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제주군은 노인이 살기 좋은 곳이다. 노인이 살기 좋은 곳은 누구라도 살기 좋다. 그런 곳은 대개 인심이 후박하고 물과 공기가 맑으며,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 태평양과 맞닿은 바닷가의 남제주군도 예외가 아니다.
성산읍 삼달리 미천굴관광단지에 있는 일출관광랜드의 아열대동산
그래도 제주도에 들를 적마다 빼놓지 않는 일정이 하나 있다. 송악산을 찾는 일이다. 거대한 2중 분화구가 형성된 송악산 정상까지 오르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는 그 기슭의 전망 좋은 주차장에서 잠시 사방을 둘러본 뒤 다시 길을 재촉한다.
아주 짧고 다급한 일정이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왠지 제주도에 다녀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송악산을 품은 제주도 서남쪽 해안에는 제주도의 자연과 역사가 죄다 모여 있기 때문이다. 쪽빛 바다, 작은 섬, 아담한 갯마을, 봉긋한 오름, 우뚝한 한라산, 너른 들녘, 그리고 수난의 역사…. 송악산 아래 해안 절벽에 서면 제주도만의 독특한 자연풍광뿐 아니라 피눈물의 역사가 남긴 생채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송악산 정반대 편에 위치한 섭지코지 해안도 즐겨 찾는 곳 중 하나다. 특히 멋진 해돋이가 예상되는 날 새벽에는 성산일출봉과 마주보는 섭지코지를 향해 부리나케 달려가곤 한다. 비록 제주도의 변화무쌍한 날씨가 먼길 달려온 사람의 정성을 헛되게 하기 일쑤지만, 섭지코지의 야트막한 언덕에 서서 ‘순도 100%’의 맑은 해풍을 맘껏 들이켜는 것만으로도 다리품이 아깝지 않다.
송악산과 섭지코지는 제주도의 4개 시·군 가운데 남제주군에 속한다. 그밖에 제주도 제일의 해안 절승인 남원큰엉, 가장 유명한 관광지의 하나인 성산일출봉과 산방산도 남제주군에 딸린 명소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남제주군의 산업구조에서 관광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남제주군은 농업과 어업 등 1차산업의 비중이 62%에 이르고 전체 인구의 약 46%가 농민인, 전형적인 농촌 기초자치단체이다. 반면 관광산업을 포함한 3차산업은 32%에 불과하다.
지방채 발행 않고 예산운용
남제주군의 면적은 615㎢에 인구는 7만7000여 명쯤 된다. 제주도의 시·군 중에서 면적은 북제주군 다음으로 크고 인구는 가장 적다. 올해의 재정규모는 일반회계 2270억원, 특별회계 106억원을 합해 총 2376억원이다. 일반회계 규모만 따진다면 전국 89개 군단위 기초자치단체 중 네번째로 많다고 한다.
하지만 재정자립도는 16.5%에 불과하다. 인구와 면적에 비해 재정규모가 큰 데다 1차산업 비중이 매우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재정자립도가 낮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쉽게 이해된다.
재정자립도, 즉 자생력이 낮고 중앙정부에 대한 의존도가 큰 남제주군은 나름대로 독특하고 합리적인 예산운용 원칙을 세워두고 있다.
그 첫째는, 지역 산업구조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1차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농업기반사업에 역점을 둔다는 점이다. 올해 투자규모를 보면 농업기반 조성에 247억원, 감귤·특용작물 분야에 45억원, 축산 분야에 75억원, 수산·산림 분야에 53억원 등 총 420여 억원이다. 그밖에 환경보전 분야에 대한 투자비가 474억원, 사회복지 분야가 187억원, 지역개발 투자비는 272억원이다. 이같은 투자비용이 전체 예산의 73.3%로 대단히 높은 편이다.
둘째로는, 지난해부터 지방채를 발행하지 않는 예산운용을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대 921억원(2000년 말 기준)에 달했던 채무를 매년 평균 6.4%씩 줄여나가고 있다. 그 결과 지난해 말에는 764억원으로, 그리고 올해 말까지는 558억원까지 채무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밖에 ‘인건비는 지방세로 해결하며, 중앙정부로부터의 지방교부세와 특별교부세를 최대한 확보한다’는 방침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런 노력 덕택에 남제주군의 올해 예산은 민선 2기체제가 출범했던 1998년 당시의 1350억원에 비해 자그마치 44%나 더 늘었다고 한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후 남제주군의 예산규모가 크게 늘었지만, 지역경제의 실상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무엇보다도 지역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인 감귤 가격 하락과 관광산업 침체로 인한 어려움이 적지 않다.
특히 감귤 가격 하락은 남제주군의 상당수 주민들에게 매우 심각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감귤농사 의존도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남제주군의 감귤 재배면적은 1만700여㏊, 생산량은 23만2000t(2000년 기준), 수익금은 1697억원에 달한다. 이는 전국 생산량의 41%, 남제주군 농업 조수입(粗收入)의 51%를 차지하는 규모라고 한다. 그러나 외국산 오렌지 수입과 도내 감귤의 과잉 생산으로 인해 “감귤농사 지어 자식들 대학공부 다 시킨다”는 얘기는 이제 옛말이 됐다.
이에 남제주군은 과잉생산으로 인한 품질저하와 가격하락을 막기 위해 열매 솎아주기와 나무 솎아베기를 지속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또한 일반 감귤에 비해 당도가 월등히 높고 특유의 향기가 있어 높은 가격에 판매되는 ‘한라봉’ 재배를 권장한다.
남제주군에서 감귤 다음으로 생산량이 많은 농작물은 감자다. 대정, 표선, 성산 등지에서 주로 재배되는 감자는 연간 7만1000여t, 470억원어치가 생산된다고 한다. 이곳 감자는 전분 함량이 많고 맛과 영양이 풍부한 데다 한겨울에도 곧바로 밭에서 캐내 출하되기 때문에 비교적 높은 값을 받는다. 또한 표선면과 성산읍에서 주로 재배하는 당근도 97억원의 농업 소득을 올려준다.
감귤, 감자, 당근뿐만 아니라 꽈리고추, 멜론, 참다래(키위), 토마토, 옥돔, 갈치, 돼지고기, 토종닭 등 생산량이 많고 품질 면에서 경쟁력이 높은 11개 품목에 대해서는 우수특산품 추천제를 실시하고 있다. 우수특산품으로 선정되면 남제주군이 품질을 보장한다는 뜻으로 ‘으뜸’이라는 상표가 부착되어 10% 이상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
남제주군의 우수특산품은 막연히 ‘내 고장의 특산품이 최고’라고 우기는 게 아니다. 각계의 전문가로 구성된 심의위원회에서 잔류농약검사, 품질검사와 여건검사를 거쳐 기준에 부합하는 품목만 우수특산품으로 선정된다.
이 제도는 남제주군에서 생산되는 모든 농·수·축산물의 청정(淸淨) 이미지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행정자치부는 이 시책의 운용규정인 ‘남제주군 우수특산품 추천 운영관리조례’를 특색조례로 선정하기도 했다.
경쟁력을 갖춘 선진 농업과 함께 남제주군의 미래를 이끌어갈 또 하나의 축(軸)은 역시 관광산업이다. 남제주군 곳곳에는 제주도의 어느 시·군 못지않게 아름다운 관광자원이 산재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송악산, 산방산, 성산일출봉, 섭지코지, 남원 이외에도 성읍민속마을, 안덕계곡, 혼인지, 추사적거지, 마라도, 용머리해안 등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민간 자본으로 조성된 제주조각공원, 제주민속촌, 신영영화박물관, 정석항공관, 오설록뮤지엄(서광다원), 소인국 테마파크 등도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다.
제주도 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지정된 3개 관광단지, 20개 관광지구 가운데 2개 관광단지(성산포해양, 표선민속)와 7개 관광지구(토산, 미천굴, 남원, 수망, 신흥, 송악산, 용머리)도 남제주군에 속해 있다.
뜨거운 펜션 열풍
풍부한 관광자원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제주군의 관광산업 비중이 상대적으로 미미한 것은 무엇보다 편의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탓이다. 그 동안에는 제주도를 찾는 관광객이면 어김없이 둘러보는 성산일출봉 주변에조차 마땅한 숙박업소가 드물었다. 고급 호텔과 콘도는 아예 없거니와 대중적인 숙박업소인 모텔이나 민박도 편안하게 쉬어갈 만한 곳이 흔치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런 숙박시설 문제는 머지 않아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문을 열거나 완공을 목전에 둔 콘도와 펜션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근래에 부쩍 늘고 있는 펜션은 농가가 많은 남제주군의 실정에 매우 부합하는 숙박시설로 평가된다.
제주도에서 펜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숙박업소 중 하나인 ‘남원통나무집’(064-764-2095) 대표 방수길씨(42·남원읍 남원리)는 이렇게 말했다.
“농민이 많은 지역 실정에 가장 적합한 숙박업소는 펜션이라고 본다. 펜션은 대규모 자본이 드는 숙박시설이 아니라 지역주민의 힘만으로도 비교적 쉽게 지어 운영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익 또한 고스란히 지역주민에게 돌아간다.더구나 우리 지역에 흔한 감귤밭은 펜션 이용객들을 상대로 하는 체험행사장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우리 고장의 특산품을 널리 알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일정 부분 판매도 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방씨뿐 아니라 제주도 관광산업 일선에서 뛰는 사람들은 “침체된 제주도의 관광산업을 되살리려면 ‘관광제주’에서 ‘휴양제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천혜의 자연경관을 한번 휙 둘러보는 방식의 관광행태가 수십 년 계속되다 보니 제주도를 서너 번 찾은 사람들은 “더 이상 볼 게 없다”고 단정한다는 것.
반면에 제주도가 언제라도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체류형 휴양지’로 인식되면 열 번 스무 번이라도 다시 찾게 된다는 얘기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주도의 자연경관보다도 제주 사람들의 두터운 인심과 제주도만의 독특한 체험프로그램을 앞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인식의 확산과 새로운 농가 수익모델로 떠오른 덕택에 최근 남제주군을 비롯한 제주도 전역에는 펜션이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제주도의 23개 관광단지 및 관광지구의 개발사업 가운데 처음으로 지난 4월 미천굴관광지구(064-784-2080·성산읍 삼달리) 일출랜드가 문을 열었다는 점도 남제주군 관광산업 발전에 퍽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3만여 평의 부지에 105억원의 사업비가 투자된 일출랜드는 천연 용암동굴인 미천굴을 비롯해 도예체험장, 레스토랑, 아트센터, 감귤체험농장, 수변공원, 아열대동산, 선인장하우스 등 다채로운 시설이 들어선 가족형 종합휴양지다.
더욱이 제주도의 23개 관광단지 및 관광지구의 개발사업 중 최초이자 유일하게 순수한 도내 자본이 투입됐다는 점에서 적잖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나머지 관광단지와 관광지구의 개발사업은 외환위기 이후 한동안 투자자를 찾지 못한데다 환경파괴를 우려한 시민단체와의 마찰로 인해 당초 계획에 비해 부진한 실정이다.
남제주군의 주목할 만한 시책 중 하나로 ‘실버인력은행’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노인들에게 일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거동이 불편하거나 와병중인 노인들에게는 일정액 이상의 수당을 지급하는 제도.
관내에 거주하는 모든 노인에게 혜택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불우한 노인이나 소외계층의 노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여느 노인 복지대책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이미 1992년에 고령화사회에 들어선 남제주군은 2001년 말 현재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율이 전체 인구의 11.8%를 차지할 만큼 높다. 그래서 1995년 12월30일 전국에서는 처음으로 ‘실버인력은행 설치 및 기금운용관리 조례’를 제정했다. 이 조례를 근거로 실버인력은행기금을 조성하고 경로수당 등 각종 노인지원사업을 추진하게 됐다.
노인이 살기좋은 곳
실버인력은행기금 30억원은 애초에 올해 말까지 조성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이미 지난해 말경에 목표액을 채웠다. 적립된 실버인력은행기금의 원금은 그대로 유지한 채 이자수익금만으로 지원사업을 펼치는데, 국비보조사업인 경로연금과는 별도로 경로수당을 지급하거나 입원보조비, 장례보조비, 공동작업장 설치비, 소일거리 마련사업비 등에 충당되고 있다.
이 기금의 지원사업비 규모는 처음 운용된 1997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모두 10억820만원에 이르며, 해마다 큰 폭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노인들에 대한 지원과 혜택이 그만큼 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제도가 가져온 부수 효과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지역주민 사이에 노인을 공경하려는 분위기가 크게 확산됐다고 한다.
그 결과 관내 79개 경로당을 대상으로 지역 청년회와 부녀회를 중심으로 한 후원회가 결성됐고, 각급 기관이나 단체들과 자매결연함으로써 각 경로당에 대한 자율적인 민간지원체계가 구축됐다.
이와 함께 주택, 수도, 전기, 보일러, 가전제품 등의 민간업체에서도 ‘종합복지서비스봉사단’을 만들어 독거(獨居) 노인이나 저소득층 노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지대해졌다고 한다.
노인이 살기 좋은 곳은 누구나 살기 좋다. 그런 곳은 대개 인심이 후박하고 물과 공기가 맑으며, 자연풍광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태평양과 맞닿은 바닷가를 품은 남제주군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보니 “먹고살기만 원만하다면 여기가 지상낙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다보면 언젠가 그 지상낙원에 둥지 틀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