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전자 윤종용 부회장/ 삼성전기 강호문 사장/ 삼성SDI 김순택 사장(왼쪽부터).
“삼성전자 실무자들은 형제 같은 계열사라고 납품가격이나 협상조건에 어드밴티지를 주는 법이 없다. 오히려 일본 등 경쟁 부품업체에서 납품받는 가격보다 5∼15% 싸게 납품하라고 요구한다. 일본에 수출하면 관세, 운임 등 각종 비용이 들어가지만, 국내에 납품할 때는 그런 게 필요 없으니 공장도가격에 납품하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품질을 잘 봐주는 것도 아니다. 값은 싸게 달라면서 품질은 경쟁사의 것과 같거나 그 이상을 요구한다.”
계열 부품회사들은 “가까운 데서 언제라도 손쉽게 공급받을 수 있어 재고를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서비스도 수시로 받을 수 있으니 오히려 일본 제품보다 값을 더 받아야 한다”고 승강이를 벌인다.
삼성전자가 삼성내 전자부품 계열사로부터 납품받는 부품 비율은 55%에 불과하다. 계열사들을 국내외 다른 부품회사들과 동일한 조건에 경쟁시켜 가장 싼 가격에 좋은 품질을 보장하는 업체의 제품을 선정하기 때문이다. 전자부품 계열사들도 관계사에 납품하는 비율이 40∼50% 수준이다. 이들은 삼성 관계사뿐 아니라 세계 각지의 전자업체를 대상으로 영업한다.
삼성이 일본의 종합전자회사들을 본 따 완제품에서 각종 부품에 이르는 사업들을 수직 계열화하고도 일본 회사들처럼 동반 침체에 빠지지 않은 비결을 여기에서 찾는 이가 많다. 계열사 제품이라고 엄격한 기준 없이 써주면 경쟁력 제고를 기대할 수 없다. ‘근친상간’의 부작용을 경계하는 것이다.
삼성처럼 핵심 부품 파트를 한 회사내 사업부로 묶어두지 않고 별도의 회사로 독립시킨 경우는 일본의 마쓰시타 그룹 정도 외에는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일본에서 배우자
삼성의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은 “1980년대 초반에는 우리도 삼성전자, 삼성전관, 삼성전기 등의 계열사 통합을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통합을 하면 CEO를 비롯한 임직원의 수를 줄일 수 있고, 간접 부문이나 노사정책 등도 효율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검토 끝에 독립 사업체로 유지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합병하면 주력사업에만 치중하느라 다른 부문의 발전이 뒤처질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합병을 하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는 전자부품 시장이 세계적으로 엄청난 규모이기 때문에 발전 가능성이 많다는 것. 지금 당장의 삼성전자 효율성만 생각할 게 아니라 시장을 더 멀리 내다보자는 수(手)였다.
부품산업의 중요성은 이건희 회장이 늘 강조해온 것이다. 이회장은 “세트의 경쟁력은 핵심 부품의 경쟁력에 좌우된다” “부품사들은 삼성전자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자립기반을 갖추라”고 했다. “한국 경제가 튼튼해지려면 설비, 기계 등 자본재와 부품산업이 발전해야 한다”며 정부에 지원책을 건의하기도 했다.
한국은 현재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지만 반도체 장비와 핵심 부품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들여온다. 일본이 극심한 경제침체를 겪으면서도 국민소득 수준은 여전히 세계 2위를 유지하는 것도 자본재와 부품산업 경쟁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회장은 “일본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40%가 넘는 품목들을 우리가 좀 뺏어오자”며 사장들을 독려한다. 삼성에는 메모리 반도체와 LCD 등 한때 일본이 지배하던 시장을 파고들어간 사례가 적지 않다.
최근 삼성의 전자부품 관계사들은 세계 일류 기업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장기 마스터플랜과 단기 계획을 속속 내놓고 있다.
삼성SDI는 컬러 브라운관 중심의 사업구조에서 탈피해 디스플레이, 신에너지, 신소재 사업 기업으로 성장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삼성전기는 현재 32가지, 2만여 종의 전자부품을 생산하고 있으나, 앞으로는 광픽업, 첨단 콘덴서인 MLCC, 차세대 인쇄회로기판 MLB 등 세계 1위가 될 수 있는 전략 품목 9개를 선정해 집중 육성하기로 했다.
삼성코닝은 디스플레이 유리 중심의 기업에서 차세대 반도체용 연마재, TFT-LCD용 평판형 백라이트 등 디지털 정보소재 기업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IT서비스 업체인 삼성SDS도 2010년까지 해외 매출 비중을 60%로 확대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