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6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수필집 출판기념회 때 아내 한점자씨(62), 장남 성렬씨(39)와 찍은 기념 사진
“저는 지금도 대방동 공군본부 자리에 가면 가슴이 뭉클함해져요. 전역한 후에도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을까 정문 앞에서 서성거렸지요.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그때였다고 말하면 군대 안 가려고 갖은 꾀를 다 쓴다는 요즘 젊은이들은 영 이해가 안 갈 겁니다.”
군대시절 상관의 도움으로 대학 야간부에 입학했지만 학비를 댈 수 없어 곧 중단하고 말았다.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 셈이다. 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없었던 자유당 말기와 4·19 무렵, 전국은 실업자 천국이었다. 윤씨 역시 막연한 절망감으로 서울을 배회하는 청년 실업자 생활을 했다. 어느새 나이가 스물여덟이 되었다.
“‘빽’이란 말이 그때 처음 나왔습니다. ‘빽’ 없이는 취업도 승진도 안 된다는 은어가 보통명사가 돼버린 거죠. 더 이상 갈 곳이 없더군요. 나이를 더 먹으면 평생 떠돌이 신세를 면하기 어렵겠더라고요. 그때 우연히 신문 쪼가리를 화장실에서 주워 읽게 됐어요. 거기서 교도관 모집 광고를 본 거죠.”
그날부터 방석이 삭을 정도로 자리에 붙어 앉아 50여 일 동안 벼락치기 시험공부에 매달렸다. 경쟁률 36대1을 뚫고 운 좋게 합격. 이렇게 해서 드디어 1962년 1월, 33년에 가까운 그의 교도관 인생이 시작됐다.
교도관의 길, 수필가의 길
말단 5급(현 9급) 교도관 발령을 받아 맨 처음 근무를 나간 곳이 서울구치소였다. 가장 먼저 접한 재소자는 동아방송의 ‘앵무새 사건’에 연루돼 구치소에 들어온 최창봉 당시 동아방송 부장과 이종구 기자였다. 5·16 정권의 부당성을 ‘앵무새’라는 사회풍자 프로그램을 통해 비판한 것이 문제가 되어 구속된 인사들이었다.
“이른바 필화사건이었어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잘 가두는 일’에만 몰두하던 제가 어느 날 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대화 내용이 아주 수준이 높더란 말입니다. 인격도 좋은 분들인 것 같고. ‘아하, 범죄자라는 이름으로 감옥에 온 이들도 그럴 수 있구나’라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으니 저도 참 순진했지요. 그 분들의 격려와 도움으로 처음 글이란 것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찌어찌 만든 습작을 이종구 기자에게 보여주었더니 자질이 보인다고, 앞으로도 열심히 해보라고 권하더군요. 어찌나 뿌듯하던지.”
이웃 아주머니의 소개로 아내를 만나 결혼도 했다. 첫아이를 낳으면서 ‘이제야 철이 드는가’라는 제목의 원고를 ‘동아일보’ 생활면 ‘남성 코너’에 투고해 난생 처음 ‘활자 맛’을 보기도 했다. 이 때 받은 원고료로 수험서를 사 공부한 덕택에 승진시험에도 합격했다며 자랑을 아끼지 않는다. ‘신동아’에 투고한 수필이 채택되어 게재된 일도 있었다.
“당시 교도관들 가운데서 글을 쓰는 사람은 저뿐이었습니다. 변호사도 아닌 젊은 친구가 기고를 하니 법무부에서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더군요. 신동아에 수필을 쓴 것을 등단으로 인정받아 문인협회에 나가기도 했죠.”
이후 윤씨는 수필가와 교도관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직함을 갖고 살아왔다. 영등포구치소 서무과장, 청주감호소와 성동구치소 부소장, 강릉교도소와 청주여자교도소 소장, 서울지방교정청 관리국장 등을 지낸 윤씨는 1994년 정년 퇴임했다. 한편으로는 법과 규율에 복종해야 하는 교정공무원으로서의 신분, 다른 한편으로는 글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수필가의 시선으로 지내오면서 남다른 생각이 없을 리 없다.
-군사독재 시절 학생이나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수감되어 있는 것을 볼 때는 무슨 생각이 들던가요. 그런 이들은 수감생활도 다른 재소자와 달랐을 텐데요.
“교도관 입장에서 보면 이른바 ‘양심범’이 많이 들어와 있을 때는 애로가 많지요. 기강이 잡히지를 않으니 수용 관리가 이만저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미결수인 경우에는 덜하지만 기결수인 경우에는 접견문제로 입씨름을 많이 합니다. 이를테면 월 1회, 혹은 2회로 횟수가 정해져 있는 접견을 초과해서 실시하라고 요구하는 식이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들에게는 그게 단순한 요구가 아니라 정부에 대한 항의나 투쟁의 방법인 셈이거든요. 그러니 그들은 당당한데 오히려 교도소장인 제가 쩔쩔매곤 했지요. 그럴 때는 누가 소장이고 누가 재소자인지 모를 지경이었어요. 모두가 시절이 수상하던 때의 이야깁니다.
지금은 차입을 금지하는 도서 목록도 많이 완화되었지만, 예전에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이러이러한 책을 볼 수 있도록 허가하라’는 항의도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야 되도록 많은 책, 넓은 세상을 느낄 수 있는 책을 허용하고 싶지만 시퍼렇게 규정이 살아 있는데 어쩔 도리가 없지요. 제가 글을 쓴다는 것을 아는 재소자들이 ‘문인이라면서 어떻게 독서의 자유를 침해하느냐’고 따져 물을 때는 정말 괴로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