자유자대학생연합회’로 변모시켰다. 이들과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장애인 인권문제를 고민한 결과 이 땅의 장애인들에겐 정치투쟁이 선행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정치권과 언론을 향해 장애인 인권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정치투쟁으로 활로 모색

    이 단체의 회장을 맡은 1987년에는 대통령선거 정국에 뛰어들었다. 정치적인 영역에서부터 권리를 찾아나가야 인권도 복지도 바로 세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공약을 준비하는 각 정당들을 찾아가 장애인 관련 정책토론을 제의했다. 특히 야당 주변을 찾아다니며 “소외받는 300만의 장애인 유권자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작정 달려가서 장애인 복지 공약을 만들라고 요구했습니다. ‘장애인 유권자가 300만명이나 되는데, 당신들은 그들을 위해 제대로 된 공약 하나 만든 게 있느냐. 당신들이 모른다면 우리가 가르쳐주겠다. 만드는 중이라면 우리와 검증단계를 거치자’고. 다행히도 야당에서 우리 뜻을 받아주더군요.”

    당시 여당인 민정당을 압박한다면 더욱 효과적일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장애인문제는 단지 장애인의 복지수준을 높여달라는 차원이 아니라 전체 인권의 측면에서 봐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시대의 요구인 민주화와 장애인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고자 했기에 권위주의 정권에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장애인 복지 공약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으나 대선에서 여당이 이긴 탓인지 구체적인 성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장애인문제는 제도화, 정책화가 선행되지 않으면 근본적인 해결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명동성당 집회와 장애인올림픽위원회 점거농성 등을 통해 장애인복지법 개정, 고용촉진법 제정, 장애인복지청 신설, 장애인 등록제와 연금제 실시 등을 줄기차게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정부 일각에서 부실하나마 이런저런 법안들이 나오더군요.”

    1989년 10월에는 장애인복지법의 국회 통과를 위해 민주당·평민당·공화당 등 3대 야당 당사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1987년 대선 때 내놓은 장애인 관련 공약사항을 지키라는 게 핵심이었다. 야당 총재 및 노동위·복지위 소속 국회의원들과 함께 토론회를 열 것도 요구했다.

    “우리는 너무나 당당했어요. 김대중·김영삼·김종필 총재와 노동위·복지위 국회의원들을 직접 설득해가며 장애인 인권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대선 때 장애인복지법 개정을 약속하고도 이를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전체 장애인들에 대한 기만행위가 된다’며 정치권에 압박을 가하는 전술이 결국 성공한 셈이죠.”

    우여곡절 끝에 장애인들의 요구가 반영된 장애인복지법 개정안이 그해 국회를 통과했다.

    신용호 국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장애인운동권의 재무통이자 기획통이다. 운동 현장에 오래 몸담았던 그에게 자금문제는 현실적인 고민거리였다.

    재무통이자 기획통

    “이성재 변호사의 권유로 대학생 신분으로 연구소에 합류했는데, 와보니까 정말 빚더미에 올라앉은 느낌이더군요.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연구소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그는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근근이 연구소를 꾸려갔다. 그러다 인쇄소를 직접 운영하면서 연구소의 활동영역을 점차 넓혀갔다. 지령(誌齡) 14년의 월간지 ‘함께걸음’은 오늘날 가장 권위 있는 장애인 전문지로 평가받고 있지만, 초창기에는 연구소에 커다란 부담을 안겼다. 신국장은 수익성을 높일 방안을 다각도로 연구했다.

    “그 무렵 충무로에서 기획사를 운영하던 후배가 경영난으로 회사를 접었어요. 그걸 재빨리 인수해서 연구소의 수익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장애우들을 위한 일자리도 만든 셈이죠. 장애인문제에 공감하는 분들을 찾아나서서 인쇄 거리를 얻어왔습니다.”

    돈이 있어야 자립할 수 있고, 장애인문제도 노동을 통해서 풀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거리를 찾는 것은 단지 호구지책만은 아니었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전산화 구축사업에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장애인들에게 일이라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장애인이 사회활동에 참여하지 않으면 완전하게 고립되기 때문. 다행히 젊은 장애인들은 전산화 마인드를 가장 잘 갖춘 집단에 속했다. 많은 사람을 만나기 힘든 장애인들에게 PC통신과 인터넷은 세상과 통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당초 정부는 실업자들을 위한 복지 차원에서 데이터베이스 구축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전산화할 것이면 장애우에게 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런데 이게 정말 장애우의 적성에 꼭 맞는 일이더군요. 자료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입력하는 장애우들의 정성과 집착은 대단하거든요.”

    연구소는 현대정보통신이 발주한 300억원 규모의 컨소시엄에 참여해 장애인 500명에게 일거리를 주는 등 외환위기 상황을 장애인의 자립을 위한 호기로 삼았다.

    신국장은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연신 쏟아냈다. 올초에는 한국도로공사 노동조합과 함께 ‘장애인 인권기금을 위한 동전축제’를 벌이기도 했다. 운전자들이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전을 기금으로 내게 한 것이다. 그렇게 모은 동전이 1억원이 넘었다.

    신국장이 운동 과정에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장애인 인권운동을 우리 사회의 민주화운동과 연계하면서 그에 동조하는 시민단체들과 연대하는 일이었다. 장애인 복지는 당연히 민주화된 사회에서 꽃피울 수 있다는 믿음에 따라 민주화운동에도 적극 동참했다. 그 결과 많은 시민단체들도 장애인의 권익을 위해 함께 싸우고 돕게 됐다.

    “장애인문제는 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장애는 어느 사회에서나 발생하게 마련입니다. 어찌 보면 모두 예비 장애인이지요. 그렇기에 그 누구도 장애 때문에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반전·반핵·환경운동과 연대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는 현실에서 ‘장애해방’은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장애발생 요인을 제거하는 것, 그리고 장애를 이유로 인권이 침해받는 현실을 바로잡는 장애해방이야말로 장애인 인권운동의 본모습이다. 따라서 장애인운동 역시 반전·반핵·환경운동과 연대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산업재해를 줄이거나 전쟁을 막고, 지뢰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장애인운동의 일환이다. 이 때문에 장애인운동은 전세계적인 인권운동으로 확대된다.

    “특히 사회·노동단체와의 연대가 필수적입니다. 예를 들어 저희는 민주노총에 단체협상시 장애인을 2%씩 의무적으로 고용하라는 조항을 넣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고, 산업재해를 당한 이가 수없이 많은 현실에서 노조가 장애인을 외면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죠. 실제로 만도기계에서 이 안을 처음으로 적용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연대이자 사회적 안전망이 아닐까요?”

    장애인들은 장애의 종류에 따라 전혀 다른 욕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뜻을 한데 모으기가 쉽지 않다.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의 요구가 다르고,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들도 휠체어에 의지하느냐 목발에 의지하느냐에 따라 생각이 다르다. 더욱이 국내 장애인의 70% 이상이 초등학교 졸업 정도의 학력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다보니 과거 각 장애인 단체는 자기 정체성과 사회운동 개념을 갖고 있기가 힘들었다. 신국장은 “장애인문제에서는 입장 차이를 따지고 선명성을 내세워봤자 서로 더 힘들어질 뿐이다”며 “전체 장애우들이 차별받는 상황에서 누구랄 것 없이 복지와 인권 향상을 위해 뜻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대가 변했다. 현장 투쟁을 선도하던 신국장도 전략의 전환을 말한다.

    “이젠 자립운동과 생활운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른바 ‘일상운동’이죠. 장애인의 이동권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작은 모임을 꾸리는 이들에게도 힘을 실어줘야 합니다. 장애우들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제반 사회 여건을 바꾸는 것이 운동의 목표니까요. 요즘 저는 직업을 통한 공동체의 삶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서산의 함께걸음농장이 대표적인 경우죠. 그 다음으로는 장애인의 자립과 자기 결정의 소중함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정책에 관한 한 장애인들이 직접 참여하고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비장애인이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장애인이 실제로 겪고 느끼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지하철역의 장애인 리프트만 해도 그렇다. 처음부터 승강기를 설치했으면 모두에게 좋았을 텐데, 그저 값이 싸다는 이유로 리프트를 설치했기 때문에 장애인들은 목숨을 걸고 지하철을 이용하는 처지에 놓였다. 장애인이 가파른 리프트를 타고 지하도를 오르내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안다면 무용지물인 리프트를 전 지하철역에 설치하는 과오는 없었을 것이다.

    신국장은 중앙대 사회교육원에 강의를 나가고 있다. 2000년 사회복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전문성을 갖추지 않고는 연구소에서 일하기 어려울 것 같아 공부를 시작했는데, 어느 결에 ‘전문가’가 된 셈이다. 그는 과거에 이른바 전문가들을 극도로 불신했다고 털어놨다.

    “저 같은 현장운동가들은 전문가를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1980년대만 해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장애인에게 반말하고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죠. 의사들도 우리를 무조건 환자 취급했죠. 사실 그건 심각한 인권침해인데….”

    그는 자신 현장에서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를 전문적인 연구자들에게 나눠주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을 장애인 직업센터와 장애인들이 함께 일하는 농장에도 데려간다. 책상물림에서 벗어나 장애인과 함께 일을 해봐야 ‘고민’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신국장은 말이 적은 사람이다. 그래서 현장 운동가로서 좀 떨어지지 않겠냐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신국장을 잘 아는 이들은 그가 강한 실천력의 소유자일 뿐 아니라 사람들을 조직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입을 모았다. 또한 전체 장애우의 관점에서 명확한 방향성을 갖고 운동의 흐름을 이끌어왔다고 평가한다.

    안경과 휠체어의 차이

    몇몇 젊은 척수 장애인들이 서울 방배동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로 모여들었다. 비가 많이 와 예정된 인원이 다 모이진 않았지만, 하반신을 못 쓰는 장애인들이 경기도 군포에서 먼 걸음을 했다. 오늘 이들은 한 초등학교를 방문해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장애체험 교사’ 역할을 맡아 장애란 것이 단지 ‘불편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직접 보여줄 것이다. 어렵사리 용기를 낸 이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신국장이 그들 앞에서 이 활동의 의의를 설명했다.

    “‘오체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씨는 주로 어린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아이들은 순수합니다. 그들이 어릴 때부터 우리들과 함께 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어른들이 갖고있는 편견에 빠져들지 않도록, 안경을 쓴 것과 휠체어를 탄 것이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는 비장애인이 될 수 없어요. 그러니 장애를 둘러싼 환경을 변화시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과 그 길을 함께 걷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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