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호

박근혜 냉담이 단일화 불렀다

노무현·정몽준 단일화협상 막전막후

  • 글: 박성원 swpark@donga.com 글: 김정훈 jnghn@donga.com

    입력2002-11-29 12:1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물과 기름 같다던 노무현-정몽준 두 후보, 그래서 애당초 후보단일화는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이런 전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두 사람은 손을 마주잡았다. 극적인 결과만큼이나 흥미진진한 보름간의 단일화 합의 과정에 얽힌 뒷얘기들.
    박근혜 냉담이 단일화 불렀다
    11 월10일 오후 경남 창원에서 열린 경남지역 선거대책본부 발대식을 마치고 다음 목적지인 전남 순천을 향해 남해고속도로 위를 달리던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중간 지점인 섬진강 휴게소에서 순천이 지역구인 김경재(金景梓) 선거대책위 홍보본부장을 만난 노후보는 “후보단일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시간은 없고 고민이 많습니다”라고 운을 뗐다. 김본부장은 “후보께서 이제 승부수를 던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모호하게 답했으나, 노후보가 뭔가 나름의 결단을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

    순천에 도착해 저녁식사를 마친 노후보는 숙소인 호텔 객실에서 김본부장과 함께 MBC-TV 9시 뉴스를 봤다. 마침 전날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가 보도되고 있었다. 노후보의 지지도는 19.5%. 정몽준(鄭夢準) 후보는 22.7%였다. 지지도 격차가 오차범위 안으로 좁혀지긴 했지만, 여전히 정후보에게 뒤지는 수치였다. 실망스런 표정이 역력한 노후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후보께서 결단을 내리십시오”

    “여론조사로 후보를 정하더라도 단일화를 해야겠습니다. 정후보가 국민경선은 못하겠다고 하니까, 여론조사 방식이라도 채택해야 국면을 타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많으면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샅바 싸움을 하겠는데,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불리해도 하늘의 뜻에 맡기겠습니다. 김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본부장은 긴말 않고 “후보께서 결단을 내리십시오”하고 동의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노후보는 곧바로 서울에 있던 선대위의 모 핵심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가 결심했습니다. 여론조사를 하는데, 공신력 있는 여러 개 조사기관을 통해서 하면 됩니다. 권역을 8개로 나눠서 TV토론을 하고, 국민이 누가 후보가 돼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원칙만 지키면서 협상을 해주십시오. 모든 작업은 25일까지 끝나야 합니다.”

    11월3일 국민경선을 통한 후보단일화를 정후보에게 제안할 때만 해도 노후보는 꼭 후보단일화를 성사시켜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후보단일화를 명분으로 내세운 당내 의원들의 집단 탈당 움직임을 차단하겠다는 전술적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일주일 사이에 노후보의 생각은 크게 달라졌다. 국민경선을 통한 후보단일화를 제안했는데도 의원 20명이 탈당을 결행해버렸고, 반전(反轉)될 듯하던 지지도는 다시 정체상태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차례 선거를 치러본, 그리고 이기기보다는 패배에 더 익숙한 노후보는 본능적으로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노후보 숙소를 빠져나온 김경재 본부장은 곧바로 순천 시내의 한 단란주점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기자 4명과 술자리를 가졌다. 밤 10시경 기자들과 만난 김본부장은 과거 김대중 대통령과 관련된 이런 저런 에피소드를 화제삼아 특유의 입담을 과시하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폭탄주가 서너순배 돈 뒤 김본부장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조금 전까지 노후보와 함께 있다가 왔는데, 진짜 중요한 기사거리를 주겠다”며 노후보의 결심을 그대로 전했다.

    김본부장의 얘기를 전해들은 기자들은 곧바로 전화로 서울에 보고했고, 자정이 다 된 시각에 민주당 중앙당사에서 심야회의를 열고 있던 선대위 인사들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당사는 일순간 벌집을 쑤신 듯 뒤집혔다.

    “속옷은 하나 입고 있어야 하는데”

    김원기(金元基) 고문은 곧바로 김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 뭐라고 떠들었소”라고 벌컥 화를 냈고, 단일화 협상단장인 이해찬(李海瓚) 기획본부장은 노후보와 직접 통화를 하기 위해 분주하게 연락을 취했다. 이해찬 본부장과의 전화통화를 통해 노후보의 결심이 정식으로 선대위에 전해지면서 선대위 내부에서는 “히든카드를 너무 일찍 꺼낸 것 아니냐”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국민경선을 계속 밀어붙이다가 막판에 ‘여론조사’방안을 최종협상안으로 제시, 협상을 타결짓는다는 전략이 엉뚱하게 전남 순천에서의 ‘천기누설’로 큰 차질을 빚게 된 셈이었다.

    정대철(鄭大哲) 선거대책위원장은 “홀랑 다 벗어버린 것 같다. 속옷은 하나 입고 있어야 하는데…”라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고, 발설자인 김경재 본부장을 향해 “돌로 쳐죽이고 싶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처음부터 후보단일화 추진에 강력히 반대했던 이상수(李相洙) 총무본부장은 “여론조사로 후보를 정하다니, 이거 웃기는 얘기 아닙니까”라고 흥분했다.

    다음날 아침 순천의 행사장에 멋쩍은 표정으로 나타난 김본부장을 본 노후보는 “김선배님, 어젯밤에 수고 많으셨습니다”라고 인사했다. 김본부장이 총대를 메준 데 대해 우회적으로 감사의 뜻을 전한 것이었다. 후보단일화를 강하게 주장해왔던 한광옥(韓光玉) 최고위원도 전화를 걸어와 “김의원이 정말로 큰일을 했다. 잘했다”고 격려했다.

    그러나 정작 ‘국민여론에 의한 단일화’를 강조해온 정후보측의 반응은 차가웠다. 11일 아침 노후보의 국민여론조사 제안을 보고받은 정후보는 “노후보가 시시각각 생각이 바뀌고 있으니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당내 후보단일화대책위에서 신중히 검토해줄 것을 당부했다.

    2시간 남짓한 회의 끝에 이철(李哲) 조직위원장은 당사 3층 기자실로 내려와 “양당 대의원들만으로 단일후보를 가리자는 이른바 ‘대의원 여론조사’를 실시하자”는 역제의를 내놓음으로써 국민여론조사 방식을 사실상 거부했다. 우위를 지켜오던 지지율이 노후보와 같은 수준까지 하락하고 있는 상황에 국민여론조사에 정후보의 운명을 맡길 경우 자칫 ‘낙마’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국민여론조사’ 대(對) ‘대의원 조사’라는 양측의 팽팽한 이견을 조율하기 위해 민주당과 통합21의 단일화협상단은 이날 저녁 비공개리에 서울 시내 N호텔의 한 객실에서 자리를 마주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무거웠다. 통합21측 협상단장인 이철 조직위원장이 민주당측 협상단 간사인 이호웅(李浩雄) 의원에게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단일화가 안된다면 대선은 하나마나다. 노무현 정몽준이야 후보니까 떨어져도 다시 솟아날 수 있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뭐가 되겠나. 정치생명을 걸고 두 사람을 납치해서라도 단일화시켜야 한다.”

    이에 이의원은 “민주당에는 정후보의 불투명한 정체성과 정책 노선을 내세워 단일화 자체에 반대하는 의원도 적지 않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노후보가 국민경선 방식에 의한 단일화 주장을 접고 정후보측이 제기한 국민여론조사 방식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는데도 정후보가 이를 거부하고 ‘대의원 상대 여론조사’ 카드로 맞선 것은 단일화 의지가 없는 것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두 사람은 이날 민주당 이해찬 협상단장과 유인태(柳寅泰) 전의원, 통합21 박범진(朴範珍) 기획위원장과 오철호(吳哲鎬) 정치특보 등 양당 6인이 참석한 협상을 마친 뒤 “바둑이나 한판 두자”며 남았다가 내친 김에 술한잔 걸치며 답답한 심경을 서로 위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협상 도중 한바탕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이의원이 9일 있었던 양측 협상단의 첫 회동 직후 기자들에게 “단일화는 ‘국민이 참여하고 호응하는 방식’으로 하기로 했다”며 노후보가 요구해온 국민경선 실시를 정후보측이 수용한 것처럼 언론플레이를 했다고 이위원장이 항의한 게 발단이었다.

    사전 각본에 따른 충돌

    이위원장은 “협상을 하자는 거냐, 말자는 거냐. 협의도 안 된 사실을 언론에 흘리는 것은 협상을 깨자는 것밖에 더 되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거듭되는 이위원장의 호통에 고개를 숙이며 연신 미안한 표정을 짓던 이의원도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맞받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싸움은 사실 각본에 따른 것이었다. 협상 시작 직전 이위원장이 이의원과 따로 만나 “우리 캠프 내부에서 나를 (민주당쪽 입장에 경도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내가 난처하니 오늘 연극을 좀 해야겠다. 내가 당신한테 고함을 지를 테니 당신도 맞고함을 지르고 멱살잡이 일보직전까지 가는 광경을 보여달라”고 귀엣말을 했다. 이의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각본에 동의했으나 막상 ‘연극’이 시작된 뒤 ‘순진한’ 이의원이 이위원장의 호통에 고성으로 맞장구를 치지 못하고 진짜 미안한 표정을 지어버리는 바람에 작전은 ‘미수’에 그쳤다. 그러고도, ‘화해’를 빙자해 따로 남은 것은 교착상태에 빠진 단일화 협상의 실마리를 되살려보자는 데 이심전심 의기투합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사실 오랜 친구 사이다. 이의원이 서울대 정치학과 69학번이고, 이위원장은 사회학과 같은 학번이다. 나이는 이위원장이 한 살 많지만 함께 운동권에서 잔뼈가 굵은 동지다. 이의원은 1969년 3선 개헌 반대투쟁을 하다 무기정학을 받았고, 이위원장은 군에 끌려간 뒤 1972년 유신선포 이후 민청학련 조직을 주도하다 사형선고를 받았다.

    끈끈한 인연을 가진 두 사람은 양당의 입장 차이 때문에 협상이 겉도는 와중에도 매일같이 비공식적으로 만나 허심탄회하게 자기 당의 속사정을 털어놓고 이해를 구하는 등 물밑 조율 작업을 계속해왔다. 이위원장은 특히 87년 대선 당시 김대중(金大中) 평화민주당 후보와 김영삼(金泳三) 통일민주당 후보 간 야권후보 단일화 추진에도 앞장섰던 경력을 갖고 있다. 이의원의 회고.

    “노무현-정몽준 후보간의 단일화 논의 역시 양김씨간 ‘민주세력 단일화’ 요구와 마찬가지로 ‘민주평화세력의 승리’라는 나름의 명분을 내걸었지만 본질적으로는 한쪽의 출마포기를 전제로 한 ‘제로섬 게임’ 성격을 띠고 있다. 이에 양 후보측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안만 내놓으며 밀고당기는 바람에 협상은 난항에 난항을 거듭했다.”

    시작은 됐지만 진척이 없던 단일화 논의가 구체적인 양자 협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6일 정후보가 한국미래연합 박근혜(朴槿惠) 대표와 전격회동해 연대 제의를 했다가 ‘딱지’를 맞은 직후부터다. 박대표와 연대 무산으로 정후보의 지지도가 빠질 조짐을 보이던 7일, 통합21 이철 조직위원장, 박범진 기획위원장 등 핵심 당직자들이 ‘후보단일화 대책위’와 협상단을 구성, 민주당 측에 협상을 공식 제의함에 따라 단일화 논의는 양자협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정후보가 12일 ‘후보자간 직접 회담’을 전격 제의하면서 단일화 방안을 놓고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던 협상에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중매결혼이라도 얼굴은 봐야지”

    12일 오전 8시 서울 여의도 통합21 당사 9층 정후보 사무실. 일일전략회의를 마친 정후보는 전날 있었던 민주당측과의 단일화 협상결과 민주당측의 국민여론조사 방식과 통합21측의 대의원 여론조사 방식이 맞서 진전이 없다는 보고를 받고는 말문을 열었다.

    “제가 노후보를 만나보겠습니다. 노후보는 나와 생각도 다르고 성장배경도 다르지만 사실 우린 차 한잔 같이 마셔본 적이 없어요. 만나봐야 서로 이해도 하고 단일화 이후에도 협력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에 이철 위원장이 “준비를 하고 만나셔야지 자칫 성과 없이 이견만 확인하고 끝난다면 안 만나느니만 못한 결과가 될 수도 있습니다”라며 신중론을 폈다. 그러나 정후보는 “단일화 방안은 단일화대책위에서 충분히 연구해주시면 저는 100% 그에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중매로 결혼을 한다 해도 상대방과 직접 만나 차라도 한잔 나누며 솔직히 얘기를 해봐야 서로 신뢰가 쌓이는 것 아니겠습니까”라며 조건없이 만나겠다는 의지를 거듭 밝혔다. 정후보는 또 단일화를 위한 방안으로 노후보측이 제기한 국민여론조사를 일부 수용할 뜻을 밝히며 협상 타개 의지를 과시했다.

    박근혜 냉담이 단일화 불렀다

    16일 새벽 단일화 합의를 발표한 뒤 소주로 러브샷을 나누는 두 후보

    13일 아침 통합21의 비공개 일일전략회의에서 이철 위원장은 “민주당측이 대의원 여론조사 방식을 거부하고 있으니 양쪽이 한발씩 양보해서 대의원여론조사 50%, 국민여론조사 50%씩의 비율로 단일후보를 가리는 새 협상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협상팀 의견을 보고했다. 순간 당직자들은 일제히 정후보의 표정을 살폈다.

    국민여론조사에는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개입해 ‘만만한 노무현’을 찍음으로써 상대하기 부담되는 정후보를 배제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양보안을 수락할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후보는 선선히 “그렇게 하세요”라고 이를 수용했다.

    “단일화를 원하는 국민이 60%나 됩니다. 국민 뜻에 따르지 못하는 후보는 사퇴해야 마땅해요. 크게 보고 큰 정치를 위한 정도(正道)로 나가겠습니다. 단일화 안 되면 둘 다 죽는 것 아닙니까. 결국 단일화하자는 것인데 제가 좀 양보를 하죠.”

    정후보는 일부 당직자들이 “민주당 일부 인사들이 ‘정몽준은 단일화가 돼도 자신이 후보가 안 되면 노후보를 안도울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협상을 하자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의도가 의심스럽다”고 흥분하자 “놔두세요. 저쪽이 비방한다고 우리까지 비방하면 단일화가 되겠습니까”라고 이를 말렸다.

    그러나 노후보 진영에서는 “정후보가 여전히 대의원 조사를 반영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민주당내 ‘반(反) 노무현-비(非)노무현’ 세력이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염두에 둔 정략적 발상”이라며 단일화를 포기하고 제 갈길을 가자는 강경한 목소리가 다시 득세, 협상은 어려움에 빠져들었다.

    “정후보 믿을 수 없다, 결렬선언 하자”

    13일 밤 민주당 중앙당사에서 열린 본부장단 회의에서는 이상수 총무본부장이 후보회담을 수용, 가부간에 협상을 빨리 끝내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으나, 임채정(林采正) 정책본부장은 아예 “정후보를 믿을 수 없다. 이제는 결렬 선언을 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후보단일화 반대파인 김희선(金希宣) 여성본부장은 “절대로 정후보를 만나면 안 된다. 말려들게 된다”고 강경론을 펴는 등 선대위 내부는 자중지란의 조짐까지 나타났다. 마침내 협상단장인 이해찬 본부장이 “이런 식으로 감놔라, 배놔라 하면 단일화 협상을 못하겠다”고 역정을 내며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버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사실 민주당내에는 후보단일화 자체에 대해 상반된 시각이 공존했다. 11월2일 후보단일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타워호텔의 선대위 심야회의에서 이와 같은 내부 이견이 선명하게 표출됐다. 당시 회의는 한화갑(韓和甲) 대표가 이틀 전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국민경선을 통해) 후보단일화를 이뤄내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당내 분위기가 급격하게 후보단일화 쪽으로 쏠리고 있는 데 대한 대책을 숙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동안 중립적 위치에 서있던 한대표마저 후보단일화를 주장하고 나서자 ‘단일화 거부’ 입장을 보이던 노후보 진영은 자칫하면 고립무원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한대표를 비롯한 중도파와 동교동계까지 대거 탈당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얘기도 들리던 터였다.

    사회를 맡은 김원기 고문이 “국민들은 단일화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추미애(秋美愛) 신기남(辛基南) 최고위원과 이상수 김경재 이미경(李美卿) 김희선 의원은 “마이웨이를 해야 한다. 지더라도 노무현의 길을 가야 한다”며 강력하게 단일화 논의를 거부해야 한다는 종전의 주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이해찬 임채정 이재정(李在禎) 천정배(千正培) 이호웅 정세균(丁世均) 이낙연(李洛淵) 의원은 단일화 논의를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정몽준과 단일화를 위한 경선에서도 이기지 못하면 이회창과 붙어도 가망이 없다”는 논리였다. 여기에 DJ와 차별화 전략을 강력히 주장했다고 해서 선대위 내부에서 ‘탈레반’으로 명명된 신기남 추미애 천정배 의원 중 정무특보를 맡고 있는 천의원도 단일화 추진을 수용한다는 의견을 내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천의원은 “지금 상태로는 대선은 필패(必敗)다. 지지율 상승을 위한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일화 논의에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이상수 총무본부장은 끝까지 단일화 논의 수용을 반대했다.

    “단일화 논의에 말려들면 후보등록 직전인 11월26일까지 선거운동을 전혀 못하는 일이 생긴다. 노후보 지지율 상승을 막으려는 정몽준 후보측의 방해작전이다. 후보등록 직전에 마지막으로 공표되는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와의 차이를 최대한 좁혀야 하는데, 단일화를 위해 허송세월하게 된다.”

    정동채(鄭東采) 미디어위원장은 “정몽준을 믿을 수 있느냐. 대선 끝까지 완주하겠다는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신중론을 폈다. 6대4 정도로 단일화 논의 수용에 찬성하는 쪽이 많았으나, 결론은 내지 못한 채 다음날 오전 다시 만나 논의키로 했다.

    심야회의 결과는 곧바로 명륜동 자택에 있던 노후보에게 보고됐다. 노후보는 “선대위 본부장들의 의견이 반반이라면 따라야 한다. 지도자로서 더 이상 이 문제를 피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단일화 수용을 결심했다는 후문이다.

    노후보는 이에 따라 3일 “경선을 실시해 후보를 단일화하자”며 당 안팎에서 요구해온 단일화 논의에 응할 뜻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민주당의 한 고위간부는 노후보가 “8·8 재보선 이후 재경선도 실시하겠다”고 승부수를 던지던 때를 떠올리며 노후보의 면모를 설명했다.

    “당시 노후보에게 ‘만약 정몽준과 붙어 간발의 차이로 지면 어떡하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노후보가 ‘그렇게 되면 내가 정몽준 의원의 선대위원장을 맡고, 집권하면 국무총리를 하겠습니다. 그것으로 대만족입니다’라고 말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대통령후보가 됐기 때문에 놀랄 정도로 욕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한번은 협상이 진행되는 도중에 ‘정몽준 후보의 내심은 한나라당과 손잡으려는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와 선대위 인사들이 바짝 긴장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정대철 선대위원장은 통합21의 이철 조직위원장을 급히 만나 사실 확인에 나섰고, 양 후보 간의 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에 나섰던 신계륜(申溪輪) 후보비서실장에게는 “다른 것보다 먼저 반(反) 이회창 합의문을 받아오라”고 특별 지시를 했다.

    그러나 정작 신실장이 14일 통합21의 민창기(閔昌基) 유세본부장을 만나 그 문제를 거론하자 민본부장은 흔쾌히 수용하면서 합의문에 한나라당을 ‘구태정치의 작태를 보이고 있는 집단’으로 표현하자고 더 세게 나왔다. 정위원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5일 밤 후보회담이 있기 직전에도 민주당 정대철 선대위원장은 노후보를 따로 만나 “정몽준 후보와 대좌하면 확실한 답을 받아낼 때까지 아예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만일 정후보가 또 시간을 끌려 할 때에는 결국 협상이 ‘결렬’로 갈 수 밖에 없으니만큼 배수진을 치라는 얘기였다.

    “모든 것을 내게 맡겨 달라”

    그러나 노-정 두 후보가 15일 심야 회동에서 후보단일화 방식에 전격 타결한 것은 정후보의 ‘결단’이 크게 작용했다는 데 양당 관계자들은 이견이 없다. 정후보는 이날 저녁 8시부터 9시30분까지 열린 경인방송 TV 대담프로에 참석하기 위해 일찌감치 토론회장에 도착한 뒤 “산책을 하겠다”며 정광철(鄭光哲) 공보특보를 데리고 밖으로 사라졌다. 정후보는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정특보의 의견을 묻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정후보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는 후문이다. 협상단장인 이철 조직위원장이 전날 “화끈하게 100% 국민여론조사 방안을 받아버리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하자 정후보는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후보의 단일화 의지와 신뢰만 확인되면 단일화 방법에는 연연하지 않을 생각임을 시사했다는 얘기다. 물론 국민여론조사로 하더라도 불리하지만은 않다는 내부 조사 보고서도 정후보에게 전달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토론회 직후 곧바로 당 관계자들과 함께 버스편으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 뒷자리에 모인 참모들은 “현실적으로 타결을 위해서는 국민여론조사를 100% 수용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김민석(金民錫) 전략위원장이 앞좌석의 정후보에게 다가가 “오늘 회담에 거는 국민들의 기대가 크다. 반드시 성과가 있어야 한다”며 각종 회담 상황에 대한 시나리오를 보고하자 정후보는 “모든 것을 내게 맡겨달라”고 말해 이미 결단을 내렸음을 시사했다.

    정후보가 서울 여의도 당사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10시5분. 비서진으로부터 11월15일자 ‘동아일보’ 가판 신문에 실린 전국 성인 1517명 상대 여론조사 결과를 받아든 정후보는 환한 표정을 지었다. 1% 포인트 이내로 따라붙는 듯하던 노후보를 다시 3.4% 포인트 차로 떨어뜨리기 시작한 자신의 지지도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어 이철 협상단장, 오철호(吳哲鎬) 정치특보, 김행(金杏) 대변인 등과 함께 회담장인 국회 귀빈식당으로 들어선 정후보는 2시간여에 걸친 역사적인 후보간 담판을 끝낸 뒤 밝은 표정으로 ‘국민여론조사에 의한 단일화’를 골자로 하는 합의문을 100여명의 보도진 앞에 내놓았다.

    불가능해 보이던 단일화 합의는 두 후보는 물론 양 당 핵심 관계자들의 고민과 토론이 뒤섞인 끝에 나온 극적인 결실이었던 것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