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영란씨 가족들이 봄소풍에 나서며 마련한 주먹밥.
드디어 못자리를 하는 날. 우리 식구 목욕을 하고 촉이 살짝 튼 볍씨를 들고 논으로 간다. 못자리할 곳에 산 흙과 거름을 섞어 고운 체에 거른 뒤 논바닥에 뿌린다. 그 위에 볍씨를 뿌린다. 마음 속으로 ‘잘 자라. 다시 좋은 씨가 되어라’ 기도하며. 그리고 위를 흙으로 덮은 뒤, 서리 피해를 당하지 않게 하고 물길을 돌보면 된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준비가 탄탄하면 막상 못자리 만드는 일은 기쁜 일이다. 해는 밝게 빛나고. 물은 시원하게 흐르고.
농사 하면 떠오르는 벼, 콩, 옥수수 이런 열매 작물은 더운 여름 기운을 받고 자란다. 서리에 약해 어린 싹이 서리를 맞으면 오그라든다. 서리가 사라진 뒤 싹이 돋게 하려면 곡우가 지나 씨를 넣으면 된다. 곡우 다음 절기는 입하(5월6일). 씨가 땅 속에 들어가 싹을 올리는 사이 여름 기운이 일어서 서리는 사라진다.
그래서 곡우부터 농사일은 바빠진다. 콩, 옥수수, 수수, 땅콩, 오이, 호박, 박… 하나하나 밭 마련하고 씨 심고 돌보기 시작한다. 지난 가을 심어 겨울을 난 밀, 보리에 이삭이 패고, 마늘, 양파에 알이 찰 때니 웃거름을 챙겨준다. 초봄부터 비닐집에서 길러낸 고추, 토마토, 가지, 고구마 모종은 밭으로 갈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 날마다 돌본다.
사람이 씨 심고 하늘이 비 주시니
우리는 농사를 골고루 하되, 어느 하나를 많이 하지는 않는다. 봄에 씨 뿌릴 때야 다 거두고 싶지만 중간에 제대로 안 되면 자연에 못할 짓을 하는 거니까. 그래서 여름 장마를 거쳐 가을걷이까지 책임지고 할 수 있는 만큼만 씨 뿌리려 한다. 한데 사람 욕심이 있어 조금만 더, 이것도 더 할까 하는 작은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곤 한다. 올해는 좀더 마음을 비우도록 해야 할 텐데 .
처음 농사할 때는 ‘오늘은 무얼 해야 하나’ 하고 망설였다. 갓 시집 온 새색시처럼. 몇 년 겪어보니 이제는 일머리가 조금씩 잡혀간다. 하지만 아직도 머리가 앞서 가곤 한다. 일은 결국 몸을 움직여야 된다. 비 소식에 부지런히 씨 심고 난 밤, 빗소리가 처마 끝에서 떨어지면 얼마나 푸근한지. 사람이 씨 심고 하늘이 비를 주시니 자연과 하나 되는 기분이다. 농사일은 사실 자연이 알아서 해주시는 거고 사람은 자기 몫을 다할 뿐임을 느끼며….
서울서는 소비를 잘 해야 살기 좋았다. 언제 어디를 가야 좋은 걸 싸게 살 수 있는지. 밥상을 차리는 일도 소비하는 흐름 속에 있었다. 고추장도 콩나물도 토마토케첩도 다 만들어진 걸 사다 간단히 지지고 볶아 먹곤 했다. 사고 먹고 나면 쓰레기도 오줌똥 누는 일도 소비였다.
여기 산골에 살아가려면 자연을 잘 아는 게 좋다. 언제 어디를 가면 무얼 얻을 수 있는지, 언제 씨 뿌리고 언제 거둬야 먹을 수 있는지. 해마다 조금씩 자연에서 먹을거리 찾는 법을 배운다. 마을 어른께 배우고 책을 길잡이삼아 배우기도 하고 나물을 하면서 배우고 또 배운다.
어린 시절 서울 한복판에서 살았으니 나물 해본 적이 있나. 모두 새롭다. 시장에서 보던 달래, 취 이런 나물을 들에서 산에서 내 손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신기하고. 시장에서는 팔지 않는 벌금자리, 수영 이런 나물도 먹곤 한다. 이름을 여쭤보면 마을 어른들은 “전에 먹긴 했지” 하며 이름을 기억해 알려준다.
이른 봄 손님이 왔기에 함께 나물을 해 밥을 먹기로 했다. 손님과 그 아이들은 나물을 한다니 좋다고 따라왔다. 밭으로 가서 꽃다지, 고수덩이(경상도는 구시디)를 뽑으니 “이게 어디 나물이야, 풀이지. 나보고 풀을 먹으래” 한다.
봄에 먹는 나물을 우리에게 가장 잘 가르쳐준 건 토끼였다. 풀을 먹여 길러 거름을 받으려고 한동안 토끼를 길렀다. 여름엔 일하고 돌아오다 낫으로 풀을 베면 쉽게 먹이를 마련할 수 있다. 한데 풀이 귀할 때는 호미로 풀을 베곤 했다.
한겨울에도 바위틈이나 눈 녹은 곳을 찾아 풀을 했고, 그걸 토끼가 맛나게 먹는 걸 보며 우리도 따라서 먹기 시작했다. 시골서 자란 작은애는 새로운 풀을 보면 한 잎 뜯어먹으며 “맛있다. 이거 토끼 주면 좋겠다” 하며 자랐다. 온갖 봄풀을 모아놓고 온 식구 둘러앉아 샤브샤브를 해 먹으며 이 풀 맛도 보고 저 풀 맛도 보며 풀과 친해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 이름도 알아내고, 또 그 맛도 즐기고 있다. 어느 저녁 집으로 돌아와보면 남편도 한 바가지, 딸도 한 움큼, 아들도 한 봉지 봄나물을 해다놓기도 한다.
들에서 일한 날은 들에서, 산에 오른 날은 산에서 먹을거리를 해오면 그걸로 밥상이 차려진다. 취나물은 무치고, 둥굴레 뿌리는 그대로 놓고, 달래로는 달래장을 만들고, 미나리, 돌나물은 초고추장에 무치고, 밥하는 사이 수영을 날로 씹어먹으며…. 이때는 늘 밥상이 자연의 기운으로 가득 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