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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희의 미술과 마음 이야기 <마지막 회>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 박상희|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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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20대의 제게 한 선배가 물었습니다. “너는 지금 정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선배가 상당히 과격한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저는 부담스러워 대충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전 정치에 대해선 특별한 마음이 없어요. 어차피 뽑혔으니까 부디 잘하기를 바랄 뿐이에요.” 선배는 시니컬한 표정으로 제게 말했습니다. “정치의식이 약하다는 건 세상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 아닐까? 그리고 세상에 대한 관심이 없는 이들이 사람에 대해선 애정이 있다고 할 때 나는 정말로 이해가 되질 않아.”

40대가 된 지금의 저는 정치에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때 선배가 한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정치에 대한 마음이 없다고 세상과 사람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일까요? 저는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모두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니까요.

정치에 대한 태도는 개인의 자유입니다. 누구든 정치에 무관심한 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정치적 무관심은 오늘날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합니다. 특히 젊은 세대의 경우 이 무관심은 더욱 커집니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이들에게 정치는 뜨거운 관심을 갖게 하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공간에서 정치는 가장 즐겨 토론되는 주제입니다.

정치에 대한 관심은 대통령선거나 총선과 같은 정치의 계절에 높아집니다. 특히 대통령제를 선택한 우리나라에서 대선이 치러지면 정치는 전 국민적으로 뜨거운 관심을 모읍니다. 지난 5월에 치러진 대선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치러진 조기 대선이었기 때문인지 그 열기는 여느 대선 때보다도 한층 뜨거웠습니다.





혁명 그린 신고전주의 화가

정치를 생각할 때 제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화가는 프랑스의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1748~1825)입니다. 다비드가 살았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의 유럽은 ‘혁명의 시대’였습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은 이 혁명의 시대를 상징하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서양 회화 역사에서 같은 시대를 살아갔지만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화가들이 있습니다. 같은 유럽이더라도 나라가 다를 경우 그 느낌의 차이는 더욱 커집니다. 서양 근대 회화에서 이런 차이의 느낌을 확연히 안겨준 화가는 다비드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입니다.

두 화가는 모두 혁명의 시대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다비드가 혁명의 본산인 프랑스에서 활동했다면, 고야는 혁명의 변방인 스페인에서 살았습니다. 두 사람의 화풍은 달랐습니다. 다비드가 신고전주의를 이끈 화가였다면, 고야는 낭만주의에 가까운 화가였습니다. 현재는 고야가 더 널리 알려졌지만, 당대에는 다비드가 더 유명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유럽 정치의 중심을 이뤘고, 그 정치의 의미를 화폭에 담은 화가가 바로 다비드였습니다.

다비드는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고전주의는 장식적인 로코코에 맞서서 일어난 미술운동이자 양식입니다. 그리스·로마로 대표되는 고대 시대의 모티프를 활용하고 구도 및 표현에서 조화, 절제, 균형의 미학을 중시하는 양식이기도 하지요. 신고전주의는 프랑스대혁명 전후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고대에 대한 열풍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다비드의 출세작인 ‘호라티우스의 맹세’는 신고전주의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혔습니다. 비탄에 잠긴 가족들을 뒤로하고 전쟁에 나가는 이들의 결연한 모습은 사적 감정보다 공적 이상을 우선시하는 다비드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줍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프랑스대혁명의 이상을 드러낸 이 작품이 혁명에 의해 희생된 루이 16세의 의뢰로 제작됐다는 것입니다.

다비드는 프랑스대혁명을 열렬히 지지한 화가였습니다. 서양 회화 역사에서 그는 어떤 화가보다도 정치적이었습니다. 혁명을 이끈 국민공의회 의원이었고, 급진파를 주도한 로베스피에르와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대혁명 시기에 그려진 다비드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은 ‘마라의 죽음’(The Death of Marat·1793)입니다.


암살된 혁명가의 최후

지금 한 사람이 욕조 안에서 죽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혁명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마라가 반대파를 지지한 한 여성에 의해 암살된 직후의 극적인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마라는 피부병을 앓고 있었기에 식초에 담근 터번을 둘렀는데, 이 혁명 지도자의 비극적 최후를 다비드는 밝음과 어둠의 극적 대비를 통해 생생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비록 생명을 잃었지만 마라의 모습은 혁명의 순수함과 숭고함을 느끼게 합니다. 마라의 이름 아래 자신의 이름을 분명하게 적어 넣음으로써 다비드는 혁명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비드의 일련의 작품은 미술과 정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예술의 한 영역으로 미술은 여느 예술 분야 못지않게 정치적일 수 있습니다. 정치의 선동과 선전에 미술은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라의 죽음’은 그 적절한 사례입니다. 한 혁명가의 죽음을 화폭에 담아 다비드는 혁명이 가져온 뜻하지 않은 비극을 마주하게 하고, 그 대면(對面) 속에서 혁명의 가치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킵니다.

그러나 미술 작품에 선전과 선동이 너무 분명하게 표현돼 있을 경우 그 예술적 가치는 훼손되기 마련입니다. 20세기 사회주의 국가들의 미술이 대표적인 사례이겠지요. 과도한 선전과 선동은 결국 미술을 수단화함으로써 인위적인 감동을 강제합니다.

저는 예술적 감동이란 자연스러운 것일 때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권력을 위한 미술’은 생각만 해도 불편합니다. 미술을 포함한 예술의 일차적인 가치는 그것을 보는 인간의 마음속 무엇인가를 자연스럽게 건드려 공감을 느끼게 하고, 그 감동을 통해 삶의 기쁨과 위안을 얻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정치 이념과 예술적 감동

여하튼, 선전과 선동의 의미를 화폭에 담으려고 할 경우 그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화가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이 점에서 다비드는 정말 놀라운 능력을 갖춘 화가였습니다. ‘마라의 죽음’에서 볼 수 있듯 그는 선전과 선동을 앞세운 게 아니라 미술적 성취를 통해 그 결과로서 혁명 가치를 재발견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화가가 특정한 정치 이념을 지지하거나 표명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근대 이후 어떤 화가들은 정치적 성향이 분명했고, 어떤 화가들은 정치적 이념에 무관심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성향이 분명한 화가라고 모두 자신의 이념을 화폭에 담지는 않았습니다.

다비드가 이례적인 것은,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을 지지한 그가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분명하게 표출한 작품을 다수 남겨놓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이러한 다비드의 작품들이 상당한 예술적 감동을 선사한다는 점입니다.

 독일의 미술사학자 요한 요하임 빙켈만은 “고대 미술이 단순함, 엄격함, 장엄함, 품위 있음 등의 느낌을 안겨준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빙켈만의 주장은 신고전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다비드의 작품들은 신고전주의가 지향한 가치들을 잘 담고 있습니다. 작품에 담긴 정치적 코드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다비드의 그림은 보는 이에게 감상의 즐거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미완성의 아름다움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Portrait of Madame Récamier·1800)은 다비드의 그림 가운데 미완성 작품입니다. 지금 한 여인이 긴 의자에 누워 이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화면 구성은 매우 단순합니다. 의자, 쿠션, 발받침, 촛대가 전부입니다. 단순한 구도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도드라지게 합니다. 헤어밴드를 한 자연스러운 머리, 당당한 얼굴 표정, 자연스러운 포즈, 고대 로마풍의 흰색 옷은 단순함과 품위를 추구한 신고전주의적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군데군데 캔버스의 흰색 부분이 보일 정도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작품입니다. 다비드는 당시 프랑스 사교계를 주름잡던 레카미에 부인으로부터 초상화를 의뢰받았지만, 이 작품을 완성하기도 전에 부인이 다비드 제자에게 초상화를 다시 의뢰함으로써 다비드는 이 작품의 제작을 중단했습니다.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은 다비드가 초상화에도 뛰어난 화가였음을 보여줍니다. 단순, 절제, 균형이라는 신고전주의 이상을 효과적으로 재현함으로써 다비드는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담은 초상화의 한 전형을 성취했습니다.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대표하던 화가 다비드의 말년은 행복하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1816년 그는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벨기에 브뤼셀로 갔고, 10년 가까이 그곳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사망했습니다. 혁명의 시대에 정치적 성향이 뚜렷한 화가로서의 삶을 추구했던 만큼 불우한 삶의 최후는 어쩌면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비드가 죽고 난 후 그의 명성도 이내 시들해졌습니다. 낭만주의와 인상파가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다비드 그림과 같은 신고전주의는 진부하고 딱딱한 양식으로 평가됐기 때문입니다. 다비드 작품이 다시 관심을 모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였습니다. 르네상스에서 인상파에 이르는 서양 미술의 역사가 양식의 변화에 따라 정리되면서 다비드는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미술과 정치의 관계를 극적으로 보여준 화가로 재평가됐습니다.



정치적 효과 극대화한 예술

미술이라고 해서 정치와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미술이 우리 삶을 반영하는 예술의 하나라면, 그 삶의 한 부분이 정치로 이뤄진 만큼, 미술이 정치에 대해 다루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미술이 정치를 다룰 때 예술로서의 미술이 가져야 할 자율성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을 주목할 때 다비드는 참으로 놀라운 화가입니다. 감동의 원천이 되는 미술의 예술성을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미술이 가질 수 있는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한 화가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조기 대선이 가져온 뜨거운 정치 열풍도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서서히 잦아들고 있습니다. 정치의 계절이 지나간다고 해서 정치가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새 정부에 대한 국민의 지지율이 80%를 넘는다고 합니다. 부디 새 정부가 임기를 다할 때까지 상처받은 국민을 치유해주고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기를 바랍니다.





박상희
● 1973년 서울 출생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문학박사,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방문학자
● 現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JTBC ‘사건반장’ 고정 패널
●저서 : ‘자기대상 경험을 통한 역기능적 하나님 표상의 변화에 대한 연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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