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호

‘테러와의 전쟁’ 제 3전선은 동남아시아

미국과 알 카에다의 끝없는 싸움

  • 글: 김재명 분쟁지역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입력2002-12-02 14: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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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 제1전선이 아프간이라면, 이라크는 제2전선이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지금 동남아에서 미국은 또 다른 반미 저항세력과 맞닥뜨리고 있다.
    • 발리 폭탄테러를 기점으로 한 제3전선이 형성되고 있는 것.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가 동남아에서 지피는 대미 성전(聖戰)의 정체는 무엇인가.
    ‘테러와의 전쟁’ 제 3전선은 동남아시아
    지금 지구촌은 전쟁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과거의 전쟁 양상과는 전혀 다른 대 테러전쟁이 그것이다.

    9·11 사건 이후 부시 미 대통령은 ‘선제공격’ 개념을 도입,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어떠한 음모도 미리 분쇄하겠다고 공언했다. 지구촌 사람들 눈에는 부시가 자비로운 패권국가의 지도자가 아니라 자못 공격적인 인물로 비치기 시작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요인 암살을 불법화했던 규정을 슬그머니 없앴고 엄연한 주권국가인 예멘에서 최근 무인비행기(predator)를 동원해 알 카에다 요원들이 탄 차량을 공격하기도 했다.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내세워 애국주의를 강조한 덕분에 11·5 중간선거에서 승리했다. 이제 그 독침을 이라크 사담 후세인에게 쏠 준비를 끝냈다. 큰 그림으로 보면, 테러와의 전쟁 제1전선인 아프간 전쟁은 후반부에 접어들었고 , 제2전선이 이라크에 형성되려는 국면이다.

    그러나 미군 최고사령관 부시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지역이 바로 동남아시아 제3전선이다. 10·12 발리 폭탄테러가 주는 의미는, 미국의 세계지배 패권에 대해 변방쯤으로 여겨온 동남아에서 누군가 도전장을 던졌다는 것이다. 미국이 오랫동안 노려온 알 카에다(Al Qaeda). 동남아시아에서 이들의 활동영역은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에 걸쳐 있다. 마음이 이라크에 가 있는 부시로서는 ‘언젠가는 손을 대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지금 동남아의 대미 감정은 매우 흉흉하다. 부시가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공격 대상이 곧 무슬림(회교도)이기 때문. 특히 인도네시아 국민 상당수는 미국이 주장하는 ‘테러와의 전쟁’을 이슬람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아프간전쟁이 벌어질 무렵, 회교도가 다수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는 정권 차원에서 아프간전쟁을 반대했다. 대규모 반전집회, 아프간전쟁 지원병 파견 움직임 등 자국의 치안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걱정해서였다. 메가와티 스카르노푸트리 인도네시아 대통령도 부시의 아프간 정책에 비판적이었다.

    미 CIA는 메가와티를 향해 “알 카에다가 당신 나라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경고음을 여러번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인도네시아는 알 카에다와 관련 없다”며 미국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했다. 그러다 10·12 발리 사건이 터졌고 어쩔 수 없이 인도네시아 정부도 칼을 빼든 상황이다. 그러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빈 라덴은 여전히 테러의 중심

    미 CIA를 비롯한 서방 정보기관은 빈 라덴의 알 카에다 조직이 지난 10년 동안 거의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세력을 넓혀왔으며 그 조직은 9·11 전보다 훨씬 위험한 반미 조직으로 바뀌었다고 판단한다.

    알 카에다는 은밀하게 움직인다. 예전처럼 캠프에 모이지 않는다. 미 CIA는 발리 사건을 미국과 그 동맹국을 향한 알 카에다의 반격으로 간주한다. 9·11 전만 해도 알 카에다는 대사관이나 세계무역센터 같은 상징성 강한 건물을 공격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9·11 뒤 이들 건물에 대한 경비가 강화되면서 알 카에다는 서양인들이 많이 모이는 동남아 휴양지 같은 ‘부드러운’ 곳으로 공격목표를 바꾼 것이라고 분석한다.

    독일 정보기관 책임자 아우구스트 하닝은 독일 언론 인터뷰에서 “관광지 경비는 허술하기 마련”이라며 “최근 몇 달간 관광지가 테러리스트들의 목표가 될 것이란 정보가 있었다”고 밝혔다. 필리핀과 태국,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어떤 곳이 다음 공격목표가 될 수 있다는 것. 태국은 마약 밀매업자와 인신매매범이 들끓고 있으며 여권위조업이 성행하는 곳이다. 테러리스트가 위조여권으로 태국을 드나들기는 식은 죽 먹기다.

    발리 사건은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나, 예멘에서 미 구축함 USS 코울호가 자살폭탄 배에 부딪혀 미 해군 19명이 사망한 지 꼭 2년 만에 일어났다. 그리고 예멘 근해의 프랑스 석유 저장시설이 폭파되고 쿠웨이트에서 미 해병이 죽임을 당한 지 1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이들 사건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테러리즘 연구자들 사이에선 현재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테러가 알 카에다의 조율을 받는 것인지, 독자적인 활동인지에 견해가 엇갈린다. ‘알 카에다 안에서(Inside Al Qaeda)’의 저자 로안 구나라타는 “이슬람 전사들은 오래 전에 알 카에다로부터 군사훈련과 이념 교육을 받았겠지만, 테러공격은 독자적으로 벌인다”고 말한다.

    물론 다른 견해도 있다. 아프간-파키스탄 국경지대 산간마을에 은신중인 빈 라덴이 그의 최측근인 이집트 의사출신 아이만 알-자와히리와 함께 은밀하게 투쟁을 조율한다는 분석이다.

    파키스탄의 실권자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이나 아프가니스탄의 하미드 카르자이 과도정부 수반은 “빈 라덴은 죽었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또한 FBI 대(對)테러 책임자 데일 왓슨도 사망설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나 빈 라덴이 죽었든 살았든, 대미 항쟁의 중심에는 여전히 그가 자리잡고 있다.

    지난 10월 아랍계 위성방송인 알 자지라는 빈 라덴 목소리가 담긴 2분짜리 메시지를 내보냈다. 여기서 빈 라덴은 미국이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공격을 그치지 않을 경우 미국의 경제적 관심이 걸린 목표물을 겨냥해 공격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10·12 발리 테러는 동남아 반미세력이 빈 라덴의 메시지를 실천에 옮긴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미국 투자가들 눈에는 발리 테러사건이 동남아가 결코 테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증거로 보일 것이다. 테러사건 직후 인도네시아 증권시장은 무려 9%나 곤두박질쳤다. 필리핀, 말레이시아, 태국 증권시장도 다를 바 없었다.

    현재 미 CIA가 파악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알 카에다 조직의 핵심인물은 세 사람. 인도네시아 출신으로 80년대 아프간 대소항전에서 무자헤딘(이슬람전사)으로 참전했던 리두안 이사무딘(37·‘함발리’로 불리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쿠웨이트 출신으로 지난 6월 인도네시아에서 체포된 뒤 미국으로 압송된 오마르 알-파루크, 올해 여름 필리핀에서 체포된 아구스 드위카르나 등이다.

    드위카르나는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섬 지역에 근거한 이슬람 무장세력 라스카르 준둘라의 고위간부 출신이다. CIA는 함발리나 파루크에 비해 드위카르나의 비중은 처진다고 분석한다.

    주목할 인물은 함발리. 그는 알 카에다의 동남아 총책이다. 파루크는 알 카에다와 인도네시아 무장단체의 연락부장쯤으로 보면 된다. 미 CIA는 지난 9월에 작성한 내부 보고서에서 “오마르 알-파루크가 9·11 1주년을 맞아 동남아시아 주재 미 대사관들을 겨냥한 연쇄 폭탄테러를 계획했음을 털어놓았다”는 충격적 사실을 밝힌 바 있다. 체포된 파루크는 처음엔 거의 말을 하지 않다가 9월 들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미 CIA는 파루크로부터 알 카에다의 동남아 조직과 활동상황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얻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파루크와는 달리 함발리는 당국의 수배를 비웃으며 잠행중이다.

    발리 테러는 미국의 음모?

    인도네시아 당국은 처음부터 이렇다할 증거 없이 “10·12 발리 사건은 알 카에다와 연계된 제마 이슬라미야(JI) 짓”이라 못박고 나섰다. 그동안의 정황으로 보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슬람 공동체’란 뜻을 지닌 JI는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남부(민다나오) 등 동남아 일대에 조직돼 있다. 범 이슬람 국가건설을 목표로 90년대 초에 결성된 JI의 현재 지도자는 아부 바카르 바시르. 바시르는 90년대 초 말레이시아에 머물 무렵부터 알 카에다 요원 함발리와 친하게 지냈다. 그는 “오사마 빈 라덴을 깊이 존경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자신은 발리 테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바시르는 “발리 사건은 미국의 음모”라는 주장마저 편다. 이라크전쟁을 앞두고 이슬람권을 잡겠다는 음모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미 CIA와 인도네시아 정부는 JI가 알 카에다와 연계돼 있고, 발리 사건은 “더 많은 미국인을 죽이겠다”는 알 카에다의 목표 아래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인도네시아 당국이 바시르를 체포할 경우 과격 회교단체들이 어떻게 반발할지도 주목거리다.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국내 과격 단체가 발리 테러를 저질렀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바시르가 주장했듯, 이른바 음모론을 믿는 분위기다. 미국이 이라크전쟁을 밀어붙이려고 획책한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에 더 귀를 기울이는 듯하다.

    함발리는 동남아시아 알 카에다 조직의 핵심인물로 미 CIA가 잡으려 하는 수배자 1호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미국을 겨냥해 동남아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테러에 관련된 인물로 꼽힌다. 미 CIA는 10·12 발리 사건도 함발리가 기획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함발리는 싱가포르 미 대사관 폭파음모말고도, 2000년 초에 22명을 죽인 마닐라 폭탄테러, 같은 해 크리스마스 무렵 일어난 인도네시아 교회 연쇄 폭탄테러에 관련됐다는 혐의를 받아왔다.

    미 CIA에 따르면, 함발리는 아프간 내전 참전과정에 빈 라덴의 오른팔인 모하메드 아테프에게 발탁됐다(아테프는 지난 11월 미군의 아프간 공습으로 사망했다). 빈 라덴의 또다른 측근 아부 주바이다는 지난 3월 파키스탄에서 체포될 때까지 그와 자주 접촉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미 CIA의 한 간부는 “함발리가 핵심인물이다. 만일 내가 동남아 알 카에다와 관련해 딱 한사람만 심문한다면 함발리다”라고 말할 정도다. 미국으로 압송된 파루크가 9월 들어 “9·11 테러 1주년을 맞아 동남아시아에서 일련의 테러를 모의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자, 미 CIA는 함발리를 떠올리며 긴장했다는 소식이다.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베트남, 말레이시아의 미 대사관이 그 무렵 문을 닫은 것은 파루크의 진술 때문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싱가포르는 19명의 테러 용의자를 체포했다.

    ‘테러와의 전쟁’ 제 3전선은 동남아시아

    발리 사건 직후 관련설을 부인하는 JI의 지도자 아부 바카르 바시르. 그는 오히려 미국의 음모설을 제기했다

    인도네시아 경찰당국도 파루크의 진술을 바탕으로 자카르타에 머물고 있던 독일국적의 알 카에다 요원 세얌 라이다를 체포했다. 라이다의 집을 수색하던 경찰은 동부 인도네시아에서 군사훈련을 받는 이슬람 전사들을 촬영한 비디오 테이프를 발견했다. 인도네시아 메가와티 정권은 인도네시아에 알 카에다가 준동하고 있다는 미 CIA의 경고에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발리 사건이 터지자 뒤늦게 대테러법을 정하는 등 바쁘다(미 국무부도 JI를 국제테러단체로 낙인찍어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그럴 경우 메가와티 정권이 국내에서 부딪칠 어려움을 고려해 미뤄왔다. 발리 사건 뒤 미 국무부는 JI를 테러조직 리스트에 올렸다).

    미 CIA의 판단으로 빈 라덴은 90년대 초반부터 그가 가장 믿는 측근들을 동남아시아로 파견,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현지 이슬람 과격세력과 연대를 다져왔다. 그 가운데 일부는 현지 여인과 결혼해 아예 뿌리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알 카에다는 다국적 기업처럼 운용된다. 마치 맥도널드 햄버거 회사와 같은 방식으로 테러리즘을 실천해왔다는 얘기다. CIA는 빈 라덴이 자신의 측근들을 동남아로 보내 현지 과격집단들과 접촉하여 알 카에다 지부가 뿌리내릴 수 있게 물질적 지원을 해온 것으로 믿는다. 이 과정에 현지 젊은이들이 아프간의 ‘알 카에다 대학’으로 ‘유학’을 가 군사훈련을 받았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미 CIA 수배자 1호 함발리는 알 카에다의 동남아 지사장, 또는 ‘관리이사’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는 90년대 초반 말레이시아로 근거지를 옮겨 알 카에다 기지에서 군사훈련 받기를 원하는 신참들을 모집해 아프간으로 보내거나, 숙달된 이슬람 전사들을 보스니아내전이나 인도네시아 현지로 보내는 일을 맡았다. 보스니아내전(1992~95년)에 참가한 이들은 세르비아 세력에 맞서는 현지 무슬림을 도와 함께 싸웠다.

    미 CIA에 따르면, 함발리는 2000년 초 9·11 테러에 가담한 범인 가운데 적어도 2명을 말레이시아에서 만나 이들이 미국으로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현재 미 버지니아에서 9·11 관련 혐의로 재판중인 자차리아스 모우사위다.

    동남아시아에 파견된 알 카에다

    국민의 90%가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도 남부 민다나오 섬을 근거지로 두고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회교반군 게릴라 문제로 20년 넘게 골머리를 앓아왔다. 수백명에 이르는 필리핀 회교 반군들은 80년대 아프간 내전에서 소련군에 맞서 싸웠던 경력을 지니고 있다. 90년대 초반 필리핀으로 돌아온 이들 조직을 빈 라덴은 대미 항쟁의 필리핀 지부로 삼았다는 것이 미 CIA의 분석이다.

    90년대 초 빈 라덴은 자신의 동서인 무하마드 자말 칼리파에게 알 카에다의 필리핀 지부를 맡겼다. 칼리파는 필리핀 여인과 결혼, 무역회사를 설립해 방패막이로 삼았다. 이미 말레이시아에 근거지를 마련한 리두안 이사무딘(일명 함발리)은 칼리파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그 자금은 빈 라덴에게서 흘러나왔다. 칼리파는 자선기관을 통한 헌금 형식으로 알 카에다와 연계를 맺은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과 아부 사야프(Abu Sayyaf)를 지원했다. 이 두 이슬람 무장조직 출신 수천명이 아프간 알 카에다 기지에서 훈련을 받은 뒤 필리핀으로 돌아가 반정부 무장투쟁을 벌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CIA에 따르면, 빈 라덴은 이와는 별도로 반미 테러를 위해 마닐라에 세포조직을 구축했다. 빈 라덴은 이 조직 관리를 람지 유세프, 그리고 유세프의 삼촌인 칼리드 샤이크 모하메드에게 맡겼다. 이 두 인물은 1993년에 일어났던 뉴욕 세계무역센터 폭파사건 음모에 가담했었다. 1994년 그들은 11대의 미국 여객기를 태평양 상공에서 폭파시키려 했다. 그러나 유세프의 마닐라 아파트에서 화공약품이 터지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고, 유세프는 말레이시아로 도망가 함발리의 도움을 받아 파키스탄으로 피신했다. 그렇지만 그 다음해(1995년) 파키스탄에서 체포돼 현재 미국에서 무기징역형을 살고 있다.

    칼리드 샤이크 모하메드는 미 연방수사국(FBI)의 수배대상 리스트 1호에 올라 있다. FBI는 그를 9·11 테러의 주모자로 꼽는다.

    유세프가 필리핀을 떠난 몇 달 뒤 오사마 빈 라덴은 자신의 측근인 아부 주바이다의 추천을 받아들여 쿠웨이트 출신인 오마르 알-파루크를 필리핀으로 보냈다. 파루크에게는 두 가지 임무가 있었다. MILF와 아부 사야프 조직을 한데 묶는 작업과 대미 테러 준비가 그것이다. 그러나 아부 사야프가 인질을 납치해 돈을 챙기는 강도집단으로 전락하는 바람에 현지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되자,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알 카에다와 MILF의 유착 관계는 어느 정도 드러나 있다. MILF는 빈 라덴의 요구에 따라 외국인 이슬람 전사들을 위한 훈련기지를 민다나오 섬 아부바카르 지역에 설치했다. 그 덕분에 동남아 지역 이슬람 전사들이 굳이 아프간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다. 약 1500명의 인도네시아 젊은이들이 그곳 훈련기지를 거쳐간 것으로 필리핀 당국은 파악한다. 2000년에 필리핀 군은 아부바카르 캠프를 파괴했고, 현재 MILF는 필리핀 정부와 평화협상을 벌이고 있다.

    CIA에 따르면, 파루크는 빈 라덴의 측근 아부 주바이다와 꾸준히 접촉하면서, 2000년 6월에는 알 카에다 고위 간부들이 인도네시아 아체(Ache) 지역을 방문하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당시 알 카에다는 분리주의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아체 지역에 알 카에다 세력을 심을 수 있는지 검토하다가 백지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네시아는 아체 분리운동을 비롯, 만성적인 지역분규로 몸살을 앓아왔다. 발리 사건이 분규 지역에 얼마만큼 영향을 끼칠지도 관심거리다. 아체와 파푸아에서는 메가와티 정권의 새로운 반 테러정책이 분리주의 운동에 찬물을 끼얹을 것으로 내다본다.

    필리핀 사업이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1999년 인도네시아의 장기독재자 수하르토가 물러나자, 빈 라덴은 그쪽으로 눈을 돌려 적극적인 활동을 폈다.

    빈 라덴의 시각에서 보면, 2억 무슬림 인구가 부패한 독재정권 아래 신음해온 인도네시아는 알 카에다 요원을 충원하기에 더 없는 텃밭이다. 빈 라덴은 90년대 중반부터 함발리로 하여금 제마 이슬라미야(JI) 쪽에 손을 뻗게 했다. 함발리는 90년대 초 말레이시아에 머물 때부터 친교가 있던 바시르로부터 알 카에다 활동과 관련해 적극적인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시르는 함발리에게 조직원들을 제공, 동남아 일대에서 반미투쟁을 부추긴 것으로 미 CIA는 판단한다. 그런 혐의 가운데 하나가 싱가포르 미 대사관 테러 음모다. 싱가포르는 지구상에서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치안망이 잘 조직된 나라다. 싱가포르 당국이 사전에 테러 음모를 탐지, 행동요원들을 체포하는 바람에 대미 테러 기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1999년 수하르토가 물러난 바로 뒤 알 카에다는 인도네시아 중부 술라웨시 섬에 훈련기지를 설치했다. 이곳에서 수백명이 훈련을 받았으나 9·11 사건 이후 폐쇄됐다. 90년대 미 CIA는 JI의 많은 젊은이들이 아프간 알 카에다 훈련캠프를 거쳐간다는 정보를 입수, 이를 인도네시아 당국에 알렸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쪽에서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현재 100명 가까운 알 카에다 용의자들을 체포해 심문중이다. 이들은 반테러 관련법에 따라 재판도 없이 장기구금 상태다. 쿠바 관타나모 해군기지에 수감된 알 카에다 포로들과 마찬가지 신세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당국은 “우리는 알 카에다와 JI 씨를 말렸기 때문에 테러에 관한 한 안심해도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전세계적으로 연간 10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리는 태국에서도 대형 테러사건이 일어날 뻔했다. 올해 1월 알 카에다의 동남아 지역책 함발리를 비롯한 알 카에다 요원들이 태국에서 만나, 미국 관광객들이 많이 드나드는 술집과 나이트클럽 등을 공격하자고 논의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그 모임에 참석했던 쿠웨이트인 폭파전문가가 체포돼 미 CIA 요원에게 털어놓음으로써 드러났다. 자바라라는 이 폭파전문가는 지난해 12월 싱가포르에서 미 대사관과 이스라엘 대사관을 공격하려다 당국에 적발돼 태국으로 도망친 일행 가운데 한 명이다.

    미 당국은 발리 사건은 알 카에다의 공격목표가 태국에서 발리로 옮겨간 데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태국은 국경도 허술하고 입국절차도 간단하다. 그래서 미 정보당국은 태국을 ‘국제 테러리스트들의 지하철로(underground railroad)’로 여긴다. 9·11 테러의 범인 가운데 2명도 아프간에서 말레이시아로 왔다가 태국을 거쳐 미국으로 입국했었다.

    발리 사건 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 검속이 강화되자, 10명 넘는 알 카에다 용의자들이 태국으로 도망가 숨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태국은 “우리나라에는 알 카에다 조직이 없기 때문에 테러 위험도 없다”(정부대변인 시타 디바리)며 관광객들이 발길을 돌리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다.

    CIA도 정보 부족으로 골머리

    미국의 대(對)테러 전문가들은 9·11 뒤 아프간 전쟁을 거치며 근거지를 잃은 알 카에다의 투쟁방식이 바뀐 것으로 보고 있다. 전에는 빈 라덴의 훈령 아래 일이 진행됐으나 지금은 8~10명 규모의 소규모 세포조직들이 지역별로 나뉘어 독자적으로 대미항쟁을 추진중이란 분석이다. 발리 사건도 6~8명 규모의 알 카에다 세포조직이 저지른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정보력이 막강한 미 CIA조차 알 카에다 세력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알 카에다 연결세력들이 어느 정도 규모이고,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해 세밀한 정보를 모르는 실정이다.

    동남아 알 카에다 연계세력 가운데 상당수는 아프가니스탄 알 카에다 훈련기지 출신이지만, 또다른 상당수는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정글지대에 설치된 훈련기지를 거쳐갔다.

    미 CIA의 고민은 그들이 과연 누구이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제대로 모른다는 점이다. 현재 아프간 알 카에다 훈련기지는 없어졌다. 그렇다고 알 카에다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보안이 유지되는 안가(安家)에서 여전히 폭탄 조작법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런 안가를 찾아내기는 아프간 훈련캠프를 찾아내 미사일을 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큰 그림으로 보면, 알 카에다의 동남아 대미 지하드는 현지 이슬람 무장세력들의 이념적 토양(세속적인 정권을 뒤엎고 이슬람에 충실한 종교국가 건설) 위에 알 카에다가 자신들의 투쟁이념(이슬람 국가에서 미국 세력과 친미 이슬람 정권을 몰아내고 이슬람 종교국가 건설)을 덧칠하여, 동남아 현지 무장세력들로 하여금 반미테러에 적극 나서도록 이끌고 있다.

    부시의 테러전쟁 제3전선이 아프간과 이라크에 이어 동남아에서 가시화될지 두고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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