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1 사건 이후 부시 미 대통령은 ‘선제공격’ 개념을 도입,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어떠한 음모도 미리 분쇄하겠다고 공언했다. 지구촌 사람들 눈에는 부시가 자비로운 패권국가의 지도자가 아니라 자못 공격적인 인물로 비치기 시작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요인 암살을 불법화했던 규정을 슬그머니 없앴고 엄연한 주권국가인 예멘에서 최근 무인비행기(predator)를 동원해 알 카에다 요원들이 탄 차량을 공격하기도 했다.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내세워 애국주의를 강조한 덕분에 11·5 중간선거에서 승리했다. 이제 그 독침을 이라크 사담 후세인에게 쏠 준비를 끝냈다. 큰 그림으로 보면, 테러와의 전쟁 제1전선인 아프간 전쟁은 후반부에 접어들었고 , 제2전선이 이라크에 형성되려는 국면이다.
그러나 미군 최고사령관 부시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지역이 바로 동남아시아 제3전선이다. 10·12 발리 폭탄테러가 주는 의미는, 미국의 세계지배 패권에 대해 변방쯤으로 여겨온 동남아에서 누군가 도전장을 던졌다는 것이다. 미국이 오랫동안 노려온 알 카에다(Al Qaeda). 동남아시아에서 이들의 활동영역은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에 걸쳐 있다. 마음이 이라크에 가 있는 부시로서는 ‘언젠가는 손을 대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지금 동남아의 대미 감정은 매우 흉흉하다. 부시가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공격 대상이 곧 무슬림(회교도)이기 때문. 특히 인도네시아 국민 상당수는 미국이 주장하는 ‘테러와의 전쟁’을 이슬람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아프간전쟁이 벌어질 무렵, 회교도가 다수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는 정권 차원에서 아프간전쟁을 반대했다. 대규모 반전집회, 아프간전쟁 지원병 파견 움직임 등 자국의 치안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걱정해서였다. 메가와티 스카르노푸트리 인도네시아 대통령도 부시의 아프간 정책에 비판적이었다.
미 CIA는 메가와티를 향해 “알 카에다가 당신 나라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경고음을 여러번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인도네시아는 알 카에다와 관련 없다”며 미국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했다. 그러다 10·12 발리 사건이 터졌고 어쩔 수 없이 인도네시아 정부도 칼을 빼든 상황이다. 그러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빈 라덴은 여전히 테러의 중심
미 CIA를 비롯한 서방 정보기관은 빈 라덴의 알 카에다 조직이 지난 10년 동안 거의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세력을 넓혀왔으며 그 조직은 9·11 전보다 훨씬 위험한 반미 조직으로 바뀌었다고 판단한다.
알 카에다는 은밀하게 움직인다. 예전처럼 캠프에 모이지 않는다. 미 CIA는 발리 사건을 미국과 그 동맹국을 향한 알 카에다의 반격으로 간주한다. 9·11 전만 해도 알 카에다는 대사관이나 세계무역센터 같은 상징성 강한 건물을 공격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9·11 뒤 이들 건물에 대한 경비가 강화되면서 알 카에다는 서양인들이 많이 모이는 동남아 휴양지 같은 ‘부드러운’ 곳으로 공격목표를 바꾼 것이라고 분석한다.
독일 정보기관 책임자 아우구스트 하닝은 독일 언론 인터뷰에서 “관광지 경비는 허술하기 마련”이라며 “최근 몇 달간 관광지가 테러리스트들의 목표가 될 것이란 정보가 있었다”고 밝혔다. 필리핀과 태국,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어떤 곳이 다음 공격목표가 될 수 있다는 것. 태국은 마약 밀매업자와 인신매매범이 들끓고 있으며 여권위조업이 성행하는 곳이다. 테러리스트가 위조여권으로 태국을 드나들기는 식은 죽 먹기다.
발리 사건은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나, 예멘에서 미 구축함 USS 코울호가 자살폭탄 배에 부딪혀 미 해군 19명이 사망한 지 꼭 2년 만에 일어났다. 그리고 예멘 근해의 프랑스 석유 저장시설이 폭파되고 쿠웨이트에서 미 해병이 죽임을 당한 지 1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이들 사건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테러리즘 연구자들 사이에선 현재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테러가 알 카에다의 조율을 받는 것인지, 독자적인 활동인지에 견해가 엇갈린다. ‘알 카에다 안에서(Inside Al Qaeda)’의 저자 로안 구나라타는 “이슬람 전사들은 오래 전에 알 카에다로부터 군사훈련과 이념 교육을 받았겠지만, 테러공격은 독자적으로 벌인다”고 말한다.
물론 다른 견해도 있다. 아프간-파키스탄 국경지대 산간마을에 은신중인 빈 라덴이 그의 최측근인 이집트 의사출신 아이만 알-자와히리와 함께 은밀하게 투쟁을 조율한다는 분석이다.
파키스탄의 실권자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이나 아프가니스탄의 하미드 카르자이 과도정부 수반은 “빈 라덴은 죽었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또한 FBI 대(對)테러 책임자 데일 왓슨도 사망설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나 빈 라덴이 죽었든 살았든, 대미 항쟁의 중심에는 여전히 그가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