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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에겐 밥을, 남미에는 희망을”

노동자 대통령 룰라의 거대한 실험

  • 글: 이성형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빈민에겐 밥을, 남미에는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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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반공 출신의 브라질 대통령 룰라. 사회적 불평등과 폭력, 납치로 얼룩진 브라질의 민주주의를 구하는 한편 외환위기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민중 편에 설 것인가. 신자유주의에 굴복할 것인가. 그의 선택에 브라질의 운명이 달렸다.
“빈민에겐 밥을, 남미에는 희망을”
박봉에다 피곤에 지친 의사는 피가 엉겨붙은 한 노동자의 왼손 새끼손가락을 잘라버리기로 결심했다. 이 노동자는 아침에 공장에서 일하다 기계에 손가락이 끼어 짓이겨져 있었다. 브라질 공단 지역이 밀집해 있는 이 곳 공공병원에는 비슷한 산재 노동자들이 거의 매일 실려 왔다. 의사는 평상시처럼 환자의 손가락을 잘랐다. 잘 수술하면 손가락을 살릴 수도 있었지만, 그런 작업은 시간이 걸리고 힘들고 귀찮았다. 새끼손가락을 잃어버린 이 노동자가 미래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의사는 상상이나 했을까? 잘려나간 새끼손가락은 불평등과 고난의 브라질 사회를 상징했지만, 그 고난 속에서 미래의 희망 또한 자라고 있었다. 희망의 이름은 룰라였다.

잘려나간 새끼손가락

선반공에서 공화국 대통령에 오른 룰라의 인생은 마치 텔레노벨라(telenovela: 중남미의 연속극으로 주로 치정, 성공담 등을 다룬다)나 전기영화의 스토리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가난한 북동부 오지에서 태어난 그는 상파울루 지역으로 이주, 성장했다. 가난한 브라질 어린이들이 항용 그렇듯 그도 축구에 미친 듯 집착했다. 코린티안의 프로 선수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거리에서 땅콩과 타피오카를 팔고 구두도 닦았다. 실업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의 무표정한 얼굴에도 일찌감치 질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소년은 ‘거리의 대학’ ‘인생의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어깨 너머로 글자를 깨쳐 어머니에게 신문을 읽어주기도 했다. 정부 운영 직업학교에서 선반공 과정을 마친 소년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금속공장 노동자가 됐다. 그는 먹물에 물든 지식인 노동운동가와 달리, 거리의 언어와 특유의 친근한 미소로 동료들을 사로잡았다. 곧 노조위원장이 됐고, 군정 말기 파업에서 국제적 스타로 발돋움했다. 노동자당을 창당하고, 이를 발판 삼아 4수 끝에 대통령직을 거머쥐었다.

그의 일생은 영화 스토리이기 이전에 브라질 근대사의 빛과 그림자를 비춰주는 생생한 그림이다. 룰라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전기로 공인받고 있는 데니지 파라나의 ‘브라질의 아들’에 따르면, 룰라의 인생역정은 “빈곤한 북동부에서 부유한 동남부로 이민을 온 한 사람의 지리적 경력을, 그리고 사회적으로 배제된 이름 없는 사람이 한 나라의 가장 중요한 대중 지도자로, 그것도 역사책에 영원히 이름이 기록될 대중 지도자로 부상한 또 다른 사회적 경력”을 잘 드러낸다. 룰라 가계(家系)의 역사만큼 브라질 현대 사회의 굴곡을 극명하게 반영한 것이 또 있을까?



루이스 이냐시오 룰라 실바는 1945년 10월27일 페르남부쿠 주의 가라눈스에서 태어났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번 선거의 결선투표에서 당선이 확정된 날도 10월27일 57세 생일날이었다. 가라눈스는 북동부 오지(세르탕)가 으레 그렇듯 오랜 가뭄과 한발에 지친 사람들이 사는 조그만 도시다. 세르탕은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는 이상 기후 현상 때문에 생존이 무척 힘든 곳이다. 간혹 엄청난 비가 내려 급류를 이루고 짧은 기간 녹지대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세르탕 사람들(sertanejos)은 이 순간을 틈타 가축을 가르고 면화나 사이잘 삼을 심어 간신히 먹고 살아야했다. 가난은 그들의 숙명이었다. 사람들은 이 가난을 벗어나려고 고물 자동차에 짐짝처럼 실려 상파울루가 있는 동남부를 향해 떠났다.

8남매를 버린 아버지

“빈민에겐 밥을, 남미에는 희망을”

1982년, 상파울루 주지사 선거에 나선 룰라가 연설을 하고 있다.

북동부의 개인 소득은 브라질 평균의 40% 수준. 브라질에서 둘째로 못산다는 중서부도 북동부 평균의 2배 수준이다. 브라질 빈민층의 절반 이상이 북동부 사람이다. 문맹률이 20%나 되는 브라질이지만 북동부의 경우는 40%나 된다. 당연히 룰라의 부모도 문맹이었다. 룰라의 회상으로 어머니가 가끔 신문을 사보셨지만 그것은 사진을 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룰라도 페르남부쿠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부모처럼 문맹자로 살아갈 확률이 무척 높았다.

브라질에서 실바란 성은 우리나라 김, 이, 박만큼 흔하다. 아버지 아리스티데스 이나시우 다 실바는 룰라 말대로 “일자무식꾼”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행복하지 못하다. 브라질 빈민가의 아버지들이 대개 그렇듯, 술 주정꾼에다 아이들에겐 애정이 전혀 없는 마초였기 때문이다. 쓰라린 첫 기억은 이렇다.

“아버지는 우리가 먹는 빵을 먹지 않았다. 모두 다 자고 있는 새벽 일찍 일어나 커피와 함께 자기만 좋은 빵을 먹었다. 남은 것은 챙겨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찬장에다 숨겨두었다.”

둘째 기억은 1952년 일곱 살 때 일이다. “세 살배기 여동생이 빵을 먹고 있는 아버지에게 조금만 떼어 달라고 칭얼댔다. 아버지는 먹던 빵 조각을 데리고 놀던 강아지에게는 주면서 여동생에겐 주지 않았다. 그에겐 강아지 새끼들이 자녀들보다 훨씬 소중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먼저 지긋지긋한 세르탕을 떠나 일자리를 찾으러 상파울루로 갔다. 1950년대 상파울루는 거대한 산업화의 열기가 꿈틀거리는 공단지역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만큼 기회도 많았다. 북동부의 이주 행렬은 이미 시작되었다. 어머니 에우리디시 페레이라 데 멜루는 자녀 8명을 데리고 뒤늦게 남편을 찾아 떠났다. 1952년 일곱 살이던 룰라와 가족들은 ‘파우-데-아라라’(사람들을 짐짝처럼 태워 먼길 여행을 하던 고물 자동차)를 타고 장장 15일에 걸친 장정에 올랐다. 고물 자동차 여행은 괴로웠지만, 당시 세르탕을 탈출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고통스런 통과의례였다. 밤에는 자동차 밑에서 새우잠을 자고, 밀가루 전병과 사탕수수 그리고 치즈로 허기를 달랬다.

연락이 끊긴 남편을 여기저기 수소문하던 에우리디시는 마침내 상파울루 근교 도시인 상투스에서 남편을 만났지만, 이미 그는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뒤였다. 일자무식꾼이던 그가 편지를 쓰지 않은 것은 당연했겠지만 8명의 자녀도 깨끗이 버릴 정도로 가정에 전혀 애착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즈음 룰라도 한번쯤 아버지를 보았을 것이다. 큰 충격을 받은 룰라는 아마도, 자신이 가정을 꾸리면 충실한 가장과 남편이 되겠다는 꿈을 다지지 않았을까. 그의 언행에는 행복한 가정에 대한 집착이 자주 드러나는데, 여기에는 어린 시절의 상처가 큰 원인이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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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성형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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