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호

‘고민하고’‘괴로워하는’ 리얼리스트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

  • 글:김중기 filmtong@imaeil.com

    입력2003-03-25 17: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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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격 행보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이창동 신임 문화관광부 장관.
    • 연극인·교사·소설가를 거쳐 마흔 나이에 영화 입문, 10여 년 만에 세계적 영화감독으로 우뚝 선 그의 알려지지 않은 삶과 일화들.
    ‘고민하고’‘괴로워하는’ 리얼리스트
    지난 3월1일 이창동(李滄東·49) 문화관광부 장관이 대구로 가기 위해 공항에 들렀다. 대구지하철 방화참사 현장을 방문하고, 희생자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이장관이 공항에 나타나자 그를 알아본 공항 의전담당 직원이 뛰어왔다. 그 직원은 평소 ‘장관의 행차’처럼 모든 편의를 제공할 태세였다. 그러나 이장관은 모든 것을 마다했다. 좌석도 일반석을 고집했고, 그냥 지나도 된다는 공항 직원의 말에도 굳이 검색대를 통과했다. ‘개인 자격’이라는 것이다. 이날 이장관은 수행원도 없었다. 천성적으로 권위적인 것을 싫어하는 그의 성정을 보여주는 일화다. 권위적인 것, 틀과 굴레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처마 밑 댓돌처럼 요지부동이다.

    이장관은 취임 후 ‘파격 복장’ ‘파격 출근’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남들은 ‘파격’이라 했지만 그것이 가장 ‘이창동다운’ 모습이고, 솔직함이다. 한편에서는 해프닝으로 몰고 가는 움직임도 없지 않지만,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소신껏 추진하는 자신감의 발로이다.

    덧붙이자면, 이장관은 이날 대구공항에 내려서는 흰 와이셔츠를 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고 한다. 대통령으로부터 장관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도 캐주얼풍 와이셔츠로 등장했던 그다. 옷가게에서 와이셔츠를 사서 갈아입고 나서야 그는 합동 분향소를 찾았다.

    어느 완벽주의자의 초상

    제법 오랜 친분을 이어온 기자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장관의 이미지는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이다. 한번은 기자가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박하사탕’을 가지고 칸국제영화제에 참가한 직후다. “행복해 본 적도, 행복의 개념도 모르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 대답이었다.



    소설가에서 영화감독으로 화려한 변신을 했고, 달착지근한 영화 일색인 가운데 걸출한 리얼리즘 영화로 작가주의 감독으로 ‘칭송’받고, 국제영화제에서도 호평을 받은 인물이 단 한번도 행복감을 느껴보지 못했다는 것이 의외였다. 지난해 ‘오아시스’로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받고 난 후 똑같은 질문을 던졌지만,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를 보면 늘 ‘박하사탕’의 김영호가 오버랩된다. 정말 천성적이다. 자기완벽을 추구하는 결벽증 때문일까.

    이장관은 지난 대통령선거 때 TV 토론프로그램에 나와 ‘왜 노무현인가’를 역설해 많은 공감을 끌어냈다. 이날 그의 논리적인 지지발언은 많은 유권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날 저녁 이장관은 밤새 자책하며 잠을 설쳤다고 한다. ‘할 말을 제대로 못했고, 잘하지도 못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단다. 그도 모자라 뜬눈으로 밤을 샌 이튿날 혼자 훌쩍 여행을 떠났다. 이 정도면 ‘지독한’이란 수식어를 써도 무방한 완벽주의자 아닌가.

    소설가에서 영화감독으로의 변신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만, 그가 연극에서 출발한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이장관은 어릴 때부터 연극 극장에서 살다시피했다. 맏형의 영향 때문이다. 맏형은 경주문화엑스포 행사기획 실장으로 있는 이필동(59)씨. 1967년 대구에 최초의 동인제 극단인 ‘인간 무대’를 창단해 40여 년간 연극만 파고든 원로 연극인이다. 현재도 원각사란 극단을 운영하고 있다.

    이장관은 여덟 살 때부터 형의 연극을 보러 다녔다. 형이 극단을 창단해 본격적으로 연극을 시작할 때는 새벽같이 연극 포스터를 붙이고 다녔다.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던 때다. 이필동씨는 “새벽 4시에 일어나려면 귀찮았을텐데 군소리 없이 풀통과 포스터를 들고 집을 나섰다”고 회상했다.

    커서는 배우 대신 대타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한 연극인은 “완벽한 대사로, 미리 준비하고 무대에 오른 듯했다”고 그를 기억하고 있다. 늘 조용히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볼 뿐이던 그가 너무 완벽하게 연기를 해내는 통에 기성 연극인들이 머쓱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는 대학(경북대 국어교육학과) 시절 이미 10여 편의 연극에 출연하고, ‘수업’, ‘엘리베이터’ 등을 연출하기도 했다.

    ‘문학 청년’이던 그는 연극을 했다는 사실을 주위에 별로 알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워낙 말수가 적고, 자신을 잘 드러내려 하지 않는 사람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서 한번씩 사람들을 깜짝 놀래키기도 한다.

    대학 은사인 이주형(59·경북대 국어교육학과) 교수도 그랬다. “강의실에서 1인극 ‘너도 먹고 물러가라’는 연극을 하는데, 얼마나 잘하는지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웬만하면 그런 학과 행사에 제작비 지원을 요청하거나, 적어도 소문이라도 낼 법하건만 그는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 이교수는 “정말 생각이 깊고, 어른스러웠다”고 회고했다.

    연극 작업은 교편을 잡기 전인 1980년대 초까지 계속됐다. 1980년은 서슬 퍼런 정부의 연극 검열이 있던 때다. 형의 극단 원각사가 대한민국연극제에 ‘뉘랑 같이 먹고살꼬’를 출품했다. 우렁이설화를 패러디한 작품으로 탐관오리와 민중과의 갈등구조를 그린 작품이었다. 검열을 거친 대본의 절반에 붉은 줄이 쳐져 있었다. ‘공연 불가’라는 표시였다. 수정해서 올리면 또 절반이 ‘공연 불가’로 내려왔다. 이때 이장관은 희곡을 쓴 이하석(55·영남일보 논설위원)씨와 대본 수정작업을 했다. 이씨와는 여섯 살 차이로 대구고와 경북대 선후배 사이다.

    여관을 잡아 같이 밤을 새웠던 이씨는 “창동이는 느린 듯 보이지만 순발력이 있고, 치밀했다”고 말했다. 공연이 불가능했던 것이 이장관의 손을 거치면 작품의 뜻은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 거부감을 주지 않는 대사로 탈바꿈했다. 이씨는 “사고가 유연하고, 열려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연극과 영화는 인큐베이터는 달라도 같은 드라마구조를 내놓는다. 이렇게 볼 때 이장관의 연극 열정은 영화에 큰 밑거름이 됐을 것이다. ‘이창동 표’ 영화의 정교한 내러티브는 정평이 나 있다. 서사적인 구조도 완벽에 가깝다. 소설가로서의 문학작업 덕분이다.

    한번은 “좀 밝고, 예쁜 영화를 만들면 안 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산업사회의 이면에서 무너져가는 한 젊은이의 비극(‘초록물고기’), 현대사의 아픔을 빼곡이 넣은 ‘박하사탕’, 순수하지만 오금 저리게도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 ‘오아시스’. 하나같이 등짐 지고 고개를 넘는 것처럼 힘겨워 보여 그랬다. 물론 ‘오냐! 그러지’라는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칼에 “자기 만족을 위한 영화는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 했다. 투철한 고민과 문제의식이 없는 작품은 안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하긴 그는 소설가로서도 그랬다. 분단상황을 그린 ‘소지’나 한국 소시민의 아픔을 그린 ‘녹천에는 똥이 많다’처럼 항상 묵직한 주제를 던졌다. 그러나 소설가로는 그렇게 빛을 보지 못했다. 한번은 “한국 독자 안 믿는다”는 말로 섭섭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1983년 서울 신일고 교사로 있을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 공모에 중편 ‘전리’로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등단했다. 이때 심사를 맡았던 한 선배 문인은 “꼼꼼하게 잘 썼지만, 산만했다”고 했다.

    2권의 창작집을 냈지만 결국 장편은 내지 못했다. 소설가로서 한계를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그의 성격대로라면 수많은 날이 고민의 연속이었을 게다.

    민중문학론, 민족문학론 등 시대에 대한 고민이 많았지만, 제대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은 1980년대 작가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그는 “1980년대 후반, 사회가 변하면서 이데올로기며, 사회에 대해 고민했던 것이 실효가 없어졌다”며 “작가로서의 한계보다 세태에 대한 실망감이 더 컸다”고 했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

    그가 영화로 눈을 돌린 것은 한국 영화계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한국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감독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다. 소설에서의 한계를 영화로 풀어낸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혹자는 이장관을 ‘변신의 귀재’라고 했다. 언뜻 들으면 쉽게 변하는 ‘해바라기 같다’는 소리로 들린다. 30년 지기인 심만수(50·살림출판사 대표)씨는 “부단한 자기 변신과 자기 단련은 내면의 강한 힘에서 나온다”며 “그것이 바로 현명하다는 증거”라고 변호한다. 연극광에서 교사로, 다시 작가로, 영화감독으로의 변신은 도전과 자기 단련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1993년, 마흔의 나이에 그 힘들다는 영화판에 뛰어든다는 것은 분명 무모한 일이었다. “마흔이 되니까 내리막길이 보이더라구요. 이렇게 살아서 되겠느냐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자신을 채찍질하며 학대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 유학을 준비했다. 그러나 박광수 감독의 조언으로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조감독을 맡게 됐다. 1982년부터 절친했던 명계남씨가 합류했고 명씨와 친한 문성근씨가 주연을 맡았다. 이렇게 의기투합한 세 사람의 인연은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그의 등장에 대해 영화판 사람들이 “소설 소재나 찾으려는 겔 것”이란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아니라는 것이 판명됐다. 몸을 던져 고군분투하는 소설가에게 감동받은 것이다.

    배우 문성근씨의 경우 ‘그 섬에 가고 싶다’를 찍으면서 “다음 작품은 이창동 감독의 작품이 될 것”이라 공언했고, 실제로 ‘초록물고기’에 출연해 놀라운 연기로 영화에 빛을 더했다.

    감독 이창동은 관객의 반응에 비교적 무덤덤한 편이었다. 그래서 어느 술자리에서 “나도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는 속마음을 털어놓았을 때 무척 뜻밖이었다. 끊임없이 관객과의 소통을 갈망했다는 것이다. “관객이 잃어버린 순수를 그리워하든, 삶의 누추함에 슬퍼하든 그건 관객의 몫”이라던 그다. 관객을 저버릴 수 없는 영화감독의 태생적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갈망한 관객과의 소통 또한 성과가 적은 것이 아니다. 그의 영화를 본 한국 관객 10명 중 3, 4명은 ‘재미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반면 2, 3명은 열광한다. 특히 30, 40대가 공감할 만한 얘기를 20대가 많이 봐준 것에 무척 고무되는 눈치였다. ‘오아시스’를 내놓고는 고정 팬도 늘었다. ‘이창동 표’ 영화를 분석하고 공부하는 모임도 많이 생겼다. 일종의 마니아그룹이 형성된 것이다.

    이제 가족 이야기로 넘어가자.

    그의 영화를 가만 살펴보면 가족에 대한 연민과 애증이 일관되게 표현되고 있다. 이장관은 4형제 중 셋째다. 맏형 필동씨 밑에 기동(53)씨가 있고, 이어 이장관과 동생 준동(46)씨가 있다.

    희한하게도 4형제 모두 순수예술과 거리가 먼 방면에서 일했다. 맏형은 연극으로 평생을 살았고, 둘째는 공연기획사를 운영했고, 막내는 영화제작사 ‘나우필름’ 대표로 있다. 대구는 특히 보수적이고, 순수예술이 강세를 띠는 곳이다.

    한 지인은 “그 틈바구니에서 이들 4형제의 ‘마음 고생’은 무척 컸을 것”이라고 했다. 이들 중 가장 ‘끼’가 많은 인물로는 이구동성 둘째 기동씨를 꼽는다. 모이면 배를 잡고 웃게 만드는 재치와 유머가 여느 개그맨 뺨친다고 한다. 1990년대 말까지 공연기획사를 운영한 기동씨는 ‘신명 덩어리’라는 형제들의 평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구 근교에서 농원을 경영하고 있다. 이런 아이러니를 맏형 필동씨는 “극과 극은 통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형제 같으면 꿈도 못 꿀 농사일이 가장 ‘끼’가 많은 기동씨기에 가능했다는 얘기다.

    “이장관은 논리적이고, 순수하다. 기동씨는 재능이 있고, 준동씨는 ‘깡다구’가 있다. 이들을 거느리면서 늘 바쁘고 어깨가 무거웠던 것이 맏형이었다”고 지인들은 얘기한다.

    형제 모두 자유롭고 고집이 센 편이다. 우직하게 자기 세계를 개척해나갔다. 준동씨의 경우 고교(대륜고) 시절 이미 동아일보 광고탄압에 반대해 급우들과 함께 언론자유지지 광고를 내기도 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끼니도 거를 만큼 가난했음에도 하나같이 ‘돈 안 되는 일’만 골라 했다는 점이다. 옛 시절을 되돌아볼 때 가난은 이들 형제의 가장 아픈 지점이다. 형제 중 제때 등록금을 내고 학교에 다닌 이가 없었다. 필동씨는 모친으로부터 “좁쌀 두 개도 포개놓고 못 살 운명”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재물을 쌓아놓고 호강할 운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들 형제는 돈과는 거리가 멀었다. 형제 중에 월급봉투를 쥐어본 것도 교편을 잡은 이장관이 처음이었다. 이 점 때문이었는지 이장관이 신일고를 떠날 때 형제들이 꽤 아쉬워했다는 후문이다.

    아버지(이용락· 2000년 작고)에 대한 기억에는 그늘이 많다. 가정의 ‘온기’는 별로 없는 편이었다. 안동의 옛 선비들이 대부분 그랬듯 어머니에 대한 배려도 없었고, 더구나 실패한 지식인으로 자괴심이 대단했다. “내 흔적을 남기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동해에 뼈를 뿌렸다. 이날 형제들은 먼바다를 보며 묘한 슬픔에 몸서리를 쳤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형제간의 우애에는 유별난 구석이 있다. 명절이 기다려진다는 형제는 이들뿐일 것이다. 명절에 만나면 밤새도록 얘기하고, 웃고 떠든다. 그래서 이웃에서는 “딸 많은 집 같다”고 할 정도다. 맏형 필동씨는 “돈도 없이 그거(형제간 우애)라도 있어야지” 하고 말했다.

    고루한 옛 선비 집안이면서 네 형제가 모두 ‘골수’ 문화예술인의 길을 걷는 것도 흥미롭다. 막내 준동씨는 어머니의 영향이라고 했다. 1992년 작고한 어머니(김제랑)는 남의 얘기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재미있게 옮기는 재주가 있었다. 가족들이 모여 웃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이장관의 영화 속에는 이러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회귀본능, 안타까움, 연민 등이 오롯이 녹아 있다. 그것은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녹천에는 똥이 많다’에는 슬픈 한 가족사가 눈물나게 그려져 있다. 주인공 남자가 슬픔과 회한에 젖어 X구덩이를 비틀비틀 걸어가는 끝이 인상적이다.

    그렇다고 그의 예술 작업이 온통 이러한 개인사(史)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개인사가 됐든, 어두운 현대사가 됐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무신경, 무감각에 전기 자극을 준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따지고 보면 문제의식은 모두 개인의 분노와 고민에서 출발하는 것 아닌가. 밝은 곳에서, 대중에게, 뛰어난 예술작품으로 제시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그의 재능 덕분이다.

    또한 이장관은 정직한 예술가다. 위선이나 거짓, 자기 연민을 걷어내고 바닥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의 논리에 힘이 실리는 것도 바탕에 정직성이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꼭 한두 장면은 뇌리에 박혀 떨어지지가 않는다. 뮤지컬을 본 후 노래 한두 곡이 기억나지 않으면 실패한 뮤지컬이라고 한다. 영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닥터 지바고’ ‘대부’처럼 세월이 흘러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두 장면은 꼭 잊혀지지 않는 영화들이 있다.

    ‘초록 물고기’에서 막둥이가 숨을 몰아쉬며 차 유리에 얼굴을 대고 죽어가는 장면이나, ‘박하사탕’에서 영호가 “나 돌아갈래”라며 외치는 장면은 특히 가슴 찡하게 다가온다. ‘오아시스’에서는 차창에 어른거리는 나뭇가지와 청계 고가도로에서 종두(설경구)가 공주(문소리)를 안고 춤추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감독의 탁월한 미적 감각에서 나온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곧잘 상도 탔고, 혼자 스케치를 즐겼다고 한다. 여러 예술 방면에 두루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찌 보면 이장관이 해온 미술, 연극, 소설 작업이란 결국 모두 영화를 위한 하나의 수련과정이었던 것처럼 여겨진다.

    이번에 그가 문광부 장관에 임명되면서 영화계 일각에서는 “훌륭한 감독 하나 잃어버리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있었다. 장관이 된 후 만나 이런 반응도 있다고 했더니 씩 웃으며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예요”라고 했다.

    이장관은 소설과 영화의 차이에 대해 “소설은 주관적이지만 영화는 극적이고 다이내믹하다”며 “시나리오를 창작하고, 제작을 성사시켜야 하고, 흥행에 신경 써야 하는 등 영화가 훨씬 피곤하고 힘든 과정이지만, 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박하사탕’을 개봉하고 만난 자리에서 그는 우리 사회의 균형감을 얘기했다. “우리는 너무 밝은 미래만 본다. 어두운 과거는 아예 보려 하지 않고, 얼른 파묻으려 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균형감각을 잃은 것이다. 그것을 찾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새 천년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한 1999년에 왜 하필 시간여행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정말 그는 영화의 시계를 거꾸로 돌렸다.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에 잔인할 정도로 치열하게 접근하고 있다. 잊혀져가던 광주항쟁과 첫사랑의 순수한 기억을 병치시키면서 “아직도 삶이 아름답다고 믿느냐?”고 묻는다.

    영화는 사회의 투영물이다. 영화를 보면 그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와 고민이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 영화에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 조직폭력배 영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무지몽매와 우격다짐을 엿볼 수 있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하사탕’이 준 묵직함은 가슴을 때렸다. 도입부의 ‘아직도 삶이 아름답다고 믿느냐?’는 물음은 부정적이기보다 ‘아름다워야 함’에 대한 역설적 표현이다.

    ‘오아시스’는 보기 드물게 가슴 찡한 러브스토리다. 막 출소한 전과자 종두,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 공주. 둘은 모두 세상에서 소외당한 인물이다. 둘은 사랑을 시작한다. 관객은 이제까지 보지 못한 불편한 사랑을 경험한다.

    이 영화를 보며 공주의 뒤틀리는 몸만큼 속이 뒤틀림을 느꼈다. 보고 싶은 것만 보아왔던, 그래서 이런 사랑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못했던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마치 한겨울 반팔 차림으로 던져진 종두 같았다. 종두가 잘라낸 가로수 가지는 공주의 창을 가리는 우리 사회의 편견과 이기, 무관심, 그리고 폭력을 은유한 것이 아닐까.

    정직성, 천재성의 원천

    내가 아는 한 이장관은 가장 유별난 사람이다. 과묵하다가도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일사천리다. 간혹 ‘말도 안 되는 얘기’가 나올 법도 한데 끝까지 질서정연한 논리를 편다. 반박할 거리가 없을 때의 군색함이라니. 그래서 간혹 같이 얘기하다 보면 질릴 때도 있다.

    또한 그는 상대의 말문을 막히게 하는 묘한 기술이 있다. 이것은 논리보다 정직성에서 오는 경우가 더 많다. ‘정직성은 모든 천재성의 원천’이다.

    그가 문광부 장관에 임명되자 사회는 ‘문화예술전문인의 장관 선임’이라는 숙원을 풀었다며 대체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한편에선 행정 경험이 없고, 문화와 상당한 거리감이 있는 관광이나 체육, 청소년 분야에 대한 이해도가 미지수라는 지적도 나왔다. 그러나 기대가 더 클 것이다.

    지난해 10월 남아공에서는 프랑스, 캐나다, 중국 등 47개국 문화부 장관이 참여하는 세계문화부장관회의(INCP)가 열렸다. 여기서 문화 다양성을 보존하고 개별국가의 문화정책을 보호하는 문화협정을 맺었다. 문화는 일반상품과 다르다는 것이 대다수 국가들의 정책방향이고 흐름이다. 문화상품을 산업적 측면에서만 접근하면 그동안의 공익적 문화지원은 불가능해지며 제도도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우리 문화의 다양성과 문화 정체성을 찾는 작업을 좌시할 수는 없다.

    영화계나 문화계에서는 지금이 문화 정책에 획기적 발전을 가져올 절호의 기회라고 한다. 문화의 틀을 새로 바꾸기 위해서는 기득권과의 마찰도 예상된다. 이미 그런 움직임들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상황이 이렇기에 이창동 장관에게는 올해가 가장 힘든 한 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단한 자기 변신, 그리고 그때마다 성공적인 자기 완성을 이뤄온 그이기에 ‘문화관광부 장관 이창동’은 희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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