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검사 인터뷰는 포도(鋪道) 위에 은행잎이 뒹구는 10월의 마지막날 오후, 서울고검 1522호실에서 이뤄졌다. 퇴직일인 11월6일이면 비워야 할 그의 사무실이었다. 그는 “지난 2월 명퇴를 결심했다. 당초 11월 중 명퇴신청을 하려 했는데, 신청서를 내기도 전 언론이 ‘선수’치는 바람에 예정보다 한 달쯤 앞당겨 신청서를 내게 됐다”며 허허롭게 웃었다.
‘청소년 지킴이’ ‘교육개혁가’ ‘탤런트 검사’…. 주지하듯, 세간에 각인된 강검사의 이미지는 그렇다. 이는 청소년보호위원회 초대위원장을 지내며 왕성한 청소년 관련활동을 한 이력의 영향이 클 것이다.
그러나 그도 역시 검사였다. 3시간여에 걸친 인터뷰 내내 그는 자신이 검찰에 회의를 갖게 된 배경, 공안·특수부 검사 시절 체험한 수사 외압(外壓) 등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사연들과 검찰개혁에 대한 견해를 작심하고 털어놨다.
초임검사 시절 검찰에 회의
강검사는 “나 자신이 워낙 검찰에 회의가 많은 사람”이란 말부터 꺼냈다. “검찰조직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검찰에 정을 느낀 적이 없다”고도 했다. 이율배반적인 말처럼 들린다.
-검찰에 회의가 많다, 정을 못 느낀다는 말이 선뜻 와닿진 않는데요.
“원래는 1972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재무부를 거쳐 부산세관 행정사무관으로 근무했어요. 그때 세관의 부패를 체험했습니다. 동료와 부하직원들이 하나둘 구속되는 걸 보면서 ‘공직사회가 정말 썩었구나’ 싶어서 법조계는 그나마 깨끗할 것이란 생각에 사시 공부에 매달렸는데 어쩌다 수석으로 붙었어요. 그때가 1976년이었죠. 사법연수원 마치고 1978년에 검사로 임용됐는데, 사시성적과 연수원성적을 합한 뒤 종합순위를 매겨 임용기준으로 삼는 거예요. 저는 사시성적이 너무 좋아 종합순위 1등이었으니 당연히 서울지검으로 발령받을 줄 알았죠. 1등을 서울지검으로 발령내는 게 당시 관행이었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저를 전주지검으로 보내는 겁니다. 당시 2등은 서울지검에, 3등은 폭력전과가 있던 터라 지방으로 발령났습니다.”
-내막이 있을 것 같은데요.
“대학 2학년때인 1969년 3선개헌 반대 데모를 해서 무기정학을 당한 사실 때문이었어요. 중앙정보부가 검찰에 관련기록을 보내 전주지검으로 발령받은 거예요. 당시 저는 발령을 거부하겠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검찰측에선 ‘그러면 신문에 난다’며 ‘1년 뒤엔 서울로 빼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첫 검사 발령 때부터 검찰에 회의가 들 수밖에 없었죠. 그때 받은 충격이 컸어요. 세관의 부패에 결코 뒤지지 않는 병폐가 검찰에 있더군요. 그때 든 회의가 이후 저의 24년 검사생활을 줄곧 지배했습니다.”
-초임검사 시절의 기억이 그토록 선명하게 각인됐다는 말씀인가요?
“그 이후론 계속 독재정권이었잖아요. 그런 후 서울지검 공안부로 오라는 제의를 몇 차례 받았는데, 안 갔어요. 그러자 1988년에 공안부로 강제발령을 내더라고요. 그때도 사흘을 버텼어요. 그랬더니 모 간부가 지금도 잊지 못할 한마디를 남겼어요. ‘너만 살려고 하느냐?’ 이거, 정말 기막힌 표현입니다. 결국 그 말의 압력에 굴복했죠. 당시는 6·29 직후여서 공안상황이 이전보다는 조금 나을 때이긴 했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공안사건 공소장을 보면 누가 어디서 태어나 어떠어떠한 불온서적을 읽고 어쩌구저쩌구 했다는 자질구레한 내용들이 무려 한 페이지 분량이나 됐어요. 그것을 검찰에선 모두사실(冒頭事實)이라고 부르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기는 공소장을 썼던 거죠. 저는 이걸 폐지해야겠다 싶어 모두사실을 모두 배제해버렸어요. 그리고 공안사건으로 계류된 사건들을 연말에 대대적으로 공소취하해버렸죠. 야당 탄압용으로 생겨난, 수년 묵은 사건들을 없애버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