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구나 16대 주석단의 비서장(의장)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 그는 이날 총서기에 선출됨으로써 대표대회의 비서장을 맡는 인물은 총서기에 오르지 못한다는, 지난 1982년 12대 대회 이후의 징크스까지 말끔히 털어버렸다. 금년 4월 중순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이 그를 표지 인물로 내세운 것 또한 미국도 후진타오의 등극에 대해서 계산이 끝 나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실제 ‘타임’은 금년 9월까지만 해도 후진타오의 실각 가능성이 중국 내외에서 적지 않게 나돌았음에도, CIA 등 정보기관들이 수집한 각종 정보를 토대로 장주석의 권력 2선 후퇴와 그 후의 권력 승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를 표지 인물로 강력하게 밀어붙인 것으로 알려졌다.
등극에 성공한 공식 후계자
될성부른 나무로 주목을 받으면서 50세의 나이에 당 최고 권력기관인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한 후진타오. 10년 전부터 그의 총서기 등극가능성은 널리 예견되었으나 사실 그의 등극은 간단하고 자연스레 넘길 일이 아니다. 중국 공산당 근세사를 통해 공식 후계자나 욱일승천했던 후보자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살펴볼 때 후진타오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우선 마오쩌둥(毛澤東)시대에 그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인식되던 류사오치(劉少奇)의 운명부터 살펴보자. 중국 공산당 혁명 1세대로 지금까지도 일반 민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는 1959년 국가주석과 국방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면서 23년간이나 당권을 장악했던 마오의 후계자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어 문화대혁명(文革·문혁)이 터지기 직전인 1965년에도 다시 국가주석에 선출돼 2인자 겸 후계자의 자리를 더욱 확고히 다진다. 게다가 그는 마오와 동향에다 후난(湖南)성 창샤(長沙)사범학교 후배라는 프리미엄까지 갖고 있었다.
같은 혁명동지인 영원한 2인자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조차 별 볼일 없어 보였을 정도로 당시 그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그의 거칠 것 없는 권력질주는 그게 한계였다. 선배인 마오가 발동한 문화혁명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에게도 덮쳐온 것이다. 그는 결국 얼마 안가 당의 공식후계자에서 추악한 당내 주자파 1호 인물로 낙인찍힌 채 일거에 실각의 운명에 봉착하고 만다. 이어 홍위병들에 의해 저잣거리로 끌려나와 고깔모자를 뒤집어쓰는 수모를 당한 후 후난성의 한 감옥에서 비참한 종말을 맞는다. 당시 그의 시신을 거둔 측근들에 의하면 그의 머리는 완전 백발에다 웬만한 여성보다 길었고 손톱 역시 10cm 이상이나 자란 끔찍한 상태였다고 한다. 마오의 공식 후계자치고는 너무나 비참한 죽음이라 할 수 있다.
류의 뒤를 이어 후계자로 떠올랐던 인물들 역시 크게 다를 바 없다. 국방부장(장관)을 지낸 린뱌오(林彪)는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자 비행기를 타고 국외로 탈출하다 추락사해 가장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후계자로 회자되고 있다. 또 화궈펑(華國鋒)은 그나마 자신을 선택한 마오에 의해 문화혁명 이후 최고권좌에 올랐으나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곧바로 실각하는 운명을 피하지는 못했다.
선배가 선택한 화궈펑을 사실상의 무혈 쿠데타로 실각시킨 덩샤오핑은 자신의 후계자들을 직접 벼랑으로 내몬 인물로 유명하다. 희생자들은 한때 그의 오른팔과 왼팔로 불린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이다. 후야오방은 후견인인 덩보다 더 농후한 진보 색채를 보이다가 1986년 1월에 실각하고, 자오는 1989년 4월 후의 사망으로 촉발된 6월의 ‘6·4 톈안먼(天安門)’사태 때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에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 실각의 길을 걸어야 했다.
물론 후진타오가 류사오치를 비롯한 비극적 후계자들과 다른, 최초의 진정한 후계자라는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적어도 2007년까지의 임기를 탈없이 마쳐야 한다. 하지만 정치·경제 상황이 모두 자오쯔양이 실각한 13년여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정된 중국 상황으로 볼 때 그가 비슷한 운명에 봉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