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5일 퇴임식을 끝낸 이명재 전 검찰총장이 박수를 받으며 검찰청사를 떠나고 있다.
“추운데 고생시켜서 죄송하다”며 말문을 열었지만 “소감이 어떠냐” “앞으로 포부를 밝혀달라”는 등 쏟아지는 취재진의 질문에 통 대답이 없다. 집에 들어서기 직전에야 겨우 “중임을 맡게 돼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 검찰이 다시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짤막한 한마디를 남긴다. 이명재(李明載) 전 검찰총장의 영욕의 10개월은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검찰은 참담할 정도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호남 출신인 신승남(愼承男) 전 총장은 국회에 탄핵안이 제출되는 등 야당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맞다가 1월13일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된 동생 승환(承煥)씨가 차정일(車正一) 특검팀에 구속되면서 결국 사표를 냈다.
검찰의 자존심이라는 대검 중수부와 서울지검 특수부도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대검 중수부는 특검팀이 연일 굵직한 수사 성과를 내놓는 동안 ‘이용호 게이트 부실수사’라는 여론의 비난 앞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 또 ‘진승현 게이트’와 ‘정현준 게이트’ 등 대형사건에 정·관계 고위인사들이 개입된 증거들이 새롭게 드러나고 재수사에 들어가면서 서울지검 특수부도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신 전총장의 퇴임 후 사흘 동안 고민을 거듭했다. 검찰을 안정시킬 수 있으면서도 임기말에 터져 나올 각종 사건을 무리없이 처리할 수 있는 인물, 정치권과 검찰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 절실했다. 이때만 해도 언론의 하마평에 이 전총장의 비중은 높지 않았다. 이미 지난해 5월 서울고검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났기 때문이다.
검찰 외부인사가 검찰총장에 임명된 것은 1963년 신직수(申稙秀)씨가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전격적인 이 전총장의 임명에 대한 정치권과 여론의 반응은 예상보다도 훨씬 좋았다. 민주당은 “위기에 처한 검찰을 되살리는 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는 논평을 냈고, 한나라당도 “검찰가족의 신임을 받고 있는 분이 임명돼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밝히는 등 이례적으로 여야 모두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39년 만에 외부인사가 총장으로 영입됐지만 검찰 내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언론 역시 긍정적 평가 일색이었다. 과연 그는 어떤 인물이기에 정치권과 언론, 검찰 내부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까.
경북 영주 출신인 이 전총장은 경북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은행에 잠시 근무하다 1970년 제11회 사법시험에 합격, 1975년 검사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형인 이경재(李景載) 전 중소기업은행장과 동생인 이정재(李晶載) 전 재경부차관과 함께 ‘수재 3형제’로 잘 알려졌던 그는 대검 중수과장-서울지검 특수부장-대검 중수부장 등을 거치면서 특수분야, 특히 경제사건 수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이철희·장영자 어음 사기사건과 명성그룹 사건, 5공 비리 사건, PCS 비리사건, 환란사건, 세풍사건 등 아직도 세인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대형 경제사건들을 무리없이 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