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호

“이교도도 사람이다!”

식민지배 맞서 싸운 16세기 유럽의 양심 라스 카사스

  • 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입력2002-12-26 14: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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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교도도 사람이다!”

    스페인 식민지배의 참상을 묘사한 드 브리의 그림

    9·11 사태 이후 미국이 국제법을 어겼다는 지적이 끝없이 제기되고 있다. 전쟁에 대한 국제법이 엄연히 존재하거늘, 미국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아프가니스탄을 폭격하면서 신은 중립이 아니다, 세계 전체의 전쟁이고 문명의 전쟁이다, 제2의 십자군전쟁이다 등의 수식어로 상황을 합리화했다. 이 말을 끝없이 되풀이한 이는 부시 미국 대통령이다.

    ‘문명의 충돌’을 쓴 헌팅턴 등은 과격한 전쟁지지 성명으로 이를 뒷받침했다. 폭격은 무고한 사람들을 악으로부터 구하는 것이고, 그에 대해 유엔 같은 국제기구의 승인을 기다리는 것은 ‘자살행위’에 불과하므로 불필요하다는 주장이다(여기서 ‘악’이란 아프가니스탄만이 아니라 아랍 전체, 심지어 이슬람교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밖의 소위 ‘불량국가’들도 포함된다). 지난 8월1일에도 부시 미국대통령은 요르단 국왕과 회담하기 직전 이슬람을 잘못된 종교라 불러 문제를 일으켰다. 그가 말한 ‘중립이 아닌 신’은 오직 기독교의 신을 말한 것이리라. 그리고 ‘잘못된 종교’의 신은 ‘잘못된 신’이기도 하리라.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국제법 학자들도 그런 주장을 펴, 이제 국제법은 강대국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패권주의의 장식에 불과하다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제법에 대한 세계적인 잡지로 우리나라 어느 대학 도서관에도 있는 ‘미국국제법저널’에 9·11 직후 실린 논문 ‘세계의 공공질서를 방어하기 위하여’ 머리말에서 라이스만이라는 미국의 저명한 국제법학자는 오직 승리냐 패배냐가 문제라면서, 민주주의의 적을 괴멸시키는 무기와 새로운 전쟁형태, 그런 무기사용에 대한 국제법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여기서 나는 나치 이상의 정치적 결단주의를 읽으며, 그가 말하는 국제법이 과연 ‘법’이라는 이름을 달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국제법의 추악한 이면

    물론 이런 식의 전쟁 합리화는 처음이 아니다. 전쟁을 도발국 멋대로 자위권 발동으로 합리화한 사례는 수없이 많았다. 예컨대 이스라엘의 1968년 레바논 공격과 1985년의 튀니지 공격, 미국의 1968년 리비아 공격, 1993년의 이라크 공격, 1998년의 수단과 아프가니스탄 공격 등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유엔에 의해 자위권 행사라는 추인을 받지 못했다. 어디 그뿐인가? 역사상 대부분의 전쟁은 국제법적으로 정당하다는 평가를 받지 못한다.



    또 하나의 국제법 파괴는 전시에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국제인도법과 관련한 것이다.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측 민간인과 포로가 대량 학살되었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유엔측은 인도법 준수를 요구했다. 또 미군이 포로를 인도적으로 대우하지 않는다고 NGO가 지적하자 미군측이 NGO에 약간의 돈을 주었다는 보고도 있다. 그러나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포로를 포로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 국제적 비난을 샀다. 이제는 국제법상 포로나 민간인에 대한 보호조차 사라지는 것인가?

    그래도 국제법이라는 것이 있다. 물론 그 효력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그럼에도 국제법은 인류 최소한의 양심이란 차원에서 존재해온 것이다. 국제법은 그 자체가 부시가 주장하는 신의 법, 문명의 전쟁이라는 식의 사고에 근거한 것이라 볼 여지가 있다. 그런 말들은 어제오늘 생긴 것이 아니다. 사실 이는 우리가 흔히 ‘국제법의 아버지’ ‘자연법의 아버지’라 부르는 그로티우스(1583~1645)의 법사상에서 이미 등장한 것이다.

    서양에서는 사람이 제정한 인정법 또는 실정법과 다른 자연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주장이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자연법이란 신의 법에서 비롯한 보편법이고, 국제법이야말로 그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것은 고대 유럽으로부터 중세 후기에 이르기까지 국제관계에 의해 귀납·경험적으로 그 존재와 보편성이 논증된 것에 불과하다. 이 경우 ‘국제’니 ‘자연’이니 하는 것은 유럽문명이라는 틀 속의 그것에 불과하고, 그로부터 나온 보편성이라는 것 또한 전지구적 규모의 보편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곧 석가나 마호메트가 아닌 그리스도, 공자나 맹자가 아닌 아리스토텔레스나 키케로가 그 전거로 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사상 내용의 보편성과 사상 형성 전거의 보편성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고, 후자의 결여가 반드시 전자의 결여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로티우스가 인류 보편의 법이라 주장한 국제법이나 자연법의 내용이 동시대 이슬람과의 관계에서도 타당한 것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여러 국민의 법이라는 것도 사실 그리스 도시국가 이래 유럽문명권의 국가적 관행을 전제로 한 것이다. 후대의 국제법 학자들은 자연법학파 국제법의 보편성이 19세기의 법실증주의파 국제법에 의해 대체되었다고 주장하나, 자연법학파의 보편성 자체가 정말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유럽에 한정된 것이었음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보편성을 갖는 것으로 주장된 자연법적 국제법은 서양 열강에 의한 세계 식민지화 과정에서 서양 열강이 사실상 그 존재를 결정하는 국제질서의 이론적 기초를 부여했고, 나아가 그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예컨대 민법의 선점(先占)이론에 따른 식민지 침략의 정당화, 해양 열강의 공해 자유 원칙이 갖는 이데올로기성 등이다.

    이와 같이 그로티우스로부터 비롯한 근대 국제법 이론은 기본적으로 유럽 독립국가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것으로 생성되고 발전된 것으로, 그로부터 소외된 객체에 불과한 비유럽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식민지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 이상에 다름 아니다. 말하자면 유럽국가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규범을 다른 나라에 강제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이나 한국 또는 일본이 소위 개화기에 적용받은(실제로는 강제된) 국제법에서도 나타난다. 국제법의 유럽 중심주의는 오늘날까지도 사실상 변함이 없다. 일본이 우리에게 강요하여 침략을 합리화하는 여러 조약은 그 모방에 불과하다.

    흔히 유럽에서 만들어진 국제법 질서는 다른 지역의 그것과는 달리 국가 평등의 관념을 내포한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국제법은 비유럽 제국과 동등한 입장에서 후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근거한 합의 위에 적용된 것이 아니라, 전자의 군사력 우월을 배경으로 후자에 강제된 것일 뿐이다. 나아가 비유럽의 여러 민족은 먼저 무력에 의해 지배당한 뒤, 국제법상의 주체성을 부정당하는 형태로 국제법 질서에 편입되었다. 힘에 의한 침략이 먼저였고, 국제법은 그 침략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 단계를 넘으면 다시 비유럽 민족들은 식민지가 이제는 식민지 지배권의 ‘국내’문제로서, 국제법의 규율대상이 아니라는 논리(국제법의 불간섭 영역으로서의 국내사항)에 따라, 국제법상의 논의 대상에서 배제된다.

    ‘근대 유럽문명에 의한 세계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국제법의 기능은 그로티우스만이 아니라 그의 절대주의적 국제법을 정치적 자유의 국제법으로 바꾸었다고 평가되는 밧텔의 이론에도 그대로 살아있다. 밧텔은 내정 불간섭 원칙을 강조하고 국가 평등의 관념에 근거한 국제법을 주장했으나, 그 또한 어디까지나 근대 유럽문명이라는 틀 속에서다. 이 역시 강대국이 멋대로 자국 보호에 치우치는 경우 기회주의적으로 애용되는 이론의 하나에 불과하다.

    밧텔의 이론은 노동력의 투하에 따른 소유권을 절대화한 로크의 이론에 근거한다. 로크는 재화의 희소성과 인간의 자기보존이라는 행동원리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주장한 홉스의 이론을 극복한 것으로 평가되나, 이 역시 유럽 민족 내부에서만이다. 그것이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온 식민자(침략자 또는 정복자)와 원주민의 사이에 적용되면 전자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해 식민자들이 자신의 노동관에 따라, 원주민은 자신이 산 땅에 노동력을 투하하지 않았으므로 소유권이 없고, 처음으로 노동력을 투여한 자신들이야말로 정당한 소유자라는 주장을 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자연법이니 국제법이니 학문이니 사상이니 하며 주장하는 소리들은 사실 원시적인 폭력에 의한 침략과 정복을 합리화하는 어용학설에 불과하다. 서양의 국제정치나 국제법에 대한 논의는 거의 그런 것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대해 비판을 제기한 이는 단 한 사람, 라스 카사스(Bartolom de Las Casas·1484~1566)란 스페인 출신 신부뿐이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를 살았으나, 어떤 책도 그를 르네상스인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를 르네상스 시대의 그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야말로 ‘인류는 하나’라는 신념에 근거해 ‘신세계’ 주민뿐 아닌, 흑인이나 학대받는 모든 사람들의 인간 존엄·생명·자유를 지키는 데 평생을 바친 보편인·세계인·행동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유럽중심주의의 역사가 갖는 독선을 최초로 지적한 역사가이자 휴머니스트이기도 하다.

    역시 르네상스인으로 불리지는 않으나 르네상스와 함께 근대사를 열었다는 ‘지리상의 발견’의 콜럼버스가 있다. 우리말로도 번역된, 역사상 유일한 콜럼버스 제1차 항해에 대한 문헌인 ‘콜럼버스 항해지’는 라스 카사스가 쓴 것이다. 이 책은 콜럼버스의 항해지를 정리한 것이나, 단순한 정리에 그치지 않고 그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담고 있다. 예컨대 콜럼버스가 원주민들(나체로, 무기도 갖고 있지 않은)에게 노동과 서양식 습관을 강요해야 한다고 쓴 부분에 대해, 라스 카사스는 신의 의지를 배반한 파괴행위라고 엄중하게 비판했다.

    이처럼 두 사람의 길은 전혀 반대였고, 그들에 대한 평가도 양극단을 달렸다. 라스 카사스는 근대 세계를 개척한 ‘위대한 발견자’ 콜럼버스를 스페인의 정복사업을 망치고자 한 ‘과대망상의 매국노’로 평가했다. 19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념하는 범세계적 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라스 카사스의 기념비가 처음으로 그의 고향 세빌리아에 세워졌으나, 곧 그 얼굴 부분에는 검은 페인트가 칠해졌다. 이처럼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양면적이다. 일반인의 감정만이 아니라 학계의 평가도 여전히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라스 카사스가 소개된 적이 아예 없다.

    “이교도도 사람이다!”

    멕시코 화가 리베라가 그린 라스 카사스. 그가 설교하는 대상은 정복자 코르테스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500주년을 맞아 두 편의 전기영화가 제작됐다. 그중 대작은 미국 프랑스 스페인 합작으로 리들리 스콧이 감독하고 제라르 드 파르듀가 주연한 작품이다. 서양인이 만든 콜럼버스 영화는 대동소이하게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영웅적으로 그리고 있다. 하지만 과연 콜럼버스는 인류사에 길이 남을 위인인가? 특히 우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고대 그리스인들도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했으나, 중세에는 그것이 금기시됐다. 15세기에 다시 그런 학설이 퍼졌다. 가난한 선원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가면 황금의 나라 인도에 닿으리라고 주장했다. 당시 지도에는 아메리카가 그려져 있지 않았다. 그 잘못된 세계의 모습을 믿고 서쪽으로 항해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옛날부터 존재했고 사람들이 살았으니 ‘발견’이란 말도 안되는 소리다. 서양인이 처음으로 ‘상륙’한 것에 불과하다. 아니 실상 ‘침략’한 것이다.

    콜럼버스는 결코 순수한 탐험가가 아니다. 오직 황금을 찾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당시 이미 인도양 중심의 거대한 무역권이 형성되었는데 서양에서 바다로 그곳을 가려면 아프리카를 우회해야 했다. 사람들은 아프리카를 탐험하여 황금, 상아, 그리고 흑인 노예들을 사들였다. 당시 아프리카에는 다수의 왕국이 번영했다. 아니 그전부터 아프리카에는 나름의 문명이 있었으나 서양인들은 침략을 위해 미개 야만이라고만 주장했다. 최근 아프리카인들은 자기들의 찬란했던 역사를 열심히 되찾고 있다.

    1487년에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 남단을 돌았다. 그곳은 희망봉이라 이름지어졌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서쪽으로 돌면 바로 인도에 갈 수 있으니 아프리카를 도는 것보다 더 경제적이라고 주장했다. 죄수들을 이끌고 69일의 항해 끝에 그는 서인도 제도의 한 섬에 닿았다. 지금도 그곳을 ‘서인도’라고 부르는 것은 콜럼버스가 그렇게 착각했기 때문이다. 인디언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이어 그는 자신이 일본이라고 착각한 쿠바에 닿았다. 그러나 황금궁전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메리카인들은 서양인들을 따뜻하게 맞았다. 콜럼버스는 스페인에 영웅으로 금의환향해 ‘인도의 제왕’이란 칭호를 받았다. 두번째 항해는 1500명의 성직자·관리·기술자·식민들이 포함된 식민사업과 기독교 개종을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아메리카 식민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식민지 총독 콜럼버스는 원주민들로부터 세금 명목으로 황금을 착취했다. 이에 반발한 원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총독직을 박탈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신대륙을 놓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싸우자 교황은 스페인에게 아메리카를, 포르투갈에게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나누어주었다. 서양 멋대로의 세계분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근대사의 가장 참혹한 식민지 침략이 불붙었다. 그후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가 그 침략에 합세했다.

    콜럼버스에 이어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했다. 인도 왕은 서양인이 가져온 선물을 초라하다고 경멸했으나, 다 가마는 향신료를 싼값으로 사와 항해에 든 비용보다 60배나 남는 장사를 했다. 그러나 그들의 궁극적 목적인 황금은 기대한 만큼 많지 않아, 서양은 무역 대신 주민을 죽이고 혹사시키는 식민지경영을 시작했다. 그 결과 멕시코의 아즈텍제국과 페루의 잉카제국이 멸망했고, 유럽은 아프리카·아메리카·아시아의 식민지화에 광분하는 시대로 돌입했다. 콜럼버스는 그 식민화의 선봉이 된 사람이다.

    콜럼버스와 달리 라스 카사스의 전기영화는 만들어진 적이 없다. 그러나 그 편린이나마 볼 수 있는 것으로 ‘미션’이 있다. 그 영화에서 로버트 드 니로는 흉악한 식민주의자를 연기하나, 제레미 아이언즈가 연기한 신부에게 감동해 원주민에게 봉사하다 신부와 함께 장렬하게 죽는다. 그 신부는 역사상 최초로 원주민을 옹호한 신부 라스 카사스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라스 카사스 역시 본래는 흉악한 식민주의자였다. 영화 속의 신부 또한 본래 그랬는지 모르지만, 영화에서는 그런 과거가 등장하지 않는다.

    라스 카사스는 1484년 스페인 남부 세빌리아에서 태어났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했다는 1492년 그는 어린 소년이었다. 1493년 9월, 콜럼버스가 제2차 아메리카 항해에 나서자 라스 카사스의 아버지도 참여했다. 1499년에 돌아온 아버지는 콜럼버스로부터 받은 노예를 라스 카사스에게 ‘선물’로 주었다. 1502년, 라스 카사스도 노예와 금은을 손에 넣기 위해 아메리카로 갔다. 그러나 이후 4년간 금은은커녕 극심한 빈궁에 시달렸고, 무참한 인디오 학살전쟁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뿐이었다.

    1506년 스페인에 돌아온 그는 신부가 되어 1507년 다시 아메리카로 갔다. 라스 카사스가 신부가 되었기 때문에 원주민을 옹호한 것은 아니다. 당시 대부분의 신부는 식민주의의 앞잡이였고 라스 카사스 역시 신부가 된 뒤에도 그런 역할을 계속했다. 신부는 다른 식민(植民)과 다를 바 없었다. 다른 게 있다면 노예로 잡은 원주민을 기독교도로 개종시키는 역할을 한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끝없이 반복되는 엄청난 원주민 학살, 광산에서의 가혹한 강제노동, 인디오 여성에 대한 강간, 인디오 아이들의 아사를 목격하며 라스 카사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러한 행위들은 인디오에게 노동을 강요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인화를 강요한 ‘엥코미엔다’라는 제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는 노동의 강요가 기독교인화에 의해 상계됨을 뜻했다.

    나이 서른에 라스 카사스는 식민들 앞에서 자신의 인디오를 해방하며 인디오에 대해 스페인인들이 저지른 부정과 압정 만행을 고발한다. 아울러 엥코미엔다 제도를 비판하고 인디오에게서 약탈한 모든 것을 돌려주라는 설교를 한다. 이것이 그가 후에 ‘첫 회심(回心)’이라 부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식민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낙심한 라스 카사스는 스페인 국왕에게 직접 개선을 요구하고자 고국으로 돌아간다.

    1516년, 32세에 그는 ‘14개의 개선책’을 쓴다. 그것은 인디오에 대한 강제노동을 중지하고 자급자족적인 인디오 마을을 건설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 교회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체하면서도 여전히 식민정책에 동조했다. 때문에 라스 카사스는 최초의 인디오보호관으로 임명돼 다시 아메리카로 돌아가 개혁을 실시하고자 했으나 일이 성사되기는커녕 식민들과의 대립만 더욱 심화될 뿐이었다. 결국 그는 강제소환 명령을 받았다.

    1517년 그는 다시 개선을 촉구하는 각서를 제출한다. 이는 광업보다 농업 식민을 중시하고 인디오 해방을 위해 흑인 노예제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중 농민 이민자를 보내야 한다는 제안은 받아들여져 희망자 모집까지 시작했으나 그들의 식민지 생활에 대한 보장을 해줄 수 없어 결국 중단되고 만다.

    인디오를 위한 투쟁

    1519년, 그는 개혁을 위한 세번째 각서를 제출하고 이듬해 그 각서에 따른 평화적 식민지 개척을 위해 다시 아메리카로 간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다시 좌절당하고 도리어 엄청난 학살사건의 빌미가 된다. 그후 라스 카사스는 제2의 회심을 경험한 뒤 1526년까지 현지에서 수도생활을 하며 신학과 법학을 연구한다. 이를 통해 라스 카사스는 이론으로 무장한 인디오 해방자이자 인디오 사도로 탈바꿈한다.

    1523년부터 집필한 ‘모든 사람을 참된 가르침으로 이끄는 유일한 방법’은 평화적 개종의 원칙을 신학적으로 논증한 것으로 이후 그의 행동지침이 된다. 여기서 그는, 언제 어디서건 폭력과 강제로 이교도를 개종시킬 수 없으며, 신앙에 따른 생활이야말로 유일한 방법이라는 주장을 편다.

    1527년, 인디오의 문화와 그들에 대한 정복사를 정리한 ‘역사’를 집필한다. 그는 만년에 이것을 ‘콜럼버스 발견’ 이후의 스페인 정복사를 다룬 ‘인디아스 역사’와 인디오의 뛰어난 문화관습 등을 고대 유럽의 여러 민족과 비교한 ‘인디아스 문명지’로 나누어 완성한다.

    1531년, 그는 인디아스 추기경 회의에 편지를 보내 인디언 착취와 정복전쟁의 부당성을 호소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그는 2년간 설교를 금지당한다. 외부활동도 힘들어진다. 그뒤에도 식민당국과 끊임없이 대립하며 평화적 개종을 위해 노력하다 1540년 20년 만에 스페인으로 돌아간다.

    라스 카사스는 평화적 개종을 위해 여러가지 개선을 호소하면서 특히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한 성인 인디오와 흑인에 대한 강제 세례의 금지를 요청했다. 이에 교회측은 당시 국제법의 최고 권위자인 비토리오에게 세례에 대해 심사토록 했다. 비토리오는 라스 카사스의 주장에 동의했다. 그가 라스 카사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데 이 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앞에서 언급한 그로티우스에게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는데, 라스 카사스와 그로티우스는 여러모로 다르기 때문이다.

    앞에서 본 그로티우스의 국제법, 자연법의 근본을 제시하면서 비토리오는 인디오도 나름의 이성을 가지고 있음에 동의한다. 그러면서도 국가를 건설하거나 통치하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음을 근거로 인디오에 대한 스페인의 지배를 정당화한다. 이 점은 라스 카사스의 주장과 상반되는 것이므로 적어도 그가 라스 카사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종래의 통설에는 찬성할 수 없다.

    라스 카사스는 그 뒤에도 인디오 정복 실태보고서와 개선책에 대한 여러 문서를 집필하여 새로운 식민지법을 성립시키고, 1545년 다시 아메리카로 돌아가 식민들과 싸우다가 1547년 재귀국해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쟁에 말려든다. 당시 세블베다라는 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의 자연노예설에 근거해 인디오를 생래적인 비인간적 야만인으로 규정하며, 그들을 ‘인도적이고 덕망 있는 스페인인’이 지배하는 것은 자연법에 합치하는 정당한 행위로 그를 거부할 경우 자연법에 따라 무력으로 지배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또한 성경에 근거해 인디오의 우상숭배, 인신희생 등은 자연에 반하는 범죄라 주장하고, 그런 행위를 하는 인디오의 생명과 재산을 뺏는 것도 정당하다고 했다.

    나아가 세블베다는 그런 인디오의 ‘압정’에 희생당하는 대부분의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의무이고 이를 위한 전쟁은 정당하므로, 기독교인은 그를 수행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파멸로 향하는 불쌍한 이교도를 개종시키는 것은 자연법과 신의 법에 일치하는 것으로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므로 이교도를 전쟁 등의 방법으로 무조건 복종시킴으로써 개종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근대 유럽 최초의 제국주의론으로 불리는 세블베다의 이러한 생각은 사실 지금 부시가 주장하는 바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세월이 500년이나 흘렀건만 인간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세블베다의 주장은 당시에도 국가와 식민주의자의 입장을 옹호하는 강력한 이론적 지주로 자리잡았다. 국왕에 대한 비판과 도전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스페인왕의 인디오정책에 위기감을 느낀 라스 카사스는 그런 세블베다의 주장을 용납할 수 없었다.

    논쟁에서 라스 카사스는 인디오의 문화와 역사를 설명하며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자연노예’가 아니라고 반박하고, 신이 우상숭배를 이유로 이교도에 대한 전쟁을 명령하지는 않았으며, 역대 교황 중에도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이 없다고 반박했다. 여기서 라스 카사스는 신의 가르침을 모르는 우상숭배자인 인디오는 복음의 진리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이교도(예컨대 유대교나 이슬람교)보다 죄가 가볍다고 하고, 유대인이나 이슬람교도를 처벌하지 않는데 하물며 인디오를 처벌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교회가 이교도를 처벌할 수 있는 경우는 이교도가 무력으로 기독교도의 영토에 침입하여 전쟁을 일으키거나 교회를 박해하는 경우, 또는 기독교도로부터 뺏은 토지를 점유하고 있는 경우 등일 뿐이라며, 설령 이교도가 무고한 자들을 부당하게 압박하고 우상에게 인신희생을 강요한다 할지라도, 그들을 구한다는 미명으로 전쟁을 벌일 경우 대부분의 무고한 자를 죽음으로 몰아넣게 된다면, 이를 최소악으로 보고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전쟁에서는 죄인과 무고한 자를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설령 이교도에게 죄가 있다 해도 신이 심판할 노릇이지 인간에게 그를 처벌할 권리는 없다고 주장했다. 덧붙여 라스 카사스는 인신희생은 유럽 고대민족 사회에서도 일반적으로 허용된 것이고, 인디오의 그것은 나름의 돈독한 신앙심에 근거하는 것이므로 결코 자연의 이성에 반하는 행위로 볼 수 없다고 반박했다.

    1552년부터 10년간 그는 ‘인디아스 역사’의 집필을 재개한다. 서문에서 그는 역사의 역할과 역사가의 자질을 논한 뒤, 다른 사람들이 실제로 보지 않은, 소문으로 들은 것을 역사라고 왜곡해 기록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또한 사물의 표면에 연연해 사물의 내면으로 천착해 들어가지 못함을 비판한다. 나아가 그들이 자신의 종교와 문명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해, 인디오가 구축한 문명이나 그들의 생활습관을 야만이라 보고 정복을 정당화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즉 문명과 역사에 대한 스페인 중심, 유럽 중심의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그런 해석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이교도도 사람이다!”

    ‘인디오 문명지’(좌)와 ‘인디오 역사’의 라스 카사스 육필 원고

    이어 그는 자신의 집필 동기를 ‘우리 스페인 국민을 그들이 빠져 있는, 그리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지극히 중대하고 위험한 오류와 기만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라고 썼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거의 절대시된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 역사상 유일한 역사가를 볼 수 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그가 식민주의자였던 과거의 자신을 엄하게 비판한 점이다. 특히 1514년 이후 그가 주장한 흑인노예의 도입에 대해 철저한 자기비판을 가한다. 지금까지도 그는 흑인을 희생해 인디오를 옹호한 자, 특히 인디오를 대신하는 노동력으로 흑인노예의 도입을 역사상 최초로 획책한 자로 비판받아 왔다. 그러나 그가 그 논리의 최초 입안자는 아니다. 흑인노예무역은 이미 1501년 9월의 칙령에 의해 시작됐고, 라스 카사스가 당시 요구한 것은 설탕공장의 가혹한 노동을 신체가 약한 인디오 대신 행할 신체 강건한 흑인을 몇 명 데려오자는 것이었다.

    1552년 ‘인디아스 역사’를 집필할 때까지 라스 카사스는 아메리카 흑인 노예의 합법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당시 유럽에서 그 문제에 이의를 제기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라스 카사스는 이미 1547년경, 포르투갈인에 의한 흑인 노예화의 참상을 목격하고, 그것이 인디오에 대한 스페인인의 불법행위와 다름없다는 이유에서 그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됐다. 그리하여 ‘인디아스 역사’를 통해 흑인노예 도입을 주장했던 자신을 적극 비판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도리어 흑인 노예화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그들을 옹호한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한편 ‘인디아스 문명지’는 당시 인디오에게 퍼부어진 비방과 중상으로부터 인디오들의 존엄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집필되었다. 이 책은 남미의 풍부한 자연과 인디오의 선·후천적 능력 등을 자신의 경험과 성직자들이 수집한 정보에 의거해 유럽의 자연 및 고대 여러 민족과 비교한 세계 최초의 비교민족지다. 여기서 그는 스페인이 오기 전 이미 인디오들이 완전한 사회를 구축했음을 상세히 입증하고, 특히 스페인의 정복을 정당화한 인디오의 우상숭배나 인신희생에 대해 착실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인디오의 존엄을 기록하다

    그는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도 야만적인 인신 희생을 했음을 상기시키면서 인디오의 인신 희생을 신에 대한 돈독한 신앙심에 근거한 것이라 설명한다. 그는 신앙에 근거한 인신 희생은 자연법이나 인정법에 비추어 허용될 수 있는 종교행위라고 주장했다. 이는 기독교가 숭배하는 절대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나, 그는 그러한 편협함을 뛰어넘어 ‘인류는 하나’라는 확신에서 자기 주장의 근거를 찾는다. 유럽인과 인디오 사이에 인간으로서 어떤 차이도 그는 인정하지 않았다.

    만년의 라스 카사스는 국왕, 즉 국가와 결별한다. 그리고 스페인 정복자와 식민주의자는 물론, 교회나 수도원 건설을 위해 기부를 받은 성직자에게도 인디오에 대한 배상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국왕의 배상의무까지 주장한다. 잉카제국이 전제국이어서 스페인 국왕의 정복이 정당했다는 주장에 대해, 라스 카사스는 인디아스의 모든 토지를 뺏은 스페인 국왕이야말로 전제자라고 맞서며 인디오에게 영토를 돌려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79년 구 소련의 침공에 의해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내전이 10년간 이어지는 가운데, 미국은 현재의 알 카에다나 탈레반에 연결되는 반체제파를 군사적으로 조직해 전쟁을 부추겼다. 그후 냉전이 종식되면서 아프가니스탄에 남은 것은 강대국에 대한 불신과 증오, 그리고 엄청난 빈곤이다. 이처럼 약소국을 단지 전략적 도구로 악용하고 용도가 끝나면 그것이 결과한 정치·경제·정신적 황폐에 대한 책임은 철저히 방기하는 강대국들의 행위야말로 인간성 유린의 가장 현저한 사례다.

    냉전 종식 후 강화된 소위 경제의 ‘글로벌화’에 의해 더욱 벌어진 남북의 격차 속에서 아프가니스탄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상황에 놓였다. 수많은 난민이 생겼고, 그들은 캠프에서 굶주림 끝에 죽어갔다. 9·11 테러와 관련해 미국 내에서 매우 예외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노암 촘스키는 ‘9·11’이란 책에서 9·11과 글로벌화의 연관성을 부정했지만, 이슬람 사회의 빈곤이 글로벌화에 의해 더욱 격화됐고, 9·11 폭격 대상인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글로벌화의 상징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냉전 이후 세계는 미소 양극체제에서 미국 일국체제로 변했다. 그래서 소련과 충돌할 걱정이 없어진 미국은 군사적으로 행동하기가 더욱 자유로워졌다. 군사비가 줄어들면서 미국은 경제적으로도 번영을 구가했다. 그 결과 미국의 이데올로기가 세계의 유일한 정의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이 일국지배를 형성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냉전이 종식되면서 종래 국제사회를 규정한 전략외교는 사라지고, 경제적 상호의존이라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세계에 대한 지배를 위해 종래의 전략외교, 힘의 외교를 고집하고 있다.

    “이교도도 사람이다!”

    1992년 세빌리아 만국박람회를 기념해 세워진 라스 카사스 기념비

    이런 상황을 호프만은 ‘소인국에 붙잡힌 걸리버’에 비유한다. 이는 군사면에서 소련이라는 공통의 적이 사라지면서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가 적어졌고 군사적 위협에 의한 외교는 유효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이 되었음을 뜻한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미국은 다른 강대국들과 상호의존관계를 지속해야 했고, 그 강도는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은 국제조직과 끝없이 불화하고 마침내는 탈퇴까지 불사하는 단독주의를 고집해왔으나, 그것이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미지수다.

    이런 상황에서 9·11테러는 미국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단순히 3000명이 희생되었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역사상 최초의 미국 본토 공격으로 냉전 후 미국제일주의라는 환상에 젖어 있던 미국인들의 자존심을 망가뜨린 것이었다. 9·11 이후 부시는 미국민에게 ‘자신감을 갖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 말의 진의는 ‘환상을 계속 키우자’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다시 환상에 젖어들었다. 9·11 테러는 역설적으로 미국이 군사적 힘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러시아 중국 이스라엘 중동 국가는 자국 내 이슬람 반체제활동을 분쇄하고자, 그밖의 선진국들은 초국가적 테러리스트들에게 위협을 느껴 부시에 동조했다.

    부시는 재판을 통해 겨우 획득한 위약한 정권을 강화하는 데도 9·11 테러를 이용했다. 취임하자마자 중국과 북한에 대해 강경정책을 펼쳤던 것처럼 ‘강력한 미국’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국내정치를 공고히 하려 한 것이다. 따라서 부시에게 9·11은 단순한 테러 ‘범죄’가 아니라 ‘전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미국이나 그 동조국에 의한 아프가니스탄 공습으로 끝나지 않았다. 중국·러시아·이스라엘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국내 반체제 세력을 탄압했다. 특히 이스라엘은 지금껏 팔레스타인에 대해 극도로 비인도적인 군사공격을 자행하고 있다.

    9·11 직후 부시는 ‘이렇게 선량한 나라가 왜 증오의 대상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은 정말 선량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시가 선량하다고 한 것은 미국이 자유·인권·민주주의를 존중한다는 이유에서이리라. 과연 미국이 자국 내에서 그런 가치를 충분히 존중하고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의문이 들지만 여기서는 일단 제외한다. 미국은 동일한 가치를 추구하는 타국 사람들에 대해서는 존중은커녕, 그를 짓밟는 억압적 부패정권을 지지하는 이중성을 보여왔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그 충분한 증거이며, 중동의 이스라엘 역시 그 가장 전형적인 사례다. 그밖에도 그런 이중성은 다반사로 나타난다.

    이처럼 미국에게 중요한 것은 자국의 이익일 뿐, 자유나 민주주의는 편의주의적 혹은 기회주의적으로 이용될 뿐이다. 여기서 미국에 대한 혐오, 반미주의가 생겨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특히 팔레스타인에 대한 미국의 태도에 대해 아랍 민중들이 뿌리 깊은 반미감정을 갖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닌가?

    그렇다면 미국은 왜 그런 이중성을 보이는가? 거기에는 억압적 정권 아래서 사는 사람들은 미국인과 다르다는, 즉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시각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서양의 전통적 오리엔탈리즘을 본다. ‘그런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판단에서 미국은 억압적 권력과 결탁해온 것이다.

    미국은 세계를 지도한답시고 글로벌화에 앞장서면서 국제협조를 주장한다. 그러나 군축이나 환경 등에 대한 세계적 합의를 무시하고, 자유무역이란 미명으로 전세계의 부를 흡수하여 낭비하는 것이 미국이다. 그리고 그 경제력을 배경으로 영어나 햄버거로 상징되는 미국문화를 전세계에 파급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미국 등은 국제사회의 억압적 구조에서 생긴 테러리즘을 군사적 폭력으로 뿌리뽑겠다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회적 억압을 증폭시킬 뿐이며, 테러리즘은 뿌리가 뽑히기는커녕 더욱 깊고 단단하게 자리잡아, 오직 무수한 희생만을 낳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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