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호

박상희의 미술과 마음 이야기

프리다 칼로 - ‘상처 입은 사슴’ ‘우주, 대지(멕시코), 디에고, 나 그리고 세뇨르 솔로틀의 사랑의 포옹’

  • 박상희|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입력2017-05-11 18:15:06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나라마다 문화 차이가 있음을 제대로 깨닫게 된 것은 길지 않은 미국 생활에서였습니다. 이제까지 두 번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멀지 않은 작은 도시에서였습니다.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그곳에선 미국 사람 외에 한국 사람은 물론 중국·인도·멕시코 사람 등 다양한 이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중 제 시선을 끈 이들은 멕시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외모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의 생활 방식이 눈에 띄었습니다. 피상적으로 관찰한 것이겠지만 제가 주목한 것은 서양 사람들과는 달리 공동체를 대하는 그들의 생활 태도였습니다. 우리 동양인들 못지않게 그들은 가족과 이웃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또 남자를 우선시하는 가부장적인 문화도 우리와 비슷한 것 같았습니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 문화는 미국과 서유럽 문화에 익숙합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문화가 그것이지요. 반면에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대표되는 라틴유럽 문화는 가깝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같은 라틴유럽에 속해 있지만 이탈리아 문화는 그래도 익숙한 편인 데 반해,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까지 큰 영향을 미친 스페인 문화는 여전히 낯섭니다.



    라틴아메리카 문화 대표하는 화가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그리고 남아메리카는 이곳을 정복한 스페인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라틴아메리카 문화가 유럽에 있는 스페인 문화의 복사본은 아닙니다. 스페인 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되 스페인이 정복하기 전 그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 토착문화로부터도 작지 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비록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아도 라틴아메리카 문화는 오늘날 지구적으로 중요한 문화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라틴아메리카 문화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이 멕시코의 프리다 칼로(Frida Kahlo·1907~1954)입니다. 칼로는 정말 독특한 느낌을 안겨주는 화가입니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독특하다는 표현 이외의 다른 말을 찾기 어렵습니다. 칼로의 작품들이 제게 다가오는 느낌은 서늘함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쿨(cool)’의 느낌이 아니라 ‘칠리(chilly)’의 느낌입니다. 기분 좋은 시원함이 아닌 낯설고 차갑게 느껴지는 그런 서늘함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낯설고 차가운 서늘함은 강렬한 충격을 불러일으키고, 시간이 흐르면서 묘한 매력을 갖게 합니다. 칼로의 작품들을 보면서 그 매력이 무엇인지를 저 나름대로 생각해보고 내린 결론은 상처와 사랑입니다. 칼로가 작품에 담은 상처에 대한 공감과 그 상처를 치유하려는 사랑에 대한 공감이 제가 칼로에게 느끼는 매력의 실체였습니다.

    어떤 화가도 자신의 삶과 유리된 작품을 그리지 않습니다. 구상화든 추상화든 작품은 그 화가의 삶, 다시 말해 화가가 갖고 있는 느낌과 생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칼로의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칼로는 참으로 극적인 인생을 산 화가입니다. 우선 그의 육체적인 고통은 감히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소아마비, 왼쪽 다리 11곳 골절, 오른발 탈골, 왼쪽 어깨 탈골, 요추·골반·쇄골·갈비뼈·치골 골절, 버스 손잡이 쇠봉이 허리에서 자궁까지 관통, 그리고 일생 동안 척추수술 일곱 번을 포함해 총 서른두 번의 수술, 오른쪽 발가락 절단에 이어 무릎 아래 절단, 세 번의 유산. 이것이 칼로의 병원 기록이었고, 이런 심각한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평생 그 후유증을 앓아야 했습니다.



    남편 리베라의 바람기

    안타깝게도 그의 아픔은 육체적인 것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평생 유일하게 사랑한 남편 디에고 리베라와 관계는 칼로가 정신적으로도 고통을 느끼는 이유였습니다.

    리베라는 20세기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칼로는 스물한 살이나 많은 리베라와 결혼했습니다. 칼로와 리베라는 서로 사랑했지만 문제는 리베라의 바람기였습니다. 리베라는 칼로가 아닌 다른 여성들과 끊임없이 추문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육체적으로 아픈 칼로의 분노와 슬픔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겠지요. 칼로와 리베라는 결혼했고, 이혼했으며, 다시 결혼했습니다. 이런 이력이 보여주듯 두 사람의 관계는 복잡했습니다. 하지만 칼로는 평생 리베라를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육체적 상처와 정신적 고통, 그리고 리베라에 대한 사랑이 칼로의 작품에는 생생히 담겨 있습니다.

    칼로의 작품들 가운데 제게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상처 입은 사슴(The Wounded Deer·1946)’입니다. 숲 속에 여러 개 화살을 맞아 상처 입은 숫사슴이 있습니다. 화살을 맞고 피 흘리는 사슴은 더없이 애처롭습니다. 사슴의 얼굴은 칼로의 얼굴입니다. 붉은 피를 흘리는 사슴은 숱한 상처로 고통받은 칼로의 삶을 보여줍니다. 사슴을 둘러싼 빽빽한 나무는 그의 삶이 처한 고난을 은유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주목한 것은 칼로의 표정입니다. 온몸이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로의 얼굴은 슬퍼 보이거나 절망스럽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담하고 굳은 의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작품을 보고나서 저는 칼로가 남긴 말, “나는 다친 것이 아니라 부서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 살아 있음이 행복하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의 하단에 칼로는 ‘Frida Kahlo. 46.’이라고 적어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카르마(Carma)’를 덧붙여놓았습니다. 카르마는 불교 용어 ‘업(業)’을 말합니다. 업이란 미래에 선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을 이루는 행위를 뜻합니다. 칼로는 과연 어떤 마음에서 ‘업’이란 말을 적어둔 것일까요? 현재 자신의 불행이 과거의 잘못된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해서일까요? 부서진 자신의 몸은 슬프지만, 이 작품을 그리는 자신의 정신은 행복하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고통의 업보를 그림으로 그리는 행위로 끊어내려고 한 그의 굳은 의지는 제게 큰 감동을 안겨줍니다.


    우주를 간결하고 신비롭게 재현

    ‘우주, 대지(멕시코), 디에고, 나 그리고 세뇨르 솔로틀의 사랑의 포옹(The Love Embrace of the Universe, the Earth (Mexico), Diego, Me and Señor Xólotl’(1949·이하 ‘사랑의 포옹’)은 칼로의 작품 가운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신비로우면서도 사랑의 힘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저는 칼로의 상상력에 놀랐습니다. 우주에서 개(‘솔로틀’은 칼로의 애견이었다고 합니다)에 이르는, 거대한 세계에서 미시적 일상까지 캔버스에 담아내는 그의 놀라운 상상력에 감탄했습니다.

    이제까지 주로 봐왔고, 이 기획에서 다룬 서양 회화 작품들은 인물화든 풍경화든 대상 재현에 주력했습니다. 무엇인가를 재현하려면 그것을 묘사하고 분석하는 데 치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마음이라면 마음은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까요? 마음은 실체가 없습니다. 아니 실체가 없다기보다는 무수한 실체를 가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게 더 적합할 듯합니다. 하늘 같은 마음, 대지 같은 마음, 싱싱한 나무 같은 마음, 자유로운 새 같은 마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모든 존재로 비유할 수 있고, 그러기에 마음은 우주처럼 넓고 깊습니다.

    이런 생각이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떠오른 것들입니다. 화가가 캔버스에 담을 수 있는 가장 큰 대상은 우주일 터인데, 우주를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신비롭게 재현한 작품은 ‘사랑의 포옹’이 처음이었습니다. 경이로운 것은 그 광활한 우주에서 느껴지는 사랑의 느낌입니다.

    작품을 찬찬히 보면, 칼로는 아기 리베라를 안고, 대지의 여신은 칼로를 안고, 우주의 신은 대지를 안고 있습니다. 주인공들의 얼굴은 무표정하고, 칼로의 목에는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대지의 여신 목도 찢어져 있습니다. 그림에 실제 담겨 있는 모습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제게 이 그림은 회복과 사랑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대지의 여신의 찢어진 목의 상처에서는 젖이 흘러나옵니다. 크고 따뜻한 손들은 인물들의 무표정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칼로는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을 그토록 아프게 한 운명을, 자신을 배신한 리베라를 여전히 보살피고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닐까요? 그 사랑의 느낌은 이 작품의 제목인 ‘포옹’이라는 말에 집약돼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포옹은 상대방을 껴안는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의 힘

    이 작품은 칼로의 삶과 정신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나=디에고(남편)=대지=우주로 이어지는 중첩되고 확장되는 이미지는 대상을 나와 구별하는 서구의 분석적 세계관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이성의 시각에선 대상과 내가 분리되지만, 존재의 차원에선 대상과 나는 하나일 수 있습니다. 나와 대상은 존재의 사랑을 통해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된 그 사랑은 다시 대지에 대한 사랑으로, 우주에 대한 사랑으로 퍼져 나아갑니다.

    ‘사랑의 포옹’을 직접 본 것은 2015년 올림픽공원에 있는 소마미술관에서였습니다. 저는 이 작품 앞에 오래 서 있었습니다. 칼로가 표현하려 했던 사랑의 마음이 제게 감정이입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받은 감동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미술의 힘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음의 움직임일 것입니다. 화가의 마음이 작품을 통해 내 마음으로 옮겨오는 것, 그래서 화가와 내가 공감하는 것에 미술의 본령이 있지 않을까요? ‘사랑의 포옹’은 제게 ‘사랑할 용기’를 전달해주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진정한 힘을 불어넣는 것은 타자를 사랑할 용기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사랑받고자 하는 유아적인 마음을 극복하는 태도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용기는 타자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일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는 이만큼 강한 사람이 있을까요?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라고 노래한 시인은 정호승입니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다가 이 세상을 돌연 하직한 삶, 그것이 바로 칼로의 인생이었다고 한다면, 제가 칼로의 슬픔과 고통을 너무 가볍게 파악하는 것일까요? 저는 칼로의 삶은 고통스러웠지만 참으로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상희
    ● 1973년 서울 출생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문학박사,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방문학자
    ● 現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JTBC ‘사건반장’ 고정 패널
    ● 저서 : ‘자기대상 경험을 통한 역기능적 하나님 표상의 변화에 대한 연구’ 등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