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보가 ‘생명줄’인 세상이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에 의지하는 삶, 그래서 정보통신 기술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이 됐다. 그 와중에 심화된 정보격차가 정보기본권을 제한하고, 한편으론 개인의 정보가 기업의 새로운 자산으로 변했다. 전자감시가 횡행하는 우울한 디스토피아에서 이를 경계하는 젊은 인권운동가 두 사람을 만났다.
모 대학 사회학과 B교수는 ‘현대사회와 음란물’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쓰기 위해 자기 연구실에서 몇몇 포르노 사이트를 서핑한다. 다음날 학장이 B교수를 불러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봐요 B교수, 젊은 애들도 아니고 알 만한 사람이 학교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요?”
이처럼 감시는 우리 사회의 일상이 됐다. 출근길 도로변에는 속도며 차로 위반을 감시하는 카메라가 곳곳에 설치돼 있고, 사무실에는 도난 방지라는 미명 아래 CC카메라를 버젓이 달아놓았다. 네트워크 뒤의 감시자는 기업의 비밀보호를 명분으로 직원이 주고받는 이메일을 훔쳐본다.
퇴근 후 이따금 쇼핑하러 들르는 백화점에선 구매기록과 성향을 컴퓨터에 저장했다가 상품 안내장을 보내온다. 정답게 이름을 부르며 소식을 전하는 스팸메일과 스팸전화는 이젠 무덤덤할 정도. 지하철역 입구에 당당하게 서 있는 전경은 아무렇지도 않게 주민등록증 제시를 요구하며 마치 범죄자를 대하듯 쏘아본다.
신용카드사는 회원이 언제 어디서 어떤 물건을 사는지를 하나하나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인공위성과 연결된 휴대전화는 누가 어디에 있든 위치를 추적해낸다. 숨을 곳은 없다. 개인의 병력(病歷)이 담긴 유전정보까지 거래되는 세상, 굳이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정보사회는 이미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통제사회로 변했다.
정보인권운동의 메카
‘진보네트워크센터 참세상(www. jinbo.net 대표·강내희 중앙대 교수)’은 PC통신 시대를 겪지 않은 이들에겐 낯선 이름이다. ‘참세상’은 PC통신 시절 독보적인 위치에 있던 독립통신망.
진보넷은 고전적인 인권운동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운동 영역을 개척해왔다. 이른바 온라인을 통한 사회운동, 그리고 ‘정보사회 속의 인권보호’가 이들의 모토다. 그간 전기통신사업법 53조 개정, 통신물 표현의 자유 인정,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 단가 인하, 지문날인 거부, 반(反)감시법 제정운동 등을 주도했다. 상근자가 13명에 불과한 작은 단체지만, 이들이 정보사회와 관련, 주도해온 문제제기는 많은 이에게 공감을 얻으며 성과를 축적했다.
서울역과 숙대입구역 사이 허름한 빌딩에 세든 진보넷 사무실은 여느 시민단체들과 다를 바 없이 수수하고 소박하다. 특이한 점이라면 컴퓨터가 유달리 많다는 점과 상근자 대부분이 20대와 30대 초반으로 매우 젊다는 것.
그러나 이런 외양과는 달리 이들이 품은 네트워크의 규모는 이곳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운다. 700개가 넘는 국내 시민·사회단체의 홈페이지 서버가 바로 이곳에 있다. 민주노총, 녹색연합,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진보성향 단체들의 홈페이지 서버가 4년 전부터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호스팅 서비스만으로도 이미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는 셈이다. 700여 개의 메일링 리스트(mailing list)와 3000여 명의 이메일 이용자도 무시할 수 없다. 만일 이곳의 서버가 멈춘다면 수백만에 이르는 사회단체 회원들은 소통의 기반을 잃게 된다.
이들이 테헤란밸리의 유수 호스팅 업체를 제쳐놓고 이곳에 서버를 둔 것은 왜일까. 기술이 특별하거나 속도가 빨라서가 아니다. 진보넷이 국가권력의 통제와 억압에 굴하지 않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지켜낼 수 있는 자치 네트워크이기 때문이다.
오병일 사무국장(32)과 장여경 정책국장(31)은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네트워크를 구상하고 지켜온 진보넷의 도드라진 일꾼이다. 이미 10년 넘게 정보인권운동에 헌신해온 두 사람은 국내 PC통신 및 인터넷 1세대. 이들의 활약에 진보넷은 11월14일로 창립 4주년을 맞았다.
1990년대 들어 통신망이 새로운 의사소통 매체로 등장하자 이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가 권력의 고민거리가 됐다. 장국장이 당시의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줬다.
“1990년대 중반 PC통신 나우누리에 한총련 CUG(회원전용 게시판)가 개설됐습니다. 그런데 한총련의 불법시위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압수수색영장을 들고 나우누리 사무실에 들이닥쳤습니다. ‘한총련 방이 몇호실이야?’ 하면서요. 이게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가 아니라니까요.”
나우누리 직원은 황당해서 입이 딱 벌어졌지만, 압수수색영장까지 제시하는 공권력을 무시할 수도 없어 게시판에 올린 글을 복사해주었다. 물론 얼마 후 몇몇 진보단체의 게시판을 폐쇄해야 했다.
그 후로도 이런 강압적인 검열행위는 부지기수로 벌어졌고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발전노조 파업과 공무원 노조 파업을 전후해서도 검열이 행해졌다. 장국장은 “현재로선 공무원 노조도 불법이고 공기업 파업도 불법이라지만, 이들이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것이 어떤 문제가 될는지는 우리 사회가 좀더 고민해야 할 과제”라고 말한다.
진보넷은 이런 통제 속에서 잉태됐다. 진보넷은 PC통신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1980년대 후반에 통신환경이 조성된 이래 1990년 11월 ‘KETEL(‘하이텔’의 전신)’의 ‘바른 통신을 위한 모임(바통모)’으로부터 ‘온라인 사회운동’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이후 나우누리의 ‘찬우물’, 천리안의 ‘희망터’ 등 바통모와 비슷한 성격의 단체들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초기에 상업통신망에서 소비자 권리찾기 운동에 주력했다. 바른 통신언어 사용, 온라인 예절 캠페인을 필두로 이들의 활동은 조회 수 부풀리기 지양운동, 잦은 시스템 다운에 대한 항의운동으로 이어졌다.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된 것은 삭제행위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됐다.
정통윤이 만든 진보넷
1990년대 초 이후 진보적인 인사들이 PC통신에 올린 글이 문제가 되었다. 당국이 ‘불온서적’으로 엄단하는 책의 내용을 그대로 타이핑해서 올리는 이들도 있었다. 이 무렵 바깥세상은 바야흐로 해금(解禁)의 시대를 맞고 있었지만, 통신공간은 그 반대로 흘렀다. ‘공산당 선언’이나 사회주의 서적은 물론, 심지어 신문에 게재된 북한관련 글을 싣는 것도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단속했다.
그러다 출판물에 대해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는 게 어려워지자 대신 들이댄 잣대가 전기통신사업법 53조였다. ‘공공의 안녕과 질서 또는 미풍양속을 해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불온한 통신에 대해 정보통신부 장관이 그 취급을 거부, 정지 또는 제한하도록 명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이는 1961년에 만들어진 조항으로, 당시 전화로 불온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게 하려던 제도. 30년 전의 통제수단을 통신과 인터넷으로 확장하려 한 것이다.
이는 국가보안법의 또다른 형태였다. 이 조항은 수사기관이 사법적 판단 없이 자의적으로 통신을 제한하거나 폐쇄할 수 있게 했고, 실제로도 악용되거나 남용됐다.
정통부는 1994년 정보통신윤리위원회(정통윤)라는 기구를 만들어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말이 민간기구지 정통부가 뒤에 있는 한 누구도 위원회의 권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 정통윤은 대다수 사회단체의 게시판을 감시했다. 특히 천리안이나 하이텔 같은 상업통신망은 정통윤의 권고 한마디에 속수무책으로 글을 삭제하고 ID를 박탈했다.
명예훼손같이 불법성이 명백히 인정된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내가 쓴 글을 누군가가 임의로 삭제하는 것은 사전검열과 다를 바 없다. 이는 헌법정신에 어긋나는 행위다. 사이버 공간만큼은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통신인들의 바람이 컸기에 삭제에 대한 반발은 거셌다. 통신단체들은 “통신의 내용이 어떻든 검열은 철폐돼야 한다”고 맞섰다. 나아가서는 정부의 규제에 순종하지 않는 독자통신망 설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인터넷을 자유롭게 쓰려면 대안의 전용통신망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장여경 국장은 하이텔의 바통모, 오병일 국장은 서울대 학생들의 정보연대 ‘SING’ 출신이다. SING은 정보자본주의의 도래를 예견하고 이에 대응해 정보공유와 프라이버시 보호 문제를 어젠더로 삼은 최초의 단체였다. 이후 다양한 계층의 통신인들이 문제의식을 공유했고, 1995년에는 ‘진보통신단체 연대모임(통신연대)’이 발족했다.
통신연대를 중심으로 표현의 자유 수호를 이끌어온 이들은 1996년 총파업 지원단을 꾸리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네트워크센터 설립을 준비했다. 당시 독자통신망으로 이름을 날린 ‘참세상 BBS’의 네트워크를 기증받은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마침내 1998년 진보네트워크센터(초대 이사장·김진균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창립됐다.
진보넷이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다고 알려지자 진보 성향의 사회단체 게시판들이 경쟁적으로 몰려들었다. 진보넷은 상업성 없는 독자통신망이라 정통윤의 권고를 무시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민주화를 위하는 변호사 모임(민변)도 진보넷에 법률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진보넷도 정통윤의 타깃이 됐다. 동성애 청소년 사이트와 북한관련 게시물이 문제가 된 것. 정통윤은 데이터센터에 공문을 보내 문제의 글을 삭제하라고 지시했다. 진보넷은 이를 과잉단속, 억압으로 받아들였고, 이와 맞서 싸우는 과정에 정치적 지향점을 찾아냈다. 인터넷을 국가의 검열로부터 지켜내자는 것,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해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자는 원칙을 세웠다.
1999년 서해교전과 관련, 한 학생이 나우누리 게시판에 장난 수준의 음모론을 제기하는 글을 올렸는데 정통윤이 전통법 53조에 의거 ‘내용이 불온하다’며 삭제하라는 공문을 내려보냈다. 글은 즉시 삭제됐고 ID까지 정지됐다. 이 사건과 관련, 그해 8월 장국장과 오국장은 민변과 함께 전기통신사업법 53조에 대한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이 법정 싸움은 3년을 끌었고, 지난 6월27일 헌법재판소는 문제의 조항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오국장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며 이렇게 한다.
“인터넷에 대한 사회적 우려를 반영한 법도 아니고, 군사독재 시절에 국민을 감시하던 법 조항을 적용하다니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하지만 최근 정통부가 입법예고한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온전하게 수용했다고 보기 어렵다. 정보통신부는 ‘불온’을 규제하는 게 위헌이라면 ‘불법’을 규제하겠다고 나섰다. 장관의 삭제명령권과 정통윤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것. 장국장은 “이대로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다시 위헌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서구는 이미 표현의 자유 문제를 졸업한 지 오래입니다. 표현이 문제가 되면 해당 법에 따라 처리하면 그만입니다. 만일 문화관광부가 언론매체를 그렇게 규제하고 검열한다면 가만히 있을 기자들이 있을까요?”
진보넷은 비단 정부 당국뿐 아니라 인터넷을 이단시하고 사회 병폐로 매도하는 일부 언론은 물론, 사이버 세계는 혼란스럽고 타락했다는 사회적 인식과도 싸워야 했다. 정통윤은 음란 사이트와 자살 사이트, 폭탄제조 사이트 같은 반사회적 사이트가 청소년들을 타락과 죽음으로 이끄는 주범이라고 몰아세우는 마녀사냥 분위기에 편승, 검열을 주도했다.
장국장은 최근 또다시 논란이 된 인터넷 등급제에 유감을 밝힌다.
“인터넷 등급제는 형식상 자율이지만 규제 내용은 사실상 검열에 가깝습니다. 인터넷이란 매체가 검열과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는 그 사람들이 더 잘 알 겁니다. 단지 규제의 끈을 놓고 싶지 않은 거죠.”
감시의 사회
전기통신사업법 53조가 위헌판결을 받았으니 어쨌든 표현의 자유 문제는 반쯤 해결된 셈이다. 그렇다면 정보인권운동은 어디를 향해 뻗었을까. 이와 관련해 장여경 국장이 주목하는 분야는 프라이버시 문제다. 검열 문제에서 한 차원 더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보화의 진전과 함께 감시가 자유로워졌습니다. 이것을 통제할 만한 제도적 장치와 사회적 합의가 미진해요. 프라이버시 문제가 특히 주목받는 것은 지금은 개인 정보가 기업의 경영자산이 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노동에 대한 감시가 더욱 세밀해졌는데, 과거의 블루칼라가 CC카메라에 의한 감시에 길들었다면 요즘의 화이트칼라는 인터넷에 의한 노동통제에 노출돼 있습니다.”
사실 ‘프라이버시(privacy)’에 딱 들어맞는 우리말은 찾기 어렵다. ‘사생활’ 혹은 ‘비밀’ 정도로 번역되지만, 최근 감시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이보다는 ‘반(反)감시(Anti-surveillance)’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게 정확하다. 장국장의 말.
“1998년에 108개 사업장을 시범 조사했는데, CC카메라는 어디에나 다 있더군요. 문제는 그것에 찍히는 사람이 찍는 사람과 합의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반감시법을 도입한 미국의 몇몇 주에서는 공장에서 노동자를 감시하려면 프라이버시위원회를 소집해 노·사가 함께 조사하고 합의해야 합니다. 감시설비가 인권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보는 거죠.”
우리나라의 통신비밀보호법도 감청설비를 설치할 때 정통부에 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신고한 곳은 전무하다. 근로자들은 막연하게나마 자신의 통신활동이 감시받는다고 짐작한다. 예를 들어 증권사의 경우 고객상담 직원의 통화는 전부 감청된다. 이른바 ‘작전’이나 수익률 보장행위 등을 예방하기 위해서지만, 직원들의 동의 아래 실시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디지털 통신수단에 대한 감시는 더욱 심하다. 이메일과 네트워크 감시는 일반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디지털 사회에서 개인정보 누출이 초래하는 위험은 고스란히 개인이 떠안아야 한다. 하지만 이 문제를 심각한 인권침해로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장국장은 “노동감시가 정당하다는 인식이 굳어지면 누구나 감시당할 수 있습니다. 이건 노동의 주체가 누구냐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문제입니다. 감시의 문제는 노동현장을 벗어나 국가 전반으로 확대될 수도 있어요.”
‘확대된 감시’의 대표적 사례는 주민등록제도다. 주민등록은 일견 대단히 편리한 제도같지만, 정보사회의 개인 인권을 침해하는 요소들이 숨어 있다. 이 때문에 지문날인에 반대하고 주민등록번호를 없애자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온다.
인터넷 기업이 개인정보를 모으는 것은 이 정보가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 기업의 가치는 실명 회원수가 좌우한다. 회원을 많이 가진 기업들만 살아남는다. 문제는 기업합병을 하거나 혹은 회사가 없어질 때 이들이 확보한 고객 데이터베이스가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대해서 누구도 통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기업들이 가진 개인 정보가 서로 통합되면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주민등록제도 때문이라는 게 장국장의 지적이다.
“미국의 타임워너와 AOL이 합병을 시도할 때 두 회사 모두 상대방이 가진 고객 정보를 탐냈습니다. 결국은 통합을 이루지 못했는데, 소비자단체의 항의보다는 본인임을 확인할 수 있는 주민번호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장국장은 새로 만들어진 플라스틱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않았다. 주민등록제도가 가진 근본적인 인권침해 가능성 때문이다.
“주민등록번호를 자세히 살펴보세요. 출생연도, 출신지역, 성별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전세계 어디에도 이렇게나 인권침해적인 제도는 없습니다. 또한 미성년자를 동사무소로 불러 열 손가락 지문을 찍게 하고 자료를 경찰서로 보내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재일동포에게 지문날인을 강요하지 말라고 일본 정부에 요청해왔다. 그러면서도 우리 정부는 전 국민에게 지문날인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디지털화하고 있다. 전 국민을 예비 범죄자로 보는 시각이 담겨 있다. 그러나 지난해 9·11 테러 이후에는 이런 철저한 국민 정보 확보책이 다른 나라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으니 아이러니컬한 상황이다.
장국장과 오국장이 주민등록제도의 문제점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통신연대 활동을 하던 1996년, 정부가 전자주민카드를 계획하면서부터다. 한 장의 카드에 개인의 모든 신상 정보는 물론 홍채(虹彩) 정보까지 담겠다는 계획이었다. 전형적인 통제의 발상과 인권의식의 부재를 그대로 보여준 사례였다.
그렇다고 이 제도가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터. 장국장의 설명이다.
“주민등록제는 어느 면에서 매우 효율적이고 편리하기 때문에 쉽게 없어지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주민등록제에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생활하는 것과 모르고 생활하는 것은 차이가 큽니다. 이런 인식을 갖게 되면 자신의 정보를 소중히 여기고, 그래서 결국은 프라이버시가 존중받는 사회가 될 거예요.”
정보가 노출된 사람은 감시사회에서 절대적인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개인의 정보는 차별에 이용된다. 그래서 성차별, 지역차별, 나이차별, 학력차별을 조장한다. 일시적인 편리함은 이내 인권침해라는 폭력으로 변해 부메랑처럼 돌아오게 마련이다. 정보사회의 인권운동이 프라이버시 확보운동으로 귀결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프라이버시 관련법이 필요에 따라 제정되고 시행된다. 이는 신용카드 관련법에서부터 통신망 이용, 인터넷 개인정보, 통신비밀, 수사기관의 정보 획득과 사용에 관한 법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비록 이런 법률들이 개인을 보호한다지만, 개인의 권리가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아 약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해온 게 사실이다. 진보넷은 이와 같은 법률의 맹점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장여경·오병일 두 사람이 표현의 자유 수호에서 시작한 정보인권운동의 관심은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특화 분야를 찾아갔다. 장국장은 프라이버시 문제에 집중했고, 오국장은 지적재산권 문제를 중심으로 연구했다.
지난해부터 디지털 저작물 유료화에 반대하는 카피레프트(Copy-Left) 운동이 사회적 이슈가 됐다. 카피레프트는 인터넷 인프라가 개인이나 사기업이 아닌 정부에서 구축한 것인데도 그 과실은 대규모 기업들이 독식하고 있고, 심지어 특허를 통해서 아예 접근조차 차단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한다.
카피레프트 운동은 나아가 만성 골수성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의 가격이 너무 높다고 항의하는 등 초국적 자본에 얽매인 정보를 기본권 개념으로 확립하려 애쓰고 있다. 디지털 사회의 장점이 정보공유인데 오프라인 시대의 발상으로 창의성을 막는 일이 잦다. 대표적인 예가 ‘소리바다’ 죽이기다. 온라인 도서관 구축이 지지부진한 것 역시 지적재산권의 벽이 너무나 높다는 걸 보여준다.
“미국에선 냅스터 논쟁으로 학계와 재계가 온통 들썩였습니다. 온라인 시대에 맞게 변화하기 위해 진지한 사회적 토론을 경험한 것이죠. 우리는 잠시 화제가 됐다가 바로 서버를 폐쇄하고 말았습니다. 활발한 토론을 주도해야 할 지적재산권 전문가들이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정보통신 선진국이라 부르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가장 열렬한 지지자는 弱者
진보넷은 여느 시민단체와 마찬가지로 재정과 인력문제를 겪고 있다. 1999년,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넘어갈 때도 고민이 컸다. 오국장은 “수천명으로부터 매달 꼬박꼬박 5000원씩 받으며 PC통신 시대에 안주할 수도 있었다”며 “만일 그랬다면 인터넷 시대인 지금 누구도 참세상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과감하게 무료인 인터넷으로 방향을 돌리면서 고생도 많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했다는 것.
다달이 500만원이 넘는 적자가 나고 상근자들이 연봉 5만원으로 버텨야 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정보단체인만큼 시대의 변화에 맞춰 재빠르게 변신해야 했다. 현재는 월 평균 1만원씩 받는 호스팅비로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각계의 후원금으로 인건비를 충당한다. 정보통신 인력이 무더기로 배출되고 있어 진보넷 활동에 도움을 주는 젊은이가 많을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요즘 대학생들은 새로운 것과 빠른 것만 좋아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한 맹신이 생겨나는 것도 그 때문이죠. 그 속에 담긴 정치적 맥락은 이해하지 못해요. 카피레프트나 리눅스 운동 같은 데 관심을 보이는 대학생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요. 하긴, 대학생들이야 아무래도 취업과 관련된 상품성이 높은 기술을 선호할 수밖에 없겠지만요.”
검열반대 등 진보넷의 활동을 가장 열렬하게 지지하는 이들은 청소년과 장애인, 동성애자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이었다고 한다. 오국장은 “사이버 세상이 막힐 경우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은 오프라인에서와 마찬가지로 약자라는 걸 절감했다”고 한다.
자유롭게 통신을 하고 싶다는 두 사람의 꿈은 10년이 지나도 변함없다. 그간 이들의 관심은 차츰 넓어져 사이버 세계 전반을 아우르게 됐다. 표현의 자유에서 프라이버시를 거쳐 지적재산권에 이르기까지 정보 기본권 쟁취를 향한 이들의 싸움은 끝이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